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은 오늘날 경제대국 중국을 건설한 덩샤오핑이 사망한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13억 중국 인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중국을 미국과 필적하는 패권국으로 변모시킨 덩. 오마이뉴스는 덩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쓰촨(四川)성 광안(廣安)시를 방문한 모종혁 통신원의 르포 기사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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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광안시 덩샤오핑기념관 중앙홀에 자리잡은 덩의 부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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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체제의 투쟁 시대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 이론을 가장 다양하게 실험한 이는 록펠러, 포드, 빌 게이츠가 아닌 공산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1978년 덩은 문화대혁명의 10년 광란을 종식시키고 중국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유연하지만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의지로 획일화된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고 경제건설을 우선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 덩.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변하면서 중국은 강대해졌고
세계는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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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고향마을 입구 주차장에는 상하이, 충칭 등 외지에서 온 차량이 즐비하다. 허나 이 차량들은 춘지에 연휴를 맞아 덩 고향을 찾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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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무질서와 가난의 그림자가 짙은 덩의 도시
광안
춘지에(春節, 춘절)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인 충칭(重慶)시 시외버스터미널을 떠나 2시간여만에
도착한 광안시. 이곳을 네 번째 찾은 기자를 따뜻이(?) 맞이한 것은 택시기사들의 승차거부와 바가지였다.
춘지에 연휴와 덩샤오핑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광안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택시들은 하나 같이 미터기 내리기를 거부하며 평소보다 2, 3배의 가격을 불렀다.
천연덕스럽게 덮어씌우는 바가지에, 여러 사람들을 함께 태우는 합승까지 감행하는 택시기사들에 질려 어쩔 수 없이 만원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다.
2001년 처음 찾은 이래 작년에만 두 차례 방문했던 기자의 눈에 광안은 기이한 도시였다. 잘 짜인 도시계획에 따라 넓은
도로, 아담한 건물, 적절한 공원과 개천, 언뜻 보면 광안은 살기 쾌적한 중국의 중소도시 같다. 그러나 도심을 달리는 차량이 많지 않고 도시
빽빽이 들어선 건물 대부분은 비어 있어 괴기스런 느낌을 주었다.
화려한 도시 외형과 달리 오가는 광안 시민들의 옷차림은 남루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삶의 고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러 상념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자가 탄 만원버스는 덩샤오핑이 태어난 마을
시에씽(協興)진 파이팡(牌坊)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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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마을은 모두 철거되고 덩의 기념관과 옛집만이 남아 성역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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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성 정부 지도자의 헌화조차 없는 덩샤오핑
동상
지난 1월 18일부터 23일까지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한지 15주년 되는 날이기도 했다. 1989년
텐안먼(天安門)사건 이후 위기에 빠진 개혁개방정책을 염려한 덩은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 남부지역을 돌며 개혁개방을 독려했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6454_1[586732].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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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고향마을 중앙에 위치한 덩의 동상에는 무수한 헌화들로 둘러싸여져 있다. 덩 서거 10주년을 맞아 충칭에서 온 한 시민이 놓고 간 헌화가
눈길을 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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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무슨 일이나 기념일을 5년 혹은 10년마다
기념하길 좋아하는 중국인들이기에, 기자는 남모를 기대감에 부풀었다. 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여 거국적으로 진행됐기에,
이날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행사가 있으리라 기대됐다.
위대한 성인의 탄생지처럼 성역화된 덩의 고향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자의 환상은
무참히 깨졌다. 퇴락한 주민 거주지를 모두 철거하고 잘 꾸며진 덩의 고향마을(故里) 중앙에 자리잡은 그의 동상에는 수많은 헌화가 놓여
있었다.
헌데 주목을 끄는 것은 헌화자의 신분이었다. 중국 중앙정부 지도자의 이름은 하나도 안 보이고 쓰촨성 정부 지도자의 헌화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가장 고위직 관리가 보낸 헌화는 광안시 당서기가 보낸 것이었다.
