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2)

이강기 2015. 9. 3. 17:33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2)    
 
水葬 당한 4만 紅軍·권력 쥔 毛… '역사의 아리러니'가 흘러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4> 샹강의 패배
간신히 살아남은 홍군도 묘얼산이 삼켜 패배 계기 中공산당 毛 전략·전술 채택
中서 파란 눈 사위가 가장 많다는 리강 마을 사람들의 공연에 홍군 물결을 봐


한국일보


서강대 정외과 교수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3> 장정의 출발
<4> 샹강의 패배
<5> 마오의 부활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샹강전투에서 패배한 뒤 묘얼산을 넘어가는 홍군의 장정로를 따라가다 들른 양슈오에서 보게 된 장이모 감독의 수상 뮤지컬 ‘인상’. 리강의 강물 위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붉은 천의 파도가 마치 그 옛날 홍군의 봉기물결 같아 보였다.

 

“이후 샹강(湘江)의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장정에 참여했던 홍군장군이 이후 회고록에서 이처럼 썼다. 샹강에서 죽은 수많은 동료들의 시체들을 샹강의 물고기들이 먹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당군의 저지선을 연이어 돌파한 홍군은 1934년 11월말 광시(廣西)장족자치주의 구이린(桂林)에서 가까운 샹강에 도착했다.

이곳은 국민당군의 마지막 저지선인 4차 저지선이 쳐 있었다. 11월30일, 항상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온 린뱌오(林彪)부대가 국민당군을 견제하고 있는 사이 삼인위원회와 마오(毛), 그리고 당지도부가 강을 건넜다. 그리고 12월1일 3만여 명의 홍군이 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4만 이상의 군대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야포 등 중무기들, 발전기, 인쇄기, 의료용 엑스레이 등 ‘움직이는 정부’라는 명칭에 걸맞게 구색을 맞춰 갖고 가던 장비들을 강 속에 던져버려야 했다. 12월3일, 홍군의 피로 붉게 물든 샹강 위에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같은 혁명서들이 둥둥 떠다녔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정확치 않다. 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일주일 가량 계속된 전투에서 국민당군의 공격과 비행기 폭격으로 1만5,000명 이상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다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반면 장정에 비판적인 외부인들은 샹강 전투는 홍군이 지어낸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전투는 없었고 샹강을 건너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농민들이 도주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장제스(張介石)가 마오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지휘부와 주력군이 강을 건너는 것은 내버려둔 뒤 공격을 시작해 나머지 군대를 해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 샹강에서 도주한 농민들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샹강 전투가 없었고 5만 이상의 군을 잃은 것이 탈영과 도주 때문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샹강 전투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삼인위원회, 특히 보구(博古)와 브라운이 준이(遵義)회의에서 권력을 잃고 마오가 권력을 잡게 되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샹강전투의 패배가 없었다면 왜 보구와 브라운이 순순히 권력을 내놓았겠는가? 일설에는 보구가 샹강전투 후 충격을 받아 샹강을 바라보며 권총자살하려는 것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말렸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샹강의 패배가 있었기에 마오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끈 마오식 전략과 전술을 중국공산당이 채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샹강전투의 패배는 중국혁명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 역사가 중국공산당에게 준 시련내지 ‘불행으로 포장된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역사의 간지라고나 할까?

 

■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미소

 

샹강으로 향했다. 길을 돌아 돌아서 오후 네 시쯤 샹강이 있는 싱안(興安)에 도착했다. 우선 찾기로 한 곳은 도강작업을 총지휘한 홍군 지휘본부가 있던 삼관당이라는 이름의 낡은 서당. 사진으로 봤던 낡은 건물은 새롭게 단장했고 이름도 홍군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까운 집에 물어보자 현사무실에서 관리를 하니 거기 가서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하필 토요일이라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여기서 이틀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홍군당과 그 뒤로 샹강이 잘 보이는 전망대를 찾아 나섰다. 홍군당 옆의 낡은 집으로 들어가 옥상에 올라가자 새로 단장한 홍군당과 샹강이 보였다.

