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4)

이강기 2015. 9. 3. 17:30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4)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0> 짚신 신고 설산을 넘다

"살 길은 大雪山 통과 뿐" … 지휘관도 병사도 눈보라 속 쓰러져
역전의 林彪도 고산증에 수차례 실신… "장정 최악 코스" 회고
댐 공사로 길 막혀… 기념비 앞에서 고난의 현장 바라보기만


한국일보


서강대 정외과 교수

 

저 멀리 흰 눈 덮인 장대한 산이 대장정 기간 홍군이 최악의 고난을 겪으며 행군한 자진산, 일명 다쉐산이다. 정면으로 산이 보이는 위치에 당시 나무 지팡이를 짚어가며 고통스럽게 산을 넘어가던 홍군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자진산( 金山)을 넘겠다고? 포기해. 그 산은 새들도 못 넘어. 선녀들만 넘을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선녀산이라고 불러. 산꼭대기에서 입을 열면 산신령이 노해서 숨이 막혀 죽게 하고 사람들이 이야기만 해도 산신령이 노해서 산사태를 일으키는 곳이야". 자진산 입구 마을에 있는 노인들은 대설산(大雪山)으로도 불리는 자진산을 넘겠다는 홍군의 계획을 이렇게 만류했다.

루딩(瀘定)교를 건넌 홍군은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대설산맥의 설산을 넘어 북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이동해 티베트 경계를 따라 북상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대설산 동쪽의 북상로를 통해 쑹판(松潘) 쪽으로 진격하는 방안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안은 인구가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식량조달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고, 세 번째 안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힘들더라도 설산을 넘기로 했다.

"설산을 넘을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산골에서 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두꺼운 옷도, 몸을 덥힐 술도 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마을 주민들의 귀띔으로 구할 수 있던 것이 고추와 생강이었다.

몸에 열이 나도록 이들을 넣고 끓은 물을 한 대접 먹이는 것, 나무를 깎아 지팡이를 만들도록 지시하는 것, 그리고 설맹을 방지하기 위해 눈을 감쌀 헝겊조각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 5,000m의 설산을 넘기 위해 지도부가 병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 장정 최악의 고난, 대설산 행군

 

산을 오르는데 꼬박 6시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일찍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느 산과 같은 녹지대가 나타났다. 사기가 높아진 홍군은 노래를 합창했다.

"야, 눈이다." 두 시간쯤 걸어 산허리에 이르렀을 때 선발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방출신으로 눈을 처음 본 병사들은 넋을 잃었고 어린아이들처럼 기뻐했다. 아직 이들은 이 눈이 자기들에게 가져다 줄 시련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르자 갑자기 안개 속이었다. 주위가 흐릿해지더니 봉우리가 보이지 않았다. 초여름인 6월이었는데도 찬 기운이 엄습하면서 광풍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리며 우박이 쏟아졌다. 대오는 순식간에 병사들의 고함과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됐다. 시련의 시작이었다. 우박이 그치고 태양이 다시 보였지만 추위는 더욱 심해졌다.

신발이 없어 짚신을 신은 일부 병사들은 짚신사이로 들어오는 눈 때문에 발이 얼기 시작했다. 숨조차 쉬기가 어려워졌다. 고산증 증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쓰러졌다.

숱한 전투를 앞장 서 지휘한 린뱌오(林彪)도 여러 차례 까무러쳐 호위병들에게 실려 산을 넘어야 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생사고락을 해온 경호원도 쓰러져 직접 마오의 부축을 받으며 산을 넘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산을 내려왔을 때 심하게 기침을 했다(곧 그는 결핵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게 된다).

여자들은 대설산을 넘은 뒤 모두 달거리가 끊겼다. 많은 병사들은 대설산이 장정 중 그 어느 전투나 고난보다 힘든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오후 3시, 선발대가 정상에 도달한데 힘을 얻은 병사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뒤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쉬웠을 뿐 아니라 즐거웠다.

한 병사가 눈 위에 헝겊 조각을 놓고 그 위에 앉아 썰매를 타기 시작했고 모두를 그를 따라 환호의 소리를 지르며 썰매를 타고 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자진산의 선녀들은 이 같은 광경을 조용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려다보고 있었으리라.

