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이데올로기
[중앙선데이] 2020.05.30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한 것은 일종의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였다. 벨이 그 유명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출간한 게 1960년이었고, 그가 말한 이데올로기란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였다. 스탈린 사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있었다고는 하나,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냉전의 한 축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던 때였다.
객관적 진리 아닌 이데올로기
사회문제 해결 위한 방법일뿐
독선과 자기연민에 빠진 보수·진보
‘공정의 옷’ 누가 입는지로 승부를
그 시절에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하기란 어지간한 학문적 성과와 용기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서구 산업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복지사회의 등장으로 마르크스가 예견한 프롤레타리아의 절대 빈곤과 계급 투쟁의 가능성이 작아진 이유도 있지만, 벨 자신의 보수적 성향이 작용한 게 분명하다. 벨 스스로도 “오늘날 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신좌익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1989년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것 역시 섣부른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역사의 종언이란 후쿠야마가 저작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 앞에 칸트와 헤겔이 있었다. 칸트는 이미 200년 전인 1789년에 “역사에는 반드시 종점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류의 잠재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목표가 곧 역사의 종점이며, 그것은 곧 인간 자유의 실현”이라는 거였다.
헤겔은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심화시켰다. “역사는 내부 모순 탓에 끊임없이 갈등을 거치며 파괴되고 새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이런 발전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근원적 모순’이 없어진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최종적 상태가 ‘역사의 종언’”이라고 말했다.
후쿠야마는 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관찰하면서, 칸트와 헤겔이 말한 “보편적 역사의 종언이 바로 지금”이라고 감상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선데이 칼럼 5/30
내친김에 좀 더 가보자. 이데올로기란 말을 처음 만든 인물은 드 트라시라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다.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대표로 국민의회에 참여했던 인물로, 1796년에 『사고력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처음으로 ‘이데올로지(ideologie)’란 단어를 만들어 썼다. 이후 그는 줄곧 자신의 학문, 일종의 ‘관념론’을 통칭하는 용어로 이데올로기를 사용해왔다.
이데올로기를 삐딱하게 바라본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지식인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게 못마땅해 그들을 이데올로그(ideologue)라 불렀다. ‘공리공론가’ 또는 ‘관념론자’란 뜻이었다. 이런 뜻은 마르크스에까지 이어져 마르크스 역시 이데올로기를 줄곧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이란 의미로 썼었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의 이데올로기에 면죄부를 준 것은 독일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의미에 가장 가까워졌다. 그는 1929년 나온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이데올로기란 ‘객관적 진리’가 아니며,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들이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란 각종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론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한 방법과 다른 해법일 뿐이다. 어떤 해법이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다가도 한쪽으로 치료를 계속하다 보면 내재한 모순이 필연적으로 불거져 나오고, 그러면 반대의 방법으로 메꾸고 보완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나와 다른 생각이라도 언젠가, 아니 ‘곧’ 참고해야 할 생각인 것이다. 거기에 어찌 종언과 종말이 있을 수 있겠나.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땅은 대단히 위험한 사고에 빠져있다. 자신들이 ‘진보’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한상진 교수의 지적대로 “독선적 자기 확신”에 빠져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헬조선’이 한순간에 ‘국뽕’으로 바뀌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적폐’요 ‘토착왜구’가 된다.
그런 오만을 가능하게 만든 게 자기연민에 빠진 보수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면서 (사실은 뭐가 보수인지조차 모르는) 스스로 부끄러워 보수당이란 간판조차 달지 못하고 자유니 미래니 에두르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보수가 뭔지는 계속 모르는 게 차라리 낫겠다. 이 한심한 정치세력을 살려낼 사람이 그렇게 없다는 게 안타깝지만, 그나마 새로 비대위원장이 된 인물의 말이 맞는 까닭이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 게 좋다. 이 땅에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없다. 아니 있었던 적도 없다. 그저 그렇게 적힌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걸치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입어야 할 옷은 공정(公正)의 옷이다. 그 옷이 작으면 살을 빼고 옷이 크면 근육을 키워 맞춰야 한다. 입으로만 공정했던 게 드러난 사이비 진보나, 공정을 가져본 적이 없던 얼치기 보수 중에 누가 공정의 옷을 제대로 맞춰 입느냐에 승부가 달렸다. 우리 국민, 대한민국의 미래도 거기에 달렸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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