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春園의 南遊雜記에서 드러난 嶺湖南觀

이강기 2015. 9. 5. 11:37

 

 


 

삼천리 제10권 제8호  
발행일 1938년 08월01일  
기사제목 南遊 雜記  
필자 春園  
기사형태 기행문  

 

 
南遊 雜記
春園
 
이미 雜感이라 하였으니 여행기를 쓸 필요는 없다. 수륙4,000리를 돌아다니는 중에 여긔 저긔서 특별히 감상된 것 - 그것도 계통적으로 된 것 말고 단편 단편으로 된 것을 몇가지 쓸란다.
 
여관과 음식점의 不備는 참 심하더라. 현대식 여관이 되랴면 적어도 客每名에 방 한간과 그 방에는 책상, 筆墨硯, 방석은 있어야 할 것이오, 속 껍데기를 客마다 갈아주는 衾枕과 자리옷과 여름같으면 모긔장 하나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꽤 큰 도회에도 이만한 설비를 가진 여관은 하나도 없다. 혹 衾枕을 주는 데가 있어도 1년에 한 번이나 세탁을 하는지. 수십명 수백명의 때무든 것을 주니 이것은 찰하리 안주는 것만도 갓지 못하다. 만일 전염병 환자가 덮고 자던 것이면 었지할는지 생각만해도 진저리가 난다.
 
또 세수터의 설비가 없어서 퇴마루나 마당이나 되는대로 쭉 둘너 안저서 하얀 齒磨粉 석근 침을 튀튀 뱃고 방금 밥상을 대하였는데 바로 그 앞에서 왈괄왈괄 양추질하는 소리를 듯고는 구역이 나서 밥이 넘어가지를 아니한다. 從此로는 여관에는 반다시 욕실과 세수터는 설비해야 하겠더라.
 
다음에는 음식였후는 부억과 사람이다. 그 연기에 깜아케 걸고, 몬지가 켜켜히 안진 부억, 때무든 치마에 주먹으로 킹킹 코를 문대는 식모. 全羅南北道, 慶尙南北道 등지로 가면 웃통 벌어벗고 손톱 길게 둔 머슴, 그러한 사람의 손으로 여툰 음식을 된장과 젓국이 처덕 처덕 무든 소반에 바처다 줄 때에는 당초에 수저를 들 생각이 아니 난다. 아모리 하여서라도 여관과 음식점은 속히 개량하고 십다.
 
O 머슴 말이 낫스니 말이지 湖嶺南 지방의 음식은 - 적어도 객주집 음식은 대개 머슴이라 일컷는 남자가 하는데, 주인아씨는 깨끗이 차리고 (대개는 아마 행내기는 아니오 前무었이라는 직함이 있는 듯) 길다란 담뱃대를 물고 머슴이라는 남자를 담뱃대 끝으로<282> 지휘하면, 그 남자가 아궁지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 단지 저 단지 반찬 단지에 근골 발달된 팔뚝을 들여미는 꼴은 과연 남자의 수치일러라.
 
O 忠淸道 이남으로 가면 술에는 막걸리가 많고 소주가 적으면 국수라 하면 밀국수를 의미하고, 漢北에서 보는 모밀국수는 전무하다. 西北지방에는 술이라면 소주요 국수라면 밀국수인 것과 비겨보면 미상불 재미있는 일이다. 아마 맑걸리와 밀국수는 三國적부터 있는 순수한 朝鮮음식이오 소주와 모밀국수는 비교적 근대에 들어온 支那式 음식인 듯 하다. 길을 가다가 주막에 들어 안저서 냉수에 채어 노흔 막거리와 칼로 썰은 밀국수를 먹을 때에는 1,000년에 돌아간 듯 하더라.
 
O 말이 낫스니 말이어니와 三南지방에 맥주와 일본주의 유행은 참 놀납다. 촌사람들이라도 술이라 하면 의례히 「삐루」나 「마사무네」를 찾는다. 西北지방에 가면 아직도 「삐루」나 「마사무네」는 그다지 보급이 되지 못하였다. 소주는 압록강을 건너 오기 때문에 西北지방에 몬저 퍼지고 맥주는 동해를 건너 오기 때문에 嶺湖南지방에 몬저 퍼진 것이다. 여긔서도 우리는 지리관계의 재미를 깨닷겠더라.
 
O 누구나 다 하는 말이지마는 全羅道와 慶尙道는 그 지세가 인접해 있는데 反하야 산수와 인심에 판연한 차이가 있다. 全羅道의 산은 부드러운 맛이 있고 둥근 맛이 있고 美하다면 우미하며 여성적인데 慶尙道의 산은 꺼칠꺼칠하고 뾰죽뾰죽하고 美하다면 壯美오 남성적이다. 부여는 충청도지마는 泗沘水가에 곱다랏케 얌전히 앉었는 扶蘇山은 대개 全羅道산천의 대표일 것이다. 인심도 이와 갓하야 湖南인은 얌전하고 부드럽고 민첩하고 교제가 능한 대신에 嶺南人은 뚝뚝하고 억세고 무겁고 接人에 좀 냉담한 맛이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말을 듯건대 湖南人은 다정한 듯한 대신에 좀 였고 嶺南人은 뚝뚝한 듯한 대신에 속이 깊어서 교정이 깊고 굳기로 말하면 후자가 전자에 勝한다 한다. 아모러나 「湖南」이라는 글자, 「嶺南」이라는 글자부텀이 무슨 특색을 표하는 것 갓지 아니하냐. 湖와 嶺!
 
