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大東亞戰爭과 半島의 武裝, 決戰大演說速記錄의 特輯

이강기 2015. 9. 5. 11:50
   
 
 
잡지명 삼천리 제14권 제1호
호수 제14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42-01-01
기사제목 大東亞戰爭과 半島의 武裝, 決戰大演說速記錄의 特輯
필자
기사형태 논설

과거 수 백년간 동양을 侵略하여 가진 搾取와 壓制로서 배를 부릴 뿐 아니라 我帝國의 東亞 共榮圈建設을 방해하던 동양 전 민족의 공동의 敵 米國과 英國 두 나라에 대하여 지난 12월 8일 帝國은 드디어 정의의 干戈를 잡게 되었으며, 開戰 삼일만에 我忠勇無比의 皇軍장병은 米英양국의 太平洋함대를 전멸시켰고 및 米英공군의 태반을 擊滅시켰을 뿐 아니라 12월 25일에는 영국의 동양침략의 牙城 香港을 함락시켜〈18〉 실로 戰史상 未曾有의 戰果를 나타낸 것은 국민전체의 기쁨만이 아니고 동양 전민족의 동경하는 바이다. 比律濱ㆍ 馬來ㆍ新嘉坡ㆍ보르네오등의 함락도 이미 시간문제로 되었는데 이 대동아 聖戰의 직후인 12월 10일, 國民總力聯盟에서는 半島민중의 武裝化와 결전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決戰大演說會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一. 決戰體制와 國民의 試鍊 ---
尹致昊
二. 敵性國家의 正體 ---
張德秀
三. 世界의 攪亂者는 누구냐 ---
申興雨
四. 新東亞 建設과 朝鮮 ---
金川聖
五. 我等 蹶起의 秋 ---
曺秉相

決戰體制와 국민의 試鍊
伊東致昊(
尹致昊)

