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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관한 책, 번역가에 관한 책

이강기 2015. 9. 1. 23:39

번역에 관한 책, 번역가에 관한 책

『번역은 반역인가』와『번역은 내 운명』

                   

번역에 관해 쓴 책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명색이 번역을 한다면서 어찌 이리도 무심하고 태평스러웠을까? 젊은 시절 문학평론가가 되겠다고 잠시 작정한 적은 있어도 번역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가 늘그막에 갑자기 이 길로 뛰어 들었기 때문일 거라고 내 맘대로 해석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변명에 지나지 않겠고, 그 보다는 그런 책들이 실력을 쌓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쓸모없는 요령만 늘일 것이라는 내 멋대로의 지레짐작 때문이라는 게 더 알맞은 설명이 될듯하다. 기본을 갖췄다는 전제아래 번역은 열정과 정성이 문제지 왕도가 따로 없다는 게 그간의 내 지론이었다.


헌데 이 책들을 읽고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책이 나오면 읽어볼 작정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번역자로서의 자신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돌아보도록 섬뜩한 자극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들 책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를 1차방정식으로 가정한다면 X는 항상 나 자신이 되었다. 저자가 ‘엉터리 번역’ 사례를 들며 질타할 때(특히『번역은 반역인가』의 경우), 그렇다면 그간 내가 번역한 책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과연 험 잡힐 곳이 없을까? 오역이나 비문은 정말 없었을까? 오탈자는 없었을까? 인명이나 지명을 포함한 외래어 표기는 제대로 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이다음부턴 지금까지보다도 더 정성들여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전도 더 찾아보고, 참고서적도 더 많이 읽어보고 퇴고의 횟수도 더 늘이고.... 암 그렇게 해야지. 물론 이런 걱정과 다짐을 전에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같이 절실하지는 않았다. 이 책들을 읽은 덕분이다. 이만하면 이들 책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은 셈이다. “텍스트는 독자와 함께 변화한다.”는 미셀 드 세로토의 말이 새삼스레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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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얼굴로 돌아 보다 - 『번역은 반역인가』


반어(反語)를 이용한 도전적인 책 이름이며 비뚤 비뚤 균형을 잃고 있는 그 글씨체며 붉은 바탕에 가로로 검고 푸른 줄을 좍좍 제멋대로 그어 놓은 표지부터가 심상치 않다. 무언지 욕구불만이 가득 차 있어 약간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 같은 으스스한 긴장감을 뿜어낸다. 한판 붙어보자는 전의(戰意)도 묻어난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말에서부터 벌써 성이 나 있다. “번역을 할 것인지 반역을 할 것인지”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란다. 책장을 넘길수록 그 도는 점점 높아져 마침내 울화통을 터뜨린다. 이왕 터졌으니 앞뒤 재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콸콸 쏟아 놓는다.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도 많았던 모양이다. 때로는 좀 거칠어 보이기도 하고 약간 오만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언설이 흥분에 곧잘 따르기 쉬운 횡설수설 없이 조리정연해서인지, 아니면 백번 지당해서인지 전혀 고깝지가 않다. 내가 옆 눈 한번 안 팔고 단숨에 읽어버린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옳아...”, “맞아, 맞아...” 하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 나올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정말 글을 잘 쓴다. 그의 성냄은 분명 우리의 번역현실에 절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줄 듯하다. 이 책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는「번역 경시는 지식인의 반역」에 대한 독자들의 댓글
(저자가 <주간동아>에 기고한 글로 부록 1.2에 싣고 있다) 거개가 저자의 주장에 열렬히 호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무엇이 그를 성나게 하나

그는 우리네 번역풍토에 몹시 성이 난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큰 것 두개만 골라 보자. 우선 번역경시에 관한 문제다. 번역의 중요성은 그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인데(그는 번역이 전제되지 않은 지적활동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사회는 물론 학계나 정부에서조차 도무지 몰라주는 것에 기차 한다. 대학에서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쳐주지도 않고 번역가를 마치 보조자나 기능인 취급하며 웬만한 외국어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대학원생 아르바이트로도 할 수 있는 ‘쉬운 일’로 여긴단다. 그러니 번역가가 제대로 대접을 받아 장인정신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번역경시 풍조는 부실을 양산하는 번역가 자신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원전(原典)을 숭상하는 우리네 정서와 관련이 있다고 진단한다. 외국어를 썩 잘한다고 해도 원전과 그 번역서(잘된 번역이라면)의 독해에 필요한 노력과 시간의 차이가 10배에 달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런데도 모두들 원전에 매달린다며 어이없어 한다. 이런 풍토에서 어찌 동서고전들이 제대로 그리고 빠짐없이 번역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미 번역된 고전들도 제대로 된 것이 드물며 전혀 번역된 적이 없는 것들도 아직 수두룩하다며 그 사례를 들고 있다. 그런데도 신학기가 되면 신입생이 읽어야 할 고전목록이라며 요란하게 추천하고 있는 것은 “지적 권위주의에 젖은 지식인의 낯 뜨거운 위선이요 직무유기”라고 질타한다. 도대체 추천자들이 실제로 그런 책들을 읽어보고나 추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단다.


