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기록문화 으뜸 국가… 책 덕분에 콘텐츠 살아 숨 쉬어”
[단국대 HK+사업단 연속 기획 ‘한국사회와 지식권력Ⅱ’ ❻]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 ● 출판·박물관·문화유산… 삶 관통하는 셋
● 기업은 사회적 책임 다해야
● ‘활자’는 지식 얻는 최적 수단
● 문화 지킴이로 이어진 책 사랑
● 문화유산 보존의 길, ‘십시일반’
2022년 11월 28일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 관장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가장 뛰어난 것은 책이다. 디지털은 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도균 객원기자]
2022년 11월 28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만난 김종규(83) 관장은 초면에 대뜸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넸다. 얼결에 받으니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 가입 절차가 진행됐다. 안내원은 이런 일이 익숙해 보였다. 능수능란한 안내에 따라 뭔가에 홀린 듯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에 이어 계좌까지 밝혔다. 한 달에 1만 원이 자동으로 출금된단다. ‘어어’ 하는 사이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이 됐다. 기자를 보고 김종규 관장이 껄껄 웃었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이 ‘친절한 강요’라고 합디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그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170㎝대 중반은 돼 보이는 제법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80대 중반이지만 성성한 백발 외엔 퍽 젊어 보였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고 했던가. ‘동안’ 비결이 미소인 듯 잘 웃고, 보기도 좋았다. 화법은 호탕하고 몸짓은 시원시원했다. 엉겁결에 발생한 월 1만 원의 비용이 아깝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을 풍겼다.
2009년 8월 10일 ‘책을 건네다: 저자 서명본전1’ 개막식 광경. [삼성출판박물관]
김 관장은 출판·문화계를 누비며 나열하기만 해도 A4 용지 하나쯤은 너끈히 채울 만한 이력을 쌓았다. 문화부 장관 표창(1990), 대통령 표창(1991), 국민훈장 모란장(1995), 제7회 명원차문화 대상(2002), 제7회 일맥문화대상 문화예술상(2004), 은관문화훈장(2011), 제15회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2012), 제21회 4.19문화상(2020) 등 받은 상도 수두룩하다.
김종규 관장의 삶은 세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첫째는 ‘출판’이다. 김봉규(88) 삼성출판사 명예회장의 동생이기도 한 김 관장은 삼성출판사 부산지사장, 전무이사, 부사장을 거쳐 1992년엔 삼성출판사 회장을 지냈다. 출판사에 몸담은 동안 ‘한국단편소설선집’ ‘세계문학전집’ ‘세계사상선집’ 등 역작을 낳았다.
1990년 6월 29일 삼성출판박물관 개관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김종규 관장, 김동리 선생, 김봉규 삼성출판사 회장, 이어령 문화부 장관, 정한모 전 문화공보부 장관, 구상 선생이다(직함은 당시 기준). [삼성출판박물관]
삼성출판박물관 전시실. [삼성출판박물관]
보물 월인석보 권23. [삼성출판박물관]
인터뷰하는 동안 김 관장에게선 줄곧 책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김 관장은 “한국은 기록문화 으뜸 국가이며 그 중심엔 책이 있다”며 “디지털 시대가 왔다 해도 책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유산이다. 내가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지키게 된 이유”라며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선 국민 모두의 ‘십시일반(十匙一飯)’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에 돌려주는 방법
‘문학사상’ 창간호(1972)(왼쪽).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 [삼성출판박물관]
“출판이 본업이지만 박물관 운영도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유산 보존도 그렇고요.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죠.”
김 관장은 2022년 11월 26일 제9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 지역위원회(MOWCAP) 총회에서 일연(1206~1289)이 쓴 ‘삼국유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된 것을 예로 들며 말을 이어갔다.
“책이 곧 유물이자 문화유산입니다. 책을 보존해 후대에 더 좋은 유산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삼성출판박물관은 이러한 생각의 산물입니다. 형님(김봉규 삼성출판사 명예회장)과 제가 의기투합했죠.”
김종규 관장은 “모두가 조금씩 힘을 모으면 우리의 문화를 후대에 전할 수 있다”며 ‘십시일반’을 강조했다. [김도균 객원기자]
“88올림픽 직후 이어령 장관이 ‘일본엔 6000개가 넘는 박물관이 있다. 2000년대에는 한국도 박물관·미술관이 1000개는 돼야 한다’고 발표했어요. 이것에 힘입어 박물관 설립을 앞당겼습니다.”
삼성출판박물관 설립부터 운영까지 자비를 이용했습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을 듯한데.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입니다. 기업이 사회에 돌려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세상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이든 동식물 같은 자연이든, 세상 모든 인연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지면서, 은혜를 입으며 살아왔고요. 물론 저는 재벌이 아닙니다만(웃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에 하고 있는 거예요. 제 자식들에게까지 이 일을 계속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박물관 소장품을 전부 기증하거나,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몰래 팔아버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 아니겠습니까. 설령 그런다 해도 자식들을 탓할 순 없죠. 단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엔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제가 사명감을 갖고 행복과 보람을 느껴서 하는, 세상에 빚을 갚는 방식이니까요.”