지금으로부터 55년 前에 내가 처음 上海에 갔을 때의 일인데, 지금까지도 그 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上海의 蘇州河 건너편에 있는 英國租界에 갔을 때 그 租界의 공원정문에 『개와 中國人은 들어오지 말아라』라고 쓴 간판을 걸어놓은 것을 보고 나는 불쾌한 인상을〈19〉금할 길이 없었으며, 인류를 개와 같이 취급하던 그 때의 痛忿한 인상은 내 일생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이처지지 않습니다.
앵그로색손족이 교만하기란 말할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훌륭한 점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은 上海공원에만 이러한 간판을 걸어 놓은 것이 아니라 加奈陀ㆍ其他 자기들의 영토 안에는 백인밖에 살지 못한다는 간판을 걸어놓았었습니다. 즉 황인종은 들어오지 말아라는 무형의 간판을 걸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분해도 아무 말을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왔었는데, 지난 12월 8일에야 비로소 英米에 대한 帝國의 선전포고의 號外로써 이 원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젯 아침의 號外는 滿洲事變 때의 號外와도 다르고, 支那事變의 號外와도 다른 것입니다. 今番 日本帝國이 英米를 상대로 일어선 전쟁은 동양민족을 英米人의 압박 하에서 구해내자는 동양민족해방의 聖戰인 것이외다. 그러므로 동양사람이 되어 가지고는 누구나 이 싸움에 나서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再昨日 즉, 12월 8일 未明에 西太平洋上에서 帝國해군이 英米군과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으며, 그날 오전 11시 45분에 宣戰에 관한 詔書가 渙發되었는데, 이는 太平洋이 생긴 이후, 처음 되는 大戰으로서 이 大戰을 일으킨 책임-책임이라고 할는지 죄악이라고 할는지 여하튼 그 책임이 100퍼센트가 米國에 있습니다. 米國은 東亞에 와서 전쟁을 惹起할 필요도 없고 義理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은 실로 聖戰중의 聖戰이외다. 이 생각을 하면 나는 한 10年 젊어진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10억만의 동양민족을 英米人의 압박 하에서 구출하기 위해 數 3천마일 밖의 太平洋上에서 日本帝國의 陸海空軍이 싸울 때 우리는 더욱 긴장해야 할 것입니다. 無論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은 누구나 다 긴장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직장에서나 어떠한 사업에서든지 긴장하여 有事以來 처음인 이 때를 당하여 萬分之一이라도 힘을 공헌하여 帝國臣民된 보람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明治 38년 5월에 東鄕大將의 對馬島海峽에서 발틔크함대를 분쇄할 때에 日本帝國의 국력과 국민의 명예가 세계적 시련을 받고 一躍하여 세계 최강국열에 進參하였습니다. 그 때 東鄕大將의 信號『皇國의 興廢 此一戰에 있다』함은 다만 발티크함대와 승부를 결한 것이 아니라 日本帝國이 新東亞의 盟主가 되고 못될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제국이 결전할 무대는 조그마한 해협이 아니라 太平洋입니다. 상대자는 일개 함대가 아니라〈20〉 세계에서 2, 3가는 大海軍國群입니다. 皇國의 興廢가 此 결전에 있을 뿐 아니라 전 동양 여러 민족의 興廢가 此 결전에 달렸습니다. 이야말로 聖戰이오 이러한 空前絶後한 大시련을 우리 1억만 국민이 堪當할 결심과 능력이 있느냐 하는 초점에 세계이목이 집중하고 있습니다.
內地 8천만 동포는 이 시련을 감당할 만한 결심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大和民族은 우으로 萬世一系로 天壤無窮하신
황실을 중심으로 奉戴하여 2천 6백年 攸久한 세월에 ?養한 忠君愛國의 赤誠과 아래로 百戰百勝한 무사의 전통적 훈련과 용감과 정신이 그 血이 되고 그 근육이 되고 그 골수가 되어 여하한 경우든지 난국을 돌파하는 堅忍性과 奮鬪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半島사람인 만큼 이 결전체제에 상당하여 우리 半島민중이 內地人 같이 이 大試鍊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관심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소질이 나뿐 것이 아니라 屢百年 文을 尊崇하고 武를 천시하던 습관이 아직도 우리사상을 지배하는 까닭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지금 생각되는 逸話一節을 말하렵니다. 지금으로부터 40餘年前에 그 때 임금께서 동대문 밖으로 거동하실 때에 侍從하던 무관중의 한 사람이 허리에 차고 다니던 環刀의 칼날을 빼여놓고 빈 자루만 칼집에 꽂고 하는 말이 「임금을 뫼시고 가는 사람이 칼을 몸에 차고 가는 것은 不敬이라」하였다 합니다. 이같이 극단으로 文弱한 사상과 습관에 빠진 우리가 용감과 ?鍊과 堅忍을 최고도로 요구하는 이 大試鍊을 돌파할 수 있을까 하는 杞憂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결점은 우리 민중의 본능적 결점이 아니오 다만 古來 풍속과 습관의 缺點遺物이므로 개선할 수도 있고 또 개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결전의 시련을 우리가 잘 치르고 못치르는 것이 우리 2천 4백만 동포의 興廢運命을 결정할 것이며, 국가가 危急存亡之秋에 직면한 이 때에 우리가 內地동포와 더부러 銃前銃後를 물론하고 內鮮一體의 大이상을 실천화하여 甘苦를 가치하고 死生을 가치하자는 결심을 가져야만 우리 존재와 장래가 明朗化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國策에 背馳되는 행동이나 사상을 취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자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가 內地同胞와 一心合力하여 가치 勤勞하며 가치 忍耐하며 가치 奮鬪하여 동양인의 동양을 건설하는 雄圖와 결심을 가지고 邁進한다면 신동아 여러 민족이 共存共榮하여 백인의 인종적 차별과 傲慢한 압박을 벗어버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은 來日 아침에 태양이 동쪽 하늘에서 솟아오를〈21〉 것같이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늙은이니 만큼 최후로 노인들에게 일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청년들과 가치 활동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의 활동을 ?勵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재래풍속과 습관에 相違되드라도 國策에 순응하는 일이면 노인들이 激勵합시다. 예컨대 지원병제도와 國民皆勞運動에 대하여 노인들의 사상과 태도가 청년들의 태도와 사상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이 있습니다. 자손간에 지원자가 있거든 ?勵합시다. 금년 지원자가 25만名에 달한 것을 보면 半島청년들의 소질이 武를 천히 보지 않는 증명이오 노인들이 좀 더 勸?하면 지원자의 質과 量이 一層 더 향상될 것입니다.
國民皆勞는 半島민중의 활로를 개척하는 비결이오 재래 노동을 천대하던 習俗을 타파하려면 노인들이 구식사상과 습관을 청산하여야 되겠습니다. 전 세계가 奮鬪하고 근로하여 優勝劣敗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만 6, 70年前 구식대로 文弱한 생활과 놀고먹는 습관을 계속하려면 필경 落伍劣敗者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한즉 우리 노인들도 우리 사는 지방과 형편에 따라 무슨 報國運動에든지 한목 끼워서 청년들의 활동을 도아줍시다. 廢物利用하는 이 時局下에 우리는 노인이라고 自暴目棄맙시다. 기왕에는 노인은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마는 현재에는 노인은 노인대로 쓸데가 있습니다. 오늘 밤에도 내가 노인이기 까닭에 이 강연을 하라 한 것입니다. 나도 노인인 까닭에 승낙한 것입니다.
(拍手) 〈22〉

