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한국 목판인쇄의 역사

이강기 2015. 9. 10. 16:29
목판인쇄의 역사

1)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목판 인쇄물 중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은,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수리하던 중 탑신부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비록 소형의 목판 권자본이긴 하나 다라니 경문의 전부를 완전하게 새겨 글자 면을 위로 놓고 먹물을 칠한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놓고 부드러운 헝겊 뭉치로 문질러서 찍어냈다. 장정(裝訂) 또한 낱장이 아닌 도서의 초기 형태인 권자본으로 되어 있고 판각술도 매우 정교하며 글자체도 필력이 한결 약동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 경은 목판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인쇄물 중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말엽에 이르러서는 목판 인쇄술이 더욱 발전하여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문(詩文)을 모아 인쇄물로 편찬해 내기까지 했다.


2) 고려시대

고려는 국가의 기본 이념과 내세관을 불교에 두어 국교로서 우대하였지만 치세(治世)의 현실은 유교가 바탕이었다. 과거를 거쳐 많은 문사들이 잇따라 배출되었기 때문에 비록 문인들이 소외되었던 무신 집정기라 하더라도 저술이 끊이지 않았으며, 학문의 범위도 넓고 분야도 다양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많은 불경을 간행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1007년 총지사에서 찍어낸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불탑에 봉안하였던 두루마리이다. 그 후 현종 2년(1022)거란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막고자 송악 내흥왕사에서 1087년 까지 대장경판을 새겨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이 경판이 <초조대장경>이며 의천이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새긴 대장경이 <속장경>이다.

두 경판은 1232년 몽고란 때 불타고 없어졌지만 불타기 전에 찍어낸 책은 일부 전한다. 강화도 천도이후에는 강화도에 대장도감, 남해도에 분사도감을 설치하고 1236년부터 16년 동안 다시 새긴 대장경이 <재조대장경>이며 현존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오랜 기간 원형이 잘 보존되고 그 많은 경판에 오자가 없고 글씨와 새김이 명필명공(名筆名工)의 한 사람 솜씨 같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3) 조선시대

조선왕조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대장경 판의 인쇄나 각 사찰의 간경사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태종 3년(1403) 계미자가 동활자로 주조되기 전의 조선 건국 초기에는 주로 목판이나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출했다. 이 무렵에 간행된 목판본으로는 태조 4년에 찍은 <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 등이 있으며, 목활자본으로는 태조 4년에 간행된<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태조 6년에 목판본을 목활자본으로 다시 찍은<개국원종공신공록권> 등이 있다.

유교가 번성했던 조선시대에는 <사서오경>과 <성리대전>이 가장 많이 읽혔다. 주자소(鑄字所)에 보관된 목각판으로 서책을 인출하여 각 지역의 향교 등에 배포하였고, 개인적으로 책을 가지려는 사람은 종이를 가지고 가기만 하면 책을 인쇄해 올 수 있었다. 그만큼 중앙 정부가 유교 경전의 인쇄 및 보급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2. 목활자의 종류

고려 우왕 3년(1377)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금속활자에서 부족한 글자를 목활자로 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그 이전부터 목활자가 인쇄에 쓰였다는 증거가 된다.
목활자본이란 인본에 사용된 활자가 모두 목활자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 나라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목활자 인쇄물로는 조선 태조 4년(1395) 및 동왕 6년(1397)에 인출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이라는 문서이다.

현재 전해 오는 목활자 인본은 모두 조선시대 것들이다. 이 중에는 관서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것이 많지만 민간에서 직접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인본들도 많다. 목활자인쇄는 1895년(고종 32) 학부(學部)에서 목활자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 등 교과서를 인쇄한 후에는 납활자인쇄로 대체되었으나, 특히 영남 ·호남 지방 등의 민간에서는 8 ·15광복무렵까지 사용되었다.

1) 서적원자(書籍院字)

조선 초 왕조 교체의 혼란기인 태조 4년(1395) 백주 지사인 서찬(徐贊)이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원에 바침으로써 건국 초기에 절실히 필요했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100여 부 찍어서 반포했다. 이 목활자를 '서적원자'라 일컫는데, 서찬이 만들어 바친 활자라는 점에서 '서찬자'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태조는 개국 후 즉위하자 개국 공신과 원종 공신들에게 녹권(錄券)과 교서(敎書)를 내려 논공행상을 했는데, 이들 녹권과 교서가 처음에는 모두 필서(筆書)였다. 그러나 필서에 의한 녹권은 본문 내용이 동일함에도 필서자에 따라 글씨체가 각각 다르고 오탈자가 적지 않아 이를 보충하는 등 조잡한 면을 보였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태조 4년(1395) 목활자와 목판인쇄를 병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녹권자'로 부르고 있다.


