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5)

이강기 2015. 9. 3. 17:29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5)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3> 1ㆍ2ㆍ4군 해후

마오, 368일 만에 우치 도착… 2·4軍의 장정은 1년 더 계속
1·2·4군 해후의 기쁨도 잠시… 장궈타오 4군 궤멸 비극
배경엔 毛의 라이벌 제거설… 역사는 승자 毛의 장정 기억



서강대 정외과 교수

 

대장정 당시의 마오쩌둥(오늘쪽)과 장궈타오. 홍군 최고지도자 중 한명이었던 장궈타오는 이후 의견충돌로 마오와 결별한 뒤 국민당에 투항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후이닝에 세워져 있는 ‘중국 노동자 농민 제1ㆍ2ㆍ4군 화합 기념탑’. 이곳에서 홍군의 집결로 사실상 장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탑 전면에 홍군 3군의 해후를 상징하는 3개의 홍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류판산(六盤山)을 떠나 장정코스를 역으로 달려 동쪽으로 후이닝(會寧)으로 향했다. 후이닝은 최근 티베트문제로 시위가 일어난 바 있는 간쑤(甘肅)성의 수도인 난조우(蘭州)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간쑤성은 외국인들이 쓰촨(四川)성으로부터 진입하는 것이 제한돼 있어 걱정을 했는데 문제는 없었다. 간쑤성이긴 하지만 동쪽에 위치해 장족들이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히려 회족들이 많았다.

마을에는 홍기 모양에 장정도시라고 쓴 장식을 가로등에 쭉 설치해 놓아 장정도시의 긍지가 강함을 보여줬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사진에서 본 높은 중국 전통가옥 양식의 탑이 나타났다. 1ㆍ2ㆍ4방면군 회합 기념탑이다.

마침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탑 앞의 넓은 광장에서 사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장정 역사현장 학습일 것이다. 학생들 뒤에는 소총을 세운 듯한 꼭대기에 별을 매달고 가운데 홍군의 얼굴을 새긴 뒤 전체를 붉은 천으로 감싼 힘 있는 조각이 있었다.

앞에는 1ㆍ2ㆍ3 방면군의 회합을 상징하여 3군의 붉은 군기 셋을 세워놓고 뒤에 ‘중국 노동자 농민 제1ㆍ2ㆍ4 군 회합 기념탑’이라고 쓴 10층 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탑에 올라 내려다보자 1936년 10월19일 이 광장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3군 병사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들의 해후로 사실상 홍군의 장정은 끝을 맺었다.

물론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앙군(제1방면군)은 한해 앞서 1935년 10월18일 우치(吳起)에 도착함으로써 368일 만에 장정의 막을 내렸다. 우리가 흔히 장정이 끝났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2ㆍ4방면군은 장정을 계속, 1년 뒤에야 이 지역에 접근했다.

소식을 들은 마오는 영접 선발대를 보냈다. 중앙군의 선발대는 10월2일 인구 2,000명의 후이닝으로 진격해 도시를 장악했다. 저우언라이(周銀來)가 도착해 2ㆍ4군 영접준비를 했다.

10월8일 장궈타오(張國燾)가 4방면군을 거느리고 도시로 들어와 성대한 환영행사가 열렸다. 이미 이 지역을 지나쳤던 허롱(河龍)과 2방면군은 연락을 받고 되돌아왔다.

3군은 축제로 밤을 새웠다. 이로써 홍군 전체의 장정이 끝난 것이다. 얼마 뒤 장궈타오, 저우언라이, 허롱은 함께 말을 타고 마오가 기다리고 있는 바오안(保安 후에 즈단ㆍ志丹으로 바뀌었다)으로 입성했다.

후이닝에서 다시 류판산을 거쳐 장정의 최종 목적지인 싼시성으로 향하면서 제2ㆍ4방면군을 생각해 봤다. 장정이 승자인 마오와 제1방면군을 중심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 4방면군의 비극

 

마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장궈타오의 4방면군은 쓰촨 동북부에 근거지를 잡고 있다가 다쉐산(大雪山)을 넘어온 마오의 군과 해후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마오와 견해가 달랐다. 쑹판(松潘)초원을 건너 간쑤성으로 들어가려는 마오와 헤어져 쓰촨 서북쪽의 아바로 갔다. 그러나 겨울을 거기에서 날 수는 없었다.