ABCD包圍陳의 兵力配備




敵性國家의 正體
張德秀

一. 支那事變은 완전히 끗막고 東亞天地에 共榮圈을 확실히 세우는 것은 帝國이 中外에 선포한 回天의 大業임니다. 이 대업을 방해하는 나라가 즉, 敵性國家인데 이러한 敵性國家는 말할 것도 없이 이른바 ABCD의 國家群임니다. 亞米利加, 英國, 支那, 蘭印임니다. 그 중에서도 지도적 지위를 점령하고 있는 강국은 英米의 두 나라임니다. 이 두 나라야말로 對日包圍陣의 本陣이라고도 할 수 있음니다.
佛蘭西도 일즉이 英米를 추종하는 나라로서 帝國의 진로를 방해하는 敵性國家이였지만 한번 獨逸의 鐵槌을 마즌 이후로는 七零八落하여 아무러한 힘이 없고 더욱이 皇軍이 佛印에 進駐한 이후에는 和順協調에 惟恐不及이외다. 獨逸과 伊太利는 제국의 盟邦이오 蘇聯은 東亞政局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帝國과의 중립조약을 근본국책으로 하고 있음니다. 물론 그가 아즉도 共産主義에 입국하고 있고 對獨결전에 있어서 英米의 후원을 절대조건으로 하고있는 이상 그러고 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는 支那의 공산당이 의연히 항일전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어듸까지든지 제국의 友好國이라고는 할 수 없음니다. 未*不 장래에 경계를 요하는 바이지만 여하튼 現下 실정에 있어서는 帝國과의 중립조약을 不動의 國策으로 하지 안을 수 없는 형편에 있음니다.
그런즉 이 때에 帝國의 동아정책에 대하야 적극적으로 敵對性을 발휘할 수 있고 또 현실에 적대성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는 英米의 두 나라뿐임니다. ABCD진영의 그 외의 국가들과 또 장래 米國을 추종하리라고 불 수 있는 南米의 諸 小國家와 같은 것은 그야말로 凱袖一觸, 족히 掛論할 것도 못되는 것임니다.

二. 그러면 日本의 적성국가로서의 英米의 정체는 어떠한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英米는 모다 세계최대의 當를 자랑하는 富國이외다.〈24〉세계최대의 해군을 자랑하는 강국
이외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富强의 실상여부를 논의코자 하지 안슴니다. 원래 英米가 제국의 적성국가가 되는 것은 그들이 부강한 까닭이 아니라, 그 부강을 의지하야 東亞의 신질서, 나아가서는 세계의 新秩序建設을 방해하는 구 세력이 있는 때문이니 나는 차라리 英米문명의 근본이데올로기를 검토하야 그 정체를 이 방면으로부터 폭로하고자 함니다.

三. 첫째, 英米는 예수敎國이라고 칭하고 있지만은 예수敎國이 안임니다. 그와 반대의 강권국가임니다. 예수의 사랑우에 나라를 세우고 그 도의에 의하야 행동을 규정하는 예수敎國이 아니라 한갓 世欲에 의하야 강력 우에선 權力國家임니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여서 예증을 들 것까지도 없지만은 英米에 가서 친히 聞見한 一端을 드러 여러분께 참고로 드리고자 함니다.
예수敎國이라고 자처하는 米國에 원래 노예와 같은 비인도적 문제가 존재할 리가 없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80年前에 흑인노예의 문제로서 4年동안이나 悲風慘雨의 南北戰爭이 있었든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 임니다. 아니 흑인의 虐待問題는 오늘날에도 오히려 해결되지 못한 사회문제의 중대한 일부면임니다.
일례를 들면 하로는 뉴-욕의 종로라고 할만한 「부로오드ㆍ웨이」의 한 식당에 점심을 먹으려 갓섯음니다. 음식의 주문을 마치고 안젔노라니까 한 4, 50 되여 보이는 점잔은 흑인 한 사람이 드러와서 역시 점심을 사먹으랴는지 손에 드럿든 「가방」을 옆에 놋고 식탁을 의지하야 안젓슴니다. 얼마있다가 그 식당주인이 그 사람에게 가서 무어라고 몃 마듸를 속살거린즉 그 흑인은 얼골에 분기를 띄고 자리를 차고 나아감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주인을 불러 사유를 무른즉 그 대답이 우리 집에서는 흑인에게 음식을 팔지 안슴니다 함니다. 웨, 흑인의 돈에는 「녹」이 쓸었드냐 한즉 흑인에게 음식을 팔면 백인 손님들이 오지를 안는다고요. 다음으로 내가 친히 당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음니다.
오레곤 대학에 있을 때에 그 洞里 어떠한 이발소에 이발을 하라갓음니다. 그런즉 그 집주인이 하는 말이 우리는 동양사람의 머리는 깍지 안는다고. 웨 동양사람의 머리털은 쇠사실인줄 아느냐 한즉 하여튼 동양사람의 머리는 안 깍는다는데 무슨 잔소리냐 해서 할 수 없이 대학 안으로 도라와서 이발을 한 경험이 있음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色의 구별도 없고 性의 구별도 없다는데 예수敎國이라고 자처하는 米國에는 이와 같이 有色人種에 대한 차별이 심함니다.
英國은 어떠함니가. 천하의 紳士國으로〈25〉 自任하는 英國은 阿片과 같은 비인도적 상품을 팔 리가 없을 것 같지만은 사실은 그 阿片을 팔기 위하야 한 100年 前에 支那와 阿片戰爭을 한 것은 여러분의 기억에도 새로울 줄 암니다.
나는 그보다도 더한층 慘酷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음니다.
「엘리자베스」여왕시대라면 영국역사에는 꽃으로 치는 시대임니다. 「드렉」과 같은 名將도 그 때에 낫고 「쉑스피아」와 같은 詩聖도 그 때에 낫음니다. 이러한 이를테면 名君聖朝人때에 한 勅令이 나렸음니다. 그것은 英國사람에게 노예를 무역하는 특권을 허락한 것임니다. 그 문구의 대의는 이러함니다. 「영국사람은 누구나 총과 칼을 들고 亞弗利加의 촌락을 襲擊하야 붓잡히는 흑인은 男女老幼를 물론하고 모다 노예로 팔 수 있다」하는 것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도적질을 공연하게 국법으로서 英國사람의 특권으로 허락한 것임니다. 이 소위 특권에 의지하야 조직된 遠征隊의 첫 배이름이 무었이냐 하면 「예수」 Jesus라는 배였음니다. 오늘날 英國의 유명한 항구의 하나인 「리바-푸울」과 같은 항구는 이러한 노예의 무역으로써 살진 항구임니다.
英米의 역사를 훌터보면 그 富强의 배후에는 이러한 노예의 억울한 눈물과 분한 피가 뛰고 있음니다. 이러한 나라를 道義의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음니가. (拍手)

