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友 朴元煥 遺稿詩

地上에서의 30個月 - 李鄕莪

이강기 2015. 9. 2. 09:30

地上에서의 30個月

 

          - 李鄕莪

 

박여사!
우선 이렇게 불렀습니다. 당신을 불러보는 것으로 그 뿐, 특별히 꼭 해야할 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된 일은 조용히 돌아앉아서 당신과의 일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언어도 나의 마음을 곡진하게 표현해 주지는 못할 것이며 더구나 공중 앞에 나서서 어눌하게 머뭇거리는, 당신에게의 이 弔詞라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인가 하는 것은 나는 압니다.

당신은 이미 우리 곁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속되고 무력한 나의 부르짖음은 당신을 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아무런 주술력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박원환씨, 나는 이따금 당신의 이름을 부르곤 합니다.

지난 7월21일 당신이 운명하셨다는 시외전화를 光州에서 받으면서 나는 깊은 나락으로 갈아 앉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기적이 있다면 그것이 천만분의 하나에 해당하는 희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에게 올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이 내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일이 생긴다 하여도 적어도 1년 이상은 머물러 줄 것으로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섯 달이 넘는 심한 병고와, 열 여드레 동안의 완전 금식기도와 마음으로 이긴 달포의 피나는 집념,「물론 살아야지요」하면서 끝끝내 죽음과 마주 서던 의연한 자세, 놀라운 의지와 높은 정신력, 당신이 보여준 생명에의 자세는 경건하며 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신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당신을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신뢰하게 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불치병이라고들 말하는 암환자 옆에서 나는 이별에 대한 이렇다할 구체적 현실감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거기 합당한 감정의 준비도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아둔한 반응이었을까요?

당신이 운명하시던 날, 나는 울지도 못했습니다.
「엄마, 박원환씨가 돌아가셨어요.」
 내 반응을 민감하게 살피면서 딸애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연락했을 때
「뭐라고?」
「박원환씨가?」
「죽었다고?」
「죽었단 말이지?」
부질없는 반문만 연발하면서 나는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당신이 위암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던 날 보다도, 병원에 누워 있는 당신을 보고 집에 돌아오던 날보다도 나는 오히려 울지 못했습니다. 울지를 못해서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증으로 괴로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상스러운 평정이 나를 에워싸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가장 영원하고 안전한 곳에 맡겨 둔 안도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런 제약도 고통도 초조감도 없이 교신할 수 있다는 광활한 해방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박여사, 나는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당신을 자주 만납니다. 특히 주말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초동 부근을 지나노라면 거기 밀집해 있는 아파트 근처에 당신은 으례 서 있곤 합니다. 당신의 표정은 진실하고 원망도 한스러움도 없는 평소의 겸손한 태도 그대로입니다. 머리결은 자연스럽게 어깨 위에 얹히고 숱이 많지 않습니다. 흰옷을 즐겨 입습니다. 당신의 손가방은 비교적 큰 편입니다. 구두의 굽은 높지 않습니다. 치마폭은 넓고 윗도리의 품은 넉넉한 편입니다.

겉으로 표현하는 말보다 속에 지닌 말이 열 배가 더 많습니다. 당신의 음성은 여리고 높은 편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조심스러워 망설입니다.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 지금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아요. 다만 애들이 너무 어려서 눈이 감겨질 것 같지 않아요. 여섯 달간이나 앓아 누워 있어도 애 아빠에게서는 귀찮다거나 지겹다는 표정 한번 발견할 수 없어요. 언제나 한결같이 대해주어요.」라고 하시더니 차마 잊히지 않아서 거기 서서 지켜보시는가. 나는 서 있는 당신 곁을 지나면서 말 한마디 손짓 하나 건넬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천상의 모습으로 황후와도 같이 배회하는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박여사,
원래 당신에게서는 俗氣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 세상 밖에서 돌아온, 세상을 모르는 貴人 같았습니다.