장궈타오는 마오 군의 장정이 거의 끝나가던 35년 10월10일 “청두(成都)를 공격하겠다”며 남하를 시작, 루딩(瀘定)교로 향했다. 또 다른 부대는 샤오진(小金) 에서 다쉐산을 넘어 바오싱(寶興)으로 진군했다. 마오 군 진군방향의 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국민당군의 핵심을 격파하며 청두에 가까워졌다.

장은 자신감에 넘쳤고 병사들도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장제스(張介石)는 20만 대군을 청두 방어에 투입했다. 평지에 전선이 펼쳐지면서 국민당군의 폭격이 힘을 발휘했다. 일주일 사이에 장궈타오는 병사 1만을 잃고 출발했던 서북쪽의 장족 지역인 간즈로 밀려나야 했다. 군대는 4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모스크바의 밀사였다. 모스크바는 린뱌오(林彪)의 사촌을 내몽고를 통해 싼시(陝西)성으로 보냈다. 그는 마오를 만나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즘의 대두를 설명하면서 위기의 시대에 당이 단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궈타오와도 오랜 친분이 있던 그는 무선으로 장궈타오도 설득했다. 그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장궈타오는 중앙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에 따라 그가 후이닝으로 진군해 온 것이다.

그러나 4군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36년 9월 소련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마오와 중국공산당이 요청한 다수의 무기를 외몽고를 통해 지원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3군이 연합군을 구성해 물품인도지역까지 돌파하기로 했다. 장궈타오 군 4만, 마오 군 2만, 허롱 군 2만 등 8만군의 총지휘관으로 마오가 추대됐다.

이들은 닝샤(寧夏)의 황하를 건너 외몽고로 북상하기로 했다. 10월24일 여성부대를 포함한 4군의 선발대가 황하를 건넜다. 그러나 이후 국민당군의 폭격 등으로 나머지 군은 도강에 실패하고 작전을 포기했다.

4군은 둘로 나뉘어 절반인 2만여 명이 강을 건너 이미 전진하고 있었다(비판적 학자들은 마오가 당내부 정치 때문에 의도적으로 4군을 위기로 몰고 갔으며 이미 강을 건넌 4군 선발대에게도 작전취소 사실을 알리지 않아 이들을 전멸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황하를 건너 서진한 4군 선발대는 보급이 중단되고 고립돼 추위와 기아, 그리고 지역소수민족(마족)의 공격으로 거의 전멸했다. 특히 여성부대는 대부분 적군에게 잡혀 윤간을 당하고 사창가에 팔려갔다. 결국 당내 권력뿐 아니라 자신의 병력도 잃게 된 장궈타오는 국민당군에 귀순하고 말았다.

 

■ 2방면군의 행적

 

난창(南昌)봉기의 영웅 허롱이 이끈 2방면군의 행군은 상대적으로 순탄한 편이었다. 후난(湖南)성 서북쪽에 근거지를 갖고있던 허롱 부대는 후난과 구이조우의 경계를 오가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군이 건너간 우강 근처 마을에서 한참 전에 주더(朱德)가 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앙지도부의 행방을 알게 된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국민당군과 간헐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구이조우(貴州)를 횡단한 2방면군은 윈난(雲南)의 군벌에게 중국의 고사를 들어 홍군과 싸우다가는 장제스에게 먹힐 것이니 우리와 싸우지 말라는 밀서를 보낸 뒤 윈난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윈난으로 들어가자 지역군벌 롱윈(龍雲)이 홍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허롱은 쿤밍(昆明) 공격을 명령했다.