四. 둘째, 英米는 自由主義ㆍ個人主義의 나라라고 함니다. 그러나 사람도적질을 공연히 허락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가 참으로 개인의 존엄을 늣기는 個人主義를 세울 수가 있으며 인격의 자유를 존중하는 自由主義를 엿볼 수가 있음니가. 대개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고는 도덕의 터를 닦을 수가 없고 도덕의 터가 문어진 곳에 個人主義나 自由主義의 집을 세울 수는 없음니다. 英米의 個人主義는 결국 利己主義이오 自由主義는 放恣主義에 불과한 젓임니다. 다시 말하면 天理가 끈어진 곳에 私欲만이 춤을 추는 젓이 英米의 個人主義이오 自由主義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토대우에 과학으로 싸아 노은 것이 곧 이른바 産業主義임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우에 선 英米사회에서는 그럼으로 노동자는 일개 사람이라기 보다도 몬저 생산의 수단이오 자본가는 일개 국민이라기 보다도 몬저 자본가임니다. 이와 같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교환가치의 관계에 서서 이익을 다토는 것이 英米의 사회조직임니다. 거기에는 이해도 없고 동정도 없고 다만 利害狡計가〈26〉 있을 뿐임니다. 강한 자는 살고 약한 자는 죽을 것 뿐임니다. 弱肉强食하는 동물사회에 무슨 自由主義ㆍ個人主義가 있을 리가 있음니다. (拍手)
나는 英國의 과거 産業史를 읽고 그 소위 산업주의의 문명이 핵심으로부터 썩어진 것을 痛切히 늣기였음니다.

五. 이와 같이 自國內에 功利主義의 文明堂礎를 가진 英米가 밖으로 도덕의 손을 펼 수가 있음니가. 인자의 덕을 싸을 수가 있음니까. 무었보다도 사실이 증명임니다. 東亞의 列民族은는 그 搾下에 피가 마르고 그 暴虐하에 뼈가 굽었음니다. 印度는 어떠함니가. 「말레이」는 어떠함니가. 蘭印과 支那는 어떠함니가. 여러분,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맷고 악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맷슴니다. 皇道 日本帝國의 敵性國家인 英米의 정체는 이에 있음니다. (拍手)〈27〉

世界의 攪亂者는 누구인가?
申興雨(高靈興雨)