샹강은 그 동안 변한 것인지 폭이 그리 넓지가 않았다. 비를 맞으며 샹강을 내려다보자 이 비가 강에서 죽어간 무수한 홍군들의 피눈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저녁식사에서 샹강의 생선요리는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샹강열사기념공원으로 향했다. 비는 거세졌다. 많은 계단 위에 높은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단 앞에는 거대한 조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 쪽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조각으로 이곳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큼지막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각도 그랬거니와 정말 인상적인 것은 그 옆에 있는 약간 작은 보조 조각이었다. 전쟁에 대립하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조각은 한 어린이와 여인을 조각한 것이었다.

눈을 감은 그 여인의 엷은 미소(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거의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와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이를 보는 순간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저 같은 평화의 웃음이 가득 찬 세상은 불가능한 것인가. 비가 내리고 밤이 오고 있었지만 그 미소 대문에 밤새도록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 라오산의 좌절과 리강의 장이모

 

샹강을 건넌 홍군은 장정 중 부딪친 여러 산 중 첫 시련의 산을 만났다. 그 지방에서는 늙은 라오산제(老山界)라고 부르는 묘얼산(苗?山)이었다. 샹강 서북쪽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800m로 높거니와 아주 가팔라서 홍군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샹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홍군들은 한 명밖에 걸을 수 없는 좁은 절벽 길에서 밥도 굶은 채 서서 잠을 자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날 해가 떴지만 많은 말과 병사들이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90도 각도의 절벽에서는 환자들까지도 들것에서 내려 바위를 기어올라가야 했다.

묘얼산으로 향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자 기가 막힌 대나무 밭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 대나무 경치는 쓰촨(四川)의 촉해죽림(蜀海竹林)이 유명하다는데 그곳까지 따로 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나자 다리가 나타났고 묘얼산공원이라고 써놓은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웬걸, 문이 닫혀 있고 대신 팻말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공사로 공원을 폐쇄한다는 공고였다. 무슨 공사들이 그리 많은지, 가는 곳마다 공사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너무도 많았다. 맥이 빠졌다.

‘중국 최고의 풍경’. 구이린의 리강(?江)을 부르는 명칭이다. 구이린에서 5시간 유람선을 타고 리강을 감상하면 도착하는 곳이 양슈오(陽朔). 유명한 장이모(張藝謀) 감독이 만든 ‘인상’이라는 수상 뮤지컬로 최근 각광을 받는 아담한 도시이다.

그런데 양슈오는 ‘중국에서 서양사위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는, 듣기에 따라 명예스러울 수도 있고, 별로 명예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 난 관광지인 만큼 서양의 젊은이들이 많이 여행을 와서는 이 곳 아가씨들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해 현지에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아 서양사위가 가장 많은 마을이 됐다고 한다. 그만큼 리강의 세계적인 명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인상’은 12개의 기암 산봉오리와 길이 2km, 넓이 500m의 리강을 무대로 이용하고 마을 사람들을 포함해 배우 1,000명이 등장하는 대형 뮤지컬이다. 대형 야외세트와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뮤지컬이라는 특이성과 스케일도 대단했지만, 뮤지컬은 환상 그 자체였다.

뮤지컬은 빨강, 파랑, 하양, 노랑 등 색깔별로 장이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색깔과 소수민족의 복장과 문화를 결합시켜 환상적인 예술을 만들어냈다. 특히 빨강이 주제인 첫 장이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어둠이 내린 검은 강 속에서 수십 명의 소수민족들이 여러 줄을 이루어 좌우로 늘어서서 100m가 넘을 것 같은 붉은 천을 펼쳤다 내렸다 하자 눈앞에는 빨간색의 거대한 파도가 생겨났다. 평생 본적이 없는 충격적인 붉은 색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자니 그 빨간 색의 파도가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남아온 중국의 농민들을 상징하는 붉은 황토의 물결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천 년의 억압을 깨트리기 위해 일어서는 홍군들의 봉기 물결 같은 착각을 느꼈다.