놀란 롱윈은 군대를 철수해 쿤밍 방어에 집중시켰고 홍군의 윈난 통과를 묵인했다. 2방면군은 윈난 동쪽에서 진사(金沙)강을 건너간 중앙군과 달리 윈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쿤밍을 거쳐 서북쪽으로 진군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성이 있는 리장(麗江)으로 들어갔다. 리장에서는 한족과 지역의 소수민족인 나시(納西)족이 홍군을 환영했다.

이어 샹그릴라로 북상한 2방면군은 부근의 유명한 라마 불교사원인 쑹짠린쓰(松贊林寺)사원과 장족의 소수민족종교를 존중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36년 4월말 이들 2만여 군대는 별 탈없이 진사강을 건넜다.

이후 2방면군은 둘로 나뉘어 한 부대는 매리설산을 거쳐 티베트의 국경을 따라 북상해 쓰촨의 서북쪽 끝으로 진군했고, 또 다른 부대는 자신들이 진정한 샹그릴라라고 주장하는 다오청(稻城)을 거쳐 북상한 뒤 36년 6월 말 간즈에서 합류했다.

허롱은 이곳에 주둔하던 장궈타오와 정보도 교환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장궈타오가 자신과 행동을 같이하자고 하자 “엿이나 먹으라”고 일축한 뒤 마오와 제1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그들이 있던 싼시 쪽으로 진군해 갔다. ·



<14> 혁명의 수도 옌안

장정 대서사시의 종착역엔 4色 산업개발 붐 '격세지감'
마오, 추격군 섬멸한 펑더화이에게 詩 헌사해
에드거 스노와 대담 '중국의 붉은별' 신화 탄생



서강대 정외과 교수

 

장정 직후 홍군이 수도로 삼았던 옌안은‘장정 도시’ 이미지를 이용한 이른바‘홍색기지’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단체관광객들이 당시 홍군 지도부가 사용한 중앙대강당 연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마오쩌둥과 에드거 스노. 이 대담은 훗날 대작<중국의 붉은 별>을 탄생시켰다.

 

 

 

1935년 10월18일, 류판(六盤)산을 떠난 마오쩌둥(毛澤東)과 병사들이 마침내 싼시(陝西)성 우치(吳起)에 도착했다. 그러나 닝샤(寧夏)군벌의 기병대가 후미를 쫓고 있었다.

마오는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이들이 더 이상 추격을 못하도록 손을 보라고 지시했다. 펑더화이는 이후 성리(勝利)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 한 야산에 저격수들을 매복시켜 이들을 몰살시켰다. 이로써 국민당군은 결정타를 맞았고, 홍군 중앙군의 도주행군은 끝이 났다.

장정을 368일이라고 하는 것도 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8,000명(4,000명이라는 설도 있다)도 채 되지 않았다. 출발당시의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원래 출발했던 이들은 3,00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승리였다.

우치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황토고원의 길답게 먼지가 많이 났다. 돌고 돌아 도착하니 ‘우치, 중앙홍군 장정 승리 종착지’라는 대형 선전판이 맞았다. 드디어 2만5,000리 장정의 종착지에 도착한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시내에 들어가 장정 광장을 구경한 뒤 성리산을 물었더니 바로 뒷산이라고 했다. 작은 야산인데 이 곳 역시 공사 중이었다. 차를 내려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인부들이 성리산전투 기념탑을 만들고 있었다.

공사 먼지를 뚫고 올라간 산꼭대기 잡목들 사이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마오가 밑에 앉아 전투장면을 지켜봤다는 나무다. 그곳에 서자 우치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다. 이곳에서 마오는 홍군의 저격에 추격군이 연이어 쓰러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 동안 국민당군에게 쫓기며 쌓인 울분을 시원하게 해소했을 것이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이름이 들어간 시를 써주었다. 마오가 장정 중 특정인 이름을 넣어 쓴 유일한 시라는 점에서도 그가 이 승리를 얼마나 감격해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로부터 30년 뒤 마오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아래 평생 심복이었던 펑더화이를 처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해가 지는 우치를 내려다보면서 비정한 역사를 생각했다. 조용히 마오가 펑더화이에게 헌사한 ‘펑 대장군’이라는 시를 읊어보았다.