세계정세는 時時刻刻으로 변하야 오늘 저녁의 이 문제는 검토할 필요도 없게 되였다.
그러나 數日 前에 이 문제가 발표된 고로 나는 공중에 대한 신용을 직히기 위하야 지금 여긔에 몃 마듸 말씀을 하게 되였다.
세계를 攪亂케 하는 자는 곧 과거 數 百年동안에 經濟的으로 政治的으로 軍事的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화할랴는 자들이 곧 그이다.
他人種 他國家를 교묘한 수단과 野獸적 폭력으로 侵略搾取하면서도 자기들은 他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망상하던 자들이 곧 攪亂者이다.
이것도 어떤 기초적 관념에서 출발된 것이다. 英國의 自由貿易론을 주장한 「아담ㆍ스밑」까지 遡及하기는 시간상 불가능하며 近代 英國人으로 앙글로싹손족에게 즉 英國ㆍ米國ㆍ加奈陀ㆍ濠洲ㆍ新西蘭ㆍ南亞弗利加人에게까지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준 문인은 「킾풀링」이다.
그는 1907年에 노벨상까지 바든 사람으로 그는 소위 「白人의 짐」(負擔)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모든 有色人種의 할 바 일을 白人種이 대신하고 그들을 지도하여야겠다는 말이다.
또 그는 「東은 東이요, 西는 西이니 결단코 짝하지 못한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東洋과 西洋은 합하지 못한다 함이다. 「킾풀링」의 사상은 즉 英米人의 대표적이다. 몇 십년동안 국제회합이 있는 때에는 種種으로 「킾풀링」의 말을 인용하게 되였다.
今般에 日米회담의 顚末을 정부에서 발표한 것을 읽어볼지라도 「앙글로싹손」족의 우월감을 현저히 보이고 있다. 이 관념이 곧 東洋에 대한 英米 사람들의 정책을 지배하고 있었다. 英國으로서 印度ㆍ緬絢을 압박한 것이나 支那에 대한 阿片戰爭이나〈28〉 香港ㆍ上海ㆍ威海衛등지를 점거한 것이나 또는 馬來半島와 뽀니오의 財源을 착취한 것이나 米國이 하와이 比律賓 「꾸암」 及 「웨익」諸島를 점령한 것이나 지금의 太平洋에 산재하야 있는 여러 섬에다가 해군과 항공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나, 人道主義와 데모크라시를 제창하면서도 파리 講和會議에서 인종평등을 용인치 않은 것이나, 모도가 그 원인이 이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리하야 동양인뿐 안이라 유색인종 전부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고로 오늘 이 때에 우리 동양이 전력을 다하야 이 包圍網을 돌파하지 안코서는 우리의 장래는 백천代가 되도록 영구한 羈絆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一億, 안이 거긔서 더 나가서 동아의 십억의 목표는 新嘉坡ㆍ馬尼剌ㆍ眞珠灣 등의 위험을 근절하는데 있다. 그 다음에는 그 관념까지 제거될 것이다. 인류의 平等과 平和가 올 것이다. (拍手)〈29〉

新東亞建設과 朝鮮
每日新報社長
金川聖(舊名 李聖根)