그마저도 한 충칭시민이 바친 헌화에 비하면 정성이
덜하다는 느낌이었다. 동상 앞에서 조화를 파는 상인 자오(여)는 "오늘 대목이라 생각했는데 판매량이 그리 많지 않다"며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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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초라한 덩샤오핑 서거 10주년 기념식 무대. 이 기념식의 주관기관은 덩의 고향마을관리소와 광안시 TV방송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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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기념식 주관자가 고작 관리소와
TV방송국?
광안시 지방정부가 주관했다는 기념행사가 열린 무대는 기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19일 오전 10시에 30분간
진행된 덩샤오핑 서거 10주년 기념식 주관기관은 덩의 고향마을관리소와 광안시 TV방송국. 정부 차원의 성대한 기념행사가 아닌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임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관광가이드 왕타오는 "오늘 덩의 고향을 찾은 방문객이 평소보다 많지만 그 이유는 순전히
춘지에 연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적지않은 방문객은 오늘이 덩 서거 10주년인지도 모른다"며 "2004년 덩 탄생 100주년 기념식 당시
온갖 지도자들이 보낸 헌화와 인산인해를 이룬 방문객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하루"라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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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치들만 신났네." 춘지에 연휴를 맞아 몰려든 방문객들에 덩샤오핑기념관 앞 상인들은 덩 관련 기념품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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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고향마을 입구부터 동행한 천즈강도 "춘지에를 맞아 아내의 고향을 찾은
김에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면서 "솔직히 오늘이 덩 서거 10주년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 왔다는 그는 "방송뿐만 아니라 신문조차 덩
서거 1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가 거의 없었다"면서 "오늘날 중국을 건설한 위대한 위인의 기념일을 이렇게까지 잊혀졌다니 너무 뜻밖"이라고
말했다.
연휴를 맞아 남자친구와 함께 덩 고향마을을 찾은 리스(여)씨도 "충칭에서 하루 만에 다녀갈 수 있는 관광지라 방문했다"면서
"덩이 사망한 날이 오늘이 맞긴 맞냐"며 기자에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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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태어나고 자란 옛집은 그를 추모하려는 사람들보다는 기념사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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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중국은 더이상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작년 9월
9일은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서거한지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기자는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成都)시
텐푸(天府)광장에서 흥미로운 행사를 목격했다. 사설 마오쩌둥기념관을 운영 중인 샤오밍싱이 지인들과 더불어 자비를 털어 시민들에게 마오 배지를
증정하는 행사를 연 것.
샤오는 "마오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자본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중국 인민을 해방시킨 위대한
인물"이라며 "마오에게 과오가 있긴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부강한 신중국은 결코 건설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6454_1[586736].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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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9일 마오쩌둥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마오 배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샤오밍싱.(왼쪽에 등을 돌리고 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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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샤오는 마오가 그립다고 했다. 이에 비해 덩을 존경한다고 해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었다. 마오가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신중국을 건국한 '국부'라면,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중국 인민들에게 부와
발전의 기반을 닦아준 '작은 거인'이다. 그러나 덩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은 너무나 조용하다.
19일 밤 중국 국영 CCTV
국내뉴스에서 덩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후진타오 주석의 간쑤(甘肅)성 공업시설 및 농촌마을 방문소식을 되풀이해 전해줄
뿐이었다.
덩은 선부론을 기치로 오늘날 중국을 부강케 했다. 그러나 지역 격차, 도농 격차, 빈부 격차의 치유할 수 없는 양극화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후의 조화사회론에 덩의 그림자는 부담이 되는 것일까. 덩의 고향에서 맞은 그의 서거 10주기는 너무나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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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고향마을 곳곳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방문을 기념하여 남긴 기념석과 기념수가 즐비하다. 그들은 진정 덩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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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은 오늘날 경제대국 중국을 건설한 덩샤오핑이 사망한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13억 중국 인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중국을 미국과 필적하는 패권국으로 변모시킨 덩. 오마이뉴스는 덩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쓰촨(四川)성 광안(廣安)시를 방문한 모종혁 통신원의 르포 기사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6847_1[587455].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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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은 황제였다. 중국 현대사에서 황제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마오쩌둥과 덩 밖에 없다. 사진 오른쪽부터 덩샤오핑, 마오쩌둥, 류사오치,
천이, 저우언라이, 주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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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미국의 세계적 언론인이자 중소문제 전문가인 해리슨 솔즈베리는
1992년 일생일대의 역작을 한 권 출판했다. <새로운 황제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에서 솔즈베리는 두 명의 공산주의
중국 황제를 해부해 나갔다.
