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개벽 제49호 |
|
호수 |
제49호 |
|
발행년월일 |
1924-07-01 |
|
기사제목 |
京城帝國大學 豫科의 開校式을 보고서 |
|
필자 |
一記者 |
|
기사형태 |
소식 |
|
6월 12일! 오후 10시 30분부터 式을 행한다 하얏기에 분주히 나갓다.
나간즉 귀빈실 내빈실 학부형실에는 벌서 어지간하게 찻섯다. 특별히 그날은 맛츰 도지사 회의에 列席키 위하야 각 지방으로서 上京하엿던 知事들도
오전 중은 式에 오기 위하야 회의를 중지하고 왓다는데, 그 까닭인지는 모르나 하여간 門間에는 자동차가 어지간하게 만히 노혓섯다. 이날로
말하면 朝鮮에서 경사스러운 날이라 할 수 잇다. 서양식 교육이 수입된 지 30여 년에 아직것 최고학부를 가지지 못하야 중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외국에 유학을 가지 안으면 그 이상 연구를 하기 어립던 朝鮮에서 대학을 가지게 된 것은 文化上은 물론이어니와 기타 각 방면으로 보아
대단히 반갑고 깃분 날이다. 그러나 나는 門間을 드러가면서부터 이상스러운 늣김을 가지게 되엿다. 말하면 반갑고 즐겁다는 것보다도 가이업고
애닯다는 말할 수 업는 悲哀를 가지게 되얏다. 그 이유는 一言으로 蔽之하면 「이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하는데 지나지 아니한다. 당국자의 말을
드르면 豫科와 法文部 及 醫學部만을 완성하는 데도 臨時費만이 500만원 가량 들겟고 經常費는 年年 4,50만원 가량이 되겟다고 한다. 이 만흔
경비를 우리가 짜서내는 세금 중에서 지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업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가르키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누구들이냐 하고
보면 敎授중에는 물론 朝鮮사람이 한 사람도 업고 학생 중에도 文科 理科를 통하야 都合 168명중에 朝鮮사람은 겨우 44명밧게 업다. 나는 이것을
드러가는 門口에서 사무원의 손으로 주는 그 학교일람 비슷한 인쇄물 가운데서 볼 때에 말할 수 업는 늣김이 電光가티 머리로 지내가는 것을
感하엿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곳에 초대를 바다 온 사람들도 거의 전부가 남이오, 朝鮮사람은 그것이 남아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멧 사람이
아니되고 그남아는 모도〈76〉 다 倭將臺 압헤 가서 허리를 굽히는 者들이엇다. 그러닛가 우리는 그저 남의 세상에 돈만 내는가
하엿다. 예정보다 약 40분 가량 지나서 식장에 들어갓다. 恒用 잇는 「勅語奉讀」과 「君代」 二唱의 式順이 지난 뒤에 有吉 총장이 壇에
올나 式辭를 하얏다. 그 중에 이런 말을 하엿다. 「諸君에게 배부한 인쇄물 중에 잇는 것과 가티 현재 본교 학생은 文理科를 통하야 전부 168명
중에 鮮人은 44명뿐이오 기타는 모다 內地人인데 그 중에는 日本에서 중학을 終了한 사람이 半數 이상이 잇스나 그 多數는 모도 다 朝鮮에 그
부형이나 친척을 둔 사람들입니다」하엿다. 이것은 今春 豫科生을 모집할 때에 朝鮮학생에게는 학교에서 보는 학과시험 이외에 특별히 경찰서에 의탁하야
신분시험까지 보게 하면서도 日本 각지의 신문에 모집광고까지를 내여서 모집한 데 대한 변명인데 그저 그럴 것 업시 「朝鮮사람에게는 고등교육을
內心은 주고 십지 안으나, 己未年間에 聲明도 잇고 또한 외국사람에게 보이는 繪棄書 거리도 만들기 위하야 不得己 명색이나마 대학을 만든 이상에는
할 수 잇는 대로 自利를 도모치 안을 수 업서서 그런 것입이다」하는 것이 오히려 설명하기에 條理도 잇고 또한 말하기도 쉽지 안흘가 하얏다. 그
후에 이런 식에는 의례히 끌녀 단니면서 都마타 두고 하는 李完用 侯爵의 축사가 잇섯는데 爲先 그 낭독하는 목쳥이 如訴如求하야 사람의 간장을 끈는
듯 하얏스며, 그 辭意는 『我 朝鮮에는 교육이 萎靡不振하더니 병합 이후로... 』 云云하는 구절에 至하야는 盡且至矣라 아니할 수 업섯다. 그
후에 多數한 日本人학생을 남겨 두고 특히 44명 중에 1인인 兪鎭午君으로 하야곰 학생總代의 謝辭를 하게 하는 것은 무슨 꿍꿍인지 듯는 사람으로
하여곰 잠간 疑訝의 눈을 번덕이게 하엿다. 閉式 후에 「自祝宴을 行하는 연회장에는 例와 가티 酒食을 보면 橫合蝟集하는 朝鮮 老物들이 꽤
위세 조케 먹고 마시는 것이 內外國人의 시선을 轉轉케 하는 것가티
보엿다.〈77〉 〈76-7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