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아버지 人物評 아들의 人物評

이강기 2015. 9. 5. 12:38
   
 
 
 
잡지명 삼천리 제4호
호수 제4호
발행년월일 1930-01-11
기사제목 아버지 人物評 아들의 人物評
필자
기사형태 문예기타

아버지 인물평

洪命憙 評, 昆?學者「타입」과 受難의 그의 半生

洪起文
아버지는 政治家라기보다 또 藝術家라기보다 오히려 「學者」인 곳에 그 소질이 더욱 만흘 줄 압니다. 가튼 學者라 하여도 學者의 속에는 「뉴-톤」타입과 「파-불」타입의 두 가지가 잇는데 아버지는 昆?學者이든 「파-불」型에 속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지금과 가치 小說, 詩歌 등 藝術方面에 발을 드러노코 게신 것도 비교적 그곳이 表現에 자유로우니까 一時 그리로 옴기신 것으로 勿論 永久한 일과 本格되는 일이 아닌 줄 압니다. 또 아버지의 政治上 社會上 見解와 나의 見解는 대체에 잇서서 符合됨니다. 가령
新幹會를 말할지라도 그 보는 方法에 잇서서 저와 아버지는 꼭 갓슴니다. 이 점에 잇서서 나는 아버지에게 對하야 肉親愛 以外에 同志로써 尊敬과 사랑을 항상 늣기고 잇슴니다.
혹 見解가 다를 때면 우리는 理論을 通하야 激烈히 싸워도 봄니다. 엇든 때는 밤을 밝혀가면서...그러나 그 結果는 내가 항상 克服을 당하고 맘니다. 이것은 결코 「아버지의 威嚴」에 눌니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넓은 智識과 그의 正當한 意見에 올흔점을 多分히 發見하기 때문이외다.

「家庭의 아버지」는 苦難의 아버지지요. 약 20餘年 동안을 貧困과 煩惱의<15> 家庭에 게시면서 그 濃霧를 헤치고 나오시기에 餘暇가 업섯지요. 이러한 環境에 禍되엇슴인지 아버지에게는 눈물보다도, 땃듯한 피보다도 차듸찬 理性이 번득이는 때가 만슴니다. 또 아버지 때문에 家庭에 波瀾이 이는 때는 別로 업고 오히려 내가 각금가다가 돌을 던지어 큰 波紋을 이르키는 일이 만치요.
그러고 남들이 아버지를 溫柔한 이로 間或 보는 例가 잇스나 아들인 내가 바라볼 때에는 强한 理智와 受難者에게서 보는 뿌리깁흔 忍隱自重의 힘이 잇읍데다. 마즈막으로 내가 말하기는 우습슴니다만은 나는 아버지가 博學인데는 저윽히, 놀람니다. 그러기에 다른 意見에 對하여는 아는 체하고 각금 싸워보자고 서둘느지만은 學術問題에 드러서서는 過히 큰 소리를 못치고 곳 움추러드러 버림니다.

徐廷禧氏 評, 策士라기보다 鬪士 金錢에 淡泊 외골수 性格

徐範錫
徐廷禧氏는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半面에 또한 나의 同志다. 그는 실로 54歲에 이르기까지 波瀾만흔 過去를 가젓섯스니 벌서 20남짓하든 靑年時代에 英語를 알어가지고 培材學堂 創立者이든 洋人 「아펜설라」와 가치 泰西文明의 飜譯輸入에 沒頭하면서 세상이 도라가는 것을 비로소 알엇다, 그런 뒤부터는 날때에 가지고 왓든 젊은 피를 감출길 업서 政治運動에 내다랏섯다. 오조약이 체결된 뒤 그는 누구누구의 동지들과 가치 OOO의 암살을 계획하여 교수대의 문압까지 갓섯다. 다행히 그 때 임군의 특지로 刑 1等을 ?하야 사형을 면하고 全南 智島에 定配갓섯지만-. 그 뒤에도 繼續하여 李某의 아들을 歐羅巴로<16> 誘出하려든 일, 그러다가 己未運動엔 3年을 大邱 감옥에서 치럿고 그 뒤는 無數한 그 方面의 苦難을 격것다. 엇재든 내가 나를 먹어서 知覺이 들 때부터 나의 아버지의 하는 일을 바라볼 때에 그의 일이란 어느 것이나 政治的 또는 社會的의 運動이 아닌 것이 업섯다. 더구나 맑쓰 思想의 洗禮를 밧은 뒤부터는 그는 三南 各地를 도라다니며 農民運動 方面에 가장 만은 힘을 쓴드시 記憶된다. 그 중에도 小作爭議에 잇서서는 過去에 經驗도 만헛든 것만치 그 自身도 相當한 自信을 가진드시 보였다. 그러나 肉親의 일을 아들의 입으로 이라타 저러타 말하기가 거북한 노릇이 되어 말하기 실흐나 率直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꾸준한 努力과 「제 몸이외의 일」에 獻身하는 그 意志와 精誠에 아들로서의 「프라우드」를 늣긴다.

