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토착 왜구 프레임이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이강기 2022. 7. 11. 07:44

“토착 왜구 프레임이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펴낸 윤해동 한양대 교수

조선일보, 2022.07.11 03:00
 
 
 
 
           윤해동 교수는 "한국학계가 게토화하고 있다. 몇몇 사람이 구역을 차지하고 족장처럼 군림한다"고 비판했다.

 

 

“‘토착 왜구’란 단어는 예전의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토착 왜구를 입에 담는 순간, ‘파블로프의 개’처럼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시공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한 식민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다.”

 

일제 식민지시기를 연구하는 윤해동(63·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문재인 정부 시절 유행한 ‘토착 왜구’에 걱정이 많다.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도 않는 적(敵·친일파)을 만들고 그 적과 싸운다며 권력 유지의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우는 ‘진보 세력’에 환멸을 느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진영을 나누고 합리적 사고와 이해를 방해하는 선동으로 학계와 지식 사회를 마비시켜 지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게 문제라고 했다.

 

 

◇”우리 학계 게토화, 몇몇 사람이 족장처럼 군림”

 

윤 교수는 ‘식민지의 회색지대’(2003) ‘식민지 공공성’(2010) 등을 펴내 친일(親日)과 반일(反日)의 이분법에 갇힌 현대사 연구를 비판해왔다. 이념에 치우친 민중사학에도 날을 세웠다. 그는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선진국 담론을 만들어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 학계가 외부와 담을 쌓고 너무 게토화돼있다. 창비 백 선생처럼 몇몇 사람이 구역을 차지하고 족장(族長)처럼 군림한다”고도 했다.

 

지난주 낸 ‘식민국가와 대칭국가’(소명)는 조선총독부를 ‘식민 국가’로 파악하면서 그 실체에 접근한 도발적 연구서다. 그는 “학계는 총독부의 억압성만 과도하게 강조할 뿐, 실재한 권력 기구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해왔다”고 했다.

 
한국광복군이 1945년 8월 미국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통신 훈련을 받고 있다. 19세기 이후 서구와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식민지를 경험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해 선진적 근대국가를 이룬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이 1945년 8월 미국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OSS교관으로부터 총기훈련을 받고 있다. 19세기 이후 서구와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식민지를 경험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해 선진적 근대국가를 이룬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독립기념관
 

◇”식민지 안 됐으면 선진적 근대국가 수립? 근거 없는 얘기”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 기구 아닌가.

 

“당시 총독부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권력 기구였다. 입법, 사법, 행정 분야에서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 경제와 사회를 주조해낸 주체였다. 이왕직(李王職)과 조선군, 조선은행은 총독의 관할 밖에 있었고, 일본을 위한 통치 기구인 건 분명하지만 총독부가 35년간 조선을 통치하고 이끌어간 권력 기구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몇 년 새 일제 식민 지배의 폭력과 억압을 강조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세계 학계의 합의된 명칭은 그냥 식민지 시기다. 강점(强占)은 학문적 용어가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에 가깝다. 교과서까지 이런 용어를 쓰는 건 문제가 많다. 구글 데이터베이스 조사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식민지 권력 기구를 ‘식민 국가’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일제 식민 지배는 한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좌절과 열패감을 안겨줬다.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 힘으로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분단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19세기에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가 있다. 태국과 네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등이다. 지금 아프가니스탄과 에티오피아는 전쟁 중이고, 네팔은 정정(政情)이 불안한 빈곤 국가다. 태국은 그나마 나은데, 쿠데타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한국이 식민지가 안 됐다면 순조롭게 근대국가를 수립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역사적 합리성이 떨어진다. 하물며 선진국이 됐을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는 성립하기 어렵다.”

 
윤해동 교수는 한국사학계의 이단적 존재다. 식민지 시기 연구자인 그는 친일/반일식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민족주의의 과잉을 비판함으로써 좌, 우 양쪽을 불편하게 했다./김지호기자
 

◇'우리만 가혹한 시련’ 한국 예외주의, 사실과 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서구와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거의 모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했다. 지금 우리는 지표상으로 완벽하게 선진국이다.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가 한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하지 않았나. 한국은 GDP 규모 10위, 제조업 5위, 국방력 6위다. 세계 7개뿐인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 이상)에 들어간 지도 몇 년 지났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선진국으로 대접하는데, 우리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것도 넌센스다.”

 

-한국이 20세기 들어 식민 지배와 분단, 전쟁이라는 유례 없이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우리만 식민지가 된 것도 아니고, 우리보다 더 가혹하게 전쟁과 학살을 겪은 나라들이 많다. 우리만 유례 없는 희생과 고난의 민족사를 가졌다는 ‘한국 예외주의’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예외주의는 희생과 고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민족주의에 공통적이다. 하지만 외부 시각으로 보면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선진국 대접을 받는 나라의 집권 세력이 ‘죽창가’나 부르고 있으면, 이게 어떻게 보이겠나.”

 

 

◇北 주체사관, 3·1운동, 임정 관심 없어

 

-문재인 정부는 2019년을 ‘대한민국 100년’으로 내세우면서 남북이 함께 기념 사업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승만은 무시했다.

 

“북은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주체 원년’으로 삼았는데, 이런 신정론(神政論)적 역사 해석은 남쪽의 3·1운동이나 임시정부 건국론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결국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 사업은 없던 일로 되지 않았나. 1919년 건국론은 이승만과 1948년 건국론에 너무 정파적으로 맞섰다. ‘진보’ 학계는 임정 법통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1919년 건국론에 편승한 잘못이 있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과 분단 때문에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잘못된 국가로 생각하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다.

 

“국민국가 수립의 실패를 한국사의 근대 이행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쓴 책들이 많다. 분단을 이유 삼아 대한민국을 뭔가 빠진 ‘결손 국가’로 보기도 한다. 현대사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답이 없다. 1980년대 편향된 역사관에 물든 586세대가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