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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 대담 - 최서면 원장-나이토 교수 3시간 ‘마라톤 토론’ - 2006.11.5 한겨레신문

이강기 2015. 9. 8. 17:21

 

최서면 원장-나이토 교수 3시간 ‘마라톤 토론’

한·일 ‘독도 영유권’ 대담

 

 

한겨레신문 강태호 기자

 

 

 

≫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판해온 일본의 원로 학자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대 명예교수(왼쪽)와 오랫동안 독도문제를 연구해온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27일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대담에 앞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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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조처는 러-일 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추진된 일제의 식민지 침탈의 서막이었다. 나이토 세이추 일본 시마네대 명예교수(77)가 27일 서울대에서 발표한 논문은 당시 이를 주도한 세 사람의 일본 관료들이 독도는 한국 땅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한-일 양국에서 독도문제의 실증적 연구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인 최서면(80) 국제한국연구원장과 나이토 교수가 세 시간여 대담했다. 28일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마주한 학자는 두 나라가 독도문제를 민족주의의 충돌이 아닌 실증주의를 토대로 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 막부, 국민들에 ‘독도는 외국, 가지 말라’ 도항 금지령”
1905년 러일전쟁 거점위해 “주인없는 땅” 억지 편입

 

최서면 원장(이하 최)= 일본 외무성은 독도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국제법적으로도 일본의 영토라는 자세다. 이는 착각하기 쉽다. 잘 분석해 보면 역사적으로 일본고유의 영토라면 왜 국제법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1905년에 영토로 편입해야 했는가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일본은 자국영토를 편입한 것인가? 고유의 영토라면 이미 자국 영토인데 국제법적으로 또 다시 자국으로 편입했다는 말은 결국 독도는 고유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한국도 자주 역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도 우리 영토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일본과는 전혀 다르다고 본다. 한국은 1905년에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국제법적으로도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영토를 편입한 행위 자체가 애초부터 잘못됐다는 점에서 국제법적으로 일본 영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05년 일본의 ‘영토 편입’이 애초부터 이상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26일 서울 사범대 ‘독도·교과서 문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선생님의 글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이토 세이추 교수(이하 나이토)=제 발표는 우선 일본 정부(외무성)의 공식견해가 안고 있는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첫째 역사적으로 고유영토라는 문제, 둘째 1905년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에 따른 것(영토의 재확인)라는 문제, 셋째 전후 평화조약 결과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논리다.

 

첫번째 고유영토라는 주장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저는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니라는 견해를 발표했다. 예를 들면 1696년 막부가 돗토리 번에 낸 회답에서 다케시마, 마츠시마는 오키 섬과 관계가 없다고 밝힌 점만 봐도 사실상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점을 전제로 1905년을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영토라면서 영토를 재확인 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일본 정부는 지금와서는 (고유영토의) ‘재확인론’을 주장하고 있다. 만일 재확인했다면 언제 확인을 했는지가 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 초기엔 영토편입이라고 하지 않고 무주지(無主地)를 선점했다고 했다. 주인이 없는 땅을 먼저 점거했다는 것이다. 26일 발표에선 무주지 점유를 둘러싼 국제법적인 논란이 있지만 그 당시에 정말 무주지였는지 아닌지를 문제삼은 것이다.

 

특히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가의 영토편입 신청에 해군성 수로부장 기모쓰케 가네유키, 농상무성의 마키 보쿠신 수산국장, 외무성의 야마자 엔지로 정무국장 등 3명이 관여했는데, 마키와 야마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키와 야마자가 각각 서문을 쓴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1903년)과 최신한국실업지침(最新韓國實業指針 1904년)을 찾아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 강원도에 속하는 섬 울릉도와 그 부속 리앙쿠르(독도)’라는 서술이 나온다.

 

이 두 책은 청-일전쟁 뒤 한국으로의 일본인 진출을 촉진시키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인데 두 사람은 리앙쿠르를 조선의 섬이라고 말한 거다.

 

 

 

≫ 최서면 원장, 나이토 세이추 교수

 

 

‘무주지’ 증명없이 무주지 선점
일본해군 외무성 등 짬짜미

 

