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壬午軍亂 回想記

이강기 2015. 9. 5. 11:49
   
 
 
잡지명 삼천리 제8권 제12호
호수 제8권 제12호
발행년월일 1936-12-01
기사제목 壬午軍亂 回想記
필자 車相瓚
기사형태 회고·수기

江華島上에서 洋艦 처바시든 대포 소리가 끈어진지 오래지 아니하야 深宮玉燭에 밤마다 왕권탈환을 꿈꾸든 閔妃의 추파는 어느듯 향촌 유림으로 건너가서 崔益鉉의 反攝政疏 한 장이 궁문에 떨어지게 되니 10년간 반도의 강산을 마음대로 쥐였다 폇다하든 稀世의 영걸 大院君도 할 수 없이 漢陽의 정계를 하직하고 楊州 한 모통이에 한거로이 누어서 白雲靑山에 잠자는 맹호와 짝을 짓게되였다.(大院君이 退位즉시에 楊州直洞에 은거함) 원래 용이 없는 바다에는 미역이가 꼬리를 치고 호랑이 없는 산골에는 여호가 선생질을 하는 법이다. 大院君이 한번 攝政의 자리를 떠나매 閔妃는 마음대로 정권을 幻弄하야 자기의 친족이면 비록 凡才庸人이라도 모다 高官大爵을 식임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돈의 팔촌까지라도 남자로만 태여난 사람이면 하다 못하야 지방군수라도 한 자리는 다 차지하게 되였다. 그때 巷談에 「李氏의 四寸이 되지 말고 閔哥의 八寸이 되라」는 말은 그것을 잘 설명한 것이다. 그네들은 대개가 국가의 해독충이 아니면 인민의 흡혈귀다. 자기의 세력만 믿고 모든 횡포, 잔학, 驕奢, 약탈, 貪汚 등을 자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閔妃는 목전의 향락을 취하고 장래의 명복을 구하기 위하야 천하의 歌妓舞童을 모다 뽑아다가 밤낫으로 궁중에서 질탕히 놀고 巫女, 卜者, 僧侶의 무리들을 불너들여 명산대천과 古寺大刹에 기도 불공을 하였다. 金剛山 만이천 봉에는 봉마다 쌀 몃 섬, 돈 몃 백냥, 포목 몃 필식은 안간 곳이 없고 楡岾寺의 53佛은 머리마다 금색이 찬란하였다. 돌도 이상하게만 생겼으면 큰 祭를 받었고 나무도 몃 해만 묵은 나무면 玉貫子 金貫子를 부치게 되였다. 이리 하너라니 정치의 꼴은 었지 되며 왕가의 위신은 또한 었지 되였으랴.〈112〉 前日 大院君시대에 모든 시설은 다 破壞되고 숙청하였든 宮紀는 여지없이 문란하야 심엄한 九重宮闕이 妖怪百出의 伏魔殿으로 化하고 충만하든 국고는 蕩盡無餘하야 아모리 인민에게 별별 走狗를 다 하야도 백관의 봉급은 몃해 동안을 주어보지 못하고 심지어 各 營門軍兵의 급료까지도 13개월이나 주지를 못하였다. 加之 閔妃는 國의 세력을 恃賴하기 위하야 太院君의 쇄국정책을 일변하야 외국과 소위 통상조약을 하면서 먼저 日本과 수호하야 공사가 서울에 來駐하는 동시에 정부에서는 군제를 개혁한다 하고 在來 五營門의 군병 약 1,000명을 급료도 주지 안코 파면하고 소위 別技軍이라는 신병을 모집하고 壯禦術의 兩新宮을 設하여 日本人 中尉 堀本禮造를 교련관으로 고용하니 일반의 聲은 자못 한울에 사모처서 牝鷄之鳴은 惟家之索이란 탄식을 발하며 전일 大院君시대를 다시 생각치 아니치 못하게 되였다. 그런 중에 壬午年에 이르러서는 봄부터 旱魃이 特甚하고 穀價가 暴騰하니 八路의 인심은 모다 騷動되야 누구나 亂을 思하게 되였다.