'큰 형 리더십' 毛, 가난의 땅서 '모스크바 보이'를 누르다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5〉마오의 부활
"중국에는 중국에 맞는 전략·전술 있다" 소련 업은 20代 보구 꺾고 권좌 복귀
중국 역사 물줄기를 바꾼 준이회의장 하루 2000명 몰려 '홍색관광' 거점화



서강대 정외과 교수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3> 장정의 출발
<4> 샹강의 패배
<5> 마오의 부활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작은 탁자를 둘러 의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준이회의장 모습. 이 작은 방에서 마오를 전면에 세운 중국혁명의 방향이 결정됐다.

준이회의가 열렸던 건물에 내걸린 마오쩌둥의 친필 현판.

 

"삼 일 이상 하늘이 맑은 날이 없고, 세 자 이상 땅이 평평한 곳이 없으며, 은화 세 냥 이상 돈을 가진 사람이 없다." 구이조우(貴州)에 대해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장정 중 홍군은 12개 성을 지나갔다.

그 중 홍군이 가장 오래 머문 지역이 바로 가난의 땅 구이조우이다. 장정 기간의 3분의 1인 거의 넉 달을 구이조우에서 보냈다. 츠수이(赤水)라는 강을 네 번이나 건너는 등 구이조우를 뺑뺑 돌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홍군이 지나간 12개 성 중 중국의 역사를 바꾸는데 가장 기여한 곳을 하나만 고르라면 그곳이 구이조우이다. 구이조우에서 마오(마오쩌둥ㆍ 毛澤東)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중국공산당의,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바뀐 것이다.

묘얼산(猫兒山)을 넘은 홍군은 붙잡은 국민당군 옷으로 변장을 하고 구이조우의 주요 도시인 준이(遵義)를 무혈점령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준이회의와 함께 보구(博古)와 브라운이 2선으로 물러나고 마오가 권력에 복귀한다.

준이에서 중국공산당은 구이조우, 윈난(雲南), 쓰촨(四川)지방의 방대한 영토에 새로운 근거지를 설치하며 이를 위해 우선 양쯔강(揚子江ㆍ장강)을 건너 북상하여 동북 쓰촨에 자리잡고 있던 장궈타오(張國燾)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홍군은 츠수이로 진격했지만 국민당군의 저항으로 북상하는데 실패한다. 이에 마오는 국민당군으로 하여금 홍군의 진군방향을 가름하지 못하도록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츠수이를 네 차례나 건너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중 한 군데가 바로 중국을 대표하는 술인 마오타이(茅台)를 생산하는 동네인 마오타이다. 그리고 적의 예상을 깨고 이미 점령한 바 있는 준이로 돌아가 이를 다시 한 번 점령함으로써 적을 혼란에 빠트린 뒤 서남에 있는 윈난성으로 빠져 나갔다.

 

■ 중국역사를 바꾼 땅 준이

 

준이는 당시에도 인구 50만(현재 100만)명의 큰 도시였다. 적지 않은 홍군들은 여기서 전깃불과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을 난생 처음보고 놀랐다고 한다. 1935년 1월15일, 독일 혁명가 로자 룸셈부르크가 학살을 당한 날로 홍군은 그를 추모하는 대중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 회의실에 모였다.

정치국 위원만이 아니라 확대회의를 열기로 한 것이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보구였다. 그는 샹강(湘江)전투 등 그간의 전투의 패배와 관련해 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구 후에 입을 연 것은 저우언라이(周恩來). 그는 그간의 패배와 관련해 자신을 비롯한 지도부의 실수를 인정하며 진솔한 자기비판을 털어 놓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원티엔(張聞天)이 보구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발한 뒤 브라운의 무능도 질타했다.

이어 마오가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나 계속된 연설에서 마오는 중국고사를 인용해 송곳 같은 풍자로 보구와 브라운을 비판했다.

'모든 면에서 우위인 국민당군을 상대하려면 유격전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패배주의로 몰면서 정면대결을 고집한 보구와 브라운의 전략 전술은 군사적 모험주의로서, 결국 소비에트의 근거지를 모두 잃고 샹강에서 대패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중국에는 중국에 맞는 전략과 전술이 있는 법"이라는 말로 발언을 끝냈다. 3일이나 계속된 회의는 결국 3인 군사위원회의 기능을 정지하고 마오를 정치국 상임위 위원으로 선출했다.

