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3)

이강기 2015. 9. 3. 17:32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3)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7> 진사강을 건너라

韓人대장 양림이 넘은 죽음의 산길… 나도 몰래 "중위 다올러"
쫓기는 홍군의 활로는 자오핑두 나루터, 7척의 나룻배로 9일만에 필사의 도강 완료
기념 동상 아래 철 모르는 소녀들 소꿉장난… 오토바이 귀로, 양림이 된 듯 게바라가 된 듯…


한국일보


서강대 정외과 교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자우핑두로 가는 길의 필자.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이 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면서 필자는 고난의 행진을 하던 홍군 지휘부와 남미대륙을 질주하던 체 게바라를 떠올리며 벅찬 감회에 젖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진사강. 홍군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가까스로 따돌리고 불과 일곱 척의 나룻배로 이 강을 건넜다.

 

진사강(金沙江)은 쓰촨(四川)성과 윈난(雲南)성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윈난에서 쓰촨으로 북상을 하기 위해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오랜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이 강을 건너는 유명한 나루터가 자오핑두(絞平渡)이다.

“쫑위 따올러(결국 도착했구나)”. 1935년 4월30일, 진사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 꼭대기에서 잘 생긴 얼굴에 눈매가 매서운 건장한 체격의 30대 중반 지휘관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밤 사이에 완전무장을 한 부하들을 이끌고 무려 80km를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지도부를 경호하는 최정예부대인 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으로 활약하던 양림이라는 한인이었다.

마오는 정예군으로 하여금 윈난의 성도인 쿤밍(昆明)을 공격하는 것처럼 작전을 전개하여 국민당군을 쿤밍 방어에 주력토록 하면서 한편으로 주력군은 진사강을 건너 쓰촨으로 북상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진사강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양림은 80km를 쉬지않고 달려온 피로도 잊은 채 망원경으로 산 아래의 자오핑두를 살펴보았다.

산 아래쪽 나루터는 텅 비어 있는 반면 여러 척의 배들이 강 건너편인 쓰촨 쪽에 정박해 있었다. 홍군의 도강을 우려한 국민당군이 이미 배를 강 건너로 도피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나루터 아래쪽 진흙 밭에 묻혀있는 나무조각을 발견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작고 부서졌지만 배가 틀림없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밑에 구멍이 나 탈 수가 없는 폐선이었다. 구멍 난 곳을 옷 등으로 메워 물이 새어 들지 않게 하고 마을을 뒤져 사공을 찾아낸 뒤 “우리는 홍군이다.

악덕지주를 처단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10년 내에 다시 돌아와 농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해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양림은 이렇게 설득한 사공과 임시로 수리한 폐선을 이용해 건너편에 정박 중인 나룻배를 탈취하기 위한 야간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사공은 양림과 함께 권총 등으로 무장한 특공대 9명을 강 건너편에 내려줬고 양림은 적을 기습공격해 제압한 뒤 나룻배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7척의 나룻배와 36명의 사공들을 동원한 도강작전을 수행해 9일 만에 모두 진사강을 건넜다. 사공들에게는 은화가 주어졌다. 이후 국민당군이 도착했을 때는 나룻배들은 이미 강을 떠내려 가고 있었다.

 

■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

 

자오핑두로 가려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산길을 지나가야 한다. 아무도 그곳을 가려고 하지 않아 하루 종일 수소문하고 다녀서야 간신히 차를 구할 수 있었다. 가보니 그 이유를 알만했다.

험준한 산길도 그렇지만 두께가 20cm는 됨직한 먼지 위를 달려가야 했다. 지구의 먼지란 먼지는 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이 길을 예술이라고 할만한 솜씨로 세 시간 정도 운전을 하자 반대편에 이르렀다.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5분쯤 내려가자 트럭이 30~40대쯤 줄을 서 있었다. 아래서 어제 밤에 트럭 한대가 고장 나는 바람에 모든 차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자 “잘 모르지만 오늘 중으로는 힘들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어떻게 찾아온 자오핑두인데 여기서 다시 좌절한단 말인가.

옆의 농가에 오토바이가 보였다. 농가의 젊은 주인에게 오토바이로 자오핑두까지 데려다 달라고 흥정을 했다. 가는 동안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는 정말 살인적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다 내려 걷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빠르게 흐르는 진사강과 그 위에 세워진 초록색 다리가 나타났다. 나 역시 양림과 같이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쫑위 따올러.”