小作爭議 말이 낫스니 말이지만 三南의 山村임으로 船車도 업서 대개는 거러 다니시는데 그 추운 동삼에 四五日式 십여일씩 도라 다니시다가(此間十行略).
그런데 그러케 도라 다니는 半面에 肉身上 卽 寢食에 괴로움이 만허섯든 모양으로 한번만 도라 다녀오시면 입으신 삿스 속에는 「이」가 엇더케 만히 꾀엇는지 놀날만 하엿다. 추우면 가는 곳곳에서 삿스를 작고 주어 덧껴입으신 關係로 추위는 혹 除하엿슬넌지 몰라도 「이」의 골님에 상당히 괴로워 하섯스리라. 그러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듸 갓다 오시면 「이」를 질머지고 오섯다고 야단하시는 것이 무리가 아니엇다.

아버지는 比較的 健康한 몸을 가지엇든 關係로 여러번 중역사리에도 그러 모진 病患을 가지신 일은 업지만은 녯날 한국시대에 한번 몹시 「주레」를 틀니신 뒤부터는 비 오는 날이나 日氣가 濕하는 때면 두 엽꾸리가 저리고 四肢의 피가 잘도 가지 안어서 지금도 괴로워 하신다.

아버지는 돈을 모른다. 只今도 긔억나는 일은 벌서 먼 녯날 내가 어릴 때에 아버지는 무슨 일로 새벽에 나갓다가 밤이 깁히 든 뒤에야 겨우 도라오시군-도라오시군 이리하기를 한참 계속하였다.(뒤에 아니 그 때가 XX암살의 음모하든 때엇다)
그 때 우리집은 가난으로 말 아니녓다. 때를 노커나 불을 못때이든 일이 頻頻하여 집에는 쌀 한 되 나무 한 단 업서서 어머니의 머리 긁는 말슴이 삘날이 업섯다. 그럴 때에 아버지는 하로 아츰에 어대서 난 돈인지 금전과 水原虹華門 그린 갑가는 紙錢을 만히 가지고 오신 적이 잇다. 例에 依하야 어머니는 火木근심으로<17> 울면서 呼訴하시건만 아버지는 그 때 그만흔 紙弊 속에서 겨우 白銅 두 푼을 덜넝 땅바닥에 떠러터리고 휙! 나가 버리섯다. 무슨 돈인지 모르거니와 그 흔한 돈을 가지고도 그러하였다. 엇재든 아버지는 家庭살림가튼 것은 俗事라 하야 도모지 介念아니하시는 便이다. 子女들이 자란 뒤부터는 집안 살림을 우리들 둘에게 맛겨버리시는 성격으로 보아도 그의 金錢에 對한 態度를 알만하다.

그는 近來에 新幹會의 所任을 마트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는 딴 意見을 가지엇다. 엇재든 내가 본 徐廷禧氏는 策士라기보다 鬪士요 學者라기보다 實行家요 준순주저하는 편보다 너무 외골수로 강직한 성격의 所有者이엇다.

아들의 인물평

鄭鍾鳴氏 評, 智識보다 經驗이 만혼 일꾼

朴弘濟
우리 어머니의 姓格은 매우 過激한 一面이 잇서서 怒하실 때에는 실로 매를 들고 따릴상 십흐리만치 甚하며 또 子息을 사랑하여 줄 때에는 溫情이 넘처나게 卽 愛와 憎의 兩極端에 서 잇는 분인 듯 보엿슴니다.
그러고 全體에 잇서서 女性다운 맛보다 男性的인 점이 더 만흔 듯 하엿슴니다. 그러기에 저 분이 사내로 태어낫든들...하고 엇던 때는 이상한 想像을 하여보는 때가 만슴니다. 그러고 어머니는 學識은 그러케 만치 못하나 아마 생각건대 過去에 여러 가지 일로 波爛을 만히 격근이만치 經驗에는 남보다 떠러지지 안을 줄 압니다.
나는 大體로 어머니를 남보다 그러케 뛰어난 이로 생각하지도 안는 代身 또 그러케 남보다 못한 인물로도 생각지 안슴니다.<18>

洪起文 評, 多少 早熟하고 根氣잇는 靑年

洪命憙
起文이를 批評할 때는 아직 일느다. 그리고 批評하더래도 아비인 내가 할 노릇이 못 될 것이다. 그러기에 簡單하게 몃 마듸만 적고 말겟다.