회의지에 도착하자 마오가 특유의 흘려쓰는 글씨체로 쓴 '준이회의 회의지' 현판이 걸린 건물이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장정 기념지 중 마오가 직접 현판을 써준 곳은 이 곳 뿐이라고 한다. 하긴 준이에서 기사회생했으니 안 그렇겠는가.

명성답게 회의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하루 평균 입장객이 2,000명에 입장료 수입 만해도 매일 10만위엔(한화 1400만원) 정도이니 이 정도면 '홍색관광'(장정 등 공산당의 역사와 관련된 관광)도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회색 기와를 얹은 아담한 집의 이 층으로 올라가자 회의실이 나타났다. 중국역사를 바꾼 현장이다. 회의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갈색 사각형 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의자가 빙 둘러 있었는데 모두 앉으면 별로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이 좁은 방에서 얼마나 뜨거운 설전이 오갔을지 상상이 갔다. 보구와 브라운을 비판하는 마오의 포효가 들리는 것 같았다.

기념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준이회의는 중국혁명의 방향을 크게 바꾼 관건"이라는 마오의 어록. 이어 화롯불을 가운데 피워 놓고 논쟁을 하고 있는 회의 참석자들의 조각과 사진이 나타났다.

참석자들의 양력과 사진을 진열하고 주요 참석자들의 발언 요지도 요약해 놓았다. 단지 모스크바의 신임을 받았다는 이유로 불과 20대에 중국공산당을 총지휘한 보구의 앳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20대에 고시를 통과해 검사가 되어 범죄를 심판하는 것도 문제가 많은데 그 나이에 세상과 인간의 심리를 얼마나 안다고 혁명을 총지휘하겠는가.

 

■ 들것의 반란과 스킨쉽의 정치

 

'붉은 교수'는 왕자샹(王家祥)의 별명이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최고 엘리트 이론간부들을 키우는 모스크바 홍색교수학원을 졸업한 수재로, 이후 소련이 중국 소비에트구역에 전권대표로 파견한 모스크바그룹의 핵심이다.

그는 장정 전 폭탄 파편이 창자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어 고무관으로 몸 속 고름을 계속 밖으로 빼내야 했고, 대나무로 만든 들것에 누운 채 장정 길에 나섰다. 정치국 정위원이었던 장원텐(張聞天) 역시 보구의 모스크바 유학동기인데도 실세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 그도 들것 신세를 져야 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역시 들것을 타고 있었던 마오는 이들에 접근했다. 나이가 한참 많은 마오는 큰 형같이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줬고 중국고사에 능통한 입담으로 이들을 사로잡았다. 예상대로 왕자샹과 장원텐은 준이회의에서 마오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들것의 반란'이었던 셈이다. 결국 마오식의 '스킨십 정치'가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준이회의의 회의장을 보고 있으니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알 고어와 이회창이 선거에서 인간미가 넘치는 부시와 노무현에게 패배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스킨십 정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바 양옥선생', 그리고 '독립건물선생'. 당시 홍군들이 지도부를 비아냥거릴 때 사용하던 표현이다. 모스크바 양옥선생은 모스크바 유학파를, 독립가옥선생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브라운을 가르치는 말로 그가 독립건물에 따로 살면서 각종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준이회의는 양옥선생과 독립건물에 대한 마오의 승리, 다시 말해 코민테른과 모스크바파에 대한 토착세력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는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기초한 도시봉기에 대한 농촌혁명의, 전면적인 시가전에 대한 유연한 게릴라전의, 도시노동자노선에 대한 농민노선의 승리다. 1930년대 중국은 여러 면에서 러시아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권위에 기초해 러시아의 경험과 지시를 절대시했다. 황석영의 <손님>이 생각났다. 황해도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의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외래사상 맹신을 비판한 소설이다. 준이회의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다.

장정과 중국혁명을 보면 보편적 법칙이라는 이름아래 서구의 경험을 맹종하는 것 보다 개별국가의 특수성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역사나 사회현상의 보편적 측면을 무시하고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북한과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은 결국 사회주의국가들에서도 유례없는 권력 세습이라는 희극을 만들어냈다.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사회과학의 어려운 숙제를 다시 한 번 고민하면서 준이를 떠났다.