다리를 건너자 정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언덕 위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진사강 도강을 기념하는 동상으로, 그 때 그 사공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들의 손에 높이 쳐들린 건 홍군들을 태워준 배의 노였다. 매번 느낀 것이지만 장정기념동상 등은 모두 당시의 상황을 조형적으로 잘 상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모습이 나를 놀라게 했다. 동상 바로 옆에 중국에서 퇴폐업소의 상징인 가라오케집 간판이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진입도로조차 없는 이 작은 마을에까지 가라오케집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장정 기념동상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위치에 가라오케집 허가를 내준 것인지.

물론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효과는 엄청날 뿐더러 단지 가라오케집만으로 개혁개방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가라오케가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가 가져다 준 대표적 상징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장정 기념동상과 그 옆의 가라오케 간판의 대비는 개혁개방 시대의 장정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씁쓸함을 금방 보상해주는 아름다운 장면이 눈에 띄었다. 때묻지 않은 맑은 표정의 어린 여자아이 3명이 구리로 만든 기념동상의 설명판 위에 아예 소꿉살림을 차려 놓고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기념동상과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 오지에 누가 찾아오겠는가.

아무도 찾지 않는 동상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모했고 이를 나무라거나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원래 홍군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공들이 꿈꾸었을 세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홍군도, 사공들도 자신들의 기념물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버린 것에 오히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 이대로 라면 죽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은 취재도 마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익숙해져서인지 마음의 여유가 생겨 왼쪽의 풍광(오른 쪽은 산비탈이었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약에라도 취한 듯 온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자동차와 달리 360도로 탁 티인 시야, 얼굴을 스치는 바람,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오토바이를 타는지 이해가 됐다. 한국에 돌아가면 오토바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옆으로 펼쳐진 장군바위와 기암절벽을 보고 있자 그 아름다움에, 그리고 이를 바라보며 장정을 재촉했을 홍군들의 열정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문득 체 게바라가 대학시절 친구와 한 대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횡단했던 ‘모토사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그러면서 갑자기 내 자신이 그 영화의 장면처럼 게바라가 되어 남미대륙을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이번엔 73년 전의 양림이 되어 장군바위를 바라보며 행군을 하는 착각에 빠졌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 왔다가 이렇게 장정에까지 참여해 죽음의 행진을 해야 하는 한 지식인의 고독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번엔 마오가, 그 다음엔 야전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되어 달리고 있었다.

순간은 게바라, 순간은 양림, 순간은 마오, 또 다음 순간은 펑더화이, 스스로의 변신이 빠르게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것은 엑스타시 그 자체였다. 먹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마약도 이보다 더 황홀하겠는가.

아, 이는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아니 내 생애 느껴 보았던 어떠한 절정보다도 강렬한 절정의 순간이었다. 아직 할 일이 많고 아내와 딸아이도 걱정이지만 만약 이대로 죽어야 한다면 이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고 정말 주저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음이 나왔다.

후원:삼성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8> 리하이의 피의 맹세

민중해방의 홍군, 리族의 땅 통과 위해 '노예 현실' 눈 감고…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리하이의 장정 기념관 마당에 세워져 있는 석상. 홍군 선봉대의 지휘관 류보청(가운데)과 리족 족장이 피의 술잔을 나누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았다.

 

리하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리족 여인들. 홍군은 리족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리하이엔 나폴레옹식 모자 쓴 리族 여성들
아름다운 호수와 숲이 가족 관광객 불러
소수 민족 도움으로 대장정 성공한 중국
티베트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주었으면

1935년 5월. 진사(金紗)강을 건넌 홍군은 쓰촨(四川)성의 수도인 청두(成都)방향으로 북상했다. 좁고 꼬불꼬불한 전형적인 쓰촨의 오솔길이어서 이백(李白)이 일찍이 “쓰촨의 길을 걷는 것은 푸른 하늘을 기어 올라가기 보다 어렵다”고 말한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행군의 어려움이상으로 홍군을 괴롭힌 것은 리(?)족 지역이 가까워지면서 생겨나는 불안감이었다. 특히 소수민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공격을 받더라도 반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큰 부담이었다.

쓰촨출신으로 선두를 맡은 류보청(劉佰承) 앞에 옷을 홀딱 벗은 일개 중대의 부하들이 나타났다. 리족의 습격으로 옷과 소품을 다 털렸다는 것이었다. 얼마 가지않아 반쯤 벌거벗은 일련의 리족이 몽둥이와 낫 등을 들고 길을 막았다.