 

■ 장족 가이드와 홍군

 

야안(雅安)을 떠나 바오싱(?興)으로 향했다. 바오싱은 대설산을 넘으려면 지나야 하는 작은 마을이다. 그나마 대설산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로 여기에서 점심도 먹고 정보도 수집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도착해 마을에 들어서 작은 다리를 건너가자 오른 쪽에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에는 홍군과 관련된 두 개의 작은 조각이 보였다. 하나는 빨래하는 아낙을 홍군이 옆에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주며 도와주는 조각이었다.

안쪽에 있는 또 다른 조각은 홍군복장을 한 여자가 칠판에 홍군의 이야기를 써 놓고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앞에는 나무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는데 머리가 허연 중년 남자가 그 의자에 앉아 조각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마치 70년 전으로 돌아가 여자 홍군이 바오싱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홍군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 앉아 그러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로 더 들어가자 커다란 붉은 기념탑이 나타났고 뒤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은 점심시간이라 닫혀 있었다. 기념탑 조각은 머리에 두건을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다른 두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자진산을 안내한 이 동네의 장족 안내자가 홍군에게 자진산을 넘는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 이 지역은 장족지역이고 홍군이 자진산을 넘도록 도와준 것은 자진산을 잘 아고 있는 장족 안내자였다.

저 안내자는 최근의 티베트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해졌다. 기념탑에는 또 말을 끌고 눈에 발이 빠지면서 설산을 오르는 홍군의 모습이 부조형식으로 사면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었다.

식사를 하고 대설산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길이 엉망이었다. 강을 막아서 댐 공사를 하고 있었다. 댐을 앞에 두고 두 길이 나타났다. 왼쪽 길이 원래 우리가 가려던 길인데, 오른 쪽으로는 '개선된 길'이라고 씌어 있었다.

물어볼 곳도 없고 해서 그냥 왼쪽 길로 들어섰다. 댐 공사 현장이 아래로 보이는 길을 따라 계속 산길을 올라가자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공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이 길이 대설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맞는데 댐 공사와 자진산 공원 공사로 길이 폐쇄됐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또 다시 좌절인가?

 

■ 저 대설산을 바라보며

 

할 수 없이 갈림길로 돌아와 오른쪽 길로 다시 올라갔다. 강을 가운데에 두고 아까 갔던 길과는 반대쪽 길이다. 강을 가운데에 놓고 원래의 길은 강 왼쪽, 이 길은 오른 쪽으로 나 있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사트럭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차 경적을 울려대고 내려서 한참 항의를 한 뒤에야 이들이 길을 비켜주어 지나갈 수 있었다. 엉망인 비포장 산길을 한참을 달려갔다.

그러기를 얼마일까. 작은 마을이 오른 쪽 언덕 위에 나타났다. 설산이 보이고 그 앞에 작은 라마사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진에서 보아온 대설산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길가에 작은 장족 가게가 있어 기념탑 가는 길을 물었다. "차는 들어가지 못하니 요 밑에서 걸어서 왼쪽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기념탑 주변 길 바닥에 부서진 하얀 조각들이 즐비했다. 자세히 보니 홍군의 모습이었다. 최근 낡은 기념탑을 부수고 새 것을 지으면서 버려진 옛 기념탑의 잔해였다.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10m 정도의 기념탑 뒤로 댐을 만들고 있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 푸른 산이 보이고, 다시 그 산 뒤로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자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난의 현장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기념탑에는 '중국노동자농민 홍군 제1방면군'이라는 큰 글씨와 '자진산 넘음 기념'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대설산을 향하고 있는 쪽 탑 하단에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어렵게 자진산을 넘는 홍군들을, 그 반대쪽에는 자진산을 넘은 뒤 환호하는 홍군을 조각해 놓았다.

