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별건곤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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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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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26-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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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상투에 갓쓰고 米國에 公使갓든 이약이, 벙어리 外交, 그레도 評判은 조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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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李商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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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회고·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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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桑一變 四十年 우리 朝鮮과 외국간에 사절이 래왕하기는 이미 역사가
오랏섯다. 그러나 과거에는 국제간 교제가 다만 동양 몇 나라에 지나지 못 하얏슴으로 사절이 한끗 간대야 中國 안이면 日本이엿고 또 지금처럼
공사나 영사의 제도가 잇서서 상설로 엇던 나라에 가서 駐在치 안이하고 다만 일시 일시로 국제간에 무슨 중요한 교섭할 일이 잇스면 피차에 특별히
래왕할 뿐 이엿다. 그러나 소위 白人의 국가와 국제간 사절이 派送하게되고 근대식의 공사영사가 백인의 국가에 가서 상시로 駐在하게 되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사오십년 내외의 사이다. 내가 주미공사 관원의 일인으로 米國에 가기도 거금 40년전-절개국 496년 丁亥 9월이엿다.
그때는 근세 조선의 대변란이라 할만한 壬午軍亂을 지내고 최초로 韓美通商條約을 締結한지 근 5년 만이요. 또 金玉均씨의 甲申革命운동이 잇슨 후
3년 이엿다. 당시 朝鮮은 자래 쇄국주의를 버리고 새로 문호를 개방하는 동시에 주자개국 493년 乙酉에 소위 日淸天津條約이 성립한후 朝鮮의
내치외교는 朝鮮이 자주한다는 獨立思想이 조선에 팽창하야 일반 문물제도를 혁신하고 따라서 국제간에 사절도 파송하게 되엿는데 그때에 주미 전권공사는
처음으로 朴定陽씨가 피명되엇섯다.
상투 튼 공사일행 이전에 우리 朝鮮에서 中國이나 日本에 사절이 가랴면 일행이 수백여인에
달하고 그 의장행렬이 몃십리에 延하야 威儀가 과연 놀〈7〉나윗고 비용도 다대 하얏스나 우리가 미국에 갈때에는 불과 일팔인이엿는데 공사외에
서기관으로는 나와 李夏榮씨와 故 李完用 후 3인이요. 번역관은 지금 李相弼군의 부군 李采淵씨요 기외는 하인청 직등속이엿다. 지금은 우리도 머리를
다깍고 아모리 頑固생원님이라도 외국관광단에 한번 뽑피면 依例 머리를 깍고 스투른 양복이나마 입어야 될줄 알지마는 그때의 우리 일행은 상투가
그대로 잇섯고 의복도 純然한 朝鮮官服을 입엇섯다. 맛치 과거에 우리 조선사절이 외국에 갈때와 복색이 조금도 다름이 업섯다. 지금와서 녯일을
생각하니 실로 滄桑一變의 감이 업지안타.
到處에 흔날리는 太極旗 이, 상투잡이, 공사의 일행인 우리가 떠날때에 공사관에
揭揚할 朝鮮國旗를 미리 예비한 것은 물론이어니와 우리가 타고가는 기선중에도 좌상에 국기를 꼬잣섯는데 눈치빠른 선주는 벌서 우리 국기를 준비햐야
식당이나 우리 출입하는 문구에다 게양하고 또 米國에 상륙할 시에도 부두, 정차장, 차내, 호탤까지 우리 국기를 게양하야 환영의 의를 표하엿섯다.
도처에 朝鮮國旗를 볼때에 반갑기도 하려니와 米國人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하엿섯다.
沿路의 米人들은 中國人으로 짐작
그때에도 중국사람은 30여만이나 미국에 가서 잇슴으로 동양사람이 가면 처음보는 미국사람들을 의례로 중국사람으로 알엇다. 기중에도 우리
일행은 다 머리를 깍지안코 또 의복이 중국복과 비슷한 까닭에 沿路의 미국사람들은 우리를 중국사람으로만 알고 떼를지여 쫏차다니면서
『촤이나-촤이나』하엿다.
公使보고 女子대접 기중에도 우수운 것은 미국인중의 시골사람들은 감히 공사일행인 우리를 가르처서 동양
엇던 나리의 여자라고 하는 것이엿다.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안이라 미국의 여자는 실내에서도 帽子를 흔이 쓰고잇고 또 의복도 사치스러운 비단옷을
입으며 수염도 간혹잇는 여자가 잇는데 우리 일행은 실내에서 갓을 쓰고잇고 또 입은 의복이 대개 조흔 비단이오. 「동다리」의 관복이 울읏붉읏하야
여자의 의복가티 뵈이고 또 일행중에 수염만흔 사람이 별로 업스며 혹 잇다 하야도 미국여자의 수염만도 못한 까닭이엿다. 그리하야 우리를 대할?에도
禮貌범절를 똑 자국의 부인을 대하는 것과 가티하는 일이 만핫섯다. 지금에 그 생각을 하야도 참으로 요절할 일이 만핫섯다.