11세기 사마광이 편찬한 역사서 <자치통감>에는 "폭력을 방지하고 해악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며, 선행을 보상하고 악행을 벌함으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자―이런 사람이라면 가히 황제로 불릴 만
하다"고 정의했다.
솔즈베리는 중국 현대사에서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장쩌민(江澤民) 등은 이 개념에 부합되는 황제로
모자람이 많고 오직 마오와 덩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국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농민혁명으로 농민·노동자제국을 건설한 마오와 그 후계자 덩.
그들은 공식적으로 황제는 아니었지만 봉건 제국의 여느 황제만큼 절대적인 권력과 막강한 권한으로 중국을 장기 통치했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6847_1[587457].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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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 덩샤오핑 옛집에 보존된 그의 방. 덩은 집안의 장남으로 혼자 방을 쓰면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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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공산 중국의 두 황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성 광안시 시에씽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주변이자 어린 시절을 보낸 쓰촨 동부지방과 충칭시는 중국 인민해방군
지도자인 주더(朱德)와 천이(陳毅)의 고향이기도 하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덩 집안은 객가의 핏줄이 닿는 가문이었다. 덩의 아버지
덩원밍(鄧文明)은 머슴과 소작인을 둔 소지주로, 네 명의 아내까지 있었다. 덩원밍이 둘째 부인에게서 큰 아들인 덩샤오핑을 얻었을 때,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경찰서장 역할까지 하면서 위세를 자랑했다.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덩은 아버지의 권유로 15세에 충칭의
프랑스어 예비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근공검학(勤工儉學, 일하면서 공부한다) 운동에 호응하여, 덩도 1920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힘들고 고된 프랑스 노동현장에서 덩은 마르크시즘에 눈을 뜨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자가
됐다.
프랑스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일생에서 큰 영향을 미친 이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다. 덩은 프랑스에서 5년 3개월 동안 체류했다. 이를 통해 덩은 외국생활이 전혀 없는 마오쩌둥과 달리 드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다른 나라의 이점을 배우지 않는다면 결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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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재직시 덩샤오핑이 거주한 숙소의 복원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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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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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이 베이징에서 근무했던 사무실도 검소하다. 그가 쓴 일상용품과 사무용품은 광안 덩샤오핑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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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팔로군 정치위원으로 군부인맥을 다지다
1926년
프랑스를 떠나 신생 사회주의대국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수학한 덩샤오핑은 1927년 긴 해외체류를 끝내고 귀국하여 본격적인 공산혁명의 길에 나섰다.
중국에 돌아온 뒤부터 10년 간 덩은 중국 공산당의 한 젊은 간부에 불과했다.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결혼에 2번 실패한 것과
1933년 당내 권력투쟁에 의해 쫓겨나고 투옥까지 된 것이었다. 덩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의 실각과 복권을 되풀이 하는데, 이 때가 처음이었다.
가정적으로 불행하고 정치적으로도 순탄치 않은 그 시기 덩은 마오쩌둥의 정치노선을 줄곧 지지함으로써 중요한 권력적 토양을
다진다.
1936년 여러 신화들로 포장된 홍군의 대장정을 덩도 무사히 완주했다. 이 때부터 사회주의 중국 건국까지 덩은 관료가 아닌
군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류보청(劉伯承)이 사단장으로 재임한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으로, 덩은 중일전쟁 시기 모든 시간을 전선에서
보냈다.
