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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諸問題의 回想記, 總督府 前高官 座談會

이강기 2015. 9. 5. 11:47
   
 
 
잡지명 삼천리 제10권 제1호
호수 제10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8-01-01
기사제목 朝鮮 諸問題의 回想記, 總督府 前高官 座談會
필자
기사형태 대담·좌담

좌담출석자
貴族院議員 法學士 前政務總監 水野鍊太郞
貴族院 前 警務局長 赤池濃
同 前 學務局長 柴田善三郞
同 前 警務局長 丸山鶴吉
衆議院議員 前 總督秘書官 水屋榮夫
元新瀉縣知士 前 京畿道警察部將 千葉了
前 朝鮮總督殖産局長 松村松盛
東洋協會編輯部 山上昶

그 당시의 治安維持와 警務當局의 그때 고심
記者 - 大正 8년 이후에 통치의 任에 당한 여러분들의 임무는 용이한 것이 아니엿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의 일은 신문지상을 통하야 어렴푸시 알수 있사오나 실제 그 局에 當한
여러분들노부터 상세한 말삼을 듯는다면 장래의 참고도 될뿐 아니라 역사적 자료도 되리라고 생각하오니 될 수 있난대로 상세히 말삼하야 주십시오. 꺼리끼는 일이 없스시면 당시의 朝鮮總督府官制改正에 대하여서와 인사에 밋치기까지 상세히 말삼하야 주시기를 바랍니다.

水野前政務總監은 이러케 말하다
大正 8년 3월 全鮮的으로 萬歲騷動이 이러낫습니다. 이것으로 朝鮮人이 日本의 朝鮮統治에 대하야 반대하고 韓國의 XX을 희망하는 騷擾로 全朝鮮 어디나 어느곳 할 것 없시 전 민중이 만세를 高唱하얏끼 때문에 萬歲騷動이라고 하였든 것입니다. 그 당시 原內閣이였는데 原首相은 朝鮮에 잇서서의 이 상태를 깊이 우려하야 朝鮮統治에 근본적개혁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겟다고 생각하엿든 것입니다. 또 이 情勢가 아메리카를 위시하야 외국에 알녀젔기 때문에 諸外國서는 日本의 朝鮮統治에 관하야 여러 가지비난을 하고 신문잡지에도 논의되엿든 것입니다. 특히 아메리카의 규-릭博士는 日本과 친교있는 관계로 原首相에게 朝鮮政治의 개혁을 희망하는 서면을 보내엿든것입니다. 原首相은 이에 대하야 자기도 동일한 생각을 갓고 잇스니 조만간 개혁을 할 작정이라고 회답하엿습니다. 그때 內閣에 잇서서는 우선 朝鮮總督府官制를 개정할 것을 의논하고 이어서 閣議에서 결정하야 樞密院의 諮詢을 經하게 되엿습니다.
그 개정의 요점은
제1. 朝鮮總督은 종래 陸海軍大將이 아니면 될 수 없섯는데 당시 또는 금후의 정세에 응하야 꼭 武官總督으로써 朝鮮에 임할 필요없시 文官武官을 불문하고 적임자를 總督으로 함이 필요하다는 취지하에 종래 總督府官制에 總督은 陸海軍將軍만으로서 식힌다는 규정을 개정하야 임용자격의 제한을 철폐하고 文官出身者라도 역시 總督이 될 수 잇게하엿든 것입니다.
제2는 警察制度의 개혁입니다.
종래는 헌병으로써 경찰의 근본조직으로하야 그 장관인 警務總長은 朝鮮駐在憲兵司令官으로써 이에 충당케 하고 각 도의 警務部長은 각 도 憲兵長인 憲兵佐官으로써 이에 임명하고 憲兵將校 及 淮士官下士는 警視 及 警部로 임용될수 잇게 되엿습니다.
그리한 것이 이 제도는 實結이 양호하지 못하고 특히 지방청에 잇서서는 道長官에게는 경찰권이 없기 때문에 道長官과 警務部長 이하의 경관과의 사이에 왕왕 협조를 일허 처무상의 지장을 이르키는 일이 많엇든 것입니다. 그래 금번의 개정에 際하야 警察官暑官制를 폐하고 그 중앙 사무는 總督府에 이임하야 同府에 警務局을 신설하고〈5〉 지방경무사무는 각 道 長官에게 인계하야 總督府 하에 경찰사무를 통일하기로 하엿든 것입니다.
제3은 總督府部局變更을 하엿습니다. 종래는 總督政務總監下에 각 部長官이 잇서 그 아래에 局長이 잇기로 한 조직이엿는대 이 조직은 복잡하고 사무의 진보를 방해하는 실정이 잇섯기 때문에 部長官을 폐하고 각 국장으로써 사무를 집행하기로 하엿든 것입니다. 이것이 官制改正의 주요한 점이엿습니다. 이 개정은 당시의 실정에 가장 적당하다고 하엿기 때문에 樞密院도 이에 동의하야 大正 8년 8월 20일에 改定官制의 발포를 봄에 至하엿든 것입니다.