宴會席의
三大特色 당시 미국에 주재하는 외국의 공사는 모다 41개국이나 되는데 엇던 연회장에 모딀때 보면 대개는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깍것스나
중국사람은 例의 도야지 꽁지가튼 머리에다 마래기를 쓰고 장유의 주의를 입엇스며 土耳其 사람들은 上尖한 모자를 썻는 고로 조선공사가 지너어 이
삼국인의 복색은 엇던 연회나 집회석에 異彩요 특색이엿는데 그중에도 머리 우에 상투를 가진 것으로나 복색이 찬란하고 색스러운 것으로나 진중의
진이엿다.
엉뚱한 中國公使 대륙성인 중국인은 누구나 교제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은 세계에 정평이 잇는 것이 지마는 기시 조선과는
자래 정치적 관계가 복잡한 까닭에 국제적 교섭에 더욱 곤란한 일이 만핫섯다. 즉 중국은 항상 조선의 내치외교는 조선이 자주 한다는 말을 세계에
공언하면서 내심으로는 의연히 자국의 속邦으로 생각하고 또 자존자대의 사상이 만튼 까닭에 조선이 외국과 직접교제하는 것을 조치안케 생각하야 최초
조선에서 외국에 공사를 파견할 시에도 여러 가지의 방해를 하야 곤란이 다대하얏고 또 공사가 미국에 간 뒤에도 중국공사는 조선사신에게 요구하기를
외국공사와 교제 할 때에는 자기와 먼저 의논한 후 교제를 하고 또 미국 외무성을 방문하는 데도 자기의 안내로 하라고 하얏다. 그러나
박공사는 그의 무리함을 단연히 거절하고 당당히 단독으로 교제를 함으로 중국공사는 항상 조선공사에 대하야 불평 불만의 기색을 가지고
잇섯다.
中國公使의 大狼狽 그러자 그 때에 미국에 재유하는 중국인 한 사람이 엇던〈9〉 미국인의 집에서 雇傭을 하다가 그
주인의 가족 칠팔인을 일시에 학살하고 재산을 강탈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매 전 미국의 여론이 일시에 이러나서 재미 30만 중국인의 방수운동을
개시하고 따라서 중미국제문제까지 되엿섯다. 其時의 어느날 이엿다. 박공사는 미국 외무성을 방문 하엿섯는데 응접실에는 중국공사가 벌서와서 名剌를
통하고 미국 외무성 대신을 면회하랴고 고대하고 있는 중이엿다. 박공사도 역시 名剌를 통하고 면회를 청한즉 먼저온 중국공사는 불너드리지 안코 추후
온 박공사를 불너드려서 장시간의 담화를 하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고대하든 중국공사는 두 번재 名剌를 드리고 면회를 청한즉 미국 측에서는 지금
조선공사와 면회중인즉 후일 다시 방문하라고 문전수객을 하고 마닛가 중국공사는 그 모욕을 당하얏스나 엇지하지 못하고 다만 불평만만 하야 공귀할
뿐이엿다. 이것은 전혀 미국에서 중국인 배척문제로 하야 미국의 감정이 좃치못한 까닭에 중국공사를 모욕하고 또 조선과 새로 국제적 관심을 사고자
함이엿다.
奇怪한 米新聞의 惡宣傳
이와가티 중미인간의 감정이 좃치못한 까닭에 미국의 엇던 대 신문은 중국인의 악선전을
하기 위하야 근거업는 허위의 기사를 만히냇섯다. 그중에 예를드러 말하면 「조선공사와 중국공사와 자전차 경주를 하는데 중국공사는 불과 몇회에
낙상을 하얏느니 또 중국공사는 路에서 미국여자의 손을 먼저 잡엇느니 하는 등의 말이엇다. 그러나 그것은 전연 그짓말이다. 박공사는 원래
지대체하고 점잔은 양반일 뿐안이라 중국공사와 자전차를 가티 만저본 일도 업고 기시 중국공사의 張蔭煥 이라 하는 이도 역시 당당한 신진의 인물로
교제와 수완이 상당하야 결코 외국인에게 견모할 짓은 안이 하엿섯든 것은 물론이다.
반벙어리의 交際 지금은 미국의 유학생도
만코 따러서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만치마는 그때만하야도 영어가 퍽은 귀햇섯다. 번역관이라 하는 이도 기시 외무아문에서 불과 1년공부에 지나지
못하야 간신이 쉬운말이나 할뿐이라. 미인과 국제교제를 할 때에는 미국인으로 조선에 와서 의사 노릇하든 某氏와 가티 통역을 하얏는데 그도 역시
조선어가 不充分하야 항상 교제 할 때면 미국 반벙어리와 조선 반벙어리가 서로 절장보단 하야 의사를 소통하게 되엿다. 그럼으로 잇다금 우수운 일도
만히 잇섯다.〈10〉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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