그 다음에 나카이 요사부로의 청원 과정을 되짚어 보고 이 세사람이 자신들의 견해와 달리 이 청원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에 어떻게 이용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이다.(본보 28일치 1면 참조) 또 이 과정에서 기모스케 수로부장이 리앙쿠르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무주지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런 논리를 받아들인 야마자는 앞서 내무성이 나카이의 청원에 대해 한국병합의 의혹을 살 수 있기에 각하한 걸 알고 이를 외무성에 신청하도록 한다. 야마자가 최신한국실업지침의 서문을 쓴때는 나카이가 신청하기 1달 전인 7월이었고 그 때까지 그는 한국통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기모쓰케는 조선수로사와 일본수로사의 담당책임자였으니 당연히 리앙쿠르가 조선 영토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마키는 한해통어지침이라는 책의 서문을 썼다. 나카이의 청원에 등장하는 3명의 주요인물이 리앙쿠르를 한국의 강원도에 속하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인없는 소속없는 섬’(무주지)라며 억지로 영토를 편입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일반사람들은 리앙쿠르가 어떤 건지 몰랐다. 나카이 요사부로는 1903~1904년에 처음으로 강치(바다사자) 포획을 위해 그 부근으로 갔다. 원래 나카이의 거점은 오키 섬의 사이고가 아니고 울릉도라고 나는 보고 있다. 울릉도에서 리앙쿠르(독도)로 나간 거다. 당시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강치 가죽이 소나 말가죽 대용품인 군수품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나카이 외에도 다른 현의 사람들도 들어와 강치 남획을 시작했다. 따라서 이 섬을 독점적으로 이용하는 사업으로 포획하기 위해 나카이는 청원을 한 거다. 근데 바로 그 시기에 일본 해군과 외무성, 농수산성 등 소속 3명이 모여 나카이를 설득해 영토편입으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무주지라서 새로운 섬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이론은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다.

 

=마키 수산국장과 야마자 정무국장의 책 서문이 역사적으로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고유영토라고 한다. 고유영토라면 그 이름이 뭔지가 중요하다. 예컨대 그 이름을 다케시마, 이와지마라고 해도 좋은데 왜 일본의 고유이름은 쓰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리앙쿠르라고 했는가가 의문인데 제가 생각하기에 1849년 프랑스 배(포경선 리앙쿠르 호)가 독도를 ‘발견(?)’해 지도에 등기한 후에 일본의 일반적인 인식은 독도의 이름을 리앙쿠르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자체가(고유의 이름이 없다는 것)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걸 완전히 부정하는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이토=그렇다. 저도 조사해봤지만 ‘리앙쿠르 락스’로 프랑스가 붙인 리앙쿠르 락스는 너무 길기 때문에 줄여서 리앙콜도였는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섬에 다케시마라는 일본 이름이 붙은 경위다. 시마네현 청에서 영토편입하면서 오키 도사(섬 관리)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은가하고 자문을 구했다. 오키도사가 마츠시마와 다케시마로 명명해야 한다고 했다. 과거 일본은 다케시마라고도 불렀는데 지도를 제작하면서 울릉도가 마츠시마로 바뀌면서 종래의 다케시마란 이름이 사라졌다. 우여곡절이 있지만 마츠시마가 울릉도의 공식명칭이 되면서 없어진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새로운 섬의 이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결론은 일본인들이 과거 고유의 영토라고 했지만 독도에 대해선 고유의 명칭이 없없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마츠시마, 다케시마의 기록은 많이 있으니까 이게 고유영토라는 증명을 위해 자주 사용하지만, 일본은 원래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하고 마츠시마는 독도를 뜻하는 것으로 써왔다. 그럼에도 왜 마츠시마도 다케시마도 아니고 왜 당시엔 리앙콜도라는 이름을 붙였는가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영토로 편입하고 나니까 리앙쿠르라는 이름으로는 편입이 안되니까 일본 문헌에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 데 착안해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또 나카이가 굳이 ‘리앙콜도’라는 이름으로 청원을 한 것은 한국의 영토라고 인식했다는 걸 반증한다. 그 신청서를 분석해 보면 무주선점은 주인이 없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이 증명은 일본 도쿄에 있는 모든 외국 대사관과 공사관에 이 사실을 알려 각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정되는 것이다. 한국 정부에 알렸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일본정부가 추천한 스티븐슨이 한국에 있었다. 그의 역할은 모든 외국문서가 한국에 왔을 때 스티븐슨이 먼저보고 궁정에 보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스를 고문으로 고용했을 때 고무라 외무대신의 의뢰서를 보면 외국의 문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먼저 하야시 곤로스케와 상담한 뒤 그가 허가한 것만 궁정에 보고하라고 한 문서가 외무자료관에 남아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스티븐슨이라는 고문에게 알렸다는 점도 중요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게 알리기 보다 다른 외국에 알리지 않은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주지라는 증명 없이 무주지를 선점한 게 되는 것이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매우 많다. 또 한가지를 예를 들면 일본 외무성은, 일본이 국제법적으로 습득한 5개 섬 오가사와라를 비롯해 이어도, 오키노도리 등 영토편입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를 가리켜 ‘전례(앞선 예) 연구회’라고 하는데, 여기엔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쇼와 연대에 행해진 전례 연구회에서도 취급할 가치가 없다고 인정한 사실을 증명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26일 나이토 선생의 발표는 1905년 영토편입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무리하게 이뤄졌는가를 증명해 준 것이다. 한국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 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일본인 중에서 도쿄가 아닌 울릉도와 독도에 가장 가까운 돗토리와 시마네현의 지방사를 발굴하여 논문을 작성한 점이 다른 일본 연구자들과 다른 특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 내용을 보면 일본 지방정부는 가난했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일에는 외국이든 어디든 힘을 쏟았지만, 막부는 적어도 2번에 걸쳐 독도 도항금지, 그러니까 “외국이니까 가지마”라는 점을 공표했고, 메이지 정부에 들어서도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일본 영토가 아니니 가지 말라(도항금지)고 했다. 모두 세번이다. 일본 중앙정부가 도항금지를 3번이나 명했는데도 왜 일본은 고유영토라고 하는가. 선생은 지방사 전문이니까 지방과 중앙정부의 이런 견해 차이는 왜 생기는 것으로 보는가.