壬午年 6월 초9일이다. 戶曹에서는 군사에게 약 1개월 분의 급료를 주기로 하고 廣興倉의 미곡을 내여 군사에게 분급을 개시하니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든 각 영의 병졸들은 맛치 ?魚가 물을 맛난 듯이 모다 몰녀 드러 廣興倉으로 갔섰다. 그러나 급기야 급료라고 받고 보니 미곡이 거의 다 부패하였고 그 중에도 倉吏 놈은 또 作奸질을 하야 미곡에다 砂石을 반이나 석고 또 두량도 12두 1석이 10두도 미만하였다. 일이 이와 같이 되고보니 아모리 평소에 幼羊과 같이 순하든 병졸이라도 정부의 태만한 처치와 倉吏의 간특한 挾雜에야 었지 분개하지 안이하리요. 병졸들은 노기가 등등하야 주먹질을 하며 정부당국자들의 비리행사를 痛罵辱叱하였다. 그런대 그 때의 창리는 마츰 戶曹判書 閔謙鎬의 家이오
閔謙鎬는 閔族政黨의 巨魁로 宣惠堂上의 요직에 있어서 모든 害公營私의 짓을 다하야 民怨의 焦點이 되는 중에 군사의 급료를 아니 주게한 것도 또한 閔謙鎬의 한 짓이라. 그러한 사람의 家人으로서 군사의 급료에까지 作奸을 하니 몃 배나 더 분 할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憤히 녁이는 군인들은 일제히 노발하야 아우성을 치며 이놈 보아라 우리가 나종에는 三水甲山을 가는 한이 있드래도 爲先 이놈붙어 따려 죽여야 하겠다 하고 惹鬧를 하는 중에 당시 제1용병으로 일홈이 있는 訓練都監 軍士 수 십 명이 먼저 달녀드러 창리를 잡아다가 한매로 처 죽였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에 분한 마음에 창리를 그와 같이 죽이기는 하였으나 閔謙鎬같은 대세력가의 가인을 죽였은 즉 그 조치로 몃 사람이나 또 죽을는지 알 수 없는 고로 각영 군사가 한 곳에 모히여 그 대책을 논의하든 중에 일반이 다 분연하야 말하기를 우늦?가 가만이 있다가 그놈의〈113〉 손에 모다 죽는 이보다는 우리들이 먼저 난을 이르켜서 나라를 亡케 하는 閔妃 이외의 要路大官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난 뒤에 국정을 바로 잡는 것이 올타하고 만장일치로 가결하야 일방으로 사람을 雲峴宮에 특송하야 大院君에게 그 뜻을 전달하고 暗暗히 氣?을 상통하니 漢城의공기는 시각으로 급변하야 장차 폭우가 올지 또는 광풍이 불지? 극히 위험참담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堂上에 安眠하는 ?雀이었지 大火의 襲來할 것을 알며 목장에 閒遊하는 幼羊의 무리가 었지 猛獅의 였보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랴. 宮中府中의 要路大官들은 아모 것도 알지 못하고 다만 管絃의 풍류소리에 태평을 노래하며 坤殿의 만세를 부를 뿐이였다.

각 營의 군사들이 이와 같이 결속되여 있을 때에 마츰 창리의 도망한 자가 閔謙鎬에게 그 家人의 피살한 事를 보고하니 閔이 크게 노하아 곳 그 군병의 首謨者 몃 사람을 잠아 그 翌日에 사형에 처하기로 하니 이것은 閔이 비록 세력을 믿고한 일이나 한 시간이라도 군병의 반란을 더 촉진 식히고 자화를 자초하는 무모의 짓이였든 것이다. 그 소문이 한번 돌자 각 영의 군사들은 憤氣가 일시에 폭발되여 首謨者를 처형하기 전에 반란을 먼저 이르키자고 訓練都監의 군대를 首頭로 하야 各隊 군사가 일제히 梨峴으로 모혀드니 東別營의 장교 기병 등 前日에 파면된 군졸도 모다 모히여 형세가 크게 떨치였다. 