부임 당시의 정세
기자 - 赤池氏 귀하는 당시 警局長으로서 가장 곤란한 朝鮮治安維持의 大任을 인수하시엿섯스니 그 당시의 朝鮮 사정에 대한 당신의 고심담을 들녀주십시요.

赤池 전 경무국장은 이러케 말하다
부임 당시의 정세를 먼저 말삼하겟습니다. 水野先生이 政務總監이 되야 朝鮮統治이 난국에 任當한 이상 나로서는 大局의 勢를 맛지 않을수 없기여 **에 응하엿든 것입니다. 그 후 東京에서 친히 朝野諸氏의 언론을 경청하고 비상히 우려하엿든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인테리들이 종래의 總督政治에 대하야 극단의 비난을 가하야 비상식적 언사까치 함부로 한다는 것이엿고 또 정부의 일각에서도 제도를 개혁하야 조선인의 대우를 개선하면 그 소요는 곳 진압된다는 의견을 주장한 것이 엿습니다. 나는 이미 拓殖課長의 任에도 잇엇고 拓殖委員會의 위원도 되엿스며 또 조선을 一巡하야 朝鮮統治의 일단을 窺知하엿기 때문에 統監이래 얼마나 我國이 조선 개발과 조선인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엿는가를 잘 알며 또한 그 경과의 실정을 보고 잇는 것입니다.
따라 一部의 비난에 대하야 - 특히 외국의 비난에 대하야 크게 낭패하얏다고 ??야 外國에 朝鮮統治의 不行屈를 陳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 갓흔 것은 너무나 실제를 알지 못하는 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今回의 소동은 조선인 고유의 事大思想 즉 親米觀念이 근원이 되엿든 것입니다. 그 원인에 접촉하야 선처하지 않으면 용이히 진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을 得하고 獨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라 소동만 하면 무엇이 된다고 공언하는 자도 잇스니 제도의 개정에 의하야 곳 진정을 희망하는 것은 엇지하면 낙관에 떠러질 ?이 잇다고 봅니다.
고로 朝鮮治安의 복구는 總督府의 위신이 확립하야 不遠間 非望을 단념하엿슬 때 비로서 이것을 실현할수 잇는 것이라고 생각하엿든 것입니다. 그런대 水野政務總監을 수행하야 伊勢의 大廟와 桃山御陵을 참배하고 京都에 도라왓슬 때 조선에서 不穩의 형세가 頻頻하다는 정보가 왓기에 不意여 西村君과 상의하고 兩人은 총독보다 압서 조선에 급행하기로 하고 그날밤 京都를 출발하엿든 것입니다.
그리한 것이 공교롭게도 폭풍우 때문에 關釜連絡船이 출범하지 않어 하로를 호텔에서 묵지 않을수 없게 되엿습니다. 이로 말미아마 그날 아침 朝鮮에서 온 山縣前政務總監과 水野新總監을 호텔에서 相面할 기회를 갓게 되야 그날 밤 대단 유익한 암시를 얻게 되엇슴은 意外의 幸福이엿습니다.
조선으로부터 오는 정보는 一通은 一通보다도 더 형세의 험악한 것을 報하야 혹은 排X의 의지를 표시하는 것인지 혹은 총독을 XX하는 것인지 실노 몸사리짓치 엿든것입니다. 때마침 野口警務局長은 중태에 잇게 되야 밤을 채울 수 없슬 듯 하다는 전보가 왓든 것입니다. 형세가 위급한 금일 警務局長의 직은 하로라도 느지면 안되겟다고 생각하고 자진 그 任에 당할 것을 자원하야 즉시 각하의 허락을 얻엇든 것입니다. 그 날밤 연락선은 총독 일행을 실고 玄海灘을 건너는대 전일의 풍랑는 아직 잣지 않어 怒濤澎湃船을 싯처 실노 稀有의 大難航海로서 轉轉 轉前途의 험악함을 말하는 듯 하엿든 것입니다.
경무관계자 일동은 갑판우에 올너가 머리를 한 대 모이고 朝鮮治安의 대책에 대하야 협의 하엿습니다. 甲一語 乙¸€語 각각 아는 것을 말하고 생각하는 바를 논술하엿든바 협의의 진전됨에 따라 일동은 모다 형세의 험악함이 예상이상임을 알고 책임이 극히 중대함을 통감하엿든 것입니다.
그래 연락선이 釜山에 도착하자 時永事務官이 우리를 마지하야 상세히 형세를 설명하여 주엇든 것입니다.
요컨대 말은 전보와 大差없서스나 同君의 입으로부터 친히 XX XX등에 대한 말을 드르매 다시 별종의 감동을 감각하게 되엿든 것입니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 불안을 感한 것은 회비의 불충분과 그 결함이 말할수 없이 많은 것이 엿습니다. 그래 丸山君과 釜山을 출발하야 총독 일행보다 앞서 翌朝 京城에 들어와 곳 總督府에 赴하야 관계자와 협의하엿든 것입니다. 제도개정의 직후로 *人總吏迭로 因하야 *착하야 사무를 보는자 극히 드무러 京畿道知事는 새로 임명되야 本町警察署長이 주로 警備의 任에 當하는 형편이였습니다.
그래 丸山君이 비상한 馬力을 내여 지휘감독에 노력하였는대 그 고심이란 참 現言할수 없섯든 것입니다.
그래 헌병은 제도개정에 의하야 이미 치안의 책임이 없고 경찰이 단독 그 임에 당하였는대 경찰의 비용은 조금도 인정되지 않엇고 인원부족으로 모든 것이 말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豫防警察은 결함뿐으로. XX의 소문에 대하여서도 조곰도 심각히 아러볼녀하지도 않엇든 것입뉀?다. 따라 우리는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고 그 이상은 서서히 운명에 일임하는 이외 딴 방도가 없섯습니다. 시간은 刻一刻 흐너 총독일행의 기차는 경성역에 도착하야 총독이 남대문역을 나올 때 轟然天地를 진동하는 폭음이 파열되였습니다. 참으로 청천벽력이엿습니다.