遺傳은 어느 程度로 밋어야 을흘넌지 모르지만 내가 文藝方面에 多少의 關心을 가지고 잇는 一面이 잇는 것 가치 그도 全面은 아니면서 文藝에 多少의 關心을 가지고 잇는 드시 보엿다. 또 우리 處地되고 누구나 政治에 關心을 아니둘 수 업지만 그는 直接前面에 나서는 굿굿한 鬪士의 氣質을 多少 가지고 잇섯다. 또 그는 무에든지 알자고 들면 어느 限度만치 알고야마는 根氣를 가진드시 보엿다.
나는 이제 새삼스럽게 子息의 敎育에 對하야 말치 안켓거니와, 엇잿든 어릴 때부터 文學者를 만들고 십흔 생각은 업섯다.
그의 性格은 무에나 極端에 이르고야마는 点이 잇섯고 또 大體에 잇서서 早熟하엿구나 하는 感想을 갓게 한다.
그가 얼마나 이 뒤에 成長할는지 나는 알 수 업다, 그러나 最少限度로 남만한 자식이 되어 줄줄은 믿는다.<19>

徐範錫 評, 意思와 信念이 强한데 滿足

徐廷禧
아직 年齡 30未滿의 範錫이를 가지고 그를 批評함은 避할 일이다, 그러기에 請에 이기지 못하여 簡單하게 두어마듸 쓰겟다.
範錫이는 열다섯살 이후는 充分한 敎育을 밧지 못하엿다, 아버지된 내 自身이 恒常 집에 부터잇지 안엇기에 家庭敎育인들 充分히 힘쓰지 못하엿다. 그러나 그는 現實社會에 對한 認識과 批判하는 힘은 仝年輩의 다른 靑年들에게 결코 지지 안을 줄 안다. 이것은 環境의 所致다. 그러기에 결과에 잇서서는 나가튼 父親과 家庭을 가젓기에 範錫의 性格과 思想은 오히려 가야 할 곳에 간듯한 늣김을 갓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지안는 氣魄이 잇섯다, 그뿐더러 智識에 對한 進取慾이 훨신 强하엿다. 또 한가지 特徵을 말한다면 冒險하는 힘이 잇섯다.
全體에 잇서서 그는 意思가 强하야 卽 엇든 事物에든지 굿굿한 信念을 가진 드시 보이니, 이것은 나로서 甚히 滿足하게 녁이는 바이다.

朴弘濟 評, 내가 실현하는 文人되자 努力

鄭鍾鳴
나는 아들
朴弘濟를 우리 社會의 第 一線에 나서는 鬪士를 만들려고 가정의<20> 敎養과 學敎의 敎育을 그 方面으로 옴기기에 가진 애를 다 써왓스나 그 아해는 期於히 文學方面으로 다라나려 함니다. 只今은 詩나 童謠나 小說을 쓰는 것에 熱中하드군요, 無論 無産階級的 文藝를 建設하는 일군이 되리라고 밋기는 하나 그러터래도 엇전지 섭섭함니다. 내 自身이 「運動」에 몸을 바친 關係로 이제 다시 내 배를 通하야 子女의 生産이란 매우 바라기 어려운 노릇가치 생각되는 터임으로 己往 잇는 子息이나 내 性格, 내 思想에 맛는 人物을 만들려 하엿스나...
이미 子息의 뜻이 그러한 以上 이 우에 더 進路에 對하여는 이래라 저래라 干涉을 아니하겟슴니다, 過去 數年의 經驗을 불지라도 干涉하는 것이 조흔 일이 아니드군요.

敎育뿐 아니라 나는 結婚方面에도 아조 子息을 自由로운 길로 맛기어 두겟슴니다. 父母가 干涉하는 强制結婚 때문에 내 自身이 靑春時節을 不幸히 지내든 생각을 하면 참아 못할 노릇은 그 일인 줄 암니다. 제 子息 批評하기 거북하기에 여기에서 붓을 놋슴니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