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위 따올러(결국 도착했구나)”. 1935년 4월30일, 진사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 꼭대기에서 잘 생긴 얼굴에 눈매가 매서운 건장한 체격의 30대 중반 지휘관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밤 사이에 완전무장을 한 부하들을 이끌고 무려 80km를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지도부를 경호하는 최정예부대인 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으로 활약하던 양림이라는 한인이었다.
마오는 정예군으로 하여금 윈난의 성도인 쿤밍(昆明)을 공격하는 것처럼 작전을 전개하여 국민당군을 쿤밍 방어에 주력토록 하면서 한편으로 주력군은 진사강을 건너 쓰촨으로 북상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진사강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양림은 80km를 쉬지않고 달려온 피로도 잊은 채 망원경으로 산 아래의 자오핑두를 살펴보았다.
산 아래쪽 나루터는 텅 비어 있는 반면 여러 척의 배들이 강 건너편인 쓰촨 쪽에 정박해 있었다. 홍군의 도강을 우려한 국민당군이 이미 배를 강 건너로 도피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나루터 아래쪽 진흙 밭에 묻혀있는 나무조각을 발견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작고 부서졌지만 배가 틀림없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밑에 구멍이 나 탈 수가 없는 폐선이었다. 구멍 난 곳을 옷 등으로 메워 물이 새어 들지 않게 하고 마을을 뒤져 사공을 찾아낸 뒤 “우리는 홍군이다.
악덕지주를 처단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10년 내에 다시 돌아와 농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해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양림은 이렇게 설득한 사공과 임시로 수리한 폐선을 이용해 건너편에 정박 중인 나룻배를 탈취하기 위한 야간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사공은 양림과 함께 권총 등으로 무장한 특공대 9명을 강 건너편에 내려줬고 양림은 적을 기습공격해 제압한 뒤 나룻배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7척의 나룻배와 36명의 사공들을 동원한 도강작전을 수행해 9일 만에 모두 진사강을 건넜다. 사공들에게는 은화가 주어졌다. 이후 국민당군이 도착했을 때는 나룻배들은 이미 강을 떠내려 가고 있었다.
■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
자오핑두로 가려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산길을 지나가야 한다. 아무도 그곳을 가려고 하지 않아 하루 종일 수소문하고 다녀서야 간신히 차를 구할 수 있었다. 가보니 그 이유를 알만했다.
험준한 산길도 그렇지만 두께가 20cm는 됨직한 먼지 위를 달려가야 했다. 지구의 먼지란 먼지는 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이 길을 예술이라고 할만한 솜씨로 세 시간 정도 운전을 하자 반대편에 이르렀다.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5분쯤 내려가자 트럭이 30~40대쯤 줄을 서 있었다. 아래서 어제 밤에 트럭 한대가 고장 나는 바람에 모든 차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자 “잘 모르지만 오늘 중으로는 힘들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어떻게 찾아온 자오핑두인데 여기서 다시 좌절한단 말인가.
옆의 농가에 오토바이가 보였다. 농가의 젊은 주인에게 오토바이로 자오핑두까지 데려다 달라고 흥정을 했다. 가는 동안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는 정말 살인적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다 내려 걷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빠르게 흐르는 진사강과 그 위에 세워진 초록색 다리가 나타났다. 나 역시 양림과 같이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쫑위 따올러.”
다리를 건너자 정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언덕 위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진사강 도강을 기념하는 동상으로, 그 때 그 사공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들의 손에 높이 쳐들린 건 홍군들을 태워준 배의 노였다. 매번 느낀 것이지만 장정기념동상 등은 모두 당시의 상황을 조형적으로 잘 상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모습이 나를 놀라게 했다. 동상 바로 옆에 중국에서 퇴폐업소의 상징인 가라오케집 간판이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진입도로조차 없는 이 작은 마을에까지 가라오케집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장정 기념동상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위치에 가라오케집 허가를 내준 것인지.
물론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효과는 엄청날 뿐더러 단지 가라오케집만으로 개혁개방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가라오케가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가 가져다 준 대표적 상징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장정 기념동상과 그 옆의 가라오케 간판의 대비는 개혁개방 시대의 장정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씁쓸함을 금방 보상해주는 아름다운 장면이 눈에 띄었다. 때묻지 않은 맑은 표정의 어린 여자아이 3명이 구리로 만든 기념동상의 설명판 위에 아예 소꿉살림을 차려 놓고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기념동상과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 오지에 누가 찾아오겠는가.
아무도 찾지 않는 동상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모했고 이를 나무라거나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원래 홍군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공들이 꿈꾸었을 세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홍군도, 사공들도 자신들의 기념물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버린 것에 오히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 이대로 라면 죽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은 취재도 마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익숙해져서인지 마음의 여유가 생겨 왼쪽의 풍광(오른 쪽은 산비탈이었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약에라도 취한 듯 온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자동차와 달리 360도로 탁 티인 시야, 얼굴을 스치는 바람,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오토바이를 타는지 이해가 됐다. 한국에 돌아가면 오토바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옆으로 펼쳐진 장군바위와 기암절벽을 보고 있자 그 아름다움에, 그리고 이를 바라보며 장정을 재촉했을 홍군들의 열정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문득 체 게바라가 대학시절 친구와 한 대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횡단했던 ‘모토사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그러면서 갑자기 내 자신이 그 영화의 장면처럼 게바라가 되어 남미대륙을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이번엔 73년 전의 양림이 되어 장군바위를 바라보며 행군을 하는 착각에 빠졌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 왔다가 이렇게 장정에까지 참여해 죽음의 행진을 해야 하는 한 지식인의 고독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번엔 마오가, 그 다음엔 야전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되어 달리고 있었다.
순간은 게바라, 순간은 양림, 순간은 마오, 또 다음 순간은 펑더화이, 스스로의 변신이 빠르게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것은 엑스타시 그 자체였다. 먹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마약도 이보다 더 황홀하겠는가.
아, 이는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아니 내 생애 느껴 보았던 어떠한 절정보다도 강렬한 절정의 순간이었다. 아직 할 일이 많고 아내와 딸아이도 걱정이지만 만약 이대로 죽어야 한다면 이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고 정말 주저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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