2) 동국정운자(東國正韻字)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세종이 우리 나라의 한자음을 바르게 잡기 위해 편찬한 책으로, 신숙주 등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이 왕명을 받들어 완성하자 세종 29년(1447)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 낸 다음 각 도와 성균관 등에 배포하였다. 이 책을 찍은 목활자 중 한자 큰 자를 '동국정운자', 한글 큰 자를 '동국정운 한글자'로 부르고 있다.

한편,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우리 나라의 한자음을 바로 잡고자 동왕 29년(1447)에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또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당시 명나라에서 새로 엮은<홍무정운>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작업을 착수하였다. 이 작업은 사람을 요동에 보내 정확한 음운을 결정하게 하는 등 오랜 시일이 걸린 탓에 세종 때 작업이 완성되지 못하고 문종 때의 교열을 거쳐 단종 3년(1455)에야 비로소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이 인출되었다. 이 책을 인출하기 위해 쓰인 목활자 중 한자의 큰 자를 '홍무정운자'라 하고, 한글의 큰 자와 작은 자를 '홍무정운 한글자'라고 부른다.


3) 을유자체자(乙酉字體字)

세조 때의 호불정책과 불서 간행사업의 촉진은 사찰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불교서적을 목활자로 찍어내게 했다. 이 때의 목활자는 제작한 사찰과 시기, 그리고 인출 경위 등에 관해서는 전해오는 바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글자체가 을유자와 닮아 '을유자체 목활자'로 불리고 있으며, 제작 연대는 15세기 후반 무렵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목활자는 하나 하나 손으로 새겼기 때문에 금속활자인 을유자에 비하면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글자 획도 가지런하지 않지만, 활자를 만들어 바로 찍어낸 책들을 보면 먹색의 진함과 인쇄의 선명도는 금속활자인 을유자보다 오히려 나은 편이다.

한편, 성종이 승하하자 대비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연산군 원년(1495) 원각사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찍고 동일한 내용의 단일 발문을 작성한 다음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 모든 책 끝에 똑같이 붙였다. 이듬해에는 임금이 개인 경비로 불경의 간행사업을 직접 도와줌으로써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와 덕종의 비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주관하여 정성껏 목활자를 더 만들고 불경을 잇따라 찍어냈는데, 이때 만든 한자 목활자를 '인경자'라 하고, 한글 목활자를 '인경 한글자'라고 한다.


4)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는 양병(養兵)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전란 직후의 혼란과 물자의 결핍으로 세태가 흉흉해지면서 훈련도감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대신 훈련도감에서는 놀고 있는 병력을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고 교서관을 대신하여 실비를 받아 책을 찍어주어 경비의 부족 분을 충당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훈련도감의 인쇄 사업은 선조 말기부터 시작하여 인조 후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인쇄하려는 책이 늘어나자 옛 금속활자의 글자체를 본뜬 각종 목활자를 만들어 다양하게 책을 찍어냈는데, 이들 활자를 총칭하여 '훈련도감자'라 부른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때는 '갑인자체 훈련도감자', '경오자체 훈련도감자', '을해자체 훈련도감자' 등으로 글자체별 활자 명을 붙여 부른다. 본 활자로 찍은 인본들은 다양한 글자체에 따라 현재 적지 않게 전해 오고 있다.


5) 실록자(實錄字)

실록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각 사고에 보관해 오던 왕조실록이 전주 사고 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자, 전란 직후 실록청에서 태조에서 명종까지의 13대 실록을 전주 사고 본에 의해 새로 찍기 위해 사용한 목활자이다. 실록처럼 귀중한 문적은 통상 금속활자로 찍어야 했음에도 전란으로 대부분의 금속활자가 소실되어 버린 탓에 옛 갑인자와 을해자를 수집하는 한편, 부족한 많은 활자들은 훈련도감 병사들을 데려 와 목활자로 만들어 보충하였던 것이다.

