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역사학자들 중에서 가장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 있다. 고려大 명예교수이자 前 상지大 총장
姜萬吉(강만길) 교수이다. 그는 현재 국무총리 산하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委」 위원장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委」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다.
姜萬吉 교수는 필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두 스승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꿈 많은 청년기에 학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도록 知的
호기심과 동기를 부여해 준 분이다. 姜萬吉 교수와의 인연은 필자가 1973년 고려大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필자에게는 高大 선배이자
스승인 것이다. 필자의 대학시절, 그는 하나의 우상과 같았다. 그의 성의 있는 강의는 「名강의」로 소문이 났었다. 그는 休講(휴강)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민중주의적 통일사관으로 한국사 왜곡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제 시간보다 일찍 강의실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사학과가 아닌 他학과 학생들도
수강신청을 했기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앉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서양근대사를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그분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 「고대신문」에 게재된 그의 時論 「한글 창제에 대한 세종대왕의 동기」는 지금도 필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에 의하면, 『世宗이 한글을 창제한 목적이 문자를 몰라서 불편해하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한글을 창제한 것이라기보다는, 「용비어천가」를
만든 그의 열성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祖父인 李成桂(이성계)의 쿠데타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글에서 필자는 커다란 知的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 필자는 모든 역사적 사실을 일단 의문을 가지고 접하게
됨으로써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워 갔다. 아직도 인상 깊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넉넉한 인품이다. 소탈하고 솔직하며, 특히 제자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그의 가르침으로 수많은 훌륭한 한국 근·현대사 전공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려大를 정년퇴임한 이후, 姜萬吉 교수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는 2000년 6월 남북頂上회담에 민화협 공동의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 이후 「金日成의 독립운동 인정」 발언을 했다.
언론을 통해 강만길 교수의 사회활동과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의 역사 인식과 통일관에 많은 우려를 갖게 되었다. 그의 「민중주의적
통일史學」은 「민족」이라는 美名下에 북한의 세습 공산독재정치와 무자비한 인권유린까지 애써 감싸고 있다. 그는 21세기를 사는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理性(이성)보다는 感性(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광복 전 독립운동 시절에 유행하던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마침내 대한민국의 正體性을
해체하고 이념적 혼돈을 유발시켰다. 大家(대가)의 반열에 오른 스승의 학문세계를 제자가 감히 비판한다는 것은 동양적 학문 풍토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1999년 초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젊은이들이 내 책을 읽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이여) 나를 밟고, 넘어서라』고까지 했다. 필자는 큰 용기를 내서 그의 역사인식과 통일관을
비판하기로 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수없이 주저했음을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 "대한민국은 실패한 歷史"
우선, 姜萬吉 교수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본다. 李承晩의 장기집권과 朴正熙-全斗煥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30년 동안의 통치는 정통성이 없으며, 反민주정권으로서 남북의 평화통일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한의 역대정부가 親日派
청산을 게을리 했다는 사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委」위원장으로서 역사청산을 주도하고 있다. 親日派 숙청 문제에서
그는 프랑스의 나치 附逆者(부역자) 청산을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는 『앞으로 남북의 교류가 좀더 활성화되려면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북쪽은 이미 親日문제를 청산한 반면,
우리는 청산이 안 됐다고 하면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도 親日청산이 빨리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姜萬吉 교수는 「이제
문제는 冷戰세력이다」에 실린 「冷戰세력의 정체와 극복방안」이라는 글에서 『남북 간 평화로운 통일을 저해하는 것이 冷戰세력』이라며, 『지금
시점에서 冷戰세력 극복의 길은 우선 冷戰세력의 뿌리라 할 수 있는 親日세력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철저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소위
