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評, 社說, 談論, 主張, 인터뷰

‘새 역사’는 자기반성부터

이강기 2020. 6. 6. 21:40

[배영대 曰] ‘새 역사’는 자기반성부터

[중앙선데이] 입력 2020.06.06 00:28 |

기자

배영대 기자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과거사 바로잡기’니, ‘왜곡된 현대사’니 하는 식상한 용어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식상한 용어라고 한 이유는 그런 말이 불러온 숱한 ‘역사 전쟁’의 씁쓸한 경험 때문이다. 또 시작되는군, 이번엔 어떤 과거사가 도마 위에 오를까. 아무리 식상한 음식이라고 해도 효과가 좋다면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또 한바탕 ‘역사 광란’이 벌어질 것인가.

숱한 ‘역사 전쟁’ 씁쓸한 경험 재연될 듯
‘적대적 공존’ 장단 맞추는 꼭두각시 탈피

 

우리 현대사는 곳곳에 뇌관이 잠재해 있다. 경솔하게 잘못 건드리면 언제고 다시 폭발할 정도로 휘발성이 강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집권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그 화약고에 손을 대려 한다. 21대 국회 첫 의원총회에서 ‘현대사 왜곡’ 운운하며 ‘새 역사’를 언급했다. 총선에서 압승한 거대 여당이 뭐가 부족해서 상한 음식에 다시 손을 대려 할까, 오히려 그게 궁금할 정도다.

그동안 수많은 ‘과거사 바로잡기’가 있었다. 뭐 하나 제대로 정리된 기억은 별로 없다. 광란의 바람이 불었다가 지나가고, 또 필요한 시기가 되면 다시 시작되고 하는 식이다. 또다시 화약고가 열리기 전에 우리 국민이 먼저 지난 경험에서 배울 건 배웠으면 좋겠다. 멀쩡한 국민이 상한 음식 먹고 탈이 나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사 바로잡기’니 하는 말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말과 실제는 대개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위안부 문제’부터 돌아보자.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 중에는 집권 여당이 직접 풀 수 있는 매듭이 여러 개 있다.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숙제는 제쳐놓고 마치 다른 시급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해선 안 된다. ‘과거사 바로잡기’라는 말이 실제로는 자기 숙제 감추기 용도로 활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적대적 공존’이란 말을 생각해 보자. 싸움에는 상대가 있다. 겉으로는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연출하지만, 실제로는 쌍방이 ‘역사 전쟁’에서 이득을 취하며 공존할 수 있다. 적대적 공존은 오래된 정치 기술이다. 정치인의 입만 보며 덩달아 장단을 맞추는 것은 꼭두각시 춤과 다르지 않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함석헌이 내놓은 광야의 외침이었다. 요즘은 진영 안의 찬양가만 크게 들린다. 광야의 목소리는 사라져버렸다. 적대적 공존을 살찌우는 것은 국민의 꼭두각시 춤이다. 국민이 그런 식상한 춤사위에 손뼉 치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메뉴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꼭두각시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발상의 새로운 전환이 있어야 한다. 지난해 9월부터 우리는 기득권이 된 소위 ‘민주화 운동권’의 뒷모습을 옴니버스 영화처럼 감상하는 중이다. 영화의 주제는 이중성이다. 앞에서는 ‘민주’ ‘정의’ ‘공정’을 말하면서 뒤로는 딴짓 하는 배우들의 연기 대결이 스크린을 달구고 있다. 올해 4월 총선에서 많은 국민이 그들의 연기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 의미가 뭘까. 잘못한 것을 스스로 고칠 기회를 다시 한번 준 것이다. 잘못한 일까지 다 잘했다고 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다 잘했고, 너는 다 잘못했다는 ‘놀부 심보’로는 그 어떤 새 역사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새 역사로 포장한 또 다른 잇속 챙기기 이벤트의 반복일 확률이 높다. ‘과거사 바로잡기’를 진정 원한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부터 지나간 역사의 한 주체였음을 반성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로 그 반성의 자리에서 ‘새 역사’의 연꽃은 피어날 것이다. 자기반성 없이 새 역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남 탓 안 하는 게 새 역사의 출발이다. 생각하는 백성의 회개와 참회가 이 나라를 구원할 것이다. 하느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