원래 계획대로 자진산을 넘어가 보지는 못하더라고 더 올라가서 자진산의 눈이라도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강을 건너 자진산 쪽으로 가는 길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1> 잃어버린 930km

홍군 금지조항 어기고 장族 약탈 '티베트 사태' 악연 시작이…
초지 통과하며 기아에 시달린 홍군, 소가죽 허리띠 먹고 간신히 버티기도
여관 운영 한족 남편과 장족 부인, 금실좋은 모습 '공존의 원리' 깨닫게



서강대 정외과 교수

 

홍군의 행군경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다쉐산(大雪山)을 바라보면서 올라가는 험로.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인 탓에 얼마 못 가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해 이 험로를 다시 되돌아 나오는 좌절을 겪었지만 곧 이어 발생한 인근 대지진을 생각하면 도리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동지들! 동지들!" 다쉐산(大雪山)을 넘자 제4방면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들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곳이 샤오진(小金)이다. 공안의 통제를 피해 두장옌(都江堰)으로 돌아 원촨(汶川)바로 못 미쳐 쓰꾸냥산(四姑娘山)으로 빠졌다.

지붕이 평평한 장족 특유의 돌집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산을 한참 올라가자 '해발 4532m'라는 팻말이 보였다. 평생 올라가 본 최고의 고도가 페루 티티카카 호수의 4200m였으니 개인적으로는 기록 갱신이다. 조금 걷자 숨이 찼다.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얼마를 갔을까, 앞에 검문소가 나타났다.

이곳부터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것이다. 4532m 고지를 넘어 근 열 시간을 달려 왔는데 여기서 쫓겨난다 말인가? (그러나 곧 이 지역에서 지진이 난 것을 생각하면 공안덕분에 목숨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공안은 500m 앞 언덕에 작은 기념탑이 있으니 거기서 사진 찍고 오는 것은 허락해주겠다고 했다. 붉은 벽돌 위에 하얀 기둥을 세운 소박한 기념탑이 나타났다. '홍군 장정 제1ㆍ4방면군 해후 기념비'라고 씌어 있었다.

아래쪽 붉은 벽돌 벽의 옆면에는 제1방면군, 제4방면군이라고 쓴 깃발아래 두 군의 병사들이 서로 만나 얼싸안고 있는 장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를 보니 마오쩌둥(毛澤東)의 제1방면군이 다쉐산을 넘어 제4방면군을 만나 느꼈을 감격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여러 책을 통해 이 같은 해후의 행복이 아주 짧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 역시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긴 고통의 순간이 찾아왔다.

 

■ 민족화해의 부부

 

해발 4532m의 빙판길을 다시 밤에 되돌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서 자기로 했다. 샤오진현의 르륭(日隆)이라는 마을인데 언덕위쪽으로 '정부여관'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르륭의 진(鎭ㆍ우리나라 리에 해당하는 작은 행정단위) 정부건물의 1층에 있는, 진 정부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바로 옆에는 경찰서가 있고 건물입구에 '인민정부', '인민무장부', '공산당' 간판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 지역이 만에 하나 불상사가 있어도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그곳에 묵기로 했다.

사람 좋게 생긴 중년부부가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부에 임대료를 내고 여관을 운영한다고 했다. 나와 동갑인 남편은 한족, 부인은 장족이라고 한다. 최근의 티베트사태 때문에 유심히 관찰했는데 평생 본 부부 중 가장 금실이 좋았다.

너무도 선한 인상의 두 부부, 그리고 평생 싸움 한 번 안 했을 것처럼 느껴지는 부부를 보고 있자니 이들이야말로 민족화해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족과 장족이 이들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공존할 수 있다면 티베트사태와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 두 번째 좌절

 

두 차례의 좌절로 생각해둔 비상대책을 실행에 옮겼다. 쓰촨(四川) 북부지역과 간쑤(甘肅)성은 출입이 금지된 장족 지역이니 회족 자치주인 링샤(?夏)의 수도 인촨(銀川)으로 날아가 거기서 차를 빌려 거꾸로 동쪽으로 올 수 있는 곳까지 온 뒤 그곳부터 다시 서쪽으로 다시 장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쑹판(松潘)초지 등 약 930km 구간을 빼먹게 되는데 그 구간은 외국인 출입금지가 풀린 뒤 다시 오는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하고 나자 허탈해졌다. 눈을 감고 가지 못하게 된, 즉 잃어버린 930km를 복기해보았다.

