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에 비친 격동의 한말과 일제시대
칼스(W R Carles)
'조선풍물지'(Life in Korea, Macmillan, 1888)
------------------------------------------------ 켐프(E G Kemp)
'조선의 모습'(The Face of Korea, Duffield,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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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스는 우유나 양의 젖을 먹지 않는 조선인들의 모습에서 나라의 장래를
크게 걱정했다. 사진은 조선 말기 남대문 시장 모습. | 때는 1884년, 그러니까 조선으로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였다. 아직도 세계 대세에 눈뜨지 못하고 중화 사상의
틀 속에서 안주하고 있던 시절의 조선 북녘 땅 함경도의 산골에 허름한 복장을 한 벽안의 신사가 꼬챙이로 땅을 후비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돌멩이며 흙을 조사하고 식물의 잎을 따서 살펴보기도 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름은 곳체(Karl Gottsche). 그는 독일의 알토나(Altona)에서
출생하여 자연과학, 특히 고생물학을 전공하고 1878년에는 뮌헨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880년 이후에는 키일대학 강사로 활동했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받고 1881년부터 1884년 부활절까지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조선에 진출하여 식민 정책을 추진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던 일본은 조선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으나 민족 감정상 스스로 조선의 지형 지물을 탐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학술 조사라는 미명으로 곳체
박사를 앞세워 조선 북부 지방의 지하 자원을 탐사하고 있었다.
1884년 4월 1일자로 조선 주차 독일 공사관의 초빙 형식으로 입국한 그는 조선의 사용 가능한
지하 자원 보유 상태를 조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본이 그를 고용한 것은 한국인들이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학습하는 동안에 서양인을 야만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심층 심리에는 서양인을 경외하고 그들에게 더 친밀하다는 사실을 일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는 곳체 박사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정체는 곧 미국 공사관에 포착되었다. 식민지
점탈의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으로서도 조선의 광산 개발은 중요한 이권 사항이었으므로 곳체의 그러한 활동을 방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 공사 후트(Lucius H Foote, 복덕)는 즉시 본국 정부에 자원 탐사 전문가를 지원해주도록 요청했고 이에 따라
버나도(John B Bernadou, 번어도)라는 인물이 부임했다. 그는 본시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속의 무관이었으나 1883년 9월에 조선 주차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라는 직함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주로 광산 탐사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세계 식민지 정책의 첨병인 영국이 이러한 정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주한 영국 공사 애스톤(W
G Aston)은 즉시 본국에 자원 전문가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부임한 사람이 곧 이 책의 필자인 칼스였다. 당시 북경 공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칼스는 전보 형식으로 쉽게 한국으로 부임할 수가 있었다.
개항으로부터 대한제국의 멸망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열강들의 이해 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지만 그러한
와중 속에서도 영국의 입장은 매우 미묘했다. 그들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인 세력 균형과 원료 수탈이라는 대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던 그들의 정책은
대한제국의 멸망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외교 현장에 있었던 실무자인 칼스의 육성은 매우 중요한 시사성을 갖는다.
칼스의 '조선풍물지'가 출판되자 한국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던 구미 각국에서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이 '네이션'(Nation)지는 서평을 통해 "이 책은 <금단의 나라>이자 <은자의 나라>인 조선에 들어가 그
국민들과 함께 살아본 영국인이 쓴 최초의 글이어서 흥미롭다…. 필자의 글은 단순 명쾌하며 매혹적이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사실과 현상을 주의
깊게 천착하고 있다. 그의 꾸밈없는 서술은 아직도 불쾌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나라에 대하여 우리에게 값진 지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칼스의 '조선풍물지'는 외교관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말해서 조선의 정치에 대한 회고록이
아니라 조선 탐사 보고서이다. 그는 18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조선에서 근무했다. 그 동안 그는 외교 업무보다는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강원도의 지하 자원을 탐사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45일 동안에 탐사한 거리는 1200km(3000리)에 이른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는 지하 자원 탐사는 물론 자신이 들린 마을의 호구 수와 마을 간의 거리, 특산물, 기압과 기온,
그리고 그가 잠을 잔 여관의 벽에 남긴 상인들의 물품 대금에 관한 낙서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압을 기록한 것은 당시의 기압계인
아네로이드(aneroid)로 지층의 고도를 환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탐사 활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생스러웠는가는 그의 기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맹수와 강도의
습격 등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그는 끈질기게 탐사를 계속했다. 그가 작성한 식물상과 동물상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도 처음 듣는
것들이 많으며, 지하 자원에 대한 지식은 그가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틈틈이 인삼 재배의 방법을 터득했으며 좋은
육질을 가지고 있는 꿩의 인공 사육을 이미 그 시대에 시도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인이 우유나 양의 젖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육류 단백질의 섭취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적은 후대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 와서는 육류 소비가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킨다는 등의 배부른 소리들을 하고 있지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육류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민족이 그 시대를 지배한 것만큼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로마가 그렇고 몽골이
그렇고 지금의 미국이 그렇다.