 

나이토=지방의 경우 직접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우니까 그렇다고 본다. 예컨데 시마네현의 경우를 봐도 독도를 어디에 자리매김 하느냐가 중요한데 오랜 기록을 보면 다케시마라는 기록이 있으니까 최종적으로 영토의 일부로 봐도 된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를 중앙정부에 제출하자 중앙정부의 조사결과 이미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 있다. ‘아이즈야 하치에몬 사건’(1837년 아이즈야 하치에몬이란 사람이 도항금지를 어기고 울릉도까지 갔다온 뒤 처형당한 기록) 당시의 최종판결문을 읽어보면 다케시마는 물론 가면 안되고, 나아가 연안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아이즈야는 시마네현에서 살고 있어 가깝기 때문에 밀무역을 한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중앙정부의 인식과 지방의 입장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생긴다. 현실적 관점에서도 다케시마에 갈 때 중앙정부의 사람들은 큰 배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방에서는 5~6명의 작은 배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의 차이가 있다.

 

= 최근 러시아를 방문했는데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연구센터부장에게 독도가 누구의 것인가 물었더니 그는 “바보같은 질문이다. 한국 것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것은 상식이 돼 있다. 독도를 측량했던 유일한 국가인 러시아는 적어도 한국 연안의 섬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곧바로 독도는 한국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의 인식은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나라 것을 손에 넣으려면 여러가지 훌륭한 자료를 만들어야 되고 연구도 많이 해야겠지만 자기 땅이니까 연구가 부족한 점이 있을까 생각한다. 일본 학장들 중에는 조선이 독도에 왜구가 공격해오니까 ‘공도(빈섬) 정책’을 써서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일본이 들어가도 무리가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일본에서도 오가사와라라는 섬에 대해 마찬가지로 ‘공도정책’을 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공도정책은 오히려 내 것이니까 한다라는 사실을 일본이 몰랐다는 걸 솔직히 인정한 다음 역사적 자료를 상호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독도 측량 유일한 국가 러시아
“한국 땅이라는 건 당연한 상식”

 

나이토=말씀하신대로다. 지금까지의 논쟁은 말꼬리 잡기에 그치고 있다. 같은 얘기로 1905년 일본의 독토 영토 편입 행위는 완전히 가치가 없는, 정당화되기 힘든 억지 편입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봐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점을 충분히 매듭 지어 나가야 한다.

 

=야마자 엔지로, 마키 보쿠신은 어떤 사람인지 한국사람은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야마자 엔지로는 외무성에서 매우 한국에 관계에 깊은 사람이었다. 한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한 사람이었다. 특히 조선 외무대신을 지낸 박용하에 대해 내동생이라고 말 할 정도 한국내 지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외무성 정무국장에 재직하면서 쭉 한국문제에 간여해 왔다. 또 마키 보쿠신은 1903년 한해통어지침의 서문을 쓰기 이전에 몇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두 사람이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리앙쿠르가 을릉도의 부속도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위치였다.