통행료를 내라는 것이었다. 돈을 주면서 통역에게 “홍군은 국민당 한족 군벌과 싸우는 농민들의 군대”라고 설득을 했다. 그러자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검은 천을 두른 근엄한 얼굴의 두목 같은 사람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류보청이 그에게 홍군을 설명하자 그는 도와주겠다며 의형제 맺기를 제안했다. 류보청이 흔쾌히 응하자 그는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 붉은 수탉을 한 마리 잡아 그 피를 두 사발에 나눈 뒤 함께 마시자고 했다. 그곳이 리하이(?海)라는 호숫가였기에 이를 ‘리하이의 피의 맹세’라고 부른다. 류보청은 형제애의 표시로 자신이 차고 있던 권총을 풀어 리족 부족장에게 선물했고 홍군은 그의 호위 속에 무사히 리족 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 한족과 소수민족의 평화로운 공존

리하이로 향했다. 가까워지자 나폴레옹식의 모자를 쓴 여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리족의 복장이었다. 기념관에 도착하자 여러 차들이 와 있고 사람들도 많아 놀랐다. 대부분의 장정 기념관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어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관람이 아니라 기념관 자체를 위한 기념관들이 많았다. 혹 있는 관람객도 대부분 직장 등에서 단체로 관람 온 ‘행사용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리하이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선 주말이라 가족단위 여행이 가능한 날이었고 리하이가 대도시인 청두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 찾아오기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기념관 문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자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앞에는 설산이 보이고 100m미터도 안 되는 곳에는 리하이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숲이 자리잡고 있었다. 장정 기념관 관람이외에도 자연환경이 가족들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곳이다.

기념관 마당에는 검은 두건을 쓴 리족 족장이 류보청과 피의 술잔을 나누는 모습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그 둘이 앉아 술잔을 나눈 돌을 현장 보존하고 있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장정 등 글들을 공식적인 중국어인 간자체 외에 리족의 전통언어로도 써 놓은 것이었다.

그만큼 리족을 존중한다는 증거였다. 기념관에는 류보청이 리족 부족장에서 선물한 권총, 홍군의 깃발을 들고 있는 리족 부족장의 사진 등 소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또 이를 관람하며 메모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 집단과 개인 자율성의 딜레마

기념관을 나와 오른쪽의 리하이 호수로 향했다. 여러 가족들이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산책을 하거나 자리를 깔아 놓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한쪽 물가에는 까맣게 탄 리족 어린이들이 미끼도 없는 원시적인 낚시대로 물에 들어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 속에 난 그 옆의 한 나무에는 아마도 청두에서 놀러 온 것으로 보이는 하얀 얼굴의 같은 또래 한족 어린이들이 나무에 매달려 낚시장면을 구경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낚시하는 리족 어린이들의 얼굴이 73년 전 리족 족장의 얼굴로, 그리고 나무에 매달린 한족 어린이들의 얼굴이 한족 홍군지휘관 류보청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어린이집단이 바로 옆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은 리족과 한족 홍군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했던 리하이 협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차를 타고 리하이를 떠나자 여러 생각들이 엉키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리하이의 맹세는 홍군의 소수민족 정책과 소수민족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당시 리족은 노예사회였으며 리족 부족장은 노예주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홍군지휘관이 무사통과를 위해 노예주와 의형제를 맺으며 노예사회라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눈을 감은 것이다. 과연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소수민족의 자율성, 소수민족의 문화의 존중이라는 이름 하에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그른 것이라는 논리 하에 이들의 전통에 개입해 노예제를 혁파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집단에 대해 개인의 자율성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집단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개입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집단의 자율성을 지켜주기 위해 개인의 자율성이 짓밟히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개인의 자율성과 집단의 자율성간의 딜레마이다.

 

■ 상반된 리족과 티베트식 해결방식

생각이 이같이 발전하자 장정도중 터져 나온 티베트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이에 대한 나의 지식은 ▲독립국가 티베트를 중국의 홍군이 1950년대에 침공해 점령했으므로 독립을 허용하거나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티베트는 이미 청나라 때부터 중국에 합병됐고 다만 20세기 초 제국주의에 의해 중국의 힘이 약해지자 영국이 침공해 점령했던 것을 홍군이 다시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두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이다.

특히 후자에 대해선 홍군 점령전의 티베트는 사원이 다수 농민과 민중을 지배하는 봉건사회였다는 점에서 홍군은 봉건적 압제로부터 티베트민중을 해방시킨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더 알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에 대한 역사성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하기에는 지식이 모자란다. 다만 티베트의 더 많은 자율성에 대한 요구는 중국정부가 당연히 귀 기울여야 하는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문제와는 별개로 이 같은 요구를 중국정부가 물리력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잘못됐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국이 티베트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물리적 대응 방식이 아니더라도 시간은 중국편이다.

