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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의 '조선비망록' - 조선을 사랑한 미 외교관의 기록

이강기 2015. 9. 7. 22:34

샌즈의 '조선비망록'

조선을 사랑한 미 외교관의 기록...열강에 맞서 국익 대변

샌즈(William F Sands)의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1930)

 

어느 사회에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긍정적이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전자를 가리켜 좌파라고 부르고 후자를 가리켜 우파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좌파니 우파니 하는 용어는 본시 프랑스혁명 직전에 부르봉 왕조의 삼부회에서 의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회랑(회랑)의 왼쪽에 서고 찬성하는 사람은 오른쪽에 서는 표결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처럼 그 의미가 정착되어, 인권과 평등에 가치를 두는 국제주의자는 좌파라 하고, 재산과 자유에 가치를 두는 국가주의자를 우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 사모관대 차림의 윌리엄 샌즈(왼쪽)가 조선 친구와 함께 장죽으로 담배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개념이나 분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것으로서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한국에서만은 위와 같은 분류가 적용되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미국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우파이고 미국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좌파라는 어이없는 분류 방법이 우리 사회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국인 미국에서조차도 적용되지 않는 이 희한한 분류법이 한국 사회에서만 통하는 이유는 아마도 미국에 순종하도록 오래도록 길들여 오면서 생긴 타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한·미 관계 12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미국은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버이 나라(parent state)만도 아니었고, 좌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원수진 나라도 아니었으며, 사람과 시대에 따라서 착한 사마리아인도 있었고, 몹쓸 짓을 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 때는 1850년대, 미국의 동부 도시인 아나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에는 푸크(George C Foulk)라는 영리한 청년이 사관 생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물도 준수하고 성적도 우수한 이 학생은 이상하게도 혼자서 일본어 학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관학교를 마친 푸크 소위는 남들이 선호하는 본부 근무도 마다하고 서슴지 않고 아세아 함대 사령부의 근무를 신청했으며, 지원자도 적던 터라 어려움 없이 그곳에 배속되어 일본의 나가사키(장기)에 근무하게 되었다. 낭만과 야망에 들뜬 이 젊은이는 주말의 외출 시간이 되면 동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일본의 풍물을 즐겼다.

    그들이 즐겨 찾는 곳은 나가사키의 언덕 위에 있는 전통 찻집이었다. 그들이 그 찻집을 즐겨 찾은 것은 그곳에 딸이 있었는데 얼굴도 미인일 뿐만 아니라 영어도 유창하여 향수를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찻집은 분위기도 우아했으며 장교이든 신사이든 간에 무례하거나 천박하면 주인으로부터 문전 박대를 당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찻집의 주인 노부부가 그 딸을 대하는 태도가 부모 자식의 사이 같지 않고 마치 하인이 상전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많은 청년 장교들이 그곳을 찾았지만 그 찻집에서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푸크 소위가 단연 스타였다. 그리하여 찻집의 외동딸과 푸크는 곧 친하게 되었고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결혼 초에 신랑은 평소에 이상히 여기던 문제, 즉 왜 그 부모가 딸을 마치 상전처럼 대하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그 대답인즉 이러했다. 자기는 본시 사쓰마(살마)의 유명한 사무라이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쓰마와 조슈(장주)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피살되었고 어린 자기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당시 자기 집안의 하인이었던 지금의 부모가 자기를 안고 도망쳐 나가사키에 숨어 사는 것이라고 했다.

    ▲ 샌즈의 임명장. 그의 한자 이름인 '山島'와 고문관으로 임명한다는 글귀가 보인다.
    이 무렵 조선 주차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생활고로 공사직을 사임하자 푸크 중위가 그 후임으로 조선 공사가 되어 1885년 1월에 부임했다. 그는 조선에 살면서 아내의 정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소설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뜻밖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활고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독자적 외교관을 확보하지 못한 채 현지의 장교를 공사로 임명하던 함포 외교의 시대였다. 빠듯한 중위의 봉급으로 푸크 중위는 공사의 품위 유지는커녕 가정을 꾸려 나가기도 어려웠다.

    한국을 사랑했고 아내와 함께 한국에 살고 싶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자 푸크는 공사직을 사임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당신이 봉급을 대신 지불할 터이니 부디 한국에 남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공인의 몸으로 그럴 수도 없었다. 끝내 1886년 6월에 원대 복귀한 푸크 중위는 함대 사령부가 있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늘 공무에 매어 있는 그로서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었기에 예편을 하고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여 남은 여생을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도 잠시뿐, 일본으로 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닛코(일광)의 어느 길섶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몸에는 사무라이의 닛본도 자국만이 낭자했을 뿐 누구도 그의 죽음을 밝히지 못했다.