지난 12월 8일은 我等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념할 날이다. 사실은 지난 2월 8일부터 日米간의 사태의 긴박과 위기를 전하고 있었는데, 당시 野村大使를 派遺하여 日米交涉을 진행시켜 왔으며, 다시 來栖大使의 派遺까지 보게 되였으나 頑迷한 米國의 태도로 평화와 정의를 旗帳로 하는 제국의 의견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우리 一億동포의 예감에도 짐작되여, 日本間에 戰火가 벌어질 날이 내일이냐 모레냐 하고 대포소리가 터질 것만 기다려 젔었습니다. 그러나 7일 밤까지도 몰랐던 이번 전쟁은 8일 未明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砲門을 열게 되였으며, 이 宣戰의 號外로 접할 때 滿場의 여러분도 응당 환희에 가슴이 터질 듯 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無論, 누구나 싸움을 싫여하는 것은 인생의 철학상 공통된 심리이겠으므로 우리 帝國 역시 전쟁을 즐기고 사람을 죽이기를 기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新東亞建設을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不得己 정의의 검을 빼여들게 되였습니다. 즉, 惶恐하옵게도 지난 8일 對英米宣戰布告에 관하야 漁發하옵신 大詔에
「東亞의 안정을 확보하야서 세계평화에 기여함은 丕顯한 皇祖考丕承한 皇考의 作述한 遠猷이어서 朕이 奉奉不措하는 바이다」
라고 말슴하신 것과 가치 東亞에 신질서를 건설하야 東亞의 안정을 확보함으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우리 나라 皇祖皇宗으로부터서의 遠大하옵신 御抱負, 御經論이옵시며, 따라서 我國不動의 國是입니다. 그러므로 明治시대에 이러난 日淸 日露의 두 전쟁은 東亞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帝國의 聖戰이 序幕이었으니, 특히 日露戰爭은 東亞에 뻐치는 백인 露西亞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東亞新秩序建設이 첫 烽火이었습니다. 이리하야 帝國은 日露戰爭에서〈30〉 未曾有의 대승을 博하야 滿洲에서 露西亞의 세력을 一掃하였고, 뒤이어서 露西亞 대신으로 다시 滿洲에 魔手를 뻐칠냐고 하는 米國의 음모를 一蹴하였습니다. 日露戰爭 후, 米國의 鐵道王 「하리만」은 南滿洲 철도사회를 日米共同管理로서 경영할 것을 제안하야 이에 관한 당시 我國政府와의 가조약이 성립되여 幾多將兵의 피를 흘리여 있든 滿洲의 권익이 다시 米國의 손으로 드러가고, 이리하야 우리 나라의 대륙경영의 好機가 미국의 好餌가 될냐고 할 때에, 小村外相의 强硬한 반대로 말미아마 이 米國의 야망은 드디여 완전히 좌절되여 버렸습니다. 小村外相 이야말로 東亞新秩序建設을 明治시대에 있어서 벌서 計劃하고 企圖한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이 小村外相의 반대가 없었드라면 滿洲는 米國의 식민지가 되여 지금쯤은 東亞의 사태가 어떻게 되였을 ** ******.
이렇게 日露戰爭을 치른 뒤 我國은 점차로 大陸經營의 地盤을 가다듬어 갔으니 昭和 6년 9월에 勃發한 滿洲事變은 帝國이 日露戰爭에서 착수한 東亞新秩序建設運動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킨 획기적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滿洲에 蟠居한 張學良政權은 중앙의 蔣介石政府와 또 이를 操의하는 英米의 세력을 먹고 가끔 帝國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럴 때마다 帝國의 穩忍自重, 張學良政權의 반성을 促하야 왔습니다마는 그러나 인내에도 한도가 있는 것으로 帝國은 드디여 결연히 이러나 輕躁浮薄한 張學良政權을 물니치고 滿洲 3천만민중의 總意에 조차 淸朝의 후예를 모시여 滿洲國을 새로 건국하였습니다. 滿洲國은 실로 東亞에 있어서 民族協和, 王道樂土를 이상으로 하는 道義的 국가입니다.
軍閥의 虐政을 一掃하고 東亞에 樂土를 맨들었습에 불구하고 蔣介石政權은 滿洲國의 성립을 또 끝내 부정하야 왔고 특히 米國은 滿洲事變 勃發초부터 九個國條約을 방패로 내세워 백만으로 滿洲國건설을 비방하였습니다.
英國도 米國에 지지하게 날뛰여 英米가 결탁하야 가지고 國際聯盟을 움지기여 滿洲國을 부?¸하였습니다.
그 뒤 蔣介石은 국민의 전력을 排日에 집중시키고 傾注시키여 있었을 적마다 帝國에 不遜을 거듭하야 사태가 不穩을 極하야왔고, 이리하야 드디여 昭和 11年 蘆溝橋의 一發銃聲이 支那事變을 이르키기에 이르렀습니다. 事變勃發當初 帝國의 不擴大方針에 불구하고 蔣介石政權은 英米의 세력을 믿고 무모한 抗日을 계속하야 사변은 드디여 收拾할 수 없이 크게 버러젔습니다. 그 동안 帝國의 무적 陸海空軍은 敢行하야〈31〉 蔣介石은 드디여 一小地方政權으로 몰락하야 瀕死의 지경에 허덕어리고, 南京에는 反共和平을 종지로 한 親日의 新生國民正統政府가 탄생하야 帝國과 긴밀한 연락아래에 新生支那의 건설, 나아가 新東亞建設에 邁進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듸까지든지 東亞를 노예상태에 두어 搾取와 압박을 마음대로 하랴는 米國과 英國은 사변의 장기화를 꾀하야 노골적으로 또 執拗하게 蔣政權을 원조하야 帝國과 항전을 계속시키고 있습니다. 支那事變의 完遂를 방해하고, 東亞의 新秩序建設을 阻止하는 것은 진실로 英米 두 나라입니다.
英米 두 나라는 19세기의 中葉부터 서로 전후하야 東亞 특히 支那에 魔手로 뻐치여 支那를 그들의 반식민지로 맨든 凶暴邪雲한 국가입니다.
英國은 印度를 잠식한 뒤에 그 毒牙를 支那에 뻐치여 1839년에 유명한 阿片戰爭을 이르키여 香港을 뺏고, 廣東, 履門, 寧波, 福州, 上海등 5港을 개항시키여 支那침략의 第一步를 내듸듸였습니다. 이리하야 阿片戰爭을 결말지은 1842년의 南京條約의 결과로 英國의 對支侵略의 홍수는 怒濤가치 몰녀들어 순식간에 全支那를 석권함에 이르러, 支那民衆이 排外熱은 극도로 沸騰되여 드듸여 1850년의 長髮賊의 亂을 보게되였습니다. 그러나 支那의 국력은 衰弱의 一路를 밟어 이 亂으로 말미아마 英國은 더욱더 깊은 근거를 支那 全土에 밖에 되였습니다.
이 뒤에 所謂 「애로」사건을 導火線으로 하야 第二次英支戰爭이 버러지여 天津條約이 체결됨으로 지나는 牛莊外 5港을 다시 개항하고, 揚子江을 개방하였으며 1860년에는 英佛聯合軍이 支那와 開戰하야 支那는 北京條約으로 다시 天津을 개항하고 九龍을 英國에 割讓하게 되였습니다. 이리하야 해가 갈수록 英國의 支那蠶食은 擴大强化되였고, 英國보다 느께 출발한 米國은 支那에 대하야 機會均等, 門戶開放이라는 金看板을 내세워 가지고 英國과 함께 支那의 집정자를 操縱弄絡하면서 經濟的으로 착취하기 시작하야 英米합동으로 支那를 완전히 식민지화, 노예화함에 이르렀습니다. 蔣介石정부가 진실로 支那의 救國을 위할진댄 모름직이 이 가치 자기나라를 뼈꼴로부터 파먹어 드러가는 英米양국의 세력을 구축하야 東亞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끈어 支那를 구하고, 東亞를 구하여야 하겠거를, 자국을 위하야, 그리고 東亞를 위하야 粉骨碎身하는 同文同種의 日本에게 향하야 干戈를 들어 적대하는 것은 실로 不可解의 일이라 하지 안을 수 없습니다. 蔣介石은 銘記하여야 할 것이니 日本帝國은 결코 支那의 적이 아니다, 支那를 구하기 위한 善隣이요〈32〉 友邦이며, 支那의 진정한 적은 凶雲하고 狡猾한 英米인 것입니다. 英米를 支那에서, 東亞에서 驅逐하지 못하는 한 , 東亞에 평화는 없고 따라서 東亞新秩建設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支那事變은 겉으로는 蔣介石과의 전쟁이지만 실은 英米와의 전쟁이어서 帝國은 蔣介石의 뒤에 숨은 英米와 싸홈하야 왔거니와 이제 지난 12월 8일로서 帝國은 英米에 宣戰하야 정면으로 이를 격파하지 안는 한 支那事變의 完遂는 생각할 수 없고 따라서 新東亞建設은 실현할 수 없으니 오늘날의 米??에 대한 개전은 실로 支那事變을 해결하고 東亞에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聖戰입니다. 그러므로 帝國은 어떠한 일이 있드라도 英米를 격파하야 新東亞建設의 대 목적을 달성하지 안으면 안됩니다. 帝國은 그 동안 완벽의 臨戰體制를 정비하였고 一億臣民이 필승의 신념에 불타고 있으니 무적의 陸海空軍이 출동하는 곳에 英米軍은 여지없이 분쇄될 것입니다.
도라다 보건대 半島는 滿洲事變의 勃發을 계기로 하야 皇國臣民으로서의 자각이 현저하야왔고, 支那事變이 이러낮다. 皇國臣民으로서의 자각이 고조에 달하야 그 동안 헤아릴 수 없는 銃後奉公을 다하야 왔습니다. 銃後奉公 뿐만 아니라 지원병으로 수련을 닥고 第一線에 勇躍出動하야 호국의 영령으로 散華한 용사까지 있게되여 半島의 愛國熱은 바야흐로 최고도로 沸騰되여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半島는 帝國의 東亞新秩序建設상 대륙의 병참기지이며 제국의 식량기지로서 제국의 전시식량을 相當하고있고, 金銀基地諸種의 軍備上 필수의 鑛物多數히 산출하야 戰時帝國의 一翼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다 皇國臣民으로서 자각한 半島 2천 4백만 민중의 애국지성의 발로이지만 그러나 진실로 半島民衆이 순국열정을 발휘할 때는 이제 닥처왔습니다. 오늘날의 英米와의 전쟁이야말로 帝國과 東亞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입니다. 이 때를 당하야 半島民衆은 더욱 鐵石의 단결을 굳게 하고 육신과 물자와 노력을 바치여 國家奉公에 邁進하기를 기하여야 합니다. 만일 이 때에 조금이라도 往平의 英米類의 자유주의적 색채의 사상을 包懷하는 자가 있어서 민중의 애국지성에 奔馳하는 赤誠을 攪亂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儼然히 또는 冷然히 이 같은 反國家的, 反時局的 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나아가 모든 艱難과 결핍을 참고 견듸여 장래의 광명을 바라보면서 일치단결하야 國難突破에 邁進하지 안으면 안됩니다. (拍手)〈33〉