朝鮮의 불안은 사실노 되야 이에 출현하엿든 것입니다. 그러나 잇때 총독의 悠悠若若한 태도는 總督政治가 흉행 또는 폭력에 의하야 조곰도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엿든 것입니다. 나는 당시 총독을 바리우고 政務總監의 無事를 視하며 겨우 현장에 서게 되엿습니다. 그 다음 총독의 관저에 들너 總督府에 도라왓습니다. 그래 暮色蒼然 점점 四邊은 어두어젓습니다. 그러나 전기는 켜지지 않습니다. 그르니 잇때까지 점등을 금하엿든 모양이엿습니다. 그래 할수 없시 燭불을 켯든 것입니다. 이때 나는 이 椿事를 다만 관청에 보고할뿐 아니라 널리 세상에 발표하야 조선의 공기를 주지식힐 필요를 늣기여 곳 붓을 드러 眞末을 썻고 丸山君은 이것을 각 관청은 물론 東京, 大阪의 제 신문사에 전보하엿습니다. 이것이 조선 도착 제 1일의 발생사로서 탕비인 방에 않저서 4, 5인과 심야 촉불을 켜고 치안에 진력하든 일은 금일에도 잇처지지 않는 인상입니다. 당시 時永君은 爆彈破裂에 대하야 책임을 깊이 늣기와 寢食을 잇고 捕縛에 노력하엿든 것입니다. 同君을 추억할 때마다 君의 책임감이 강함에 대하야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民心安全 求療施設
폭탄소동은 의외라고 하면 의외이고 예상한 바라하면 예상한대로엿든 것입니다. 이에 의하야 사기는 긴장되엿든 것입니다. 즉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의 각오로써 突進하는 외에 방도가 없섯든 것입니다. 지금이야 바로 新政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하는 것이 다만 조선인의 주의를 끄을뿐아니라 세계의〈6〉 주의를 끄으는 때가 되엿습니다. 만약 불행이 실패한다면 經率한 자는 혹은 武官으로써하나 文官으로써 하나 日本은 朝鮮을 통치할 능력을 갖지 못하엿다는 혹평을 내리울는지 몰낫든것입니다. 그러니 새로 부임한 관리는 국가에 대한 책임으로써 粉骨碎身하야 꼭 성공을 기하지 않을 수 없섯습니다.
성공을 맹서하지 않을수 없섯습니다. 그러니 엇지 하든 치안유지와 인심안정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섯든 것입니다. 금일의 조선인은 총독정치에 대하야 의혹은 갓고 잇스나 조곰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선량한 자이라 할지라도 앉어서 성패를 보는 이상에는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不逞者는 無論 新政의 실패를 희망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로 策動하는 것입니다.
威信이 없슬때에 명령을 하면 명령을 드러줄리도 없고 강제한 댓자 돌연히 반항만 증가식힐 것이요 宣傳한다면 茶話의 화제밧게는 안될 형편이엿습니다. 고로 焦眉의 時務는 다만 하나 즉 百難을 무릇쓰고 경찰을 수립하야 그로써 맹동을 억압하고 질서를 회복하야 안주의 歸向을 알녀줄것뿐엿습니다.
