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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조선 패망의 시발점?

이강기 2020. 12. 10. 09:37

세종이 조선 패망의 시발점?

 

 

  •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경제학

  • 대학지성

2020.12.06 18:00

 

 

역사에 등장한 제국과 왕조, 공화정부는 언젠가는 사라진다. 로마, 명, 조선, 일제가 그러했듯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 없다. ‘조선왕조 패망의 시발점이 세종?’이라는 제호처럼 후대 누군가가 ‘000 정부가 대한민국 패망의 시발점이었다’고 치고 나올지 모른다. 문재인 정부가 지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종 비판이다. 그는 일본의 앞선 국력을 알고도 따라잡으려 하지 않았고, 서얼 차별 강화로 인재풀을 좁혔으며, 노비를 늘리고 납세자이며 군역을 지는 양민을 줄여 재정력과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그의 위광으로 이런 노선이 300년 이상 유지되어 국력 피폐와 국권 피탈로 이어졌다. 대표적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과 박제순은 0 대 5로 뒤진 축구 한일전의 종료 5분 전 투입된 교체 선수로, 한두 골을 더 허용했을 뿐이다. 패배 책임을 뒤집어쓴 이들 뒤에 85분 이상을 뛴 선수들이 숨어 있다. 세종, 세도정치가, 고종 등 역대 지배층이다.

제호와 같은 명칭의 유튜브 강의 영상(하단 주소)을 1년 전 올렸다. 일부 학자와 저작도 비판과 재평가에 나섰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금기에 도전하는 친일파나 매국노로 치부된다. 유방, 관우, 악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위인이 자국의 학자나 언론에 의해 수시로 검증되고 재해석되는 것과 비교된다.

 

오늘의 세종상은 570년 전 양반층의 시각으로 평가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실록을 쓴 사관은 그에 대해 악평할 이유가 없었다. 대일 격차는 관심 밖이었고, 서얼 차별로 출세 기회가 늘었으며, 노비 증가로 재산과 가세가 커졌고, 죄를 지어도 사약 받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태종과 황희 등 깨인 그룹은 달랐다. 당시에 노비제를 ‘하늘이 내린 같은 백성’에게 고삐를 채우고 굴레를 씌워 차별, 착취하는 것으로 보고 노비 축소로 이어질 종부법을 제정했다.

 

역사적 사실 다섯 가지다. 첫째, 세종은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한 임진전쟁 전 유일한 왕이었는데, 얻은 정보와 인재를 사장해 일본 추격의 기회를 놓치고 격차 확대의 빌미를 제공했다. 1428, 1439, 1443년의 통신사로 일본이 여러 면에서 앞선 것을 알았지만 이를 내정 혁신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200년 뒤진 화폐경제 이행이 500년 뒤지게 되었다.

 

둘째, 태종이 힘들게 도입한 종부법을 허조 등의 간언으로 18년 만에 종모법으로 되돌려 노비를 늘렸다. 이 조치로 3백여 년 사이에 2천만 명이 양민 아닌 노비로 산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이 법제화한 서얼차대제의 집행을 강화하여 좁은 인재 등용문을 더 좁혀 인력을 대거 사장했다. 종모법과 서얼차대제 강화는 국력 쇠퇴와 망국으로 이어졌다. 납세자 감소로 재정이 취약해졌고 불만 세력이 늘어났으며 지배층의 통치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국, 일본 제도와 비교할 수 없는 낙후된 법제였다.

 

셋째, 재위 기간 중 백성 다수의 먹거리 확보와 주거 생활이 불안했다. 유난히 잦은 가뭄으로 농작물 작황이 나빠 일용할 양식 확보가 힘들었다. 재위 32년 중 가뭄 걱정이 없었던 해는 6년(1424, 1433, 1437, 1438, 1441, 1442) 정도다. 성종, 중종 때 가뭄보다 심했지만 저수지, 수로 등은 정비되지 않았다. 북방의 4군과 6진 개척에 따른 경상, 전라 거주 백성 다수의 강제 이주로 안민과도 거리가 있었다.

 

넷째,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양반과 백성 일반에게 친숙한 문자가 아니었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어 해득률은 5% 미만으로 추정된다. 사용자가 양반가의 아녀자 등 일부층으로 한정되었다. 실록에서 훈민정음이 긍정적으로 언급된 곳은 정조 때 대사헌인 홍양호의 상소(1783.7.18.) 정도다. 그마저도 중국 파견 사신의 중국어 발음 개선에 기여했다는 내용이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의식 고취와 당국의 정책으로 한글 교육이 확대되었지만 한글 평판이 높아진 것은 해방 후다. 초등교육 확대와 문맹률 저하, 한글 전용, 정보통신기술 활용 시의 한글 우수성 등 때문이다.

 

다섯째, 대명 사대의 강화는 자주독립 기상의 저해와 상실, 후대 왕들의 자주국방 의지 약화, 군사약국으로의 전락을 가져왔다.

 

위 내용의 많은 부분이 오래전에 지적되었지만 찬양에 몰입된 주류그룹은 애써 못 본 채 했다. 대한민국의 패망을 늦추고 막기 위해 우리의 역사 인식을 세탁하여 기존 위인의 재평가와 숨은 위인 발굴에 나설 필요는 없을까. 그렇지 않아도 미화된 세종을 더 빠는 광적 애국 행위와 구별된 이성적 접근의 세종론이 긴요한 시점이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경제학

공학사(서울대), 문학석사(한국학대학원), 경제학박사(히토쓰바시대)라는 남다른 경력을 갖고 있다. 경제학자로 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장 분야가 주 전공이다. 한국사회보장학회 회장(2012년)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신대 일본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일본학회 학술상을 수상(2017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