我等蹶起의 秋
夏山茂(舊名 曹秉相)

지난 12월 8일, 我帝國은 米英의 搾取와 壓迫밑에 있던 동양을 구출하기 위하여 정의의 검을 빼여들게 되였음니다. 지금으로부터 641년前 印度는 실로 찬란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였으나 英國이 印度를 빼앗아먹은 뒤로는 그 민족의 문화를 저하시키고 교육향상의 주력함이 없이 다만 300년間을 물자와 그들의 노력을 搾取하기에만 힘써왔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印度사람을 버렸고, 단지 심한 도적의 행위만을 일삼아 왔음니다.
그 뿐만 아니라 英國은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소위 阿片戰爭이라는 것입니다. 이 阿片戰爭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이지만 印度에다가 阿片을 재배해 가지고는 中國에 가지고 가서 판매하여 支那민족으로 하여금 퇴페하게 하고, 나약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멸망의 구렁털이에 집어넣는 인류 최대의 罪惡史를 비져내였던 것임니다. 당시 이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痛嘆한 林則徐總督이 阿片의 수입을 반대했으나 英國이 듯지많기 때문에 不得己 二萬斤의 阿片을 적재한 상선들에 불을 질렀음니다. 이것에 격분을 일으킨 英國은 군함을 보내여 무력으로써 林則徐總督을 降服시키고 손해배상으로 香港을 빼앗었던 것이외다.
이리하여 英國은 香港을 동양착취의 최대 기지로써 일세기에 ?하여 사용해 왔었는데, 이 香港이 지금 우리 皇軍의 包圍하에 있어 陷落될 날이 시간문제에 달려있게 되였음니다. 이제 不遠한 장래에 이 香港이 우리 皇軍에 陷落되는 날이면 동양은 동양인의 동양이 되는 첫 승리가 될 것이니 응당에 지하에 있는 林則徐總督도 이 快消息을 접할 때 춤을 추것임니다.
그들 英米人 등은 馬來, 佛印, 香港만이 아니라 上海, 北京, 天津 등 각지에 租界를 가지고 搾取에 搾取를 거듭해 왔던 것이외다. 만일 그들〈34〉 앵글로색손족이 살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동양에까지 왔었다면 혹 용서할 점도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많은 영토와 많은 자원을 가지고도 더 욕심을 채우려고 동양에까지 기여들어서 동양인이 먹고 입어야 할 것까지 빼앗아 갔음니다. 이것이야말로 필요 이상의 악심이오, 따라서 生活保定이 아니라 豪華를 위한 탐욕인 것이외다. 이러한 그들의 호화를 위해서 동양민족은 오랫동안 呻吟을 해 왔었고 침략을 당해 왔었음니다.