김 관장은 2022년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이 제정한 ‘한국출판편집자상’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출판편집자상은 출판 편집자를 대상으로 시상하는 국내 최초의 독립된 편집자상이다. 같은 해 11월 24일 ‘도서출판 길’에서 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이승우 편집자에게 한국출판편집자상 대상이 수여됐다. 김 관장은 “편집자상 제정은 정말 장한 일”이라고 했다. 까닭은 ‘좋은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책 속에 길 있다
1996년 3월 28일 백남준 작가(오른쪽)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광복전후 50년 자료 특별기획전’을 관람하고 있다. [삼성출판박물관]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입니다. 평생 출판업에 몸담았기 때문입니까.
“글쎄요. 인간은 끊임없이 기록 하려는 존재입니다. 당연한 이치죠. 수명엔 한계가 있는데, 후대에 자신의 문화를 ‘바통 터치’해야 하잖아요. 문자가 생기기 전엔 바위나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 기록을 남겼어요. 형태로 남길 수 없는 건 ‘소리’나 ‘몸짓’으로 갈음했습니다. 책은 이러한 문화를 담아낸 기록이자, 기록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책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후대에 문화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음향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방법도 있지만 지식은 ‘활자’를 통해 전달될 때 가장 온전히 보존·전달됩니다.”
2022년 1월 1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에 따르면 조사기간 1년(2020년 9월~2021년 8월)간 종합 독서율이 47.5%를 기록해 절반을 밑돌았다. 직전 조사인 2019년 조사 때보다 8.2%포인트나 감소한 수치다. 또 2022년 10월 9일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연평균 독서량은 2011년 18.8권에서 2021년 8.8권으로 10년 새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전체 연령대 가운데 가장 큰 감소 폭이다. 2021년 기준 20대 독서량은 30대(9.8권), 40대(9.0권)보다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10대(13~19세) 연평균 독서량은 22.2권에서 13.1권으로 줄었다. 20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감소 폭이다. 스마트폰 이용 시간이 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독서량 감소세가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2005년 2월 2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다시 찾은 우리 책전’을 관람하고 있다. [삼성출판박물관]
“사회적 흐름을 막을 순 없죠.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러니까요. 하지만 저는 한국인이 독서를 잘 하지 않는 민족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집마다 책이 없는 곳이 없고, 훌륭한 ‘베스트셀러’는 지금도 100만 부 넘게 팔립니다. ‘책을 안 보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책을 판단해야 해요. 여전히 ‘책 속에 길이 있다’며 책을 챙겨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 초대회장 일화가 있어요. 이 회장은 매년 1월 일본에 가면 서점을 꼭 방문해 책을 읽고 자신이 읽은 책을 임원들에게도 권했습니다. 그가 타계했을 때 가진 장서만 수만 권이었어요. 지금의 삼성이 그냥 탄생한 게 아니에요. ‘지식의 원천’으로서 가장 뛰어난 것이 책입니다. 디지털은 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은 예전부터 기록문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록문화 으뜸 국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을 보세요. 한 개의 오탈자도 없습니다. 이런 뛰어난 문화의 중심에 책이 있습니다.”
책 있어 퇴계·다산 살아 있다
김종규 관장의 책 사랑은 문화재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가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맡게 된 이유다.“책을 사랑하다가 자연스레 문화유산을 지키게 됐습니다. 말했듯 책이 곧 문화유산이니까요. 책엔 역사도, 문화도, 인간도 담겨 있습니다. 책을 모으다 보면 책만 취급하게 되는 게 아니에요. 붓, 필통, 연적 등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게 됩니다. 결국 문화 자체를 사랑하게 되죠. 박물관을 운영하다 보니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고,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맡아 어느새 13년차에 이르렀습니다. 이 자리 역시 무보수입니다(웃음). 그래도 즐겁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취미는 ‘고(古)미술품’ 수집 아니겠습니까. 과거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했을 때 가장 먼저 박물관부터 턴 게 괜한 일이 아닐 겁니다.”
한국 문화유산만의 특징이 있습니까.
“한국은 풍부한 기록문화 유산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그만큼 ‘콘텐츠’가 풍부하죠. 삼국유사 하나만 놓고 봐도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배울 점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에요. 다산 정약용이 34세 때 귀양을 갔습니다. 가슴에 울분이 가득했던 정약용은 퇴계 이황의 ‘퇴계집’을 읽으면서 자신을 다스렸어요. 정약용은 자신보다 250년 전 살았던 이황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었고, 마음을 다잡아 18년간 500권에 달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현세의 우리는 정약용을 통해 배웁니다. 결국 500년 전에 살았던 이황도, 250년 전에 살았던 정약용도 책으로 말미암아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책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잘 보존하는 것이 관건으로 보입니다.
“다행히도 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저는 사람들이 긍정적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봤으면 해요.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장고 등 우리의 책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세계에 내놔도 손색없는 수준이죠. 특히 수장고는 아마 원자폭탄이 터져도 무사할 겁니다(웃음). 각 시나 학교마다 도서관이 있어 접근성도 높고요.”
김종규 관장은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은 1만5000명이 넘는다. 10만 명이 목표”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목표는 크게 세워야죠.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돈을 써야 할 곳이 많지만 저는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내는 월 1만 원이 가장 값지게 쓸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유산은 한번 손상되면 돌이킬 수 없어요. 모두가 조금씩 힘을 모으면 우리가 살아온 땅, 인연, 문화를 후대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 이현준 기자
- mrfair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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