左翼들이 「冷戰세력」이라고 지칭하는 右翼 척결을 위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親日派 청산을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日帝의 한반도
식민통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간은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프랑스는 우리처럼 분단 상황도
없었으며, 6·25와 같은 전쟁의 비극도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거의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서 「親日행동」과
「反日·애국행동」의 경계를 아주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무인도에서 살아야 했다. 이를 따르지
않은 조선인이 거의 없었다. 일제下 유명 인사들의 공식적·형식적 親日행위와 非공식적 애국행위를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북한은 親日 청산한 게 아니라 지주계급을 숙청한 것
북한의 경우, 소련군 장교로 북한에 진입한 金日成은 국내 권력기반이 全無했었다. 金日成은 북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20일 만에 전격적으로 실시된 토지개혁을 통해 기존의 親日 지주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민중들의 자주적 개혁이 아니라, 소련軍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서 地主·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親日派 청산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親日派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姜교수의 주장에 대해 지난 9월29일 연세大에서 열린 「교과서포럼」에서 이주영(건국大·미국사) 교수가 적절한 비판을
제시했다.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은 反共국가, 자유주의 국가로 출발하였다. 그것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일본인 통치 밑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美 군정 밑에서 성장한 엘리트도 있었다. 그러한 엘리트는 전문 지식을 가진
관료·군인·기업가·교육자·기술자·종교인·예술인들로서, 신생국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人材들이었다』
姜萬吉 교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역량이 과소평가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남측에서 강조하는
右翼 주도론과 북측에서 강조하는 左翼 주도론 모두를 배격하고, 통일전선운동 주도론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학자라 할 수 있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성립된 시기까지는 국민주권체제를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했다. 그 이후 좌우익의 대립으로 혼선과 대립을 빚다가
식민지시대 말기로 접어든 1930년대 후반기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그것이 지향한 政體(정체)를 분명히 밝힐 수는 없지만,
「부르주아」 계급과 종교단체와의 협력을 모색한, 적어도 「노동계급 독재」는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중국지방
독립운동전선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의 左派노선과 임시정부 중심의 右派노선 모두 정치체제는 보통 비밀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하고,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한 일종의 민주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
1978년)
광복 전후 좌우익 갈등 과소평가
姜萬吉 교수는 『민족주의적 합일점에의 접근은 그것이 미처 정착되기 전에 일본의 패망과 이어서 연합군의 분할점령과
東西冷戰(동서냉전)의 심화로 인해 민족분단은 고정화했다. 이 때문에 분단시대 민족주의의 최대 과제는 그대로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식민지 시대 말기의 민족주의가 지향한 방향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만약 일본의
패망이 늦어졌다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左右翼의 민족주의적 합일점이 가능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左右翼의 사상과 독립방법論을 둘러싼 대립이나, 광복 직후 남한사회에서 左右翼의 대립을 경험한 한국인들이라면 日帝의 패망이
늦추어졌더라도 그렇게 쉽게 左右翼의 대립이 해소되었을 것으로 낙관하지는 못할 것이다. 중국에서 西安사변(1937) 이후 벌어진 여러 차례
國共합작의 비극적 결말을 상기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姜萬吉 교수는 日帝 강점기에 통일전선운동에서의 金九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金九가 광복 후 평화로운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와 암살당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金九가 평양行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남한에서 간첩으로 암약하던 공산주의자 성시백의 권유가 있었다. 성시백은 臨政 시절부터 金九를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948년에는 국회 「工作」에도 힘을 쏟았고, 金九에게 남북연석회의에 와달라는 金日成의 초청장을 직접 전달한
인물이다. 그는 1950년 5월15일 체포되었고, 6·25가 터지고 이틀 뒤 처형되었다. 金日成은 그를 통일혁명열사로 인정했다. 金九의 평양行은
북한의 對南공작의 결과라는 점을 姜萬吉 교수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채택된 ① 외국軍 즉시 철수, ② 외국軍 철수 후의 內戰 발생 부인, ③ 全조선
정치회의 구성과 그 주도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와 정부 수립, ④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의 내용은 당시 국내외 상황으로 보아 실현이
어려운 것들이다.