그들은 비분강개의 언사로 奸黨討伐과 정부개혁을 宣誓하고 行陣을 시작하야 먼저 軍器庫를 깨트리고 모든 군기를 점령하야 일제히 무장을 하니 旗*槍劍이 日光을 희롱하고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들은 全軍을 2대로 난우어 1隊는 대궐로 직향하고 1隊는 訓練院下都監으로 향하니 전자는 궁중과 정부를 襲擊코자 함이오 후자는 新營訓練隊의 日本人과 밋 日本公使館을 襲擊코자함이었다. 궁궐로 향하는 군대가 대궐 근처로 直到하니 군신상하가 모다 경황하야 었지할 줄을 모르다가 御命으로 近侍를 보내서 여러 군사에게 宣諭하되 「너희들이 었지 하야 이러한 행동을 하느냐 所請이 있으면 무었이던지 다 들어줄 터이니 速히 退歸하야 安心하라」고 하였으나 군사들은 듯지 아니하고 高聲怒呼하여 閔族派의 貪虐病國한 죄악을 들어 꾸짓고 또 大院君을 속히 입궐식혀 정치를 일신 개혁하여야 된다하고 退軍치 아니하니 王上도 또한 었지 할 수없어 이에 급히 使者를 雲峴宮에 보내여 대원군의 입궐을 청하고 군란의 진정 을 囑願하니 大院君이 直時 입궐하야 자기의 평생 신임하고 일반 군대에서도 평소 경애하든 前訓練大將
李景夏를 보내서 군사에게 萬般의 說諭를 하야 속히 해산하기를 청하였으나 원래 흥분된 군중은 다만 說諭뿐으로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야 大院君의 威德과 李景夏의 信望도 아모 효과를 얻지 못하고 군대들은 의연히 궁문밖에 結陣하고 怒號叱辱할 뿐이였다.〈114〉 그리고 下都監으로 가든 군대는 가는 길로 新營門을 깨트리고 영중에 난입하야 일본인 교관 堀本禮造를 죽이고 또 그날 밤에는 西大門밖 天然亭에 있는 日本公使館 淸水館을 불질으고 난민은 또 서로 聲을 和하야 일본거류민까지 모조리 있는대로 그리그리 하니 그때 日本公使 花房義質은 겨우 仁川으로 도피하야 영국측량선 「뿌라이잉핏*」호를 타고 長崎로 갔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일대의 군병은 또 포도청과 감옥을 깨트리고 모든 죄인을 해방하니 그것은 당시 閔族一派의 貪官輩가 무고한 인민을 함부로 잡아 가둔 것을 분개함이였다. 때마츰 여러 날을 감을다가 죄인들이 해방되자 불시에 큰 비가 오니 일반 인민들이 깁버하며 말하기를 정부에서 무고한 인민을 가두었다가 이제 출옥하게됨으로 한울이 감응하야 비까지 온다하였었다.

6월 10일이다. 맹수와 같이 怒呼하든 군대들은 새벽 붙어 雲峴으로 몰려들어 大院君에게 호소하니 大院君이 친히 나와서 군대에게 利害를 말하고 먼저 해산붙어 하고 다시 선후책을 논의하자 하나 그들은 완강하게 듯지 안코 狂?怒濤의 勢로 다시 대궐로 몰녀 드러가서 입궐하였든 閔謙鎬와 前京畿監司
金輔鉉을 잡아내여 亂?亂刀로 처죽이고 내전으로 直犯하야 閔妃를 죽이랴고 搜索하니 例의 機敏한 閔妃는 궁녀로 변장하고 武監 洪在羲(후에 改名 啓薰)의 保護로 守衛兵 金聖澤, 韓億吉에게 엎여서 궁문을 가만이 나와 丹鳳門 밧 洪啓薰의 누의 洪尙宮의 집에서 잠시 난을 피하다가(그때에 閔妃가 亂兵에게 잡히였다가 洪宮人이라 詐稱하야 免禍하였다) 다시 尹泰駿의 집에가서 小轎를 얻어다고(花洞 閔應植의 집으로 피하였다가 또 東大門 밖 李圭翊의 집에 슴어 있었으나 그 亦 위태함으로 閔應植, 閔泳綺, 沈相薰외 某某의 擁護로 忠州 長湖院에 있는 應植의 숙부 閔泳緯의 집에 잠행하야 난을 피하니 그때 閔妃의 처참한 행색이야 었지 형언할 수 있으랴 當年의 영화부귀는 槿花一夢으로 化하야 무심한 松風鳥聲은 옛 시절의 三絃六角을 대신하고 맛있던 龍醬鳳湯은 山菜野蔬로 변하고 말었다. 천하만사야 었지 되였던 그는 自己殘命만 보전한 것을 다행히 생각하고 無量大佛에 감사를 올리였을 뿐이다.