육식 민족이 당대의 역사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채식 민족에 비하여 육체적 힘이
강인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더 공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 학자들의 주장이고 보면, 채식을 강조하는 것이 의학적으로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역사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채식 민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남방계는 채식 민족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기마 민족이었던 북방계는 분명히 육식 민족이었다. 그러던 것이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유목 민족이 몰락하면서부터 우리는 농경 민족이 되었고,
그 후 주식이 곡류로 바뀌면서 우리의 체내에는 육류를 소화할 수 있는 효소가 퇴화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민족 열등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요즘의 기성 세대 중에서 우유를 먹으면 설사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소화 효소의 퇴화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인이 우유를 먹지
않음으로써 겪게 될 장래의 비극을 걱정한 칼스의 지적은 우리의 역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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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켐프는 한국 여인의 모습에 특히 관심을 갖았다. 사진은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그림 '마님과 하녀'. | 칼스의 '조선풍물지'에서 눈길을 끄는 또다른 대목은 거기에 수록된 40편의 삽화이다. 초벌 그림의 인상을 풍기는 이 그림들은
당시 한국인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지만 그가 남긴 글의 행간을 주목하노라면 당시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한국의 서화와 골동품을 반출해 갔는가를 알 수 있다. 칼스의 설명에 의하면 이 그림들은 그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그가 가져간 한국의 민화와
풍속화, 그리고 도자기를 밑그림으로 하여 영국의 화가가 다시 스케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의 밑그림으로 얼마나 많은 풍속화나
민화가 이미 그 당시에 해외로 반출되었는가를 알만 하다.
이 무렵보다는 다소 시차를 두고 한국을 찾은 또 다른 영국인이 있었는데 그가 두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켐프 여사이다. 그의 직업은 풍경화가였기 때문에 그의 기행은 전적으로 그림 여행이었고 따라서 그의 기록이 한말 풍운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봉천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것은 왕조의 멸망이 목전에 다가온 1910년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목격한 일부 정치적 사건과 전문을 다루고 있다. 그는 한국 전역을 돌아보았지만 특히 금강산의 경치에 대한 찬사와 여인상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과 기록을 남겼다.
한국의 풍광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객기로 살던 젊은 날에 나는 강릉 경포대에서 영주
불영사까지 걸어서 여행하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특히 25km의 불영계곡을 걷던 추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 알프스나 그랜드 캐년을 본
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중국의 누구인가는 "원컨대 조선에 태어나 금강산이나 한번 보았으면…"(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이라고 시를 읊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풍광을 탐미한 시인 묵객들이 많았지만 켐프의 그림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뉴욕의 고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거기에 수록된 아름다운 수채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조바우를 쓴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 각시 시절의
어머니를 회상했으며, 어쩌면 이 그림은 한국회화사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이 개화기의 문물을 소개하는 탁월한 여행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 그림과 화가가 본 한국의 풍광을 소개하고 싶었다.
켐프의 눈에는 한국 여인의 숨어 사는 모습이 특히 기이하게 보였던 것 같은데, 이는 같은 여자의
입장이어서가 아니라 당시 한국 여인의 모습을 본 외국인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그런데 아랍 여인들의 차도르처럼 긴 장옷을 입은 여인의 줄 타하는
모습이라든가, 이목이 번잡하지 않은 해거름에나 바깥 출입을 하는 여인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장옷마저 없는 여염의 아낙은 하다 못해
키라도 쓰고 나가던 모습의 익살스러운 그림이 이채롭다. 그밖에도 풍경화가답게 그가 그린 산수의 풍경도 이 책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식민지주의를 거론할 때면 우리는 일본을 생각하게 되고 침략, 약탈, 학살과 같은 것들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식민지가 일본과 같지는 않았다. 영국처럼 지하자원이나 문화재를 주목했던 나라가 어쩌면 더 식민지주의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숙주의 생명을 상하지 않으면서 더 저강도의 수탈을 했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칼스(William Richard Carles: 1848∼1929) -- 1848년 6월
1일: 영국 와위크(Warwick)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 말보로대학 졸업. -- 186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주차 영국 공사관의
번역 유학생으로 동방 생활을 시작. -- 1882∼1883: 북경 주차 공사관 서기관 대리 -- 1884∼1885: 조선 주차
영사. -- 1886년: 헬렌(Helen M James)과 결혼. -- 상해 부영사(1886), 중경 영사(1889), 한구 영사
대리(1895∼1896), 복주 영사 대리(1897∼1898), 천진 및 북경 영사 및 총영사(1899∼1900)를 역임. --
1901년: 일선에서 은퇴. -- 왕립지리학회 회원(FRGS)과 세계적인 동식물학회인 린네협회 (Linnean Society) 회원으로
활약. -- 1901: 성 미카엘 조지 훈장(CMG)을 받음. -- 1929년 4월 7일 사망. 취미는 크리켓·테니스·승마.
■켐프(Emily Georgiana Kemp: 1860∼?) -- 영국의 풍경화가. --
왕립 스코틀랜드지리학회 회원(F.R.S.G.S.) -- 1893년부터 1913년까지 전시 활동. 그의 작품은 알파인 클럽 갤러리에 9점,
워커 아트 갤러리에 1점, 여성예술가협회에 2점이 소장되어 있음. -- 중국을 여행하며 당시의 견문을 토대로 "중국의 모습"(The
Face of China)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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