중요한 군사작전에서 여러 번 승리하여 이름을 날린 129사단의 정치위원 생활은 덩에게 일생일대의 분기점이었다. 그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의 말처럼, 군사와 정치의 긴밀한 관계를 정확히 파악했다. 또한 자신이 정치 지도자로 확고히 발돋움하는데 기여한
군부인맥을 형성했다. 1940년 평생 반려자인 쭈오린(卓琳)을 만나 결혼한 것도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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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지방을 통치하는 당 제1서기로 재직할 시기 덩은 일생 중 가장 권세를 부리며 호화롭게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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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저 작은 친구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1946년부터 49년의 국공내전 시기 덩샤오핑의 군대는 연전연승의 빛나는 업적을 이뤘다. 류보청과 덩의
제2야전군은 중국 화중, 화남, 서남지방 등을 잇달아 해방시켰다. 그 공로로 덩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식전에 참석했고,
쓰촨·꾸이저우(貴州)·윈난(雲南)·시캉(西康, 티베트) 등 서남지방 4개성을 통치하는 당 제1서기에 올랐다.
1952년 마오쩌둥의
부름으로 베이징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덩은 실질적인 중국 서남지방의 왕으로 거주지인 충칭에서 권세를 부리며 호화롭게 지냈다. 국무원 부총리로
중앙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덩은 마오와 류사오치(劉小奇), 저우언라이의 후원 아래 중국 최고지도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마오는
일찍이 덩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1957년 소련을 방문한 마오는 흐루시초프에게 동행한 덩을 소개하면서, "저 작은 친구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는 장제스 정예군의 1백만 군대를 궤멸시킨 사람이오, 저 사람 앞에는 밝은 미래가 있소"고 말했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6847_1[587463].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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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말년 내내 타고 다닌 홍치(紅旗) 자동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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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그러나 1958년 마오가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중국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주자, 덩은 이를 치유하기 위해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제시했다. 원래 쓰촨의 속담이기도 한 흑묘백묘론은 1962년 덩이 공산당 중앙서기처
회의석상에서 처음 제시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덩의 실용주의정책은 곧 마오의
미움과 질시를 받게 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오자 처절한 보복을 당한다.
세 번 쫓겨나고 컴백하여 황제가
되다
1968년 만 62세의 나이에 장시(江西)성 생산건설병단의 노동자로 하방당한 덩샤오핑은 자신이 따랐던 류사오치와 달리
죽음은 면했다. 두 번째 정치적 실각이었던 이 시기 덩은 일생 최대의 고난과 아픔을 인내하면서 보냈다. 1973년 파탄에 이른 경제 상황을
염려한 마오쩌둥의 의해 복권된 덩은 베이징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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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시기 덩샤오핑은 62세의 나이에 하방당해 일생에서 가장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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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덩은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되살리기 위해 실용주의정책을 실시하지만, 다시 마오의 눈밖에 나서 세 번째의 실각을 하게 된다. 1976년 공산주의 중국의 건국 황제 마오가
죽자, 이듬해 덩은 세 번째 복권을 하면서 명실공히 마오의 뒤를 잇는 황제로 등극했다. 그 뒤 덩은 흑묘백묘론에서 한발 더 앞서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과 선부론을 내세워 중국을 변혁시켰다.
덩은 무소불위의 황제이자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후계자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단칼에 내쫓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정통성 유지를 위해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던 마오에 대한
평가를 "공로 7할, 과오 3할"로 하여 여전히 공산주의 중국의 '국부'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장쩌민을
내세우고 21세기 지도자로 후진타오(胡錦濤)까지 발탁할 만큼 용의주도했다. 그는 황제가 죽은 뒤 권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무상함을 깨닫고
자신의 신격화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는 공산당 1당 독재와 100년 흔들림없는 경제발전을 위해 1989년 텐안먼(天安門)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총과 탱크로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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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의 완수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남방지역을 다니면서 장쩌민을 다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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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남순강화로 개혁완수하고 후진타오를
발탁하기도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학살한 텐안먼사건 5개월 뒤 덩샤오핑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텐안먼사건후 보수세력이
시장경제의 싹을 죽이려 하자, 1992년 1월 덩은 남방지역을 방문했다. 덩은 더욱 강력한 개혁개방을 촉구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발표,
장쩌민으로 하여금 개혁드라이브를 추진토록 압박했다.