다음은 일부 교수들의 그릇된 번역 자세와 부실한 번역 작품들에 대해서다. 그가 가장 심하게 성을 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교수들이 낸 조악한 번역서들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교수자신이 부실하게 번역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원생들에게 번역을 시켜 자기 이름으로 내는 바람에 부실해 지는 경우이다. 명색이 교수라면서 학생들에게 책잡힐 정도의 번역서를 내는 것도 참담할 지경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도덕불감증 차원을 넘어 범죄에 해당된다고 분개한다. 저자는 오역과 비문이 수두룩한 번역서 사례 십여 가지를 노골적으로 책 이름을 밝히거나 또는 어떤 책인지 독자들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암시를 줘가며 비난을 퍼붓는다. 발행자가 직접 나서서 번역원고를 8개월에 걸쳐 뜯어 고친 이야기도 하고 있고, 원고를 검토한 후 도무지 책으로 낼 수 없어 고심 끝에 계약을 파기한 경우도 밝히고 있다. 미국서 박사학위 받은 이름난 대학의 교수들이 낸 번역서나 문광부 추천도서 100종에 든 번역서, 또는 무슨 단체의 대상을 받은 번역서에 오역이나 비문이 널려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대부분 한 때 언론이나 독자들의 이목을 끌던 책들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여기에 거론 안 된 번역서들에서도 얼마든지(어쩌면 더 많이) 부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도 되겠다.


섬뜩한 반면교사

이 모두가 번역하는 사람들에겐 모골이 송연할 이야기들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내고 학술원 회장을 지낸 원로 경제학자”의 번역서도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이, 사실 몇몇 구제불능의 극단적인 경우는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번역하는 사람치고 이런 사례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번역가로서 장차 누군가에 의해 호된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에두르지도 않고 일부는 굳이 실명을 거론해가면서까지 큰 소리로 꾸짖는다. 그 용기와 기개가 정말 존경스럽다. 이 책의 장점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지적되어 당사자들은 물론 모든 번역가들과 번역을 지망하는 후진들이 섬뜩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잘못들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은 번역가들이나 번역지망생들이 마땅히 새겨들어야 할 비판이다. 그는 한국의 번역현실이 이웃나라 일본 보다 100여년이 뒤진 후진국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다. 드물게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애쓰는 교수들도 있으며 밤을 새워가며 올바른 번역을 위해 애쓰는 숨은 일꾼들도 있단다. 번역의 미래는 이들 의식 있는 인문학자들과 장인정신에 투철한 숨은 일꾼들의 개인적 노력,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첨단 매체를 통한 독자들의 날카로운 비판에 기대를 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번역에 대한 사회의 인식전환과 ‘정부 또는 공적기구’의 전폭적인 후원이 뒤따라야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번역가들이 웃고 있다 -『번역은 내 운명』


책 표지를 뚫어 만든 여섯 개의 동그란 구멍(표지처리가 매우 특이하다) 속으로 드려다 보이는 여섯 필자들의 얼굴이 모두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미소는 우리네 사진 찍는 버릇이랄 수도 있다. “김치!” 하며 찍었을 듯도 하다. 그러나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의 즐거운 회고담 같은 책 내용과 썩 잘 어울린다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보통 ‘운명’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제목의 글들은 탄식조이거나 비장감을 띠는 내용이기 마련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와는 달리 번역가의 ‘행복’을 다루고 있다. 고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도 약간 곁들이고는 있지만 오늘의 성공이 그것들을 모두 즐겁게 만든다. 차라리『번역은 내 행복』이란 제목을 붙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죽어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것”이라며 번역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 들여 거기에 전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뜻에서 붙인 것인 줄 몰라서가 아니다. 공경희도 2005.3.6자 <동아일보>에 운명적으로 번역가가 된 사연을 <번역은 나의 운명>이란 제목의 글로 소개한 적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 그들의 얼굴에 띤 미소는 차라리 비장한 것이어서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다.  