金日成의 전쟁 책임 외면
姜萬吉 교수는 6·25 전쟁 발발에 대한 金日成의 책임 문제를 회피하면서, 남북 양측이 적대감을 버리고 화해
협력할 것을 강조한다. 姜萬吉 교수는 1999년 1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민족문제에 주역이 되면 통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6·25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침략전쟁으로 보면 그 뒤에는 반드시 원한과 보복심 같은
것이 따르게 됩니다. 통일은 기어코 해야겠는데 민족의 다른 한쪽에 대한 원한과 보복심을 가진 채 통일하려 하면 결국 평화통일이 아닌 전쟁통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6·25는, 우리 땅은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줬다고 생각게 됐습니다』 姜萬吉 교수의 저술
어느 곳에서도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6·25를 도발한 金日成의 책임을 묻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6·25는 전쟁통일의 방식으로
실패한 통일전쟁』이라고만 주장하면서, 金日成의 전쟁 발발 책임은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 강의 「20세기 우리 역사」 속의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라는 章에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新수정주의의 입장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자료가 좀더 공개되어야 그 진실이 더 많이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의 태도는 한반도를
달나라에서 망원경으로 보거나 수백 년 전 中世 조선의 사료를 뒤적이듯이, 아주 객관적으로 조망한 것처럼 보인다. 6·25가 발발했을 때, 그는
고등학생(당시 17세)이었을 것이다. 누가 기습 南侵을 했는지, 어떻게 해서 서울이 일거에 함락되었는지, 왜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줄 지어
갔는지를 들어서 알 수 있는 세대이다. 그런 그가 마치 6·25가 北侵인지 南侵인지도 모르겠다며, 「증거자료 부족」을 근거로 전쟁의 진상을
얼버무리고 있다.
서방세계와 공산권에서 그만큼 자료가 공개되고 연구되었으면 충분하지 얼마나 더 공개되어야 하는가? 姜萬吉은 한국
전쟁 이후 李承晩이 독재정권으로 변질되어 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北의 金日成이 박헌영을 미제의 앞잡이로 몰아서 전쟁 敗戰(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一人 우상숭배의 공산독재로 간 현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朴正熙의 근대화 업적 부인
姜萬吉 교수는 지난 세월 대한민국이 쌓아 올린 경제성장, 즉 근대화에 부정적이다. 그는 朴正熙 정부의
경제성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朴正熙 정권의 경제개발은 한국을 만성적 무역적자국, 외채과잉국, 식량수입국으로 전락시킨 데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재벌중심 경제체제는 엄청난 외채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경제의 對外종속성을 심화시키고, 경제적 민주주의에 크게 역행했으며, 농업을
철저히 희생시켜 「만성적 식량수입국」으로 만들고 소득분배 구조를 악화시켜 국내 각 계층의 격심한 갈등을 빚어 냈다』
이같은 시각은 『朴正熙 정권이 우리 경제를 非민주적 방향으로 오도한 결과, 1990년대의 IMF 관리체제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궤변으로 이어진다.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朴正熙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민주화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파당정치, 무분별한 국민들의 소비행태, 과격한 급진 노동운동이 야기한 勞使갈등 등이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본질적 위기였음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姜萬吉 교수가 의도하는 과거 청산의 대상은 親日派에서 멈추지 않는다. 朴正熙·全斗煥 군사정권에서
일했던 보수·기득권층도 자연히 포함된다.
지난 9월10일, 「민족화해」와의 인터뷰에서 姜萬吉 교수는 현재의 보수·右翼 세력을 「反민주」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는 『과거의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中世의 양반의식을, 아니면 日帝 강점기의 反민족 상황과 의식을, 아니면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민족상잔의 상황을 유지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과연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中世와 日帝의 잔재물,
군사문화들뿐인 것인가? 보수주의자의 元祖이면서 프랑스혁명의 과격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보수주의자들은 급진적 개혁을 거부하는 것이지, 변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군사정권 好시절에
권력의 단물만 빤 기득권 층이라는 姜萬吉 교수의 단정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흑백논리다. (kon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