일진일퇴 '붉은 강 도하'… 마오, 퇴로를 얻고 딸을 잃고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투청 들어서니 거대한 '츠수이 기념관' 관광객은 없는데 3D 첨단시설 떡하니…
중국 최고의 술빚는 마을 마오타이에선 가난에 찌들은 민초들 일상 '아이러니'



서강대 정외과 교수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3> 장정의 출발
<4> 샹강의 패배
<5> 마오의 부활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츠수이 기념관에 있는 조형물. 두 달여 동안 네 차례 감행된 홍군의 츠수이 도하 작전을 불은 강물을 배경으로 형상화시켜 놓았다.

중국의 대표적인 술이 생산되는 마오타이 마을. 호텔 한두 곳을 제외하고 마을은 전체적으로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준이(遵義)를 떠나 츠수이(赤水ㆍ적수)의 현장인 투청(土城)으로 가기 위해 시수이(習水)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뜩이나 험한 길을 공사를 하느라고 완전히 파헤쳐 다닐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비까지 왔다.

홍군의 야간행군을 생각하며 어두워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질퍽이는 길을 비를 맞으며 걸고 또 걸었다. 결국 30km를 6시간 반 만에야 주파할 수 있었다.

장정 내내 성한 국도와 지방도로를 본 적이 거의 없다. 낡은 기간시설을 보수하고 건설경기로 경제를 부양시키는 한편 마을 사람들을 건설공사에 동원해 어려운 농촌에 소득을 올려주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올림픽을 겨냥한 측면도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호텔에 도착해 여권을 내밀자 생전 처음 받아보는 외국인 거주등록절차를 몰라 공안을 부른다고 했다. 밤늦게 불려 나온 공안은 장정 70주년 때 장정을 재현한 중국 젊은이들을 취재하러 외국인이 한번 왔을 뿐이며, 한국인은 처음이라고 했다.

 

■ 6시간 반의 강행군, 최초의 한국인

 

츠수이. 강바닥이 붉은 돌로 되어 있어 마치 붉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구이조우(貴州) 북서부의 강이다. 1935년 1월28일, 홍군은 츠수이가 흐르는 투청 동쪽에 진을 쳤다.

군지휘권을 장악한 만큼 마오(毛)는 첫 전투를 큰 승리로 장식하고 싶었다. 그는 홍군이 자주 사용해온 작전대로 매복해 있다가 추적군을 역으로 공격해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로 오히려 대패를 했다. 비상지도부 회의를 통해 북진계획이 취소되고 대신 츠수이를 건너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공병대에게 하루 밤사이에 부교를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불가능할 것 같은 임무를 완수했고 전멸을 면한 홍군은 츠수이를 건너 도피했다. 숨을 돌린 마오는 홍군에게 다시 츠수이를 건너 준이를 재탈환하라고 지시했다. 적의 의표를 찌른 이 작전은 적중했고 마오는 첫 승리를 거뒀다. 마오는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 마오타이(茅台)를 통해 츠수이를 건넜다.

마오타이를 건넌 뒤 선발대로 하여금 적의 눈에 잘 띄게 큰 길로 서북쪽으로 진군하도록 한 뒤 주력군은 여러 군데로 나누어 다시 츠수이를 건너 구이양(貴陽) 쪽으로 남하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서 두 달 이상을 소모했던 츠수이 4도하가 끝났다.

 

■ 마오의 딸과 깨어진 독

 

투청은 마오에게 양면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큰 패배를 안겨준 곳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멸을 피하고 후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투청의 츠수이 도하가 없었다면, 현재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시수이에서 투청으로 가면서 문득 마오의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이 떠올랐다.

장정 출발 시 이미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이 곳 투청에서 애를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하루 뒤 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라는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육감대로 아이는 얼마 뒤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두 달 뒤 허쯔전은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격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마오가 장칭(江靑)과 결혼을 하면서 이혼과 함께 소련으로 보내졌지만 우울증 등으로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다.