O 湖南을 국토로 하는 百濟人과 嶺南을 국토로 하는 新羅人이 서로 犬猿 不相容하였을 것은 지금서도 상상이 된다. 1,000년간이나 동일한 주권 하에서 살아옴으로 性情과 習尙이 퍽 많이 융화도 되었으련마는 아즉도 百濟人 심정, 新羅人 심정의 특색은 선명하게 남아<283> 있어서 지금도 서로 조롱거리를 삼는다.
 
O 畿湖나 西北지방에는 湖南人, 嶺南人의 자손이 離居하기 때문에 순수한 혈통이 없어지고 일종 羅濟혼혈이오 西北의 기후풍토에 감화된 딴 종족이 생겼다. 그러나 百濟人은 新羅人의 피정복자오 지금 조선문명의 직계가 신라에서 나려왔음으로 西北人은 언어나 習尙이 嶺南人다운 점이 만타. 딴 소리지마는 高句麗人의 자손은 다 어디로 갓는지, 평생에 의문이다.
 
O 소리(歌)에 남북의 차이가 분명히 들어난다. 나는 咸鏡道소리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어니와 平安道의 대표적 소리되는 수심가와 남도의 대표적 소리되는 육자백이에는 그 음조에 아주 조화될 수 없는 截然한 구별이 있다. 수심가는 噪하고 급하고 壯하고, 육자백이는 克하고 緩하고 연한 맛이 있다. 다 같이 일종 슯흔 빛히 있지마는 수심가의 슯흠은 「悲」의 슯흠, 哭의 슯흠이오 육자백이의 슯흠은 「哀」의 슯흠, 「泣」의 슯흠이다. 악기로 비기면 수심가는 秋夜의 주라나 피리오, 육자백이는 春夜의 玉笛이나 거문고일 것이다.
 
O 그런데 平安道사람은 소리를 내면 자연 수심가調가 되고, 남도 사람들은 자연 육자백이調가 되며, 평안도사람으로 육자백이 배호기나, 남도사람으로 수심가 배호기는 지그히 어렵다고 한다. 아모리 잘 배홧다 하더라도 그 소리에는 자연 제 지방 음조가 끼운다고 한다.
 
O 平安道부인네의 곡하는 소리를 들으면 꼭 수심가가락인데 남도부인네의 곡하는 소리를 들으면 꼭 육자백이가락이다. 혈통과 풍토의 자최는 도저히 버서나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O 嶺南의 양반세력은 참 굉장하다. 嶺南양반의 印이 깁히 백힌 것은 이유가 있다. 百濟를 멸하고 高句麗를 합하야 新權人은 200여년간 勝者, 治者의 지위에 있었고 주장이 혹은 松都로 혹은 漢陽으로 옮은 뒤에도 국가의 중심세력은 실로 新羅의 故疆되는 慶尙道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朝鮮역사의 주류(비록 不美한 것이지는)되는 東西니 老少니 하는 당파 쌓홈도 其實은 慶尙道가 그 원천이었었다. 高句麗양반, 百濟양반이 다 슬허지는 동안에 오즉 新羅 양반이 2,000년의 영화를 누렷으니까 그 印이 깁히 백혔을 것은 자연한 理다. 그러나 금일에 와서는 新羅양반도 다 썩어진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284> 양반님네가 어떻게나 완고한고 하니 사서오경에 없는 것이라 하야 비행기의 존재를 부인할 지경이다.
 
O 그러나 양반이 심한 대신에 선비를 귀중히 녀기는 생각은 참 모범할만 하다. 西北人들이 선비의 귀중할 바를 모르고 황금이나 권력만 숭배하는 것에 비기면, 嶺南人은 과연 양반이다. 그네는 선비가 사회의 생명인 줄을 이해한다.
 