많은 티베트의 젊은이들은 이미 티베트의 언어와 문화를 잊은 지 오래이며 이는 앞으로도 가속화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최대무기는 많은 한족들의 티베트이주와 경제력 장악이다. 이 점에서 물리적 대응은 중국을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주목할 것은 홍군이 리족과 티베트에 취한 정책간의 대비이다. 홍군은 리족에 대해서 리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자율성을 지켜준다는 이름아래 노예제라는 개인 자율성의 파괴를 외면했다.

그러나 티베트의 경우 봉건제로부터 개인의 자율성을 해방시킨다는 이름아래 티베트라는 ‘소수민족’내지 집단의 자율성을 침해했다. 즉 정반대의 정책을 취한 것이다. 리족식 해법도 문제가 있지만 티베트식 해법역시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아무리 봉건적 질서가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티베트의 다수민중이 바라지 않는데 외부세력이 “그것은 틀린 것이니 내가 대신 해결해 줄 게” 하고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 서구제국주의가 제3세계의 식민화를 “낡은 비인간적 질서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문명화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한 것이 잘못됐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 이치다.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9> 루딩교를 장악하라

반란 진압용 강희제의 다리, 20세기 농민군의 다리가 되어
국민당군이 널판지 없앤 다리… 홍군, 쇠사슬 매달려 도하 성공
홍군복 입고 루딩橋 건너자… 공안 "티베트 사태" 추방 아찔



서강대 정외과 교수

70여년 전 홍군이 앙상하게 남은 쇠사슬에 매달려 목숨을 내걸고 도강을 감행한 루딩교를 이제는 관광객과 주민들이 한가하게 건너가고 있다. 그 때와 달리 나무 상판이 깔려 있지만 그래도 사이사이 발 밑으로 보이는 다두강의 급류는 너무나 무서웠다.

루딩교를 건너자마자 현지 공안으로부터 검문을 당하는 일행. 인근 기념품 가게에서 빌린 홍군 모자와 복장을 착용한 키 큰 이가 필자다.

 

청나라 강희대제 39년인 1700년. 티베트와 쓰촨(四川)성의 성도인 청두(成都)의 중간에 있는 캉딩(康定)지역에서 티베트계인 장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너무 먼데다가 제대로 된 도로도 없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너무나 애를 먹었다.

특히 청두평원과 티베트지역을 가로지르는 다두강(大渡河)은 큰 장애였다. 반란을 진압한 뒤 강희대제는 진압군을 용이하게 티베트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이 강에 다리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장정의 클라이막스 중 하나를 이루는 루딩(瀘定)교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청나라는 이 다리를 짓기 위해 독일 등 유럽의 선진국 기술자들을 거액을 주고 초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리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루딩교는 길이 101m에 너비가 3m를 넘는 웅장한 현수교로 13줄의 굵은 쇠사슬이 지탱하고 있다. 그 중 9줄은 다리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데 줄과 줄 사이에 나무판자를 깔아 간격을 메웠다.

문제는 13개의 굵은 쇠사슬이 21톤이나 나가는 1만2,164개의 체인으로 만들어져 있고 각각의 기둥이 20톤에 달해 공사에 막대한 쇠가 필요하다는 것. 청나라는 필요한 쇠를 구하지 못해 고생을 하다가 97일 만에 한 산속에서 철광을 찾아냈다고 한다.

1705년 다리가 완공되자 강희대제는 이 다리가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라는 뜻에서 ‘루딩’ 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실제 다리가 이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차와 소금, 비단 등이 티베트의 라싸로 들어가고 티베트의 모피와 약재가 청두로 들어오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은 확실하다.

홍군은 다두강를 건너 북상을 하기 위해 루딩교를 장악하기로 했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루딩교가 이번에는 홍군이라는 새로운 반란군의 구세주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역사는 때로는 그 주역들이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한다.

 

■ 쇠사슬에 매달려 불길을 뚫고

 

루딩교 탈취명령을 받은 두 군대는 다두강를 가운데에 두고 행군을 했다. 길이 좁은데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로 인해 길이 미끄러워 한 발만 헛디뎌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다시 행군을 떠나려는 순간 말을 탄 전령이 나타나 명령문을 전했다.

“29일까지 루딩교를 탈취하라.” 29일이면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갈 길은 240리(약 100km)나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진군한 최대속력은 하루에 160리 였는데 이보다 더 빨라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밥을 해먹을 수 없어 생쌀을 씹고 물을 마시며 행군을 계속했다.

해가 진 뒤 한 마을에서 대나무 울타리를 통째로 사 그것으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 행군을 했다. 밤을 샌 야간행군으로 1935년 5월29일 아침 6시 특공대는 루딩교에 도착했다.

