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스 알렌의 조선견문기
의사-선교사였던 필자, 순교가
미덕이라는 위험한 사고에 경고
호레이스 알렌의 '조선견문기' (Things Korean, 1908)
1850년대의 황금 질주(Gold Rush)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 서부에는 또다시
무료함이 찾아 들었다. 태평양 연안에 몰려든 서부의 개척자들(frontier)은 바다 너머의 미지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다시 서쪽으로의 항진을
시작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험가들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목사와 의사, 그리고 정부의 명령을 받은 아세아함대사령부 소속의
해군 사관과 수병들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각기 달랐지만 모험심이라는 면에서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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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앞줄 가운데)과 공사관원들. 알렌은
고문자격으로 이들을 수행한다. 월남 이상재(앞줄 맨 오른쪽)도
보인다. | 한국이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초창기인 1880년대 초에 남보다 먼저 이 땅에 온 사람으로 블랭크 선장(Captain Blank)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미국의 뉴
베드포드(New Bedford)에서 선장 노릇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흔히 그를 선장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실상 부랑자와 같은 인물이었고 그의
이름(Blank) 만큼이나 부황(부황: blank)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동부 시베리아에 정착하여 중국 여인을 아내로 맞아
자식도 낳고 사냥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본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집안은 온통 쑥밭이 되어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중국 마적들이 그의
가족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해 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을 찾아가 범인의 체포를 요구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며칠을
상심하던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최신형 기관총 몇 자루와 야영 장비를 구입한 다음 그곳에서 직업도 없이 떠돌던 건달 4명을 이끌고 광야로
사라졌다. 그가 광야로 떠난 후 동부 시베리아와 동만주 일대에는 수없이 많은 중국인 마적들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기록된 피살자만도
수백명은 족히 넘었다.
북경 정부는 즉시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고 마음에 짐작되는 바가 있는 시장은
블랭크 선장을 불러 그곳을 떠날 것을 정중하게 요구했다. 다음날 그는 일본으로 떠나는 배를 탔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머물지 않고 곧 조선에
입국하여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검붉은 수염에 장대한 체구를 지닌 이 서양 사나이는 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조선에서 넉넉한 수입을
올리며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에게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여관에 들러 저녁을 먹고 양치질을 하기 위해 의치를
빼어 닦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 냈다가 다시 조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조선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정신을 차린
조선 사람들은 그 기이한 요술(?)을 다시 보여 달라고 부탁했고, 블랭크 선장은 이 공연을 통하여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모험가들의 뒤를 이어 조선에 입국한 무리들이 선교사와 의사들이었다. 빠르면 2주, 풍랑이라도
만나면 4주가 걸리는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조선에 들어온 이들은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의 촉수라는 두
얼굴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의사들이 이 땅에서 겪은 일화들은 포복 졸도할 얘기들이어서 이들의 견문기는 서양 사회의 흥미 있는
얘깃거리가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알렌의 "조선 견문기"(1908)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목사이자 의사인 알렌은 본시 중국에서 의료 선교를 하고 싶어서 동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흔히 하는 중국에서의 삶보다는 더 미지의 세계에 가보고 싶은 심정에서 1년의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대부분의 인생살이가 다 그렇듯이 때로는 운명적인 것에 의해 사사롭게는 개인은 말할 나위도 없고 한
국가의 역사도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게 된다. 알렌이 입국한 직후에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라는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게 된다. 조선의 조급한 개명을
꿈꾸던 개화파로서는 당초 자신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가 이제는 수구파의 핵심 세력이 된 민영익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민비의 친정
조카인 그는 당시 개화파의 최대 정적이었다. 결국 우정국 낙성식에 초대되었던 민영익이 개화파의 자객들로에게 일곱 군데의 칼을 맞고 사경을 헤매자
왕실에서는 말로만 듣던 서양 의사에게 그 치료를 부탁했다. 민영익의 수술에 성공한 알렌은 즉시 당시의 국립의료원인 광혜원의 의사 겸 고종의
어의가 되는 행운을 잡게 된다.
이 무렵에 미국 주차 조선 공사 박정양이 워싱턴으로 부임하게 되자 알렌은 고문 자격으로 이들을
수행하게 된다. 커다란 통영갓에 긴 도포를 입은 박정양의 일행이 워싱턴에 나타났을 때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서울 거리에 나타난
부시맨(Bushman)을 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국무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는 지진이 일어났다고 소동을 피우는 바람에
알렌은 애를 먹었으며, 1층에 숙소를 잡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국무장관이 박정양 일행을 위해 만찬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 참석한 미국
외교관 부인들의 야한 복식을 본 사신 일행은 기생들이 접대하러 나온 줄로 착각하고 큰 실례를 범하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아더(C A
Arthur)를 만나 신임장을 제정할 때는 큰 절 3배를 올리려고 하는 바람에 또 소동이 일어났다.