O 扶餘에 갓슬 때에 산에서 어덧다는 석기시대의 유물을 보았다. 아직 농경의 術이 발달되지 못하고 漁獵으로 생업을 作하던 그네는 평지에 살 필요가 없음으로 向陽하고 물 좋고 외적을 방비하기에 편한 산곡에 군거하였다. 그 유물이 대부분은 도끼와 살촉과 그것을 가는 숫돌 등이었다. 그네는 그것으로 식물을 구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다. 그네의 유일한 필요품은 실로 무기였을 것이다. 냇가으로 돌아다니면서 점판암 같은 돌을 주어다가 깨트리고 갈고 밤낫 무기만 많드는 것이 그네의 일상 생활이었고, 각금 사냥하기와 이웃한 부락과 전쟁하기가 그네의 사업이었다. 살촉을 반쯤 갈다가 내버린 것이 있다. 아마 도중에 전쟁이 낫던 것이지. 정신없이 숫돌에 살촉을 갈고 앉어다가 푸르룩 하고 날아오는 돌팔매와 화살에 깜작 놀라 뛰어 닐어나는 양이 보이는 듯하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숫돌에 갈던 자국이 분명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고 독긔도 아니오 살촉도 아닌 무었에 쓰는 것인지 십자형으로 갈아 놓은 석편이 있다. 아마 자기 딴에 썩 묘한 것을 만드노라고 한 모양이니 이것이 실로 미술의 시초오 많일 그것을 갈면서 흥에 게워 나오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하면 그것이 음악의 시초일 것이니 예술은 실로 이리하야서 생긴 것이다. 아마 4, 5천년 일이라는 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 역시 내 祖先으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 정답게 생각되더라.
O 인정풍속이나 그 풍토의 자연의 미관은 오즉 그 문학으로야만 알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문학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닛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알려할진댄 실지로 구경다니는 수 밧게 없지마는 저마다 구경을 다닐 수도 없고 또 다닌다 하더라도 眼識이 없어서는 보아도 모른다. 나는 우리들 중에서 문학자 만히 생기기를 이 의미로 또 한 번 바라며 그네들이 각기 자기의 향토의 풍물과 인정습속을 자미있게 그러고도 충실하게 세상에 소개하여 주기를 바란다.<285>
 
O 이번 길에 민요와 전설도 될 수 있는대로 수집하여볼가 하였더니 여정이 넘어 倥忽하여서 실패하고 말았다. 학생이든지 관리든지, 누구든지 鎖閑삼아 그 지방의 민요, 전설, 奇風, 異俗, 풍경 같은 것을 수집하야 글을 만들면 자기도 자미있고 세상에도 裨益할 바가 많을 것이다. 더구나 京城이라든지, 平壤, 大邱 등 대도회며 慶州, 扶餘 같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며 釜山, 義州와 같이 自古로 대외교통 빈번한 곳의 민요, 전설은 극히 가치있는 것일 것이다.
 
O 湖南에는 광대가 많고 嶺南에는 기생이 많다. 광대에는 사내광대, 게집광대가 있으되 기생에는 母論 사내는 없다. 湖南 각도회에는 광대없는 데가 없는 것과 같이 嶺南 각도회에는 기생없는 데가 없으며 그 대신에 湖南에는 별로 기생이 없고 있다하여도 嶺南産이 많으며, 嶺南에는 광대라면 대개 湖南産인 듯 하다. 서울서도 光武臺 등지에서 떠드는 광대는 거의 다 湖南사람인 것을 보아도, 또 宋누구니 하는 名唱, 名琴이 대개 湖南사람이 것을 보아도 湖南은 광대의 본토인 줄을 알 것이다.
 
O 파리보다 기생수효가 셋이 더 많다는 晋州를 비롯하야 大邱, 昌原 등지는 기생의 산지로 유명하다. 京城도 무슨조합, 무슨조합하고 嶺南기생전문의 무역소가 있으며, 7,8년전 平安道 등지에도 수천명 嶺南産이 跋扈하엿다. 었지해서 湖南에는 특별히 광대가 만히 나고 嶺南에는 특별히 기생이 만히 나느지 거긔도 무슨 역사적 관계가 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아모러나 무슨 이유는 있는 듯 하다. 春香의 고향되는 湖南에서는 기생들이 모도 다 春香의 본을 밧고 말았는지.
 
O 平壤기생이라면 平壤병정과 함께 서울서도 명성이 쟁쟁하지마는 平安道에는 현금에는 기생 있는 데가 平壤 외에 수삼處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었다. 20여년전에는 내 고향되는 定州에도 3,40명 기생이 있다하였고 검무로 유명한 宣川기생, 무었무었으로 유명한 成川기생, 安州기생하고 꽤 만턴 모양이나 여러 도회가 쇠잔함을 따라 기생도 絶種이 되고 말았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嶺南은 西北 보다 아즉도 생활이 裕足하야 부자계급, 노는 사람 계급이 있는 모양이다.
 
O 아모러나 기생제도의 시초는 新羅의 俱樂部제도에서 발생한 것이닛가 이는 양반으로 더부러 嶺南의<286> 2대특산이 될 것이다.
 
O 비록 雜感이라고는 하였으나 넘어 질서없이 짓거러서 죄송하기 끝이 없다. 명년에 만일 기회가 좋아서 西北지방의 여행을 마초게 되면 무식한 내 눈으로 본 것이나마 계통있는 見聞記를 하나 쓰려 하고 그만 그친다. (丁巳 9月)<287>
<282-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