번역가로 사는 이야기

교수직을 겸하고 있는 두 분을 빼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전업 번역가들이다. 다들 수십 권의 번역서를 냈으며 100여권을 낸 분도 있다. ‘97년부터 시작했다니까 평균 1년에 10권 이상을 낸 셈인데 초인적인 능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하긴 지금 최고로 잘 나가고 있다는 어떤 번역가도 1년에 11권의 번역서를 낸 적도 있다 하니 본래 이곳은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고달픈 곳인가. 번역에 할애하는 시간은 4-5시간(교수겸직)에서 8-10시간(전업번역)이 보통이다. 10시간이라면, 자는 시간, 먹는 시간, 사이사이 잠간 쉬는 시간 빼고 나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다는 계산이다.   


번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여섯 분 모두가 한결같다. 그들이 고달픔을 이겨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또한 이 때문인 듯도 하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쏟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너, 번역해서 먹고 살 수는 있어?”라는 친구의 물음에 “잘 먹고 잘 산다!”는 대답이 쉽게 나올 수 있고, ‘가난한 신혼살림에 이은 이혼의 아픔’을 이겨낼 수 있고, 엉덩이에 못이 박힐 정도로 긴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은 나머지 현재의 ‘행복’에 취한 때문일까,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가 너무 적다. 무명시절이나 초보시절에 겪었음직한 외로움과 서러움과 고달픔에 좀 더 많은 지면을 배정했으면 현재의 ‘행복’이 더 빛나 보이고 번역을 지망하는 독자들에게도 더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쑥스럽기만 한 출판사 가기’, ‘피해갈 수 없는 돈 이야기’, ‘번역가의 속앓이, 원고료’ 등을 쓴 권남희와 이종인의 글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번역가가 펼치는 번역 이야기

저자들은 주로 자기들이 낸 주요 번역서에 관련된 이야기와 ‘번역이란 무엇인가’ 하는 ‘번역론’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주로 번역지망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하다. 자못 지루해지기 쉬운 소재인데도 모두들 자신의 체험과 결부시킴으로써 이 역시 들을만한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직역과 의역 이야기도 있고 오역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좋은 번역’의 기준과 기획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여러 사람이다 보니 주장에 조금씩 차이도 난다. 직역에 무게를 두는 이도 있고, 의역을 극구 변호하는 이도 있다. “번역에서 오역은 필수”라며 오역을 두려워말라고 충고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오역을 금기시하는 이도 있다.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판단은 독자가 할 일이다. 직역과 의역에 대해서는 김춘미가 소개한 이와노 호메이(岩野泡鳴)의『표상파의 문학운동(1913)』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인상 깊다. 그의 직역번역이 요새 같으면 악역(惡譯)의 대표적인 사례로 매도되겠지만, 당시 지식인들과 문인들이 이 번역체에서 참신함을 느껴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송병선의『돈키호테』1부6장 이야기와 말린체 이야기, 이종인의 ‘언어로 표현되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도 꽤 들을 만했다. 


번역경시에 대한 항의

먼 옛날 문자가 발명된 이후 지금까지 문명발달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전문가들이면서도 당시 사회는 물론 후대의 사가들로부터 그 공적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룹을 든다면 아마도 그리스.로마시대의 ‘낭독자’와 인쇄술 발명 이전까지의 ‘필경사’, 그리고 ‘번역가’들이 아닌가 싶다. 이 세 전문가 그룹이 없었다면 글쎄 역사가 지금의 수준에까지 와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21세기 현대의 역사가 아직 중세말기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이유 댈 것 없이 우선 이들이 없었다면 현대문명을 촉발시킨 르네상스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


이 셋 가운데 낭독자와 필경사는 이미 오래 전에 그 존속가치를 잃고 말았지만 번역가만은 문명의 유동성이 커질수록 그 효용성이 오히려 더 높아갔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번역을 가볍게 보는 사회의 눈이다. 특히 원형(원전)을 좋아하는 우리네 사회에선 앞서『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가 기막혀 하듯이 그 정도가 더 심해 보인다. 언론에서조차 번역서를 소개하면서 번역자의 이름마저 안 밝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니 어쩌니 먼저 떠들어 놓고는 막상 그들의 안중에 번역가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성을 내든 행복해 하든, 위의 두 책은 이 같은 번역경시 풍토에 대한 번역가들의 강력한 항의로도 비친다. 하나는 성을 내며
직설적으로 내뱉고 다른 하나는 은근히 자기의 ‘행복’을 과시함으로써 존재가치를 드러내 뵈려는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성내주는 것이 고맙고 행복해 뵈는 것이 보기 좋다.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싶다.

('기획회의' 제175호, 200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