샤오진에 도착한 마오는 1935년 6월25일 제4방면군의 사령관 장궈타오(張國燾)와 만났다. 마오는 북으로 진군해 간쑤와 싼시(陝西)성에 근거지를 만들자고 주장한 반면 쓰촨에 기반을 갖고 있던 장은 쓰촨을 벗어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의견을 조율하느라 홍군은 근 두 달을 이 지역에서 허비했다. 결국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갖고 있던 군사위원회 총정치위원 자리를 장꿔타오에게 내주고야 북상 합의를 얻어냈다.

마오의 군대는 간쑤성으로 올라가기 위해 쑹판초지를 통과해야 했다. 끝없는 풀밭과 아름다운 들꽃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이 숨어 있었고 그 물들이 모여 죽음의 늪을 이루고 있었다.

멀쩡한 땅이 갑자기 끝없는 심연으로 변해 늪 속으로 말과 홍군을 삼켜 버렸다. 게다가 이곳 고원지대는 8월 한 여름에도 우박이 쏟아지고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마실 물도 구할 수 없었다. 고인 물들은 녹슨 것처럼 붉은 색을 띄고 있었는데 마시면 배탈이 나고 이질에 걸렸다.

제대로 잠 잘만한 곳도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하거나 굶어죽거나 늪에 빠져 죽었다. 먹을 것이 없는 병사들은 소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씹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일주일 걸려 초지를 통과했을 때 살아남은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 장족에 진 빚

 

"내가 장정 중 외국에 진 빚은 장족에게 진 빚이 전부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빼앗아 온 것들을 돌려줄 것입니다." 마오는 1936년 에드거 스노와의 면담에서 이처럼 말했다. 마오 스스로 홍군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던 '8개 주의사항'(농민의 것을 훔치지 말라 등)을 장족에게는 어겼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왜 그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까? 두 가지 이유이다. 쓰촨 북쪽의 장족 지역은 유목지로서 인구가 적고 식량이 부족했다. 그곳에 수많은 홍군이 들이닥쳤으니 식량부족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당시 그 지역에는 약 22만명의 장족이 살고 있었고 식량은 자급자족을 하고 조금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10만 대군이 들어온 것이다. 둘째, 장궈타오와의 논쟁으로 이곳에 너무 오랜 시간(92일) 머문 것이다. 장족은 한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제스(張介石)는 라마고승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해 공산주의는 라마교와 장족의 적이라는 것을 설교하는 한편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숨기지 않는 곡물은 압수하고, 홍군에게 곡물이나 식량을 팔면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따라서 홍군이 이 지역에 들어갔을 때 장족은 다 숨어버리고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식량을 살 수도 없었고 대지주의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밭에서 여물고 있는 보리를 무단으로 베어 먹어야 했고 장족들이 키우는 야크를 잡아먹어야 했다.

자신들의 생명줄인 식량을 빼앗기자 장족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홍군을 공격했다. 결국 이들간의 악연은 1950년 홍군의 티베트 점령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상당히 오래 된 셈이다.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 침공을 정당화하면서 사용하는 논리(티베트의 전통질서는 봉건적 사원경제의 압제체제이며 홍군이 티베트민중을 이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줬다는 주장)도 바로 장정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홍군은 쓰촨 서북부의 한 사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승려 1,000명의 이 절은 홍군이 협상 특사로 보낸 장교를 세 번이나 죽여 버렸고, 승려들은 밤에 말 타고 사원 밖으로 달려 나와 홍군들의 목을 베었다. 홍군이 접근하면 총격을 가하고 폭탄을 던졌다.