덩은 죽음을 앞두면서 홍콩의 반환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으로부터 평화적인
방법에 따라 되찾은 홍콩의 대지를 걸어 자신의 또다른 업적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1997년 2월 19일 덩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산주의 중국의 황제였던 덩이 자신이 집무했던 베이징에서 붕어(崩御)했을 때 기자는 그 현장에 있었다.
덩의 죽음을 알리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순간, 베이징은 적막과 슬픔의 도시로 변했다. 흥청대던 술집, 유흥업소는 순식간 문을 닫았다. 가게,
상점, 식당도 적잖이 철시에 들어가거나 문을 연 곳은 먹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숨죽이며 침묵을 지켰다.
떠들썩했던 거리는
고요했고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웃는 낯빛으로 다닐 수 없었다. 13억 경제대국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이 한 인물을 그처럼 추모했던 것은
마오쩌둥 사망 이래 전무후무했다. 덩샤오핑, 그는 정말이지 진정한 황제였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6847_1[587469].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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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핑, 안녕하세요?" 1984년 중국 국경절 퍼레이드 당시 베이징대학생들이 덩에게 바친 소박한 헌가. 13억 중국인들은 여전히 덩에게 이런
헌가를 바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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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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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성장의
열매 우리도 나눠달라!" |
[해외리포트]
덩샤오핑 10주기 특집 ③ - 양극화의 그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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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혁(mtes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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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adragon_347472_1[589040].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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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광안시 덩샤오핑기념관에 세워진 덩의 동상. 오늘도 중국 인민들은 덩에게 무수히 많은 조화를 바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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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지난 달 20일 쓰촨성 광안시 시에씽(協興)진 잔치(戰旗)촌. 덩샤오핑이
태어난 파이팡(牌坊)촌에서 불과 5㎞여 떨어진 이곳을 찾은 기자는 특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농가의 대청마다
붙여놓은 덩의 사진. 덩은 자신의 고향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주민 공원슈(여)는 "덩샤오핑 동지는 중국을 부강케 한 지도자다. 우리에게 그는
재화와 안녕을 가져다주는 수호신과 같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마을 곳곳 눈에 띄는 빈집들. 적지않은 생활용품을 그대로 놓아둔 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혹은 타지로 떠나간 농민들이 살던 집이었다. 일부는 가족 전체가 떠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가족 중 한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있었다.
쥐꼬리만한 수입, 늘어가는 세금과 교육비 부담, 발전하는 도시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 등의 피폐한 농촌 현실이
덩의 고향마저 이농현상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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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주민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을 그대로 남겨둔 채 버리고 간 잔치촌의 빈 농가. 이 빈 집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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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가난이 공산주의는 아니라고
했건만...
1976년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문화대혁명의 10년 광란이 종식되었다. 마오에 의해 세 번째 쫓겨났던 덩샤오핑은
1977년 권좌에 복귀하고 1978년 최고 권력을 완전히 손 안에 넣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농공업 생산력이 극도로 저하된 중국에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먹는 문제였다.
덩은 중국 인민들의 먹을거리를 해결코자 자신의 측근인 자오쯔양(趙紫陽)과 완리(萬里)를 농업
대성(大省)인 쓰촨과 안휘로 각각 파견했다. 당시 중국 농촌은 9년동안 계속된 기근과 생산된 곡식을 모두 도시로 '약탈'당하면서 빈사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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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의 초상화를 소중히 집 대청에 걸어놓은 잔치촌의 한 농가. 덩의 고향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덩을 무척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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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자오와 완은 덩의 믿음대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세부화된 농업생산대와 농가생산청부제를 도입, 농촌의 기근을 몰아냈다. 1979년에 이르자 중국에서는 "수수를 먹으려면 자오쯔양에게 가고
쌀을 먹으려면 완리에게 가라"는 말이 대유행할 정도였다.