閒話休題―이에 대궐 안에는 大小官員과 宮入厥層이 다 도망하고 궁전이 공허하게 되니 亂兵이 여러 궁전을 無人之境과 같이 橫行하고 王上은 緊急御命으로 大院君의 입궐을 청하야 군란의 진정을 哀訴하고 항상 大院君의 겻헤 있어서 禍亂을 피하였다. 궐내에서는 이와 같은 變亂이 있는 동시에 궐문 밖에 있는 一枝의 군대는 雨中임을 무릅쓰고 領議政
李最應의 집을 襲擊하니 最應은 大院君의 仲兄 興寅君으로서 閔妃가 대원군의 政敵임에 불구하고 閔妃에 아부하야 세력을〈115〉 부리던 터임으로 군대가 그를 또한 살해코자 함이였다. 最應의 子 載兢은 궐내에 달녀와서 大院君에게 운명의 구제를 애걸하야 大院君으로붙어 興寅君家에 침입치안이 할 事를 군대에게 청하였으나 때는 벌서 느진지라 興寅君은 상독 뒤에 숨어있었다가 亂軍鐵杖에 마저 죽고 집은 산산히 破壞를 당하고 또 美洞에 있는 閔昌植의 집을 破壞하는 동시에 閔昌植을 잡아내여 鍾路街上에서 亂刺打殺하고 捕盜大將 韓圭稷의 집도 襲擊을 당하였으나 韓은 다행히 身을 피하였을으로 죽엄을 면하였었다. 그외로 閔族一派의 피해된 자와 家屋의 毁破된 자가 또한 數가 없었다. 그날의 광경이야말로 참으로 悚懼悲慘하였었다. 한성의 전 시가는 血雨腥風에 코가 실만하고 砲煙火災에 눈도 뜰 수가 없으며 성내 성외에는 피난하는 남녀노소가 낙역불절하야 애호비명의 소리가 구천을 통하였다. 전일까지 薰天의 세도으로 별반의 驕奢를 다 부리던 閔族一派가 一朝에 었지 그러한 참화를 당할 줄 았었으랴 그 전날까지도 사람마다 閔家에 태여나지 못한 것은 한탄하던 것이 그 날에 와서는 閔家는 커녕 音相似한 文哥까지도 變姓슝? 하게쯤 되였다 또 작일까지 그리 온순하고 殘弱하야 모든 학대와 천시를 바드면서도 참어 오든 군대와 시민은 었지 그리 용맹스럽고 慄悍하게되였는지 그들의 향하는 곳에는 군주도 없고 국법도 없고 대원군까지도 없게 되였다. 그저 猛獅怒虎와 같은 기세로 國賦을 죽여라 閔族을 撲滅하라 어른이어든 목을 잘으고 아희여든 불알이라도 까고 여자여던 머리채라도 잡아 뽑아라 하고 高聲怒叱할 뿐이였다. 그리하야 한참동안에는 大院君이 다시 섭정이 되여 만기를 친재하고 군대를 선유하야 해산하라 하야도 도모지 듯지 안코 그저 閔妃를 죽여야만 퇴거하겠다고 聲言하니 大院君도 할 수 없이 令을 나리되 閔妃는 난군 중에서 이미 죽었은 죽 그리 알고 군대를 속히 퇴거하라 하며 국내에 閔妃의 喪을 발표하고 閔妃의 의관으로 假葬을 하기로 준비한 후 신정부 조직에 착수하야 李載冕(大院君長子)으로 訓練大將兼戶曹判書宣惠堂上을 식히고 군대의 安頓을 명하며 政務의 쇄신을 선언하니 군대들. 그제야 그 목적을 달하였다하고 大院君 萬歲를 고창하며 환호성 속에 궁중을 퇴하야 본영으로 도라갓다.

