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에 대한 소견 | ||
김영희님이 올리신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재조명해 본다"는 매우 중요한 화두여서 필경
여러 논객님들이 나설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들 하셔서 좀 늦었지만 저라도 나서보기로 했습니다. 김영희님이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의 통치내용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하셨으므로 저는 다만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색다르게 개진해볼까 합니다.
조선왕조에 관한 사극을 보면 흔히 왕의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하곤 하는데, 일부 국내학자들과 특히 외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왕들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그렇게 방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후기의 세도정치시대 뿐 아니라 전기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왕조를 전제군주정치체제라 하지 않고 귀족(양반)정치 혹은 "자문기관(council)" 정치체제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정치를 한 것은 왕이 아니라 실권을 쥔 궁중양반들이었다는 겁니다. 조선 전 시기를 통하여 이러한 귀족정치에 크게 반발하여 자신들에게 권력을 집중시킨(혹은 집중시키려 한) 왕들이 몇 분 있는데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습니다. 즉 태종과 세조는 성공했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실패한 것입니다. 명군으로 이름난 세종과 성종, 그리고 영조와 정조는 그들 권세있는 양반들을 덕과 기지로 잘 구스르고 설득하여 자신들의 소신을 밀고 나간 영특함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 왕들은 그야말로 궁중양반들에게 질질 끌려 다닌 모양입디다. 학자들 중에는 조선시대의 언로(言路)개방(물론 양반들에 한했지만)에 대해 현대의 민주사회에다 비겨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여기엔 간과하고 있는 엄청난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즉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유식한 척 하는 학자들인 관리들이 옛 중국의 수많은 고전적인 비평문 구절들을 인용해 가며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데 왕과 일부 개혁적인 신하들이 무슨 일을 추진해 보려고 해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이성계가 고려의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민심을 얻음으로서 조선건국의 기틀을 삼았는데, 건국 후 100년도 못 가 그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즉시 개혁이 필요했지만, 400년 동안을 손을 쓰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했으며, 임란후 국방력을 기른다는 명목으로 1616년부터 실시한 군세(軍稅=三手米制)는 백성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자청해 노비가 될 정도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어 1702년에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있었지만 1751년에 가서야(그러니까 개혁의 소리가 나오고 49년 만에야) 그것도 완전 철폐가 아닌 세율을 반으로 낮추는 것으로 고치는 정도였습니다. 그 외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개혁을 요하는 안건들이 양반들의 중구난방적인 의견 불일치로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대명천지인 오늘날의 우리 나라 정치형편에 비춰봐도 조선시대 왕들이 권세를 가진 궁중양반들의 "입김"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가히 짐작이 안가는 바도 아닙니다. 이러한 실정의 왕권마저 말기의 세도정치시대가 되면서 더욱 초라해져 왕은 점점 더 허수아비가 되어 갔습니다. 바로 이 450여년간의 귀족정치(혹은 자문기관형 정치)의 적폐를 하루아침에 일소하려고 한 것이 대원군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형해만 남은 왕권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가 특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복궁 중건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이 왕권의 위상회복 때문이었습니다. 아전들과 하층민 출신을 소수나마 요직에 등용한다던가 수많은 서원(18세기 말까지 서원 수가 650개에 이르렀으며 그 중 270개가 국립이었다고 합니다)들을 폐쇄하고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여 그들의 종래 특권을 줄인 것도 재정개혁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양반들의 기를 꺾어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집권 10년 동안에 어사나 대간직을 평균 20일에 한번 꼴로 갈아치운 것도 그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가 일본 낭인들이 주도한 며느리 참살 음모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것도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외척세력의 대두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쇄국양이 정책과 9명의 프랑스 신부 외 8천 여명의 교인들을 살해했다는 끔직한 천주교 박해 등도 왕권확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양반과 서민(경복국 중건 등으로) 모두에게 원성을 샀으니 배겨낼 도리가 없었겠지요. 외국학자들은 그의 쇄국양이정책과 천주교도 학살을 이상스럽게도 크게 취급하지 않습디다. 그 보다도 거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는 것이 그가 점조직 식의 인사정책을 선호했기 때문에 기존의 지배조직을 무너뜨려 그가 몰락한 후 사회혼란을 더 부채질한 원인이 되었고, 그것이 망국을 더 앞당기는 꼴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 같습디다. 이강기 드림 (2000.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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