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말과 일제시대] 조선은 과연 자주국인가
열강 속 약소국의 설움…수호조약
명문화에도 중국과의 관계 논쟁거리로
■데니(O N Denny)의 '청한론'(China and Korea, Shanghai, 1888)과
묄렌도르프(Paul G von Moellendorff)의 '청한 종속론'(A Reply to Mr. Denny, Leipzig, n.d.)의
논쟁
한국의 사상사를 공부하노라면 으레 율곡( 이이)과 퇴계(이황)의 철학적 논쟁에서 잠시 그들의 논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이 그들의 철학을 담론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논의해 보자면, 퇴계는 인간이란 이성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고(인) 의롭고(의), 겸양하고(예), 지혜(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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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 지금은 독립문
자리이다. | 그의 논리의 핵심은
인간이란 두뇌(이성)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율곡은 인간이란 가슴(기)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기쁨(희)과 분노(노)와 사랑(애)과
두려움(구)과 슬픔(애)과 미움(오)과 욕망(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두 어른의 논쟁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실은 가슴이냐 머리냐 하는
논쟁도 중요하지만, 퇴계는 사랑이란 지성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율곡은 사랑이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퇴계가 옳은지, 아니면 율곡이 옳은지를 편 갈라 판정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를 살아간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가슴으로 산
사람도 있고 냉철한 머리로 살다간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 경제학자로 케임브리지경제학을 창시한 마샬(Alfred Marshall:
1842∼1924)의 말처럼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한 사람'(cool brain and warm heart)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역사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사마의가 없었다면 제갈량이 존재할 수 없었고, 스키피오(Scipio Africanus)가 없었다면
한니발(Hannibal)의 위대함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의 격동의 한말에도 그러한 빙탄처럼 대조적인 두 외국인이 살았는데, 하나는
데니 (O N Denny)이고 다른 하나는 묄렌도르프(Paul G von Moellendorff)이다.
전자는 미국 서부 출신의 공격적인 성격의 변호사였고, 후자는 프러시아 출신의 냉철한 학자였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국적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달랐지만 오월동주일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독일 신사로서 이지적이고
논리적이었던 묄렌도르프와 자유분방하며 감성적이었던 데니는 서로가 극단적 대조를 이루면서 한국사의 한 시대를 엮어갔다.
이들 논쟁의 핵심은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냐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고
묄렌도르프가 먼저 논쟁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말하는 속방의 논거는 서기 670년대에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고, 중국의 연호를 썼으며, 천자 사신의 주재 아래 왕의 즉위식을 거행했으며, 조선의 국왕이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시대가 지나면서 다소 성격의 차이는 있었지만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에서 성하지맹을
맺으면서 종속 관계는 분명한 국가간의 약속으로 자리잡았다고 묄렌도르프는 주장한다. 사실 여부만을 놓고 따진다면 묄렌도르프의 그와 같은 주장은
모두가 맞는 말이었다. 중국의 천자가 폐하일 때 우리의 왕은 전하였고, 후는 비였고, 태자는 세자였으며, 천자의 칙사가 오면 영은문까지 나가 네
번 절을 올리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왕의 즉위는 물론 세자의 책봉은 천자에게 아뢸 사안이었으며, 절기마다 지방 특산물을 보내어 천자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식을 갖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4년에 김옥균이 중국을 몰아내고 자주 정부를 수립하자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는 묄렌도르프로서는 김옥균을 역적으로 간주하여 일본까지 추격해 죄인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미법계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던 데니는 종래와 같은 묄렌도르프 식의 청한 종속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도 지난날에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등의 봉신국(봉신국) 노릇을 한 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지나간 일이라는 것이다. 이미 한일수호통상조약(병자수호조약, 1876)의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 국가임'을 천하에 공표했으며, 한미수호조약 (1882)의 체결 당시에 거중 조정을 했던 이홍장이 조약 문서에 '조선은
중국의 속방임'을 넣을 것을 요구하다가 관철되지 않아 이를 철회했으니 그것은 중국이 명시적으로 청한 종속론을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데니의 논리였다.
