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도취증(나르시시즘)의 양면성
(“기획회의” 228호, 2008.7.20)
최근에 번역한 바버라 오클리의『나쁜 유전자―왜 로마는 쇠망했고, 히틀러는 일어섰으며, 엔론사는 파산했고, 그리고 내 언니는 왜 어머니의 애인을 가로챘는가(Evil Genes―Why Rome Fell, Hitler Rose, Enron Failed, and My Sister Stole My Mother's Boyfriend)』에 “자기도취증”에 관해 아주 재미있는 해석이 있어 그 이야기를 하며 오늘의 혼란스런 우리 사회를 진단해 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자기도취증이란 “자기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만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 자기도취증은 가벼울 땐 애교로 비쳐질 수도 있고 또 인간이나 사회에 순기능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심해지면(이른바 악성이 되면) 작게는 타인과 사회에, 크게는 국가와 인류에 큰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오클리는 주장한다.
그녀는 이 자기도취증 장애의 특징을 과대망상적인 자만심, 자기의 개인적인 비상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미친놈”으로 취급한다는 인식,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이용하기,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기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증세로 진단한다. 극단적인 자기도취증 장애자로 오클리는 히틀러, 마오쩌둥, 차우세스쿠, 니야조프 등 희대의 독재자들을 든다. 히틀러는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한 회견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귀하는 역사상 처음 보는 가장 위대한 독일인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 시절에 자신의 “어록이 장님과 귀머거리를 치료하고 중풍환자가 수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는 “나와 같은 사람은 500년 만에 겨우 한 사람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라고 호언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무라트 니야조프 현 대통령은 그 자신의 초상화를 사실상 모든 공공장소에 걸어놓고, 얼굴에 반사된 햇빛이 도시를 번쩍번쩍 비칠 수 있게 해가 떠 있는 쪽으로 계속 회전하는 금박 입힌 동상을 수도에 세워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나는 거리에서 내 사진과 동상을 보는 것에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했다. 오클리가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이들 못지않은 극단적인 자기도취증환자일 것이다.
다음으로 자기도취증의 순기능적인 면을 살펴보자. 가벼운 자기도취증은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나 마음의 상처에서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며 자신이 취약하지 않다는 비현실적인 감정을 갖게 하고 자신에게 던져진 어떤 인생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리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나 과학자, 발명가들에게도 가벼운 자기도취증세가 있다. 그들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시련의 세월을 이겨내며 마침내 불후의 예술작품이나 위대한 발명.발견을 이룩해내는 데는 이 자기도취증이 큰 역할을 한다. 자기도취증이 없는 과학자의 경우를 한번 보자.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르 멘델은 수줍음을 잘 타는 몹시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고약한 시험불안증까지 있어 충분한 실력이 있으면서도 고등학교 교사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위대한 발견을 해 놓고도 그의 어눌하고 현학적인 강연, 부분적으로만 발표된 연구결과, 그리고 수줍음으로 인한 다른 과학자들과의 교류부진으로, 사람들이 자기의 업적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자포자기에 빠졌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기도취증이 있는 사람이어서 계속 자기의 연구결과를 세상에 알리려고 애를 썼다면 세계 식물학계는 실제보다 약 35년 일찍이 유전학의 기초가 되는 중심개념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도취증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너무 적으면 개인이나 사회가 갖고 있는 재능과 지능 대부분이 빛을 발하지 못한 체 그냥 묻혀버릴 수 있고 그것이 너무 많으면 타인이나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으며 심지어 나치즘, 파시즘, 프로레탈리아 독재처럼 이념과 권력에 대한 극단적인 자기도취증 장애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바야흐로 순기능적 자기도취증에서 역기능적 자기도취증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권력을 쥔 사람들부터 그래 보인다. 비단 이번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난번 사람들도, 그리고 그 앞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아직 경증이긴 하지만 이게 중증이 되면 제어되지 않는 권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시청 앞 광장을 사람들이 가득 메우게 된 근본원인도 이런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도취증에 빠진 권력자는 자신의 과장된 자아상에 의해 특별한 심리적 이점을 갖게 되지만 깨지기 쉬운 이 자아상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평가절하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실체를 재구성하려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사회 지도층이나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소위 글께나 쓰고 말께나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편이 짝 갈라져 제 주장만 옳다 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려 함으로써 공통의 가치관이 붕괴되는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의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TV 토론을 보노라면 패널들 대부분이 거의 치유 불가능한 역기능적 자기도취증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곧잘 극단으로 흐르는 풍조 역시 자기도취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오클리가 지적했듯이 자기도취증은 편집증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으며 편집증은 자기가 받은 경멸과 모욕을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어쭙잖은 일에도 깊은 상처를 받고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역기능적 자기도취증을 고취하는 데는 디지털기기와 인터넷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라는 한국의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 발전이 엉뚱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나르시시즘”이란 말이 일반화 될 정도로 사람들은 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부지런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자만에 빠져들고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악마를 만든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포털 사이트나 닷컴의 댓글들이 지금 이성을 잃고 있다. 이 무슨 아이러닌가.
“신바람”이란 말을 오클리 식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순기능적 자기도취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단 신바람이 나면 여느 때보다 두 몫 세 몫의 성과를 올린다고 한다. 우리가 그만큼 감성적이라는 뜻도 되겠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단기간에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게 된 것도 실은 이 신바람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역동성은 여전히 철철 넘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신바람, 다시 말해 순기능적 자기도취증으로 전화시킬 지도력이 없는 게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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