이 때 찍은 태백산 사고 본을 살펴보면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은 기존의 금속활자에다 새로 만든 목활자를 보충하여 갑인자와 목활자 또는 을해자와 목활자로 찍었으며, 선조부터 효종까지의 실록은 목활자를 주로 하여 찍었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총칭하여 '실록자'라고 일컫고 있다.


6) 교서관(校書館) 필서체자(筆書體字)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인조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의 인쇄 업무가 옛날과 같이 교서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자 훈련도감에서 활자 만들기와 판짜기 등의 인쇄 기법을 경험한 장인들이 교서관으로 옮겨와서 인쇄 업무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현종 때 무신자(戊申字)가 주조되어 중앙 관서의 금속활자 인쇄 업무가 다시 원활하게 수행되기까지의 사이에 교서관이 갑인자와 을해자의 필서체를 답습한 목활자로 책을 찍어 공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교서관 필서체자'라고 한다. 교서관 필서체자는 또한 숙종 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목활자도 있는데, 이는 초기의 활자보다 크기가 작고 단정한 모양을 띄고 있다. 옆의 사진은 무신자 초기 인본인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로, 후기 인본에 비해 인쇄가 정교하다.


7) 생생자(生生字)

생생자는 정조 16년(1792)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들어 있는 취진판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를 글자 본으로 삼고 황양목을 사용하여 만든 목활자로 크고 작은 활자가 32만 여자에 이른다. 이 활자는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목활자 중 가장 대규모로 관서에서 제조한 목활자인데, 철종 8년(1857)의 주자소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8) 학부(學部) 인서체자(印書體字)

고종 31년(1894)의 갑오경장으로 관제 개혁으로 생긴 부서 중 하나가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學部)였다. 학부 편집국에서는 당시의 새로운 문물과 근대화 의식을 수용하기 위해 교과서의 개편 작업이 시급했는데, 그 결과 무쇠로 만들어 쓰다가 마모되어 방치해 둔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와 이를 바탕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개편된 교과서를 다량으로 찍어냈다. 이 때 사용한 목활자를 '학부 인서체자'라 부르며, 특히 한글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를 '학부 인서체자 병용 한글자' 또는 '학부 한글자'라 일컫는다.

야소삼자경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어린이용 <훈몽삼자경>의 체제를 본 떠서 만든<야소삼자경>을 찍기 위해 만든 목활자이다. 인본은 한자로 번역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 대목을 큰 한자 밑에 작은 한글자로 훈과 음을 표시하고 끝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 인쇄해 냈다. 이를 총칭하여 '야소삼자경자'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한자 큰 자를 '야소삼자경 대자', 한글 작은 자를 '야소삼경 한글자'로 일컫는다.


9) 기타 목활자

그외 임진왜란 이전 목활자로 현재 전해오는 것에는 중종 때 나주목에서 만든 '금성자(錦城字)', 명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이 만든 '호음자(湖陰字)', 광해군 때 평양에서 만든 '추향당자(秋香堂字)', 그리고 선조 18년(1585)에 교정청에서 <효경대의>를 찍기 위해 만든 '효경대자(孝經大字)'의 인본 등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민·관에서 다양한 목활자를 만들어 각종 서책이나 문집, 족보 등을 인출하는데 사용하였다. 선조 41년(1608)부터 광해군 7년(1615)까지의 사이에 내의원의 의관(醫官)들이 의서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내의원자(內醫院字)', 광해군 13년(1621)에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조(鄭造)가 그의 친구인 문계박에게 의뢰해 만든 '문계박자(文繼朴字)', 17세기 후반에 나주목에서 만든 '나주자(羅州字)', 정조 21년(1797)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인출하면서 사용한 '춘추강자(春秋綱字)', 동왕 22년(1798)에 김한동(金翰東)이 조상의 문집을 찍기 위해 평남 성천에서 만든 '성천자(成川字)' 등이 있다.

이후에도 많은 목활자가 개인들에 의해 사사로이 만들어졌는데, 순조 10년(1810)에 장훈이 사적으로 책을 찍기 위해 소형 목활자로 만든 '장혼자(張混字)', 동왕 15년(1815)에 예조판서 등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 자신의 저서를 찍기 위해 만든 중간 자와 작은 자의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 동왕 25년(1825)에 박병은(朴秉殷) 등이 <증주삼자경>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훈몽삼자경자(訓蒙三字經字)',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양주의 보광사에서 불서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보광사자(寶光寺字)'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목활자가 있었으며, 이들의 인본 또한 다양하게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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