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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버려 나라를 잃었다...반전주의자 설치고 전사는 푸대접" - 하멜 표류기

이강기 2015. 9. 7. 22:31

"바다를 버려 나라를 잃었다...반전주의자 설치고 전사는 푸대접"

하멜(Hendrick Hamel)의 "하멜표류기"(Narrative and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68)

한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토인비 (A J Toynbee)를 비롯한 현대의 역사가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중국의 맹자도 어느 국가의 멸망은 결국 그들의 내재적 모순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결국 그 국가의 허술한 국방력 때문이며 특히 해상 방위를 소홀히 했을 때 국가의 미래를 장담할 수가 없다.

▲ 하멜이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 상륙하던 모습. 하멜표류기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1890∼1940년대의 미국의 외교 정책을 지배했던 사조는 해상권을 장악하는 것이 결국 초강대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이었던 마한(Alfred Mahan: 1840∼1914)이 쓴 '해상권이 역사에 끼친 영향'(1889)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사조는 미국의 대외 정책, 특히 대한 정책의 기조를 이룬 것으로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국제적인 요인도 지상군을 철수하고 미 제7함대로 극동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던 데 부분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국가 방위 개념에는 바다를 지킨다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왜구나 서양 오랑캐의 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해안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밤이면 해안에서 불빛을 보여서는 안되었으며, 섬에서 모든 주민을 철수시키는 이른바 공도 정책을 썼다. 연안 선박 이외에는 대양에 나갈 수 있는 함선의 축조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먼 바다에 나가려면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을 만들어야 파도로 인한 기울음으로부터 복원이 빠르고 속도를 낼 수 있는 법인데 모든 배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만들어 대양 진출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법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번연히 예상했던 이순신은 배를 만들지 않고 조립 직전까지만 준비해 두었다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첩보를 받고서야 급히 조립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야 거북선의 시운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에 조선이 초토화되고 운양호 사건(1875) 이래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군사적인 요인도 결국은 우리가 해상권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운양호가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조선 사람들은 뱃전에 보이는 거대한 대포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렸지만 실은 그 대포는 실물이 아니고 그림이었다. 그래서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해군은 해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조선의 포대를 위협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의 회한을 되뇔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나라에도 장보고와 같은 해양 정신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해양 기술을 연마할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모두 잃었기 때문인데 그 중의 하나가 하멜의 표착이었다.

때는 1653년 8월 15일 밤, 제주도 대정의 모슬포 앞바다에 한 척의 이양선 이 난파되었다.

워낙 폭풍이 심했던지라 선원 64명 중에서 28명이 현장에서 익사하고 36명만이 다친 몸을 이끌고 해안에 올라 왔다. 날이 밝자 섬의 주민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즉시 이를 관가에 보고하자 대정 현감 권극중이 병사를 이끌고 와 이들을 체포했다. 선원들은 동쪽을 가리키며 '나가사키'라고 외침으로써 자기들이 일본으로 가려다가 난파한 선원들임을 알렸으나 현감은 막무가내로 선원들을 체포하고 우선 달아날 것에 대비하여 목에다 방울을 달았다. 관헌과 주민들은 해안에 떠오른 표착 선박의 유류품들을 약탈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곧 제주 목사 이원진에게 끌려갔다. 목사는 이 이방인들에게 참으로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면서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조정에 문의했다. 그로부터 두 달 반이 지난 어느날 일행이 다시 목사 앞에 끌려나가니 그의 옆에는 분명히 서양 사람인 듯한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서 있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네덜란드인인 벨테브레(Jan J Weltevree, 박연: 1595∼?)이었다. 그때로부터 26년 전인 1627년에 일본으로 가던 중 물을 구하러 육지에 올랐다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주민에게 잡혀 억류되어 있던 그는 이미 모국어를 거의 잊은 채 58세의 초로의 신사가 되어 있었다. 벨테브레는 가물거리는 어휘를 회상하며 겨우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난파 선원의 안타까운 신세로 천리 이국 땅에서 동포를 만난 하멜 일행은 기쁨도 잠시뿐, 날개가 없는 한 이 나라에서 탈주할 꿈을 버리라는 말을 듣고 깊은 절망에 빠진다. 벨테브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하멜 일행은 탈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기들은 선원의 수가 많고 해양 기술도 갖추고 있으므로 벨테브레와는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탈주를 작심한 하멜 일행은 어느 날 밤에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잠행을 했다. 그런데 외국인의 독특한 냄새를 맡은 동네의 개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주민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 일행은 잡히고 말았다. 그 후 하멜은 지난 날의 실수를 거울 삼아 개가 없는 쪽으로 다시 탈주를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훔쳐 탄 배가 너무 허술하여 주민들의 추적을 받고 다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제주 목사로서는 더 이상 이들을 잡아 두는 것이 자기로서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모두 육지로 이송할 것을 상주했다. 결국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하멜 일행은 영암·정읍·전주·연산·공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일행은 벨테브레의 통역으로 효종을 알현할 기회를 가졌다. 이들은 국왕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그들은 어전에서 서양의 기이한 춤과 노래를 보여주었고 그 대가로 푸짐한 상품을 얻는 것으로 만족했다. 효종은 이 색목인들을 노리갯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훈련 대장 이완의 휘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훈련대에 편입되었다고는 하나 하는 일이란 없었다. 기껏해야 고관 대작의 집에 불려 가광대처럼 서양의 춤과 괴성같은 노래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다. 사대부들은 당시 주자학적 인식 속에 서양은 오랑캐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그 여흥을 즐겼으나 당사자인 하멜의 일행이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 사람들은 감당해야 할 전쟁을 회피하고 있었고 호전적이고 용맹한 군인이 오히려 모멸을 당한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러한 반전주의의 나라에서 자신들이 조선을 도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고 자신들의 능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아 쓰임새가 있기를 바랐으나 그러한 바람은 모두가 허사였다.