흔히 장정은 홍군이 우치에 도착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홍군은 우치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바오안(保安)으로 이동했다. 바오안은 이후 홍군이 옌안(延安)을 수도로 정해 이동하기까지 머문 임시수도가 됐다. 마오와 홍군지도부들이 머물던 기념유적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1936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마오, 저우언라이(周恩來), 보구(博古)가 머물던 토굴이 있었다. 36년 12월. 마오는 이 토굴 밖 마당에서 푸른 눈의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의 붉은 별>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젊은이는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홍군의 심장으로 숨어 들어온 미국의 진보적 저널리스트 애드거 스노였다. 그는 한달간 이곳에 머물며 마오와 인터뷰를 한 뒤 38년 그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세계 3대 르뽀문학의 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책은 마오와 장정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 혁명 수도와 서부개발

 

장정, 그리고 혁명홍군의 도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옌안이다. 장정이 끝난 뒤 1년 반 뒤인 37년 1월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내전이 본격화하는 47년까지 10년 동안 홍군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옌안에 도착했다. 옌안은 2년 전 들렀을 때와 달리 활기가 넘쳤다.

시안(西安)까지 고속도로가 완공이 됐고 사방에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을 짓고 있었다. 우치, 즈단(志丹ㆍ바오안의 현 지명)에서도 목격한 것이지만 옌안에 들어서 가장 놀란 것은 건설 붐이었다.

서부개발과 석유 덕분인 듯 했다. 나중에 취재해 보니 옌안에는 1000억 위엔(14조원)을 투입돼 홍ㆍ황ㆍ녹ㆍ흑 4대 산업기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홍색기지는 혁명의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이용한 홍색관광지 발전 계획이다. 실제로 지난해에만 사상최고 수준인 650만 명이 옌안을 방문해 35억 위엔을 썼다고 한다.

황색기지는 황토고원의 지질적 특징과 문화적 특징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고, 녹색기지는 세계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사과 등 이 지역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가공할 수 있는 중국 최고의 석유화학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흑색 기지)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방에 지어대는 건물들을 볼 때 과연 다 분양이 될 것인지부터 걱정이 됐다.

이 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지는 ‘옌안혁명기념관’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1950년에 지은 낡은 기념관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인데 아직도 공사 중인 것을 보니 엄청나게 큰 기념관을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홍군지도부가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본부를 옮겼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토굴 등이 여럿 있다. 그 중 양자링(楊家嶺)으로 향했다. 홍군지도부가 1938년부터 47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마오 등의 토굴숙소와 함께 중앙대강당과 혁명정부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중앙대강당은 42년 건설돼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린 큰 건물이다.

강당 안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옆얼굴을 겹치게 한 동그란 그림아래 ‘중국 공산당 제 7차 전국대표자 대회’라고 쓴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연단 앞에서 여럿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시안○○○ 유한공사’라고 쓴 작은 현수막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회사에서 온 이른바 홍색유람이었다. 바람도 쐬고 역사공부도 할 겸 단체로 많이들 온다고 했다.

밝은 회색 홍군복을 입고 열심히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지난 번 왔을 때 만났던 그 아가씨였다. 기념촬영을 위해 관광객들에게 홍군복을 빌려주는 아가씨인데 싹싹하고 자기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데다가 웃는 모습이 가히 ‘살인미소’여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언제 내가 옌안에 다시 와 또 만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너무도 반가웠다.

강당을 나와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지도부의 토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2년 전에는 마오의 책상에 앉아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많아 그럴 틈이 없었다. 확실히 옌안의 홍색산업은 뜨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 바오타산에 올라

 

숙소를 잡은 뒤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바오타(?塔)산에 올랐다. 바오타산에는 옌안의 상징이 된 바오타라는 탑이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 때인 8세기에 만들어졌고 송나라 때 중건된 유서 깊은 탑은 높이가 20층 빌딩 높이에 해당되는 44m터나 된다.