마오가 남긴 인민공사 도그마에 사로잡힌 보수세력은 덩의 개혁에 강력히
저항했지만, 덩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가난이 공산주의는 아니다." 덩에게 중국 공산당의 1당 독재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가난과 폭압이
아니었다. 우선 인민들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덩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불만이 크다. 잔치촌
주민 장까이(가명)는 "덩이 중국을 잘 살게 했다지만 고향마을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군에 입대해
신장(新疆)에서 13년만에 돌아와 보니 고향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면서 "생산대의 생산력은 여전히 낮고 각종 잡세는 수십가지여서 입에 풀칠하고
아이들 교육시키기도 벅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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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발전 사진전시회에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농민공. 중국 대도시에는 이처럼 몸 하나로 힘들게 살아가는 농촌 출신 농민공들이 수없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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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90% 사람들은 경제발전에서
소외당하다
광둥(廣東)성에서 일을 하다 다리를 다쳐서 귀향한 쉬따웨이(가명)도 "잔치촌에는 30호당 1개의 생산대가 10개
있는데 한창 일할 젊은이를 둔 생산대는 하나도 없다"면서 "잔치촌 300호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은 외지에서 일하러 나간 가족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농촌은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광둥으로 돌아가 딸아이 교육비를
벌텐데…"라면서 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쉬따웨이,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작년 여름에 만난 생산대장 리청치는 "도시에서
일하면 1년에 족히 4000~5000위안(약 48~60만원)은 벌지만 농사일은 하루 종일 일해도 1년에 1000위안(약 12만원)밖에 못
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리는 "도시에 나가 공장에서 일하는 딸과 사위가 달마다 보내주는
1500위안(약 18만원)로 생활비와 손녀 학비를 충당한다"면서 "농사일로 살아가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국의 지니계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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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1990 |
1995 |
2000 |
2005 |
계수 |
0.343 |
0.389 |
0.417 |
0.450 |
*
주1) 소득분포가 완전히 평등한 상태가 0임. 주2) 수치가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정도가 높은 상태임. * 출처: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 |
ⓒ 오마이뉴스 고정미 | |
| 덩샤오핑은 '선부론'(先富論,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을
갈파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도입했다. 그의 이론은 오늘날 중국을 미국과 패권을 겨루는 'G2'의 쌍두마차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시켰다.
덩의 개혁개방정책은 도시에 잘 사는 수혜자를 낳았지만 9억 농촌인구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을 가져다주었다. 발전된
도시에서도 선부론의 경쟁에서 탈락한 빈민들이 양산되고 있다.
중국인민대학 농업경제학과 캉샤오광 교수는 "덩의 이론대로라면 도시가
농촌을 부양해야 할 단계이지만 농촌에 대한 투자는 거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국 경제가 매년 8% 이상의 성장을 이루지만 매년 새로
증가하는 8%의 부는 최상위층 8%가 독점한다"면서 "나머지 90%의 사람들은 경제발전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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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어촌마을에 들어선 빌딩 숲. 오늘날 선전은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로 변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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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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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는 상하이의 포동지역. 번영하는 중국 경제처럼 포동의 발전은 극에 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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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화려한 경제성장, 도시발전 속의 명암
덩샤오핑의
'선부론'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으로 질주해온 30년, 중국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다.
덩의 이론에 따라 초유의 경제실험장이
되었던 광둥성 선전(深?)시는 상전벽해의 현장이다. 홍콩에 인접하여 원주민 3만여명이 살던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선전은 오늘날 중국 차기 직할시의
하나로 거론될 정도로 눈부신 도시발전을 구가하고 있다.
