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에 비친 풍운의 한말과 일제 시대
"천형받은 백성...관리는
기생충...부패와 부정이 발전 가로막는다"
이사벨라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
역사 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아마도 자기 연민과 그로 인한 사실의 호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역사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 중의 하나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한국사는 한국 사람만이 읽는 역사로 끝나고
말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사만으로서의 한국사가 아니라, 동양사에서의 한국사와 세계사 속에서의 한국사의 위치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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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포의 일본군 묘지. 비숍 여사는 근면한 조선인들이 가난하고 외세에
시달리는 것은 부패와 부정 탓이라고 지적했다. | 역사 학자가 그와 같은 근시에 빠질 경우에 시각을 교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잠시 자신의 자료를 덮어두고 남의
사는 모습이나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어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학사의 가장 근 병폐인 사료 부족으로부터 지평을 확대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을 보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를 살았던 외국인들의 현장 목격담은 우리의 편협한 국수주의로부터 역사학을 해방시키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허물이나 잘못된 가치관을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번역하여 소개하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도 그러한 범주에 드는 좋은 사료 중의 하나이다.
●한말 선교사 3대 노작 중 하나
다만 이러한 사료를 읽을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서구인들이 쓴 글의 행간에 깔린 백색
우월주의와 비기독교 사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비논리적이고도 자존적인 비하 의식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버리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들이 당초부터 한국을 비하할 의지를 가지고 썼다면 읽을 가치도 없고 번역할 가치도 없겠지만 그들의 호의와 남다른 통찰력이 담긴 글이라면 우리가
굳이 배척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글에 다소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고마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그들의 기록이
우리의 역사학에 끼친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1897)가 그러한 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저술 중의
하나이며, 이 책이 그리피스 교수(William E Griffis)의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
1882)과 헐버트 목사(Homer B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와 더불어 한말
선교사가 쓴 3대 노작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영국의 황금기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 요크셔에는 버드(Bird)라는 명문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가문에는 에드워드라는 귀족이 있었다. 그에게는 이자벨라와 헤니(Hennie)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이 유복한 가정에도 불행은 있었다. 가족이
모두 병약한 것이었다. 두 딸이 결혼하기도 전에 부모가 별세하고 두 자녀 또한 병약한 상태에서 부모를 잃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이
두 자매 앞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는 이 두 자매를 치료하기 위해 왕진을 온 비숍(John Bishop) 박사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어의 수련의가 된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이 무렵에 동생 헤니가 장티푸스에 걸리게 되고 그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헤니는 치료도 소용없이 죽는다. 그후 이자벨라는 비숍 박사를 사랑하게 되어 이자벨라의 나이 50세에 10년 연하인 비숍 박사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자벨라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8개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지난 후 1881년에 남편은 어느 선원을 수술하다가 단독증에 감염되어
1886년 3월 6일, 결혼 5주년 기념일을 2일 앞두고 사망한다.
이자벨라는 다시 우울증과 고독으로 괴로워하다가 당시로서는 탐험가들의 대상이 되었던 극동의 오지
여행을 떠난다. 그는 1894년 1월에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1894년 2월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그때 이미 그의 나이는 63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1897년까지 3년 동안 극동에 머물면서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장기간 체류했다.
그는 마적단의 습격을 무릅쓰고 시베리아의 한인촌을 탐사했으며, 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으면서
봉천을 여행했다. 한국의 이 시기는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그리고 을미사변을 겪은 한말 풍운의 핵심기였기 때문에 그의 육성
증언은 그 시대 연구의 중요한 일차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는 한국에
머물면서 크기가 2.4mx1.35m 짜리의 나룻배를 타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으며 남한강을 따라 양주, 여주, 청풍, 단양을 여행했으며,
다시 노새를 타고 금강산의 4대 사찰과 안변의 석왕사를 돌아보고 북경로를 따라 파주, 안주, 덕천, 순천을 여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인의
삶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정착하고 있는 한인촌을 찾아보기도 했다.
깔끔한 일본을 거쳐 내한한 비숍 여사가 한국을 돌아보고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가난과
불결이었다. 그는 이러한 한국인의 생활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고 체념한다. 그가 더욱 절망한 것은 상류 사회의 사치와
방탕이었다.
그가 단양의 어느 토호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주인 마님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고, 남편은 스코틀랜드 위스키와 프랑스의 샴페인과 코냑을 두루 갖춘 채 영국제 시거를 물고 있었으며, 집안은 수단제 카페트를 깔고 벽에는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거울이 걸려 있고 탁자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얘기가 아니라 1890년대의 얘기라는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비숍 여사는 한국의 장래에 더욱 절망을 느끼게 된다.