게다가 산 위에 세워져 있어 당시 허허벌판이던 1930~40년대의 옌안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반드시 사진 속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세워진 목적과 상관없이 홍군 혁명수도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시 보아도 운치가 있는 우아한 탑이었다. 탑 사이로 지는 석양과 옌안시를 내려다보면서 장정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굽이치는 강을 건너고, 설산을 넘고, 죽음의 초지를 건넜던 장정은 지금 70여년이 지나 차를 타고 돌아보았어도 정말 ‘피와 용기로 쓴 대서사시, 패배이자 승리였고 절망이자 희망이었던 대서사시’이었다.

그 길을 다시 밟아온 험난했던 여정도 이제 끝나 간다고 생각하니 문득 <장정>이라는 시를 읊고 싶어졌다. 마오가 장정을 끝내며 썼고, 이후 장정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다.

홍군은 고단한 원정길도 겁내지 않았네(??不??征?)

깊은 강과 험난한 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네(万水千山只等?)



<15> 장정의 한인들

30여명 장정 韓人중 양림·무정만 완주… 그후 삶은 불운
양림-넉달 뒤 전사, 무정-한국전중 병사
김산도 아리랑 출간 못 보고 처형당해



서강대 정외과 교수

 

한인 혁명가로 옌안에서 활동한 김산의 아들 가오융광(왼쪽)씨를 만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가 아무도 찾지 않고 돌보지도 않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오후 늦게 나자핑(羅家坪)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장정, 나아가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는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한인들의 피와 땀도 배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상기하며 양림과 무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장정에 참가한 한인은 30여명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대부분 전사하고 살아서 장정을 완주한 사람은 양림과 무정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무정은 양림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1905년 함경북도 출신으로 14살 때 3.1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당군의 포병장교로 근무했으나 국민당군에 실망해 공산당에 가입한다.

장제스(蔣介石)의 상하이(上海)쿠데타 때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옥하여 펑더화이(彭德懷)의 포병단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홍군에 대포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펑더화이와 무정뿐이었다.

장정 후 무정은 조선의용군을 만들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일성이 지배하는 북한에서 포병총사령관을 지내는 등 북한군의 요직을 거쳤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1951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회ㆍ진사강을 건너라>에서 소개한 바 있는 양림은 1898년 평안북도 출신으로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해 윈난(雲南)육군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필사적으로 항일을 하겠다는 뜻에서 ‘필사적’의 중국어 발음(삐스더)와 비슷한 삐스디(毖士梯)를 중국이름으로 정했다. 졸업 후 중국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뒤 난창(南昌)봉기 등에 참가해 능력을 인정 받았다.

중앙지도부를 경호하는 최정예 부대인 군사위원회 간부단의 참모장으로 장정에 참여했고 진사(金沙)강 도하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장정을 끝낸 넉 달 뒤인 1936년 2월 황하를 건너는 동진작전에서 특공대를 직접 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38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옌안의 한인(1): 김산

 

장정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옌안(延安) 하면 떠오르는 한인이 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다.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인 에드거 스노의 부인인 님 웨일스가 중국 공산당을 취재하기 위해 1937년 옌안에 왔다가 도서관에서 수준 높은 영어책을 빌려가는 사람이 있어 수소문해 만난 것이 바로 한인 혁명가로 이곳에 와 있던 김산이었다.

웨일스가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쓴 김산은 본명이 장지락으로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와 베이징에서 의학공부를 하다 좌익 서적을 읽고 사회주의에 경도됐다.

1925년 중국 공산당원이 됐으나 1930년대 두 차례나 일본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지만 끝내 아무런 자백을 하지않아 풀려난다. 그러나 이렇게 석방된 것이 오히려 의심을 사 당에서 축출되는 등 시련을 겪은 그는 1936년 소수민족 해방전선을 창설하고 옌안지역에 만들어진 소비에트지구에 조선혁명가 대표로 와 있었다.

유학시절 <아리랑>을 읽고 감동을 받았지만 이후 학교공부와 먹고 사는 일로 그를 잊어버린 사이 그의 책은 한글로 번역되어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다. 그리고 그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안타까웠다.