투청에 들어가자 거대한 기념관이 나타났다. 츠수이 도하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등 장정 중 본 것 중 가장 뛰어난 첨단시설이었다. 그러나 가끔 연휴 때나 단체관광이 올 뿐 관람객이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츠수이의 의미가 크지만 도로사정 때문에 아무도 올 수 없는 이 오지에 이 같은 첨단 기념관을 만든 것은 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첨단시설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인 것은 한 깨어진 물독을 끈으로 묶어 놓은 것과 두 푼의 동전이었다. 한 노인이 기증을 한 것인데, 장정 시 홍군이 자기 집에 와 머물다가 실수로 독을 깬 뒤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독 값으로 주고간 돈이라는 것이다.

노인으로서는 그 동안 보아온 국민당군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태도라 감격스러워 버리지 않고 있다가 기념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기증을 해왔다고 한다. 중국내전에서 홍군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증언하는 역사적 증거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 마오타이는 어떻게 국주가 됐나

 

마오타이는 투청과 준이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츠수이가 흐르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 도시는 예부터 '맛있는 술의 강'이라는 이름의 좋은 강물로 독한 백주를 만들어 츠수이를 통해 쓰촨(四川)에서 들어오는 나룻배에 실어 보내던 곳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홍군이 마오타이에 들어와 행군할 때 아직 술을 모르는 10대의 어린 홍군이 가게의 큰 항아리에서 마오타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마침 오랫동안 걸은 발이 피곤하고 열이 나 이 항아리 속의 액체를 발에 부어 씻었다고 한다. 그러자 독주의 알코올이 날아가며 시원해지고 소독효과까지 있어 여러 병사들이 다리 등의 소독에 사용했다고 한다.

뒤늦게 현장에 온 나이가 든 홍군들이 술 임을 알고 마셨더니 엄청나게 독한 데다 맛도 기가 막혔다. 다들 마신 뒤 남은 것은 모두 싸 갖고 떠나 동네의 술독을 텅 비고 말았다.

물론 마오도 마셨다. 마을 사람들은 어차피 양조장 주인들은 다 도망간 뒤인데다 술도 자신들의 것이 아니어서 홍군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이후 혁명에서 성공한 뒤 베이징에 돌아온 마오는 그 때 마셨던 마오타이의 백주를 그리워했다.

또 그때 마오타이의 주민들이 보여준 따뜻한 대접에 감사하는 뜻에서 외국 정상과의 만찬 등 국가적인 행사에 마오타이를 쓰도록 했다. 이에 따라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술 '국주(國酒) 마오타이'가 탄생한 것이다. 현재 마오타이는 거대한 국영기업이다.

마을 입구에도 '중국 최고의 술 빚는 마을'이라는 운치 있는 아치형 문이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서자 냄새 때문에 코를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된장 비슷한 냄새였는데 술 빚는 마을답게 전체가 누룩 냄새였다. 그 향기로운 마오타이를 만드는 냄새가 이처럼 고약하다니 아이러니컬 했다.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중국최고의 술을 만드는 술도시답게 아주 고급 호텔이 있었지만 방이 없었다. 마오타이 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인데 마오타이 대리점 등 관련 고객들로 일 년 내내 만원이라고 한다.

마오타이가 운영하는 또 다른 호텔을 소개 받았지만 다시 퇴짜를 맞았다. 마을에는 잘만한 숙소가 없었다. 결국 위성도시로 가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 마오타이에는 마오타이가 없다

 

저녁 겸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마오타이까지 와서 마오타이 맛을 보지 않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오타이를 파는 곳이 없었다. 즉 마오타이에는 마오타이가 없었다. 대신 마을 곳곳에는 크고 작은 독을 진열해 놓은 술집들이 즐비했다. 잔술을 파는 곳들이다.

마오타이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명성에 비해 너무도 가난한 도시였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 가난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마오타이회사와 마오타이 시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다.

마오타이는 돈도 많이 벌고 직원들 대접도 잘 해주면서도 일반주민과 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오타이가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것이 없다는 불만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에 <두 도시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다. 마오타이야 말로 그 이야기의 전형이다. 흥정거리는 '마오타이 왕국'과 그 밖의 가난하기 짝이 없는 '비(非)마오타이의 마오타이'라는 두 도시이다.

정작 홍군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것은 마오타이 회사가 아니라 마오타이시의 민초들이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마오타이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