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군의 저지선을 연이어 돌파한 홍군은 1934년 11월말 광시(廣西)장족자치주의 구이린(桂林)에서 가까운 샹강에 도착했다.
이곳은 국민당군의 마지막 저지선인 4차 저지선이 쳐 있었다. 11월30일, 항상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온 린뱌오(林彪)부대가 국민당군을 견제하고 있는 사이 삼인위원회와 마오(毛), 그리고 당지도부가 강을 건넜다. 그리고 12월1일 3만여 명의 홍군이 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4만 이상의 군대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야포 등 중무기들, 발전기, 인쇄기, 의료용 엑스레이 등 ‘움직이는 정부’라는 명칭에 걸맞게 구색을 맞춰 갖고 가던 장비들을 강 속에 던져버려야 했다. 12월3일, 홍군의 피로 붉게 물든 샹강 위에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같은 혁명서들이 둥둥 떠다녔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정확치 않다. 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일주일 가량 계속된 전투에서 국민당군의 공격과 비행기 폭격으로 1만5,000명 이상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다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반면 장정에 비판적인 외부인들은 샹강 전투는 홍군이 지어낸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전투는 없었고 샹강을 건너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농민들이 도주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장제스(張介石)가 마오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지휘부와 주력군이 강을 건너는 것은 내버려둔 뒤 공격을 시작해 나머지 군대를 해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 샹강에서 도주한 농민들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샹강 전투가 없었고 5만 이상의 군을 잃은 것이 탈영과 도주 때문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샹강 전투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삼인위원회, 특히 보구(博古)와 브라운이 준이(遵義)회의에서 권력을 잃고 마오가 권력을 잡게 되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샹강전투의 패배가 없었다면 왜 보구와 브라운이 순순히 권력을 내놓았겠는가? 일설에는 보구가 샹강전투 후 충격을 받아 샹강을 바라보며 권총자살하려는 것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말렸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샹강의 패배가 있었기에 마오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끈 마오식 전략과 전술을 중국공산당이 채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샹강전투의 패배는 중국혁명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 역사가 중국공산당에게 준 시련내지 ‘불행으로 포장된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역사의 간지라고나 할까?
■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미소
샹강으로 향했다. 길을 돌아 돌아서 오후 네 시쯤 샹강이 있는 싱안(興安)에 도착했다. 우선 찾기로 한 곳은 도강작업을 총지휘한 홍군 지휘본부가 있던 삼관당이라는 이름의 낡은 서당. 사진으로 봤던 낡은 건물은 새롭게 단장했고 이름도 홍군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까운 집에 물어보자 현사무실에서 관리를 하니 거기 가서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하필 토요일이라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여기서 이틀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홍군당과 그 뒤로 샹강이 잘 보이는 전망대를 찾아 나섰다. 홍군당 옆의 낡은 집으로 들어가 옥상에 올라가자 새로 단장한 홍군당과 샹강이 보였다.
샹강은 그 동안 변한 것인지 폭이 그리 넓지가 않았다. 비를 맞으며 샹강을 내려다보자 이 비가 강에서 죽어간 무수한 홍군들의 피눈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저녁식사에서 샹강의 생선요리는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샹강열사기념공원으로 향했다. 비는 거세졌다. 많은 계단 위에 높은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단 앞에는 거대한 조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 쪽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조각으로 이곳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큼지막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각도 그랬거니와 정말 인상적인 것은 그 옆에 있는 약간 작은 보조 조각이었다. 전쟁에 대립하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조각은 한 어린이와 여인을 조각한 것이었다.
눈을 감은 그 여인의 엷은 미소(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거의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와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이를 보는 순간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저 같은 평화의 웃음이 가득 찬 세상은 불가능한 것인가. 비가 내리고 밤이 오고 있었지만 그 미소 대문에 밤새도록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 라오산의 좌절과 리강의 장이모
샹강을 건넌 홍군은 장정 중 부딪친 여러 산 중 첫 시련의 산을 만났다. 그 지방에서는 늙은 라오산제(老山界)라고 부르는 묘얼산(苗?山)이었다. 샹강 서북쪽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800m로 높거니와 아주 가팔라서 홍군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샹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홍군들은 한 명밖에 걸을 수 없는 좁은 절벽 길에서 밥도 굶은 채 서서 잠을 자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날 해가 떴지만 많은 말과 병사들이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90도 각도의 절벽에서는 환자들까지도 들것에서 내려 바위를 기어올라가야 했다.
묘얼산으로 향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자 기가 막힌 대나무 밭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 대나무 경치는 쓰촨(四川)의 촉해죽림(蜀海竹林)이 유명하다는데 그곳까지 따로 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나자 다리가 나타났고 묘얼산공원이라고 써놓은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웬걸, 문이 닫혀 있고 대신 팻말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공사로 공원을 폐쇄한다는 공고였다. 무슨 공사들이 그리 많은지, 가는 곳마다 공사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너무도 많았다. 맥이 빠졌다.
‘중국 최고의 풍경’. 구이린의 리강(?江)을 부르는 명칭이다. 구이린에서 5시간 유람선을 타고 리강을 감상하면 도착하는 곳이 양슈오(陽朔). 유명한 장이모(張藝謀) 감독이 만든 ‘인상’이라는 수상 뮤지컬로 최근 각광을 받는 아담한 도시이다.
그런데 양슈오는 ‘중국에서 서양사위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는, 듣기에 따라 명예스러울 수도 있고, 별로 명예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 난 관광지인 만큼 서양의 젊은이들이 많이 여행을 와서는 이 곳 아가씨들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해 현지에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아 서양사위가 가장 많은 마을이 됐다고 한다. 그만큼 리강의 세계적인 명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인상’은 12개의 기암 산봉오리와 길이 2km, 넓이 500m의 리강을 무대로 이용하고 마을 사람들을 포함해 배우 1,000명이 등장하는 대형 뮤지컬이다. 대형 야외세트와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뮤지컬이라는 특이성과 스케일도 대단했지만, 뮤지컬은 환상 그 자체였다.
뮤지컬은 빨강, 파랑, 하양, 노랑 등 색깔별로 장이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색깔과 소수민족의 복장과 문화를 결합시켜 환상적인 예술을 만들어냈다. 특히 빨강이 주제인 첫 장이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어둠이 내린 검은 강 속에서 수십 명의 소수민족들이 여러 줄을 이루어 좌우로 늘어서서 100m가 넘을 것 같은 붉은 천을 펼쳤다 내렸다 하자 눈앞에는 빨간색의 거대한 파도가 생겨났다. 평생 본적이 없는 충격적인 붉은 색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자니 그 빨간 색의 파도가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남아온 중국의 농민들을 상징하는 붉은 황토의 물결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천 년의 억압을 깨트리기 위해 일어서는 홍군들의 봉기 물결 같은 착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