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부산 어린이 공원 육영수 여사 방문기념 돌비

이강기 2015. 9. 9. 09:54

부산 어린이 공원 육영수 여사 방문기념 돌비  

(2004.10)

 

부산 성지 수원지 어린이 공원 어느 동산 위엔 1981년까지도 육영수여사 방문 기념으로 만든 둥글넓적하게 큰 돌비 하나가 서 있었다. “웃자.....하늘을 보고.....” 지금 글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이 참 좋다 싶은, 육여사의 필적으로 새긴 그 돌비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쏴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간혹 성지 수원지 이웃에 있는 부산 큰집에 내려가는 길에 어린이 공원에 들릴 때면 빠짐없이 그 돌비를 보곤 환하게 웃던 사진 속의 육여사 모습을 떠 올리곤 했다.  

 


그런데 80년대 초 몇 년간 들리지 못하다가 중반쯤 되던 어느 해 그 돌비를 찾아 갔더니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길을 잘 못 들었나 싶어 이 곳 저곳을 찾아 헤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아유, 지금 와서 그걸 찾으시면 어떡하나, OOO여사가 와서 진작 없애버렸다우” 했다. “이런 망할.....” 하마터면 점잖은 입에 육두문자가 입 바깥으로까지 나올 번했다. 하도 서운하고 어이가 없어서였다. “원 세상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다니...” 당시 OOO여사라면 육사위에 보안사가 있고 또 OO사 위에 “여사”가 있다며, 그 서슬 퍼런 세도를 비꼬던 언어의 유희 맨 꼭대기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여사”였다. 설마 OOO여사가 직접 그 돌비를 없애라고 지시야 했을까 마는 아무튼 그 여사가 다녀간 전후에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긴” 것인데 애꿎게 그녀가 욕을 바가지로 듣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유홍준인가 하는 문화재청장이 “알아서 긴” 광화문과 수원 운한각 현판의 일로 노무현대통령이 싸잡혀 욕을 듣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맨 윗사람이 평소에 처신을 올바르게 했으면 아랫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알아서 길” 리가 만무할 것이다.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앞 사람의 광휘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거나, 역사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에 따라 마음대로 뜯어 고쳐도 된다는 식의 비뚤어진 역사관을 평소에 보였기에 아랫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알아서 기게” 되었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동상이나 흉상 하나 제대로 두는 법이 없고,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의 하나라는 구 중앙청 건물도 케케묵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하루아침에 부셔버리고는 애국했노라고 어깨에 힘주고 그걸 보고 박수 짝짝 치는 나라에 “그 까짓” 돌비 하나 현판하나 온전히 보존할 리 없을 것이다. 그리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걸핏하면 후대의 역사가 말할 것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며 겉으로는 역사를 엄청 모시는 듯 번드레한 언설을 내뱉으면서도 막상 역사란 권력자가 마음대로 부수고 자기 입맛대로 뜯어 고쳐도 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문화적으로는 최 후진국인 나라가 바로 한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