대저 이 군란은 李朝 建國이래에 처음되는 내변으로 불과 이틀 동안에 疾風迅雷와 같은 민속한 행동을 하야 10년이래 철옹성같이 견고하든 閔族政府의 무대를 근본적으로 소탕하고 大院君을 다시 집정케 한 것은 그네들의 큰 성공이요 누구나 경탄치 안이치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몃칠을 지나서 일대 난관의 일이 돌발하였으니 그것은 彼野心的 淸國의 간섭이다. 당초에 閔妃는 구사일생으로 忠州에서 난을 피하다가 驛官
卞元圭를 京城에 보내여 자기의 생존하였다는 것을 국왕에게 밀고하고 自己의 近親 閔台鎬를 囑하야 국왕에게 청국에 교섭하야〈116〉 내란 평정을 요구한다. 국왕은 다시 閔黨과 결탁하고 魚允中을 北京에 급송하야 그때 당지에 체류하는 領選使 金允植으로 사실의 진말을 淸政府에 보고하고 또한 兵을 청하니 此는 誤國亡社하는 妄計 중에도 큰 망계이였다. 閔族一派의 죄악을 말한다면 그보다 더 큰 죄악이 또 어듸 있으랴 이때에 淸國은 朝鮮이 丙子洋優 이후로 日本 及 世界各國과 점점 交通이 빈번하고 朝鮮에 대한 자국의 세력이 날로 감소함을 보매 언재이던지 기회만 있으면 세력을 다시 확장하랴고 하던 터이라 朝鮮에서 한번 兵을 청하매 被野心 勃勃한 李鴻章은 맛치 飢獸가 肉臭를 마튼 것 모양으로 千載好機로 생각하고 卽時 북양함대를 명하야 五營의 육군 약 오천을 실고 吳長慶, 袁世凱, 黃士林의 인솔하에 급히 朝鮮을 향하야 7월 14일(양8월29일)에 南陽灣에 도착하니 때에 朝鮮은 벌서 난이 평정되고 大院君이 다시 집정하야 만사를 정돈하는 중이였다. 彼等이 만일에 국제상 도덕의 양심이 있었다하면 바로 그 길로 그저 도라갈 것이나 彼等은 원래 특별튕? 야심이 있는 터인즉 었지 공연히 그대로 도라가고만 말리요 또 대원군이 당로하야 조선을 잘 요리하는 것은 자국의 불리로 생각하든 중에 가지 閔妃일파의 대원군 정적이 있은 즉 지나인의 소위 이이제이의 흉계를 써서 閔氏를 붓잡고 대원군은 제억하는 것이 큰 상책으로 생각하고 청병이 인경하든 제3일 바로 7월 16일에 大院君을 黃士林의 진중으로 유인하야 彼等은 말하기를 淸國 정부에서 당신을 좀 회견하자 한다 하고 불의에 군사로 大院君을 용위하고 南陽灣으로 직향하야 군함 定遠號로 天津까지 갔다가 다시 保定府로 옴기여 감금하니 鳴呼 大院君의 제2회 섭정도 삼일천하에 불과하고 여러 군대와 시민의 피와 고기로 싸워서 일우운 개혁의 공업도 일조수포에 도라가고 말었으며 한양의 시가는 청병의 말밥굽에 유린을 당하고 정부는 다시 閔族의 수중으로 도라가게 되였다.
淸兵은 이와 같이 大院君을 무리하게 잡아간 후 가진 횡포를 자행하야 조선 군병의 근거지인 往十里, 梨泰院 등지를 포위하야 다수한 군인을 학살하고 訓練都監, 禁衛營, 武術營, 御營廳, 總戒廳을 폐하고 자기의 마음대로 군대를 좌우전후 四營으로 편제하고 淸國軍隊의 敎鍊과 지휘를 밧게하였다. 그리고 일방으로 閔妃의 환궁을 청하야 소위 奉迎使
홍순옥과 陪從 이용익 등을 國望山中에 보내여서 閔妃를 영입한 후 전일에 발표하였던 閔妃喪을 철회하고 다시 민족일파로 정부를 조직하는 동시에 군란에 죽은 閔謙鎬, 閔昌植, 金輔鉉, 李最應 등에게 謚號贈職을 주고 大院君의 興黨인 李景夏, 鄭顯德, 許斌 등을 사형에 처하고 당시 명사로 국정에 참여하였던 金宏集 등을 축출하여 閔應植, 閔烱植, 閔台鎬를 重用하야 정권을 막기니 朝鮮의 정국은 다시 군란 이전의 원상으로(第111頁에 繼續)〈117〉(第117頁 車相瓚氏 論文에서 繼續) 회복하였었다. 그러나 淸國의 간섭은 전일보다 더욱 심하야 閔妃가 비록 다시 정권을 잡았으므로 만사가 다 吳長慶 袁世凱의 지휘를 받게되고 加之日本은 공사관 襲擊 及 거류민 살해 사건으로 문제를 이르키여 仁川에서 소위 濟物浦條約이 성립되며 5만원의 배상금을 지출하는 동시에 공사관 보호의 명의 하에 200여명의 군대를 京城에 주재케하니 이로부터 朝鮮은 엄연히 양국 감시 하에 있게 되고 후일 甲申政變時 日淸의 충돌이 생기게 되며 따라서 天津條約의 체결과 또는 甲午 日淸戰爭의 이러남을 보게 되였다.〈111〉
〈112-117,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