    그 후 몇 사람의 공사가 거쳐간 뒤 이 책의 필자인 샌즈가 조선 공사로 부임했다. 가문의 연줄로 보더라도 훨씬 더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심만만한 샌즈는 이 미지의 땅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기 위해 조선으로의 부임을 자처했다. 그는 부임 초에 조선의 강산이 황폐한 것은 외국인의 침략의 야욕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파괴하여 그렇다는 말을 듣고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 비경의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에 대한 고종의 사랑과 고종에 대한 그의 연민은 각별했다.

    ▲ 1885년 1월 조선공사로 부임한 조지루크 중위.
    3년에 걸친 공사 생활을 마친 샌즈는 미국 공사의 자격으로서는 자신이 조선을 돕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공사직을 사임하고 조선 정부의 왕실 고문으로 부임했다. 그는 어명을 받아 전국의 민정을 시찰하고 제도를 개선했으며, 이권 외교를 위해 들개들처럼 달려오는 외국의 투기자들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는 함경도의 오지까지 찾아가서 반란군을 선유했으며, 척신과 근신들로부터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무렵, 1901년에 제주도에는 프랑스 신부 라크루(Larcrouts, 구) 신부와 무세(Mosset, 문) 신부가 포교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라는 교리에 따라 마을의 신목을 베어 버리고 해안 무속이 심한 이 지역의 신당을 헐어 버리는 등의 작폐를 저질러 원성을 사고 있었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정부로부터 강봉헌이란 오리가 징세관으로 제주도에 들어와 수탈이 심했는데 이때 일부 천주교도들이 그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프랑스의 세력을 믿은 신부들도 일부 이를 방조함으로써 민원을 샀다. 이에 대정 군수 채구석(채구석: 1879∼?. 제주인. 1879년에 식년 생원에 합격. 자는 대여)과 유림의 좌수 오대현과 강우백, 그리고 제주 관노 이재수 등이 상무사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1901년 5월에 도민들을 규합하여 제주읍을 습격하고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악행을 저지른 천주교도 500명과 주민 200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저 유명한 이재수의 난이다.

    ▲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제주시 관덕정 앞 광장에 집단 살해당한 채 널려 있는 천주교도와 주민들의 시신들.
    제주도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즉시 샌즈를 불러 강화도 수비대를 인솔하고 내려가 사태를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제주도와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개화파 출신의 고영희를 부관으로 뽑은 다음 100명의 수비대를 배에 태우고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반란군을 진압할 만한 무기나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선교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에서는 함대 2척을 파견하여 섬을 초토화시킬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미 700명이 피살된 이 작은 섬에서 다시 신식 군대의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다면 그 피해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샌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선 프랑스 함대의 포티어(Pottier) 함장과 로티(P. Loti) 참모장을 만나 공격을 중지시킨 다음 반란군의 회유에 들어갔다.(로티 참모장은 그 후 제독이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재수의 무리는 죽창과 활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는 수천명이 넘어 보였다. 샌즈는 우선 자신의 강화도 수비대를 허장성세하여 대규모 군대가 온 것처럼 보인 다음 이재수의 무리를 설득했다. 반란군은 의외로 온순하여 쉽게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사태를 수습한 샌즈는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들 중 채구석을 징역에 처하고, 나머지 3인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이 집단 학살은 그 후 제주도의 정치 문화에 커다란 앙금으로 남았다. 이때 필자인 샌즈는 프랑스 선교사를 보호해 준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뢰종 되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받았다.

    샌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운명은 점차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러시아가 패배하자 이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임을 그는 감지했다. 그는 이제 열강의 이권으로부터 조선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서 조선의 중립화를 제안했다. 고종을 설득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누구의 교사를 받았는지 내장원경(왕실 재정 책임) 이용익은 그의 봉급을 중단했으며 그의 집을 압류했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조선 주차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임권조)를 찾아가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만나 조선의 중립화를 호소했지만 이미 조선을 병합한다는 거대한 밑그림을 완성하고 이를 추진 중이던 그들이 샌즈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한 선량한 왕국의 망국을 붙잡지 못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며, 극동의 지도를 둘둘 말아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샌즈가 미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 공사관에서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축하하는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 자리에서 축하의 건배를 제의한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 주차 미국 공사 몰간(J P Morgan)이었다. 샌즈의 얼굴과 몰간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개화기의 한·미관계사를 돌아 볼 때면 나는 자신이 좌파인지 아니면 우파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주간조선1999.09.23 /15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