홍군은 한 달이나 계속된 전투 끝에 1,000명의 병사를 잃은 뒤에야 사원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자 홍군은 충격에 빠졌다. 방마다 곡식과 말린 야크 고기, 소금, 설탕 등 먹을 것이 가득 넘쳐 났기 때문이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사원에는 먹을 것이 넘쳐 나다니. 이를 보면서 홍군은 티베트사회가 민중의 고혈을 짜는 봉건적 사원경제체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티베트민중 자신이 아니라 외부세력이 대신 해방시켜 주겠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12> 인촨으로 날아가다

류판산 2800m 꼭대기에 웅장한 장정기념관 덩그라니…
옥상에 올라가니 높이 50m 마오 詩碑에 깜짝
'중국적 사회주의' 구호… 본질 뭔지 묻고싶어



서강대 정외과 교수

 

‘류판산 장정기념관’ 으로 오르는 길. 길 중간에‘장정 정신 확장하여 화해사회 건설하자’는 구호가 씌어 있고, 그 뒤로 마오쩌둥이 <류판산> 시를 지었던 정자가 보인다.

 

마오의 <류판산> 시비.

 

 

 

장족지역인 쓰촨(四川) 서북부지역의 진입에 두 차례 실패한 뒤 비행기 편으로 청두(成都)를 떠나 인촨(銀川)으로 향했다. 티베트문제로 공항의 경비가 삼엄했다.

짐 검사도 까다로워 카메라와 캠코더의 배터리 때문에 세 번이나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야 했다. 링샤(?夏)의 수도이자 실크로드 기차의 출발지인 인촨은 인구 60만 명의 도시로 중국에서 생산되는 구기자의 반 이상을 생산하는 구기자의 집산지이다.

인촨에 도착하자 계속 비가 오던 구이조우(貴州)나 쓰촨과 달리 황토고원과 서부 사막의 일부답게 공기가 건조하고 상쾌했다. 인촨, 그리고 홍군이 지나간 장정로여서 우리가 가려는 류판산(六盤山)은 모두 링샤 회족 자치주에 속해있다. 그만큼 이슬람교도인 회족이 많이 살고 있다.

도시도 구이조우나 쓰촨에서 봤던 낡은 도시들이 아니라 신도시로 깨끗했다. 중국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서부개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로 역시 새로 만든 고속도로였다.

동부 해안가에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시장을 겨냥한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여기에서 번 돈으로 낙후한 서부내륙지방에 투자해 도로 등을 건설하는 중구의 서부개발은 정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합쳐 놓은 프로젝트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시장과 이윤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라면 누가 장기적 관점에서 서부에 이같이 대대적인 돈을 들여 도로 등에 투자를 하겠는가? 도중에 지나간 한 도시는 이 같은 생각을 더욱 갖게 했다.

도시로 들어가자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인공으로 물을 끌어들여 끝없는 물의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도로도 차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8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부자동네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 최후의 고산

 

류판산 지역으로 들어가자 전형적인 황토고원들이 나타났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모든 것이 반대였다. 다른 지역은 평지에 강이 흐르고 산들이 보인다. 그러나 황토고원의 길은 모든 것이 밑으로 있다. 차가 달리는 평지가 고원이기 때문에 길옆에 깊은 계곡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곡 아래로 물이 흐르고 집들과 마을도 계곡 아래에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내려가는 것”이고 “평지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평지로 올라간다”고 이야기한다.

황토고원에서 특이한 것은 집의 지붕과 설계였다. 이 곳의 전통집들은 중국의 전통가옥처럼 지붕의 가운데가 높고 양쪽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은 구조였다. 그리고 그 낮은 쪽이 마당 안쪽을 향하고 있다.

모든 것이 척박하고 비조차 귀한 곳이라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남의 집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차가 달리면서 그 같은 모양의 지붕이 나타날 때마다 황토고원의 어려운 생존조건에 가슴이 아팠다.

류판산까지는 길이 좋지 않았다. 두시간 여를 달려 류판산에 도착했다. 류판산은 쓰촨의 설산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홍군이 넘은 마지막 고산이다. 그리고 진시황과 한무제, 당태종 이세민 등은 서쪽 정벌과 북쪽 정벌을 위해, 칭기스칸은 반대로 남쪽 정벌을 위해 넘었던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산이다.

높이가 2800m로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지만 마오쩌둥(毛澤東)과 홍군이 넘었을 당시만 해도 구름 사이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야 했던 산이었다.