조선에 억류된 지도 이미 12년이 지난 서울 생활에서도 그들은 탈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로서는 배를 구하여 탈주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는 계제에 중국의 사신이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신이 올 때면 조선에 서양인이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조정에서는 하멜의 일행을 남한산성으로 은닉시켰다. 첫번째 소개 때에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갔지만 두번째에는 사신이 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자신들이 서양 사람임을 설명하고 중국으로 데려가 줄 것을 간절히 요구했다. 중국의 사신은 이들의 인도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어찌 된 셈인지 중국 사신의 요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조선의 조정에서 그에게 뇌물을 쓰고 없었던 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하멜 일행이 조선 관군에 붙잡히는 모습.
이제 하멜의 일행은 생명의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한 위험 속에도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자비로운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더 이상 서울에 두었다가는 화근이 되리라고 생각한 조정에서는 이들을 호남의 오지로 보냈다. 당시 그들은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며 절간을 찾아가 자비로운 스님들의 보시로 연명했다. 이때는 조정에서도 이들을 거의 방목한 때여서 일행은 조선의 문물을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악한 생활 속에 14명이 이미 죽고 22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은 호남 지방을 떠돌며 유리걸식하며 살았다.

그런 삶을 살던 차에 1569년에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이들의 삶에도 변화가 왔다. 현종은 생존자 22명을 순천·남원·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분리 수용하였다. 이들이 바닷가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탈주를 다시 계획했다. 그들은 구걸을 하고 품팔이를 하여 열심히 돈을 모아 3년 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배를 살 돈을 마련했다. 그들이 1666년 9월 4일 밤에 여수를 출발하여 탈주에 성공했을 때 생존자는 모두 16명이었는데 남원 일대의 내륙에 갇혀 있던 일행은 합류하지 못하고 여수에 있던 8명만이 일본의 히라도(평호)에 도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남아있던 일행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당시 오랑캐였던 그들이 조선에서 결혼하여 정착했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후손도 없이 모두 외롭게 죽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탈주한 일행 중에서 다소의 학식이 있던 하멜은 고국으로 가는 선편을 기다리는 2개월 동안에 기억을 더듬어 13년 동안 나포되어 있었던 조선의 체험기를 써서 바타비아의 총독에게 바쳤는데 이 글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하멜표류기"이다. 이 기록은 비록 13년이 지난 후에 회상 형식으로 썼다고 하나 날짜까지 틀림이 없다는 점에서 놀랍고, 위로는 왕실의 생활에서 아래로는 여염의 삶까지 직접 목격하고 서술한 최초의 서양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상은 서글픔과 아쉬움같은 것이다. 왜 당시 제주에 표착할 때 총포와 도검을 더 연구하여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녹여서 농기구로 썼을까? 당시의 국왕인 효종은 명색이 북벌을 계획했고, 이완은 훈련 대장으로서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는데 왜 하멜과 같은 선진 해양 민족의 난파 선원들을 만났을 때 총포술이나 조선술 또는 항해술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사대부의 노리개로 썼을까?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와 똑같이 난파 선원을 받아들인 일본은 우리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난파 선원들로부터 조총의 기술은 물론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워 이른바 난학(난학: Dutch Science)이라는 독특한 학문 체계를 완성했고 이것이 근대 일본의 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우리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그 난학이 조선 침략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행한 역사의 민족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과거의 어느 순간에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있었다. 이러한 논리를 조선조 멸망사에 대입해 본다면 우리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지배 계급들이 주자학적 세계관에 눈이 어두워 그들에게 능동적이고도 긍정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멜표류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당시 서구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의 물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있을 것이다.

◇하멜(Hendrick Hamel)
1630년대에 네덜란드 고르쿰에서 출생.
1650년: 포겔 스트루이스호(Vogel Struijis)를 타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로 가 보조원을 거쳐 스파르웨르호(Sparwer)의 선무원이 됨.
1653년 8월 15일: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대정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착.
1654년 6월: 서울로 이송.
1663년: 순천·남원·전라좌수영(여수)에 분리 수용됨.
1666년 9월 4일: 배를 타고 탈주하여 이틀만에 일본 히라도에 도착, 동인도회사에 인도됨. 네덜란드로 귀국.
1667년: 바타비아 총독에게 "표류기"를 저술하여 보고함.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함.

(신복룡 건국대 교수· 정치학)


주간조선2000.01.13 /15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