이제 우리는 또 米國의 罪惡史를 봅시다. 米國은, 日露戰爭때 日本을 찬성했었으나 그것은 日本을 위해서가 아니라 딴 욕심이 있어서 그리했던 것임니다. 그것은 무었인고 하니 皇軍이 피를 흘려서 획득한 南滿洲鐵道를 米國정부의 하리만손이라는 사람이 부하 30餘名을 데리고 와서 돈으로 바꾸자 했음니다. 日露戰爭뒤에 오는 경제의 곤란을 기회로 하여 돈을 바꾸자고 하면 으레이 바꿀 줄 알았던 米國은 그것이 성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日本을 반대시하여 왔었던 것임니다. 그리고 日本이 강국이 되여가서 동양의 지도적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을 米國은 猜忌하여 동양에서 日本을 집어치우면 문제없다는 생각으로 우리 帝國에 여러 방면으로 방해를 끼쳐오다가 최근에에는 소위 ABCD包圍陣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經濟的으로, 혹은 政治的으로, 軍事的으로 압박을 가해 왔던 것이외다.
그들이 항용 절규하는 바 道義와 평화는 말뿐이인 실제에 있어서는 10억의 동양인을 蔑視하고 노예시하여 왔던 것이며, 및 搾取의 대상을 삼아왔던 것이외다. 실로 그들 때문에 10억의 동양인의 발전은 없었음니다. 오직 빨리기만 했던 것이외다. 이에, 帝國은 분연히 일어나서 그만 빨리자, 이 때까지 빨리였던 것을 토해 내여 놓아라, 다시는 못 빨아 먹도록 일격을 가하자는 뜻 밑에서 今番 大東亞聖戰에 검을 빼여 들었음니다.
이 太平洋上의 전쟁이야말로 我等 동양인을 저 포악해 米英의 搾取下에서 구출해내는 聖戰으로, 我等 국민은 단연 蹶起하여야할 때임니다. 一億의 皇軍이 前衛隊가 되고, 다음은 滿洲, 다음은 잠깐 支那, 다음은 泰國, 이리하여 十億의 동양민족은 한 뭉치가 되여서 英米의 세력을 처서 깨트리고, 동양의 천지에서 몰아내여야할 때임니다. 이에 있어서 滿洲가 뜻을 가치하고, 잠깬 支那가 또한 그렇고, 泰國이 또한 뜻을 가치하여 皇軍의 泰國國土進駐와 共同防衛에 협정한 것은 실로 기뿐 일이오, 이는 역시 동양의 같은 피가 서로 상통하는 점이라 생각함니다. 동양의 피가 한데〈35〉 묵겨서 일치협력하는 때에는 무서울 것이 없고 못때려 부실 것이 없음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皇軍 혼자서 개전 삼일만에 벌써 英國의 주력함대를 깨트려 부셨고, 하와이 眞珠灣의 米國의 주력함대까지 때려부셨다는 것은 호외로 다 보셨을 것임니다. 이는 我國이 정의를 위해서 일어섰기 때문에 신이 함께 했던 것외이다. 忠勇無敵의 皇軍의 奮戰도 奮戰이지만 정의를 위한 싸움에는 신도 도와주는 것임니다. 사실상 我國은 아직까지 침략을 위해서 병기를 든 일은 없음니다. 벌은 하늘이 내리시는 것임니다. 그러기 때문에 英米함대는 太平洋上에서 벌을 발았음니다. 즉, 정의의 蹶起에 신의 도음이 묵겨서 皇軍은 연전연승케 되는 것임니다.
오늘 낮에 某席上에서 南總督께서 말슴하시기를 「어떠한 전쟁에서든지 처음에 이기는 편이 끝까지 이긴다」 하셨는데 이는 진리라 생각함니다.
처음에 이긴 아군은 끝까지 이길 것을 확신하고 我等은 다가치 궐기하여 英米를 향해서 「그만 빨아먹어라, 이미 빨아 먹었던 것을 내여 놓아라, 다시는 빨아먹어서는 안던다」 경고와 할께 단연코 英米의 세력을 타도하지 않아서는 안됨니다.(拍手)〈36〉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