이 산이 특히 유명한 이유는 마오가 산을 넘으며 <류판산>이라는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시를 지었던 곳에 정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 올라갔다. 큰 길에서 벗어나 작은 길로 산속으로 올라갔다. 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 꽤나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이 같은 산 꼭대기에 저렇게 큰 건물을 세워놓았는지 신기했다.

올라가 보자 ‘류판산 장정기념관’이었다. 내가 본 책에는 모두 정자 이야기만 하고 기념관 이야기는 전혀 없었는데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었다. 류판산은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자 정말 살이 엘 정도로 추웠다.

기념관 앞에는 마오가 시를 지었던 정자가 있었고 그 밑에는 ‘장정 정신을 확장하여 화해사회 건설하자’는 구호가 씌어 있었다. 또 그 앞에는 회족 특유의 창이 없는 모자를 쓴 목동이 양을 몰고 가고 그 사이를 홍군이 행진하는 조각이 있었다. 조각 역시 이 지역이 회족이 많은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기념관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기념관 왼쪽에 서 있었던 커다란 광고판이었다. 거기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샤오캉(小康)사회를 달성하자’고 씌어 있었다. 중국에 와서 많은 구호들을 유심히 보아 왔지만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구호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 구호를 보면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란 결국 자본주의”라는 난창(南昌)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말이 생각났다. 과연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란 것이 존재하는지, 또 그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마오와 홍군에 참여한 농민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가 소위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 시인 마오

 

제1, 제2, 제4방면군의 붉은 깃발을 길게 옆으로 펼친 모양 위에 ‘장정 정신은 영원히 빛나리라’라는 장쩌민(江澤民)의 글씨를 크게 확대해서 써 놓은 거대한 조형물을 지나 많은 계단을 올라가니 기념관이 나타났다.

거대한 시설이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문이 닫혀 있었다. 다행이 안에서 지나가는 직원이 우리를 보고 문을 열어줬다. 단체 관람 외에는 관람객이 없다고 한다. 하긴 교통수단이 없으니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을 것이다.

하도 비슷비슷한 진열물들을 여러 장정 기념관에서 보아서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다. 다만 류판산의 역사를 소개한 것들은 흥미로웠다. 오래 전에 지은 다른 장정 기념시설들과 달리 이 기념관은 가장 최근에 지은 것으로 최근 급속히 성장한 중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듯 가장 규모도 컸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들인 것 같았다.

이 꼭대기에 이만한 시설을 지으려면 장정정도는 아니라도 무척이나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도 별로 오지 않는 이 곳에 이같이 웅장한 시설을 지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사실 장정 기념물은 소박한 시설이 그 정신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닐지.

기념관을 나오려는데 안내원이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옥상으로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옥상으로 나가자 그 위에 높이 50m가 넘는 거대한 장정 기념비가 나타났다.

지금껏 본 것 중에서, 아니 존재하는 장정 기념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념물이었다. 단지 비석으로 세운 것이어서 그런지 조각도 없고 그냥 밋밋한 4각형 모양이었다. 거기에 ‘류판산 홍군 장정기념비’라고 쓰고 마오의 유명한 <류판산> 시를 특유의 마오 필체 그대로 써놓았다.

바람이 너무 불고 추웠다. 그래도 류판산의 옛길이 잘 보일 것 같아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헤치고 간신히 걸어 건물 끝으로 가 밑을 바라봤다. 그러자 마오가 류판산 꼭대기에서 보았을 산의 모습과 굽이굽이 길이 나타났다. 추위에 떨면서 그의 <류판산>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은 높디높고 구름조차 맑은데 天高云淡

남으로 줄지어 나르는 기러기, 시리도록 바라본다 望?南?雁

장성에 이르지 못한다면 누가 대장부라 부르랴 不到長城非好?

지나온 길을 헤어보니, 어느덧 이 만 리 屈指行程二萬

육반산 고개 마루 위에서 六?山高峰

홍기는 서풍 받아 힘차게 펄럭인다 紅旗漫卷西風

말고삐를 움켜쥐고 먼 길을 걷는 오늘 今日??在手

타고 온 저 말, 매어둘 날이 언제일까 何??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