여자 나이 서른 여덟이면 집안 살림살이의 맛이 살갗에 베고 그 언행에서도 부엌의 행주 냄새가 나는 게 예사인데 당신에게서는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당신 면모의 불가사의함에 대하여 여러 차례 문의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럴 리가 없어요, 선생님」하면서 부끄러워했습니다.

박여사, 당신의 시는 맑은 크리스탈과 같았습니다. 당신의 정신이 산책하던 길은 환상의 궁전이었습니다. 당신의 곁에서 풍겨오는 분위기는 포도원에서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이러한 점에 대하여 항상 신비롭게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해석을 내립니다.
「아아, 그이는 일찍 돌아가시려고 그러하셨는가,」라고요....

박여사, 당신은 진실로 고결한 분이었습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따져보면 우리들이 사귄 것은 地上에서의 30개월에 불과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1980년 12월 말경 문인협회 사무실 근처의 비로봉 다방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의 약속 때문에 그 다방에 들렀는데, 당신이 희곡작가 김숙현씨와 마주앉아 있었습니다. 김숙현씨가 그 흉허물없는 소탈한 음성으로 말했었습니다
「이향아 선생님, 정말 잘 만났어요. 내가 왜 진작 이선생님 생각을 못했을까요. 이이는 제 친구인데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선생님 많이 좀 도와주세요.」

이러한 정도의 인사소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며 또 뭐 그리 심각한 일도 아니어서 나는 별 생각 없이 유쾌하게 응수했었습니다. 그리고 1월10일경, 박여사 당신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우리 집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날 당신이 눈처럼 하얀 오우버코트를 입고 오셨던 것을 나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문학에 관한 것 말고도 많은 것을 얘기했습니다. 밤이면 불면증이 습관처럼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커피를 사양하셨습니다.

그 후로 당신이 시문학지의 추천을 마칠 때까지 처음에는 1주일에 한 번씩, 다음에는 격주에 한번씩, 그리고 나중에는 한 달에 한번씩의 간격으로 우리들은 만났습니다. 당신의 약속시간은 정확하였고 만날 때마다 서너 편의 작품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의욕이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처음 낮은 그 자리에 그림처럼 조용히 앉았다가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별스러운 것도 없는 나의 작품평이랄까 조언에 대하여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흡수하고 소화해 주었습니다. 혹 도움이 될 지 모르니 몇 권씩의 책을 골라서 빌려주면, 당신은 그 다음 번에 올 때 으례히 그 책을 탄탄하고도 예쁜 종이로 표지를 싸고 또 싸서 빌려준 내가 어이없게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을 접한 사람이라면, 당신이 지체 높은 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규수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음식을 즐기지도 않았습니다. 흔히 영혼이 비옥해 지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는 육체적 양분의 輕視, 아니면 당신의 성격이 유달리 정갈스럽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소화불량증이라고 하면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라고, 신경이 과민하면 위장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나는 제법 아는 체를 했습니다. 당신이 떠나기 6개월 전까지도「신경성이 아니까요」라고 엉뚱하게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모 대학병원의 무책임한 의사의 견해에 편승하여, 아, 당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외롭게 하였습니다. 나의 무식함을 용서받을 길은 없을 것입니다.

박여사,
우리가 사귄 것은 지상에서의 30개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짧음에 비하여 우리들의 관계가 진실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었음을 날이 갈수록 절감합니다. 내가 감히 당신 생애에 있어서의 최후의 거리를 함께 걷는 축복과 행운을 나누어 가졌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차라리 그를 몰랐었다면 내 마음이 편할 것을...」하고 우리들의 관계를 한탄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내 가슴에는 커다란 공동 하나가 뚫린듯 허전한 바람이 붑니다.

박여사, 나는 이 공동에 기화요초로 장식하여, 언제나 당신이 돌아와 유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습니다.

오세요, 자주 오세요. 가끔은 꿈으로라도 다녀가세요. 지금 이 시간도 나를 내려다보면서 다 알고 있다고 머리를 끄떡이는 그대여, 그대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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