강대 국가와 약소 국가의 관계에서 조공은 흔히 있는 일이었는데 예컨대 버마의 국왕이 영국 국왕에게
인사차 예물로 조공을 받쳤다고 해서 버마가 영국의 속방이었느냐고 데니는 반문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대 국가와 약소 국가 사이에 관례적이고
의전적으로 오고 간 영향력은 주권을 침해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데니가 한중 관계사에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원세개의 횡포였다. 본시 무사 출신이었던
원세개는 성격이 거칠고 오만했다. 그도 일개 조선 주차 외교관이었지만 자신은 여타의 공사들과는 다른 감독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실의 하마비
앞에서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은 채 대전까지 들어갔으며 국왕을 무례하게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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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 출신 외교관 원세개는 조선을 속국 대하 듯 횡포를
부렸다. | 한미 수교와 더불어
전권 공사 민영익이 미국으로 출발하려 할 때 원세개는 그를 불러 속국의 사신이 지켜야 할 세 가지의 원칙 '영약삼단'을 지시했는데, 첫째로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미국 주차 청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그의 안내를 받아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할 것이며, 둘째로는 미국
정부에서 주최하는 각종 외교 모임에서 조선 공사는 반드시 중국 공사보다 아랫자리에 앉아야 하며, 셋째로는 미국에서의 제반 외교 업무를 청국
공사와 상의하여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참으로 무례하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외교관이 부임하면 먼저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다음 국립 묘지를 방문하고, 그 다음으로 외교사절단을 찾아가 상견례를 하는 것이 순서이다. 외교 모임에서의 서열은 강대국의
순서가 아니라 그 외교관의 부임 일자 순서로 결정된다. 외교 업무는 그 국가의 독자적인 권한이며 기밀이기 때문에 중국과 상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지난 세기의 구습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다고 데니는 생각했다.
원세개의 폭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외교관의 특권을 이용하여 인삼을 밀수함으로써 엄청난
치부를 했고, 인사에도 간여했다. 그는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의 미녀를 첩으로 들여 살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야반도주를 하면서도 그
현지처를 데리고 갔다.(그 여자는 그 후 유명한 시인인 아들 원극문을 낳았고 그 손자가 바로 원가류로서 노벨 화학상을 탄 그 사람이다.)
데니는 이러한 불공정한 한중 관계사를 열혈한 필치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청한론'이다. 데니가
이 책을 쓰자 묄렌도르프도 곧 그에 대한 반론으로 '청한 종속론'을 썼다. 그는 자신의 추천에 의해 조선에서 근무하게 된 데니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처사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의 글에도 인간적인 애증이 배제될 수는 없었다. 이 글을 통하여 묄렌도르프는 다음과 같이 데니를
반박하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한 데니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세계가 청국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수행하면서, 그 문제의 여러 사실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고 논리가 부족하며, 더구나 전략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청국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조선에 주재한 청국 대표(원세개)에게 악담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책자
전문에서 그가 보여 주고 있듯이 그는 자신을 조선의 왕에게 천거한 나라(청)와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리하여, 그의 책은
한 정부고문의 솔직하고 냉정한 추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자신이 공박하고 있는 쪽에게 개인적 감정이 상해 있는 정치가의 격앙된 함성으로
받아들여진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의 훼예포폄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춘추 전국 시절의 유명한
도적이었던 도척이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살았듯이 설령 객관적인 안목에서 비난을 받을지라도 그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며,
베이컨(F Bacon)이 일세를 풍미한 철학자였다 할지라도 그는 수뢰죄의 형사피의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말과 글을 가지고 그를 칭송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묄렌도르프와 데니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면서 선악의 어느 한 편을 들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 모험심이 강한 서방의 여느 외국인들이 그러했듯이, 묄렌도르프도 나름대로 야망과 경륜을 가지고 동방에 온 후로 공과의
비평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많은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데니는 풍운의 한말에 열강으로부터 조선과 그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신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을 평가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중국의 속방이라고 말한 묄렌도르프는 우리의 적이요, 우리를 옹호한 데니는 우리의 동지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각기 역사의 위치에서 자기의 삶을 소신껏 살아간 사람들일 뿐이다.
인간은 가슴으로 사는가, 아니면 머리로 사는가라는 처음의 화두로 돌아가서 두 사람의 일생을
돌아본다면, 데니는 분명히 뜨거운 가슴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고, 묄렌도르프는 냉철한 머리로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후 데니는 결국
묄렌도르프에 의해 거세되어 울분을 품고 귀국해야 하는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 대목에서 역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머리로 산 사람이
결국은 가슴으로 사는 삶을 이기더라고 하는 사실이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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