威信을 갓게 되고 歸向이 확고되며 殖産 교육은 물론 庶政이 順調로 되어감은 확연한 일입니다. 다만 잇때 힘을 경찰에만 *住한다면 필연 物議만니 비난이 百出할 것이나 원래 變에처한 便宜의 처치이니 모든 것이 뜻대로 될 때까지는 여하한 공격에도 귀를 기울니지 않고 一路邁進할 것이입니다. 특히 新政은 憲兵制度의 개정으로써 要綱의 하나으로 하는 이상 만약 경찰이 치안을 유지못한다면 그 자신 新政의 실패인것입니다. 이 의미에 잇서서 경찰의 수립은 이때 가장 중요하야 寸時도 緩延할수 없는 것입니다. 警務局長의 적임자를 內地에 구함은 지당한 일일는지 알수 없스나 이와갓흔 위급에 際하야 책임자를 寸時라도 缺한다는 것은 滋味없다고 생각한 것 不肖不才를 不願하고 自進 警務局長이 될 것을 자원하얏고 따라 경관 500인 증원을 요청하야 곳 그 허가를 받엇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大正 8년 9월 3일이엿습니다. 당시 朝鮮의 不穩은 굉장히 선전되었든 것입니다.
경찰에 잇서서도 그러하엿든 것입니다. 그것을 예시하면 제일 경성내에 잇서서는 대개 문을다덧든 것입니다. 이것은 朝鮮 관습상 정치에 대한 XX의 의사표시인것입니다. XX내에서 만세를 부르는 囚徒가 잇섯든 것입니다. 一內鮮人 왕래가 전혀 두절되야 종래 친밀하든 자도 소식이 없섯습니다. 그리고 內地人에 대하야 XX적 태도를 취하는 朝鮮人이 비상히 많어젓든 것입니다. 지방에 잇서서는 內地人의 XX를 강요하며 XX의 행동을 취하는 자 심히 많어젓습니다. 一 上海의 假XX를 신임하고 그 성공을 희망하는 자 적지 않엇습니다. 1, 民族自決 朝鮮XX 朝鮮自治등등을 굉장히 신뢰하는 念이 강하야 기독교신자중 米國長老派의 회당에 출입하는 자 顯著히 증가하엿습니다. 여러 가지 풍설이 其處를 중심하야 흘너 나왓든 것입니다. 이리하야 全鮮을 통하야 米國을 尊崇하고 미국인을 신뢰함은 말할수 없서 도저히 금일의 상식으로는 律할수 없섯든 것입니다. 특히 民族自決論은 미국대통령 우윌손의 제창인 고로 꼭 미국의 힘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믿고 또 미국은 민족의 해방을 천직으로 하기 때문에 XX운동에는 十二分의 호의를 표시하는 자이라고 선전하며 심한 것은 이로 말미아마 우윌손의 來鮮을 믿고 환영할 준비를 하는 자도 잇섯든 것입니다. 이에 반하야 我 국력에 대한 의혹과 總督府輕視는 말할 수 없섯든 것입니다. 정말 總督府政治는 일대위기에 당면하엿든 것입니다.
형세가 이와갓치 험악한 데다가 당시 北鮮은 미증유의 旱災로 인하야 기아에 헤매는 자 많고 또 코레라가 유행하나 死者累累한대 종래의 慣信으로서 코레라 병환자는 그냥 遺棄하고도주하는 예가 잇서 그 참상은 언어도단이었습니다.
또 다시 수십년래 처음 보는 대폭풍우를 마저 그 야참 百災가 일시에 襲擊하야 온 感을 주든 것입니다. 이러한 전염병에 걸닌 모든 환자를 모도다 치료하는 것은 즉 위정자의 임무이니 하로라도 더 遲延할 수 없다하야 8월 3일 政務總監은 관저에 總督府 병원장 芳賀博士를 招致하야 당해 관리이와 防病에 대하야 회의한 결과 至急히 방침을 확정하고 예산하고 예산을 편성하야 극력 求療에 맹활동을 하게하엿든 것십습니다.
이 求療濟가 크게 효과를 내여 總督政治를 환영하는 民情이 漸起되야 민심도 점차 온화되엿든 것입니다.