 

나이토=그렇게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마키 보쿠신은 나가사키현 출신이고, 야마자 엔지로는 후쿠오카현이다. 마키 보쿠신의 책은 ‘고쿠류카이(대륙침범의 선구단체인 흑룡회)’라는 우익거점단체에서 펴냈다. 야마자도 흑룡회의 멤버였다. 그렇니까 야마자는 조선 침략·대륙 진출의 선봉 단체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청-일 전쟁 이후 쭉 일본을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통으로서 대 한국 로비의 최고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고지도를 근거로 일본 것이다, 한국 것이다라는 논란이 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는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독도관련 지도의 경우 대부분이 근대적인 측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림’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지도는 지식에 의한 그림 지도이지 실지 측량을 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옛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즉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이 지도를 만들었는가를 보지 않고 단순히 고지도에 독도가 나온다든가, 다케시마라고 돼 있다라든가라는 것으로 우리 것이다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컨대 영유권 다툼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것은 정부가 편찬한 ‘관찬 지도’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관찬 지도를 모두 네 번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독도.울릉도가 나오는 지도는 한 장도 없다. 이노 다다타카란 사람이 만든 마지막 관찬 지도는 정확성 면에선 지금도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지도인데 거기에도 마찬가지다.

또 오늘날의 지도처럼 영유 영토개념에 입각해 지도를 만든게 아니고 항해지도로서의 의미가 크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에 돌아가면 적어도 지도의 표기로 영유권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주길 바란다.

 

 

 

 

 

일본사 논문선 ‘일 영유권’ 없어
학자 3~5명은 되레 “한국 땅”

 

나이토=말씀 그대로다. 일본에서도 최근 여러가지 지도가 나오고 있는데 옛 지도가 발견되면 관에서 만들었는지 민간 지도인지도 구별하지 않은채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들어있는가라는 단순한 논리만이 초점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17~18세기의 지도는 울릉도와 다케시마가 만약 그려져있다고 해도 전문적인 정보 내지 지식에 의해 만든 것밖에 안됩니다. 그런 논리라면 조선의 지도를 보면 반드시 쓰시마가 들어있는데 쓰시마가 조선 것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한·일 민족주의 충돌 회피 위해
활동가 보다 연구가 많아져야

 

=이제 결론을 얘기했으면 하는데. 독도문제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할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리한 논리와 주장을 피해야 한다. 즉, 역사적으로 자기 것이라고 증명하려면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하고, 국제법으로 하려면 국제법으로 해야지 두개를 섞어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진실이 무엇인지에 입각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대부분 국제법 학자는 국제법에 따라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사 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케시마가 일본 것이라는 논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이토 선생을 비롯해 고인이 된 가지무라 히데키(전 가나가와대 교수)는 , 호리 가즈오(교토대 교수) 등 서너분의 일본사 학자들은 일본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구자가 아닌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비전문 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제대로 된 근거 없이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진실을 먼저 증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법상으로 논증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독도가 우리 것이다 보니까 왜 우리 것인지에 대한 연구에 소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독도 연구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독도활동가보다는 독도 연구자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독도활동가가 많이 나오면 두나라 민족주의의 충돌만 있을 뿐이다. 외교는 민족주의의 충돌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돼야 한다.

 

나이토=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해서 비난을 받거나 괴롭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런 일은 별로 없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돗토리현의 주민밖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젊은 학자들이 좀더 나와서 이 문제를 연구했으면 한다.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사이에 열린 마음으로 논쟁이 됐으면 좋겠다. 한국의 외교통상부 홈페이지를 보면 역사적 내용이 없어 아쉽다. 물론 일본 외무성의 홈페이지도 제대로 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학자의 양심에 따른 것일 뿐이다.<한겨레신문, 06.10.30>

 

정리/강태호,김도형 기자 kankan1@hani.co.kr

 

최서면 원장

독도, 안중근 의사 연구 등 한일 관계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 연구해왔다. 1969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서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기>를 발견하고, 1974년 도쿄 간다 고서점에서 안중근 의사의 옥중서기 <안응칠 자서전>을 찾아내기도 했다. 해방공간에서 장덕수 암살범으로 지목돼 유죄선고를 받기로 했던 그는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피해 195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69년 도쿄 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 등 일본정계의 실력자와 두터운 교분을 유지하며 한-일 외교의 막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88년 귀국해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했다. 그의 국제한국연구원은 한국학 관련 연구기관중 드물게 희귀자료 20만여점을 체계 있게 보관하고 있다. 팔순을 넘은 나이에도 현역 독도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나이토 세이추 교수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학문적으로 줄곧 의문을 제기해온 일본 역사학자중 한명이다.

한국과 가까운 시마네 대학교수에서 정년 퇴직이후 <시마네현의 100년> 등 지방사 연구를 바탕으로 10여년 넘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문제점을 규명해왔다. <세카이> 2005년6월호에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역사적으로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일본외무성의 주장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2005년 3월 <도쿄신문> 회견에서도 “과거 일본이 독도를 실효지배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매우 조잡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현재 일본안 분위기에서 독도가 일본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독도 문제 연구는 학자의 양심에 관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도 문제와 관련해선 한국도 열린 자세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