●무당의 주술에 의존해 사는 삶
그러던 차에 그는 시베리아의 한인촌을 답사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곳의 한인들은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검소하고 근면하며 인성도 착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이들의 삶을 시샘하는 러시아 정부가 한인들을 추방하기도 하고
유입을 집요하게 막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비숍 여사는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들이 조선에서
살았더라면 이토록 근면하였을까? 라고 비숍 여사는 묻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 사는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가난하고 불결하고 게으르며,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은 왜 그토록 근면하고 유복한가?
비숍 여사가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조선에 사는 한국인들이 가난한 것은 노동의 의욕이 낮고 따라서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의 노동 의지와 생산성은 그토록 낮은가? 결론은 부패한 관리의 수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체념이 끝내 한국인을 가난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천형이었으며 저주였고 관리는 기생충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절망으로 인해서 한국인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무당의 주술에 의존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는 진단한다. 이 가난한 나라에서
푸닥거리로 소요되는 연간 총액은 약 250만달러에 이른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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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들의 저녁 식사.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의 탐식증에 놀라워
했다. | 한국은 결코 가난하거나
게으른 나라가 아니라고 비숍 여사는 강변한다. 한국은 개발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부존 자원만으로도 한국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진단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식생활 중에서 외국인들이 공통되게 놀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탐식증이었다.
비숍은 한국인들의 이러한 식사 습관은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잔칫집에 가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야말로 그들이 아사와 영양 결핍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들을 데리고 잔칫집을 찾아가 굴뚝 뒤에서 등을 두드리며 자식들을 억지로 먹이는 장면에서 우리는 1950년대의 소년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 이론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꼭 같은 종자의 귤일지라도 양자강 남쪽에서 재배하면 당도가 높은 과일이 되지만 북쪽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안자의 말씀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왜 미국으로 이민 간 동포들은 그토록 근면하고 우수한데 이 땅의 우리는 가난하고 찌들게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입헌군주제가 가장 이상적"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비숍 여사가 제시한 방안은 부정 부패를 척결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하고 왕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정체를 입헌군주제로 바꿔야 한다는 그의 주장의
행간에는 자신들의 정체에 대한 오만이 배어 있어 크게 귀 기울일 바는 아니지만, 오늘날까지도 구두선처럼 되뇌고 있는 부패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고 또 오늘 내일에 끝날 것 같지도 않다는 데 우리의 슬픔이 있다.
한말에 이 땅을 찾아 왔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공통되게 나타나면서도 비숍 여사에게는 좀 색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부분은 역시 여권 문제이다. 그는 우선 한국 여성의 한글 해득률이 0.2%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여성들의 문자 해득률이 이토록
낮고 그들이 은둔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불신이나 비하 때문이 아니라 빗나간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비숍 여사의 견해이다.
즉 아내는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남편은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어이없는 부부상이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으며, 사대부 마님의 대부분이 서울의 지리를 모르면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남자들은 「아내와 결혼하고 사랑은 소실과 나누면서도」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이다.
■글을 마치며
풍운의 한말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비분강개하고 애상(pathos)에 젖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로는 그것이 오래다면 오래라고 말할 수 있는 10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비극은 이 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그때의 비극이 운명적이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가 저지른 재앙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비극은 기회 상실이었고 그것은 지배 계급의 미망 때문이었다. 새 천년이 시작되었다고 모두가
법석이지만 어제 뜬 해와 오늘 뜬 해가 무엇이 다른가? 유구한 역사 속에 수유와 같은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즉 역사 앞에
겸허히 서서 온 길을 되돌아보고 갈 길을 고뇌하는 길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디로 가려는지를 알고 싶거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복룡 건국대교수 ㆍ 정치학)
◇ 비숍(Isabella Bird Bishop: 1931∼1904) 연대기
--1831년 10월 15일: 아버지인 에드워드 버드(Edward Bird) 목사와 어머니
도라(Dora Lawson) 사이에서 태어남. 고향은 요크셔의 보로브릿지.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문학ㆍ역사ㆍ회화ㆍ프랑스어ㆍ 성서를 공부했고, 아버지에게서 라틴어와 식물학을 배웠으며, 혼자서 화학ㆍ 시ㆍ생물학을 공부함. --캐나다와
북미주를 여행하고(1854) 『미국에 온 영국 여인』(Englishwoman in America, 1856)과 『하와이군도』(The
Hawaiian Archipelago, 1875)와 『일본의 오지』(Unbeaten Tracks in Japan, 1880)를 씀.
--1881년 3월 8일: 의사 비숍(John Bishop) 박사와 결혼. --1886년 3월: 남편 사망. --1894년
1월∼1897년 1월까지 극동 여행.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 --『양자강 너머』(The Yangtse Valley and Beyond, 1899)를 집필. --1901년: 모로코를
여행한 후 그 여독으로 1904년 10월 7일에 사망. -- 최초의 왕립지리학회 여성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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