警察의 充實과 集合
당시 警務는 *度創設의 際이니 그 不備不完한 것은 말할 수 없섯습니다.
예컨대 경관이 일만 오백인이라고 하나 그 반수는 조선인 순사인대 그들은 인심동요에 際하야 *감심을 갓게되야 엇지하여든 안심 할 수 없섯든 것입니다. 그 근무도 또한 정확하지 못하엿든 것입니다. 또 3000명의 내지인 경찰관은 일휴뿐이니 새로 모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엿든 것입니다. 그러나 돌연이 생긴 일이라 모집에 대한 아모러한 **도 갓지 못하얏슬 뿐 아니라 준비도 없고 예산도 엇든 것입니다.
그 우에 조선불안의 소래 높어짐에 응모하겟다고 하든 자도 취소를 申?하는 형세이니 언제 요원을 보충할 수 잇슬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섯든 것입니다. 그러한대 시국은 날노 날노 험악하야저 경찰관을 요함은 刻一刻適切하야 경기도이하 13도가 모다 위급을 호소하야 경관배치를 요구하는 催促이 화쌀(矢)갓하엿든 것입니다. 경무국은 원래 그 요구에 응함에 급급하고 잇스나 도대체 경관이 없섯든 것입니다. 그리니 엇더케 할 수가 없섯습니다. 百方苦慮하야 내지의 제씨에게 간청하야 겨우 응모자를 얻어스나 그들에게 줄 被服이 없고 패검도 없섯든 것입니다.
그래 평복으로써 근무하게 하엿슴으로 일견 경찰관인 것을 식별할 수 없섯든 것입니다. 體載도 또한 조치 못하엿든 것입니다. ** 혹은 이것으로써 경찰의 무력무능을 말하고 혹은 불규율을 비난하여 그야참 百鬼夜行否百鬼*行이엿습니다.
이러케 하여서는 안되겟다고 경찰의 실패를 말하는 자도 많엇습니다. 당국자로서 가장 심통한 것은 조선경관의 약 반수를 점한 조선인 순사가 거지반 정세를 보고 안할 뿐 아니라 심한 것은 不逞의 徒와 통모하고 그 행동을 방관 또는 원조하는 것이엿습니다. 그것은 宣傳에 의혹되야 통치의 前途를 비관하엿든 까닭입니다.
그런고로 내지인 경관이 잇다할지라도 바로 안내자 없시 길걷는 격으로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섯든 것입니다. 一言으로 말하면 당시의 경찰은 半身不隨의 상황이엿든 것입니다. 사정이 말한 바와 갓헛기 때문에 시무의 급한 것은 總督政治의 위신을 위하야 경찰의 충실을 급히 할것과 경찰기능을 평상시 상태에 회복 할 것이엿습니다. 이것을 하로 빨니하면 하로의 利가 잇고 하로 느지면 그 害가 그만치 크게 되기 때문에 경찰당국은 百方苦心하야 日夜肝膽을 태우며 寢食을 잇고 *掌하야 하로 겨우 3, 4시간을 睡眼하면서 2, 3개월을 경과하엿든 것입니다. 그러나 만전을 기하지 못하는 이상 急에 備하는 방침보다 우선 경성 집중의를 취하엿든 것입니다. 전력을 경성에 집중하야 경성에서 폭탄 기타 치안을 紊亂하는 일이 없도라 진력하고 그 다음 도청소재지에 주력하고 기타의 곳에는 가령 불온한 일이 잇다할지라도 방임하기로 하엿습니다.
그러나 경찰관의 증원과 함께 지방을 예비할때에도 역시 集中主義를 취하야 3인 내지 5인이 근무하야 일단 위급한 일이 잇스면 응급조치를 하도라하엿습니다. 경찰이 무능하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은 주재소제도를 취하야 지방에 한사람식 배치하엿기 때문에 폭력에 대하야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잇다는 것을 暴露하엿기 때문이엿습니다. 當幸히 天佑를 得하야 경찰은 예상보다 단시일노써 충실하야저 불안은 의외에 속히 제거되엿스며 계획은 착착 진보되야 큰 破綻을 보이지 않고 경비의 任을 다 할 수 잇섯든 것입니다. 기적이라함은 이러한 것을 가라침이라고 보앗습니다. 그래 天佑神明의 加護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섯든 것입니다. 그러나 天佑는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니라 당국자 일동이 마음과 힘을 합하야 하엿다는 것을 이저서는 않될 것입니다.

