- 기자
- 배영대 기자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불과 3개월 만에 세상이 바뀐 느낌이다.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빠른 속도다. 기원전을 뜻하는 ‘BC’의 의미도 바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비포 크라이스트(Before Christ·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약자인데, BC의 C가 예수가 아닌 코로나(Corona)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코로나 사태가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식민지·전쟁 딛고 서양 문명 배우기 결실
코로나 이후 뉴노멀, 통합적 성찰의 계기
BC 표기는 지난 200여 년 동안 근대 문명을 서양이 주도해왔음을 상징한다. 기독교를 앞세운 서양 제국주의가 비서양 지역을 무력으로 침략한 후에 만들어낸 시간과 역사의 기준이었다. ‘문명 대 야만’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재단했다. 당연히 서양은 문명이고, 비서양은 야만이다. 비서양 지역에 어떤 문화와 문자와 역사가 있었든 간에 상관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재빠르게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외치며 서양 문명의 열차에 올라탔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으로 들어가자는 구호에 지난 100여년 한국의 삶도 휘둘리게 되었다. 제국주의 폭력이 문명이란 이름으로 미화됐다. 서양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문명화, 근대화, 세계화였다.
서양중심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을 우리만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지난 세기 우리는 ‘실학(實學)’이란 이름으로 서양 문명화의 대열에 편승했다. 서양이 실학이고 우리는 허학(虛學)이었다. 빨리빨리 허학에서 벗어나 실학으로 갈아타야 했다. 빨리빨리는 지난 세기 서양의 눈으로 본 우리의 모습이다. 식민지를 당한 수모를 꾹 참고, 산업화도 빨리빨리, 민주화도 빨리빨리 한꺼번에 밀린 숙제 몰아치듯 해야 했다.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졌지만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서둘러 아픔을 봉합하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야 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잇따를 때 잠시 아차 싶었다. 무작정 달려가다가 안전사고로 황망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데 눈을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청천벽력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각오로 전 국민 금 모으기 행렬이 이어졌다.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에 오를 때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와 너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을 목놓아 외쳤다. 대~한민국 구호 뒤 ‘짝짝 짝 짝짝’ 박수는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격려요 감사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그러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우리 국민은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식민지와 전쟁과 IMF 위기를 겪으며 내공을 키워온 우리 국민이었다. 코로나는 전 세계 국가에서 동시에 치러진 국력 테스트였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 대응이 세계의 모범사례로 주목받는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선진국이 되어 있다고나 할까.
하루아침에 선진국이 된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피와 땀과 눈물이 오랜 시간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렇게 지내온 우리의 삶을 갈라놓지 말고 차분히 통합적으로 성찰하는 데서부터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을 찾아봤으면 좋겠다.
코로나 사태가 역경의 마지막 관문이었으면 좋을 텐데 아마 그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아직 코로나 감염도 다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테스트도 이어질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도 있겠지만, 다시 또 힘 합쳐 일어나면 된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이미 봄날도 지나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아시아에서 일본은 재빠르게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외치며 서양 문명의 열차에 올라탔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으로 들어가자는 구호에 지난 100여년 한국의 삶도 휘둘리게 되었다. 제국주의 폭력이 문명이란 이름으로 미화됐다. 서양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문명화, 근대화, 세계화였다.
서양중심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을 우리만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지난 세기 우리는 ‘실학(實學)’이란 이름으로 서양 문명화의 대열에 편승했다. 서양이 실학이고 우리는 허학(虛學)이었다. 빨리빨리 허학에서 벗어나 실학으로 갈아타야 했다. 빨리빨리는 지난 세기 서양의 눈으로 본 우리의 모습이다. 식민지를 당한 수모를 꾹 참고, 산업화도 빨리빨리, 민주화도 빨리빨리 한꺼번에 밀린 숙제 몰아치듯 해야 했다.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졌지만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서둘러 아픔을 봉합하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야 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잇따를 때 잠시 아차 싶었다. 무작정 달려가다가 안전사고로 황망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데 눈을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청천벽력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각오로 전 국민 금 모으기 행렬이 이어졌다.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에 오를 때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와 너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을 목놓아 외쳤다. 대~한민국 구호 뒤 ‘짝짝 짝 짝짝’ 박수는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격려요 감사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그러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우리 국민은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식민지와 전쟁과 IMF 위기를 겪으며 내공을 키워온 우리 국민이었다. 코로나는 전 세계 국가에서 동시에 치러진 국력 테스트였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 대응이 세계의 모범사례로 주목받는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선진국이 되어 있다고나 할까.
하루아침에 선진국이 된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피와 땀과 눈물이 오랜 시간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렇게 지내온 우리의 삶을 갈라놓지 말고 차분히 통합적으로 성찰하는 데서부터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을 찾아봤으면 좋겠다.
코로나 사태가 역경의 마지막 관문이었으면 좋을 텐데 아마 그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아직 코로나 감염도 다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테스트도 이어질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도 있겠지만, 다시 또 힘 합쳐 일어나면 된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이미 봄날도 지나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