서양 사람들은 오랑캐요,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외국인들이 살기가 불편하던 차에 알렌
박사의 의술은 서양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료 수가라고 해야 게란 몇 줄에 배추 몇 포기를 들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알렌은 모든 고생을 보람으로 알고 감내했다. 특히 왕실의 어의가 되었다는 것은 그로서는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가 이익을 추구하고 그의 본래의 의도였던 기독교 정신을 포교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그는 고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밤중에 불려 가는
일이 허다했지만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민비의 병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왕실에서는
단호하게 사진을 요구했다. 사진이라 함은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에 남자 의사가 사대부의 부인들을 직접 진찰하지 않고 맥박 위에 비단을 얹어 놓고
진찰하거나, 심지어는 맥박 위에 실을 동여매고 그 실의 끝을 방문 밖으로 끌어내어 그 실을 통해 전달되는 맥박의 진동을 이용하여 진맥하던
방법이었다. 진맥은 그렇다 하더라도 입안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경우라든가 왕비 몸의 어느 부위를 살펴야 할 경우에는 더욱 난감했다. 혀를 살펴
보아야 할 경우에는 장지문의 창호지를 입만큼의 너비로 뚫고 그리로 내민 혀를 진찰했으며 국부 진찰은 아예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주사가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지존한 몸에는 금이나 은 이외의 쇠붙이를 댈 수 없기 때문에 금이나 은으로 만든 주사 바늘을 요구할 때면 알렌은
더욱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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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가 세운 성누가병원 환자실. 선교사들은 포교활동에 의료와 교육을
병행했다. | 약품 보급과 투약의
어려움도 마찬가지였다. 요드포름이 부족할 때는 멸균한 찰흙을 환부에 발라 화농을 빨아낼 수밖에 없었고, 약효가 빠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3회분의
약을 한꺼번에 복용하여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는 허다했다. 모든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 나자 '죽은' 시계와 고장난 자전거를 몰고 와 고쳐 달라는
경우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렌은 회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병이 생기면 미신에 경도되고 때로는 비과학적인 민간 요법, 이를테면
상처가 나면 개고기 찜질을 하는 것도 증상을 악화시키기 일쑤였으며, 인삼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치료를 어렵게 만들었다.
알렌의 또 다른 체험으로서는 기독교 선교사로서의 고충이었다. 본시 감리교계 목사였던 그는 포교를
표면적으로 내세운 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인내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여느 백색 우월주의자들처럼 한국의 무속을
야만시하지도 않았으며 가급적이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오히려 조선에서 기독교 포교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어느 선교사가 우상을 믿는 국왕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법석을 피우다가 추방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경직성을
개탄했으며, 우상 파괴라는 이름으로 전통 문화를 비난하는 선교사들의 지각없는 처사를 우려하기도 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정치적 억압이 극심한 이 땅은 복음을 전파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천주교를 이미 경험한 이 나라에서는 교도나 성직자를 가리지 않고 순교가 미덕이라는 위험한 생각에 빠져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또 한 가지, 그의 눈에 신기하게 느껴지는 현상은 똑같은 기독교인데 왜 침례교가 한국에서는 정착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성공하느냐의 문제였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엉뚱하리만큼 간단한 곳에 있었다. 즉 그의 관찰에 의하면 한국인은 목욕을 싫어하기
때문에 침례교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국 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은 역시 언어였다고 알렌은 회상하고 있다.
한국어의 수많은 어미 변화의 불규칙성은 모든 외국인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의사 전달의 오해는 어느 곳에서나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와 하인에게 '칵테일 석 잔만…'(Please three cocktails!) 이라고 부탁했더니 한 시간만에 닭의
꼬리(cock-tail) 세 개를 뽑아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그는 한국의 전기 개설에 깊이 개입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사람들이 기중기 밑에서
작업을 하면서 기계를 계속 올리라는 뜻으로 'Come on!' 하고 소리쳤더니 '그만!'으로 알아듣고 기계 작동을 중단, 밑에서 작업 중이던
기사들이 모두 압사할 뻔했던 악몽을 기록하고 있다.
알렌의 '조선견문기'에서 개화기의 웃지 못할 수많은 일화들에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은 그가 조선
주차 공사로 활약하던 당시의 정치 활동에 대한 평가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공사 재직 중에 망국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조선의 운명보다는 지나치리
만큼 미국의 국익에 집착했다. 외교관이라는 신분에서 본다면 어쩌면 이것은 큰 흉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의 본직이 목사요 의사였다는 점에서,
조선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온 사람의 행실로서는 잘했다고 할 수가 없다.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결국 을사보호조약을 운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대한제국의 멸망에 대한 미국의 무신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역사가들이 그에 대해 더욱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책을 쓸 당시인 1908년의 상황에서 이미 30년 후에 일어날 일본의 만주 침략을 예언할 만큼 국제적·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왜 한국의 망국을 막는 쪽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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