第3部長 治安維持
總督府는 제3부장의 부임을 기달녀 경비가 아직 정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급히 제 3부장회의를 개최하엿든 것입니다. 회의의 준비함에 따라 일동은 그 책임이 중대함을 절감하야 결사적으로 그 직책을 다하기로 각오하엿든 것입니다. 그런대 당시 제 3부장들은 모다 年少하고 처음 朝鮮에 나왓기 때문에 朝鮮사정에 조금도 통하지 못하엿든 것입니다. 이러케 하여가지고는 도저히 이 난국을 타개하야 나갈 수 없겟다는 여론이 많엇든 것입니다. 이것을 듯자 남자의 의기로서 엇더케 하든 성적을 내어 치안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겟다는 기분을〈7〉〈이하 제 45頁에 續〉 갓게되야 突然緊張하야저 사기왕성하엿든 것입니다.
제3부장은 누구나 그 도의 치안뿐만 아니라 朝鮮 전도의 치안유지를 갖고 自任하야 국가로써 任하지 않은 자 없서슴에 至하엿든 것입니다. 그런 고로 一語은 一語보다 통렬히 그리고 言言句句가 모다 肺肝으로부터 끄러오르는 것이엿끼 때문에 片言隻語라고 할지라도 琴線을 촉진하지 않는 것이 없섯습니다.
특히 죽엄을 각오하고 일생을 期하지 않는 것이니 그 장렬함은 말할 수 없서 참으로 귀신을 울닐만하엿든 것입니다. 회의로서 이와 갓치 순정에 충만하고 眞劍하엿슴은 아직 본 일이 없는 광경이엿습니다.
그래 회의가 끈나슬 때 삼부장의 眉字의 사이에 ** 결의가 빛나는 동시에 張固의 신념이 충분하야 그 얼골은 빛낫든 것입니다.
이 회의에 잇서서 水野政務총감이 마로 자제에 대하는 듯한 온정으로써 제삼부장을 대하야 그들말을 잘듯고 요구를 드러주며 終始溫言으로써 慰撫하야 사기를 고무한 것은 일동이 깊이 肝銘한 바되야 금일에 이르기까지 이즐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하차계속)-〈5-7,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