농민공 문제를 다루는 사회운동단체에서 일하는 훠옌핑(여)은 "덩의 말처럼
기회의 땅인 선전에 와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않다"면서 "지금 선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에 달하고 홍콩인 부럽지 않은 부를
축적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 외지인으로 구성된 오늘날 선전을 지탱하는 것은 저임금에 혹사하는 노동자들"이라며 "중국사회가
이들의 노고를 직시하여 보상을 해주어야 하지만 이들에 손길을 내미는 관심은 너무나 적다"고 비판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천지개벽을 이뤘다고 놀라워 한 상하이의 푸동(浦東).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중국의 야심을 보여주는 동방명주탑 아래서 푸동지역의 발전은 빛의
속도와 같다. 해마다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푸동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꿈의 낙원이다.
충칭 출신으로 푸동에서
이모부를 도와 물류업에 종사하는 위민은 "쓰촨에서 갓 대학을 졸업하여 충칭에서 찾은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은 고작 800위안(약
9만6천원)이었지만 지금은 1만위안(약 120만원) 이상을 번다"고 말했다.
그는 "내륙지방과 연해지방의 생활환경, 근무조건,
소득격차가 너무 크다"면서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선부론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연해지방의 부가 내륙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한 인텔리 청년이 현실에 좌절하여 고향을 버린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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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최고의 남녀 부자인 인밍산 리판그룹 회장(왼쪽)과 허용즈 샤오텐허그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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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회장은 맨손으로 중국 최대의 오토바이 기업을 일구고 자동차회사까지 창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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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혁 |
| 소외된 인민들 "우리도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
덩샤오핑이 처음 서구문화를 접했고 한 때 왕처럼 지냈던 충칭에서도 선부론의 혜택에 따라 성공한 사람들이
적지않다.
1958년 '반혁명 우파분자'로 몰려 22년간 강제수용소와 교도소에 구금되고 출소 후에도 공장 노동자로 전전했던 인밍산
리판(力帆)그룹 회장. 그는 개혁개방정책 이후 감옥에서 익힌 영어로 대학 강사가 된 뒤 1992년 오토바이 제조업체인 리판을 창립, 오늘날 충칭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지난 2003년 민간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중국 정치협상회의(政協) 충칭시 부주석으로 발탁되었던 중국의
대표적인 붉은 자본가 인밍산. 그는 작년 여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나를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든 마오쩌둥 주석의 결정은 회개와 반성의
시간을 가지도록 했고 덩의 신정책은 감옥에서의 깨우침을 사업에서 발휘하는 기회를 주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마오와 덩에게 받은
은혜를 이제는 사회에 돌리려 한다"면서 "부국안민의 입장에서 고용을 늘리는 제조업에 집중하고 한 푼의 세금도 빼돌리지 않는 것은 이런 철학
때문"이라고 말했다.
단돈 2000위안(약 24만원)의 자본금과 5개의 테이블로 시작한 훠궈(火鍋)식당으로 오늘날 충칭 최고의 여성
부자가 된 허용즈 샤오텐허(小天鶴)그룹 회장도 덩에게 고마워한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덩의 개혁개방정책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정리해고된 늙은 여성노동자로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식당업에서 시작해서 식료품, 호텔, 물류, 여행,
테마파크, 부동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지만 대부분 종업원 고용증대에 초점을 둔 비즈니스"라고 소개하면서 "먼저 부를 이룬 사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길은 사업을 잘 해서 고용을 늘리고 종업원의 복지증진에 힘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부론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덩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중국사회에 공헌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머지 90% 이상의 중국 인민들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역 격차, 도농 격차, 빈부 격차는 이미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일부 인민들은 이미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도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도 덩샤오핑이 남긴 달콤한 파이를 맛보게 해달라"고. 덩이 죽은 지
10년 되는 오늘, 그는 21세기 중국에게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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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충칭시 쩡자옌에서 벌어진 주민 도로점거시위. "우리는 생존을 원한다!"는 플래카드를 든 중국 인민들의 집단행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