2005년 노무현정부가 사회주의계열에 대해서도 항일투쟁 등을 인정하기로 함에 따라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뒤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베이징(北京)에 도착해 장정을 떠나오면서 그의 아들인 가오융광(高永光)씨를 만났다. 공대를 졸업하고 국가경제위원회 기술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은퇴했다는 가오씨는 1937년 1월 생으로 70살이 넘었다.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김산이 죽은 뒤 한족인 김산의 부인은 재혼을 했다. 가오씨는 새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이다.

 

- 사진을 보니 아버님은 키가 크던데 선생님은 키가 작으시네요

“그래요.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 키는 180cm가 넘었다는데. 어머니 키가 작아요.”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으실 것이고, 어머님은 어떤 분이었어요

“허베이(河北) 출신으로 학생회장을 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그러다가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강한 분이었지요.”

- 아버지가 김산이라는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조선족이라는 느낌은 받았어요. 그러다가 대학생이 된 뒤에야 아버지가 조선족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이야기해줘서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 아버지에 대한 책인 <아리랑>을 언제 처음 봤습니까?

“1970년 당시 옌벤(延邊)의 조선문제연구소장이라는 분이 홍콩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보고 구입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후예가 있는지 찾아 나섰는데 연배 분들이 살아 계셔서 어머니를 찾아 왔었어요. 그 때 그 분들이 책을 갖고 와서 봤는데 가슴이 뭉클했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어요.”

- 아버지는 복권이 언제 됐나요?

“복권을 신청할 준비를 해 놓았다가 1980년대 초에 해서 곧 복권됐어요. 1997년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러 옌안에 가서 찾아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2005년 아버지의 훈장을 받으러 한국에 갔었는데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인정해줘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뿌리를 생각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여행을 준비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김산이 웨일즈를 만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마오의 베리야(스탈린의 비밀경찰 대장으로 무자비한 숙청으로 악명이 높았다)라고 할 캉성(康生)에 의해 바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숙청당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책도 나오기 전에 죽은 것은 몰랐다. 김산은 웨일즈와 인터뷰당시 자신이 만주에 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신분보호를 위해 2년간 출간하지 말 것을 부탁해 <아리랑>은 1941년 처음 출간됐다.

다시 말해, 자신의 책이 출간됐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그것도 일본군의 총알에 의해서라 아니라 혁명동지들의 총알에 의해서 말이다. 그에 비하면 국민당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양림은 너무도 행복한 편이다.

그의 피는 어디에 흘려져 있는 것인가? 우리가 어제 다녀온 양자링(楊家嶺)의 뒷산인가? 아니면 바오타(寶塔)산의 구덩이인가? 마오쩌둥(毛澤東)은 그의 처형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먼 이국 땅에서 개죽음을 당하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조국의 운명처럼 나의 삶은 패배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에서는 승리하고 있다”던 그의 말이 생각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산, 잘 가시오.

 

■ 옌안의 한인(2): 조선혁명 군정학교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나자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개발 붐으로 이미 사방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또 아파트를 짓고 있어 옛 모습을 서술한 책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작은 다리를 찾아냈는데 앞에 ‘나자핑’이라는 돌 팻말이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가자 양쪽에 지저분한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왼쪽으로 한 노점상이 팔려고 쌓아놓은 물건들 사이로 비석이 하나 보였다.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였다. 독립운동의 중요한 유적이건만 아무도 찾지 않고 돌보지도 않아 노점상의 창고로 변한 모습에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노점상들이 주섬주섬 물건들을 치웠다. 기념비에 쓰인 내용은 조선혁명군이 1944년 3개월간의 행군 끝에 이곳에 도착해 학교를 지어 12월 완공했고, 45년 2월 주더(朱德)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식을 했으며, 김두봉이 교장을 지냈고 1945년 8월 하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북조선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어렵게 찾아간 학교 터와 숙소역시 폐허가 되어 있어 가슴을 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