다리의 서쪽 편을 장악하고 건너편을 보니 모래주머니로 만든 참호에 국민당군의 총구가 보였다. 그러나 기막힌 것은 다리에 달랑 쇠사슬만 남아있고 그 위에 깔려있던 널빤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국민당군이 걷어갔다는 것이었다. 저 다리를 어찌 건널 것인가? 나팔소리와 함께 특공대가 쇠사슬에 매달려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국민당군의 총탄이 쏟아졌다. 한 병사가 강물로 떨어졌다.

총알보다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소리를 내며 발 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더 무서웠다. 건너편이 가까워지자 앞에서 갑자기 불이 솟구쳤다. 국민당군이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나 한 대원이 앞장서 불길을 뚫고 뛰어 들었고 나머지 군대로 그를 따랐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때 돌연 적군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진군해 온 홍군이 나타나 도착, 총격을 가하자 포위당한 상황을 깨닫고 도주한 것이다. 홍군은 널빤지를 모아 다시 다리에 깔았다. 루딩교를 탈취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루딩교에서 실제 전투가 있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1936년 에드거 스노와 가진 인터뷰에서 처음 소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루딩 이야기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당시 루딩교에는 제대로 된 국민당군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문짝을 빌려갔던 것을 기억했고, 어떤 이는 홍군이 다리에 덮을 나무를 구하고 다녀 만일을 위해 준비해준 관을 내주었다는 증언이 있음은 밝히고 있다.

이는 나무를 놓지 않고는 걸어서 다리를 건너갈 수 없었던 다급한 상황을 의미한다. 또 루딩교의 전투에 과장이 있다 해도 장제스(張介石)가 자연이 홍군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다리의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 공안에게 추방당하다

 

루딩교에 도착했다. 루딩은 아담하면서도 그 동안 보아온 시골의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였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 위치를 확인한 뒤 근처의 한 카페에 내렸다.

어제 한국에서 비행기로 청두로 날아온 한국일보 장재구 회장과 차마고도의 비디오작가 박종우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오지, 그것도 역사적인 루딩에서의 만남은 너무도 반가웠다.

장정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을 들라면 당연 루딩교이다. 앞으로 다리 진입소로 쓰이는 중국전통 건축물을 배경으로 허공에 매달린 쇠사슬 다리가 시각적으로 그 어느 장정의 유적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장정을 준비하면서 여러 책, 비디오 등에서도 수백 번 본 적이 있는 다리이다. 그렇게 너무도 익숙한 루딩교가 나타났다. 루딩교가 장정의 상징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장정을 재연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입장료를 받는 진입소로 들어가자 기념품가게, 홍군 복장을 빌려 주는 가게 등으로 복잡했다. 박 감독이 특집에 쓸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홍군복을 한 벌 빌려 내게 입어보라고 했다. 바지는 그렇고 해서 상의를 입고 홍군모자를 썼다. 영락없는 ‘홍군 손호철’이다.

루딩교로 나가자 우선 다두강의 물소리가 나를 긴장시켰다. 여러 번 책으로 읽은 것이지만 역시 다두강의 급류는 무서웠다. 쇠사슬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다리답게 무척이나 흔들렸다. 그리고 바닥도 쇠사슬에 나무 조각들을 얹어 놓은 것인 만큼 나무 조각 사이로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그 위를 걸어 건너면서 자꾸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나무 조각도 없는 다리를 쇠사슬에 매달려 건넜다는 홍군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그런데 진입소 밖으로 나오자 공안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외국인들로 보이는 일행이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다니자 누군가 신고를 한 것 같았다. 여권을 보여주자 이곳에 온 여행목적을 묻길래 “장정 취재 중”이라고 답하며 준비한 서류까지 보여줬다.

그러자 공안은 “이곳은 최근의 티베트사태로 인해 위험지역이기 때문에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며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벗어나 청두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간즈(甘孜)에서 시위가 발생한 사실은 알고 있었고 루딩이 행정구역상으로 간즈 장족 자치구에 속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시위발생지역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 별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공안은 아무래도 우리가 청두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권을 복사한 뒤 돌려주고도 자신들이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며 4륜 구동차로 앞서가며 따라오라고 했다.

결국 이들은 루딩 행정구 끝까지 가서야 우리를 보내주었다. 그러고도 미덥지 않았는지 그곳 차량 검문소를 지키는 경찰에게 우리 차의 번호를 적어두도록 지시한 뒤 한참을 미행하다가 돌아갔다. 루딩에서의 짧은 행복은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