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國格, 일본의 國格
간혹 한국과 중국 탁구선수들이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맞붙는 장면을 TV로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고 민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부분의 중국선수들은 감정표출을 극히 자제하는데 반해 한국선수들은 표정이며 동작에 감정이 너무 많이
베어 있다. 한두 점 앞서가면 펄펄 날다가도 그 반대가 되면 갑자기 소침해지고 경기마저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은
서로 엇비슷할 터인데 그 실력을 매순간 차분하게 정성껏 발휘하여 이기려 하기보다는 주로 그때그때의 분위기와 기세에 의존하여 이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코어나 승부도 기복이 심하다. 결승전에서 어쩌다 상대를 꺾기라도 하면 그 기쁨을 그만 주체하지 못해 좀 민망할 정도의
제스쳐들이 나온다. 상대선수와 심판에게 악수를 청하는 예절도 잊고 벌렁 경기장에 드러누워 환호를 지르기부터 한다. 반대로 중국선수들은
냉정하면서도 영악하다. 상대가 감정에 치우친다 싶으면 살살 약을 올려 자세를 더욱 흐트러지게 만든다. 그들은 설사 이겨도 겉으로 담담한 척
위장한다. 속으로는 훌쩍훌쩍 뛰고 싶겠지만 안 그런 척하며 스포츠에 필요한 에티켓 차릴 것 다 차리고 의젓하게 퇴장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승강이나 ‘싸움’이 일어날 때 거기에 대응하거나 그걸
처리하는 양국의 자세를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한국과 중국 선수들의 탁구시합을 보는 것 같다. 옛날 구한말의 역사를 살펴봐도 그래 보이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임진왜란 전후에도 그러했던 것 같고, 모르긴 해도 삼국시대에도 그러하지 않았나 싶다. 한쪽은 펄펄 뛰며 감정을 있는 대로
표출하는데 반해 다른 쪽은 감정을 극히 자제한다. 한쪽은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할 소리 안할 소리 다 해버리고 마는데 반해 다른 쪽은 겉으로
태연한 척 의젓한 척하며 어쩌다 한 마디씩 그것도 조용조용하게 할 뿐이다. 한쪽은 금방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덤비면서 막상 속으로는 일이
닥쳤을 때 거기에 대한 대비도 변변히 않고 있는데 반해 다른 쪽은 겉으로는 웃음 띤 부드러운 얼굴을 해 보이면서 속으로는 연구할 것 다하고 챙길
것 다 챙기고 때가 오면 상대에게 한방먹일 대책을 강구한다. 글자 그대로 한쪽은 외강내유고 다른 쪽은 외유내강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아이와
어른 사이 같기도 하다.
승강이나 싸움에는 으레 구경꾼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국가간의 그것에는 온 세계
구석구석에 있는 사람들이 구경꾼이 될 수도 있다. 큰 승강이나 싸움은 물론 하다못해 도로의 접속사고 싸움에 이르기까지 주로 지는 쪽은 처음에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쪽이다. 구경꾼들이 그걸 놓칠 리가 없다. 보통 2,3분만 보고 있으면 그 결과가 훤히 내다보인다.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은 논리가 어지럽고 또 상대방의 반격에 대한 대비도 소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쪽이 분명 옳다싶은데도 지고는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거나 가슴을 쾅쾅 치는 사례를 흔히 본다.
그런데 구경꾼들은 구경을 하면서 승패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승패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 보다는 양 당사자들의 접전방법이나 태도에 더 관심이 많다. 누가 더 논리적인지, 누가 더 의젓한지, 누가 예절(거기에도 예절은
지켜야 하니까)을 더 지키고 있는지.... 말은 안 해도 그런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양쪽의 인격까지 저울질 해 본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면 막돼먹은 사람으로 본다. 불같이 감정을 드러내면 아직 수양이 덜 된 사람으로 본다. 처음엔 강하게 나갔다가 논리가 부족해
나중에 슬슬 꼬리를 감추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본다.
한국에선 지금 독도와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로 ‘난리’가 났다. 접속사고 싸움에서 성질 급한
운전자가 상대방을 단번에 때려눕히기라도 할 것처럼 주먹을 치켜들고 상대방을 위협하듯이 당장 일본의 항복이라도 받아 낼 기세다. 삭발에 단지에
일부 사람들이 거침없이 감정을 폭발시키고, 외교장관이 나서더니 국무총리가 나서고, 무슨 안보관계 의장인가 하는 사람이 공약삼장의 정신까지
들먹이며 독립운동 하는 것 같은 말을 하더니 결국 대통령까지 나섰다. 그것도 모자라 원고를 며칠간 고심을 하며 직접 썼느니 어쩌니 하며 할 소리
안 할 소리까지 다 해 버렸다. 웬만한 소리를 해도 저쪽에서 오불관언이니까 제풀에 화가 나서 점점 도를 높여가다가 마침내 최종 카드까지 다 내민
꼴이다. 이미 일본 쪽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지만, 마치 김정일이 핵시위를 해도 미국이 끄떡도 안 하니까 점점 그 도를 높여가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이 ‘싸움’의 결과는 보나 마나인 것 같다. 싸움에서 먼저 감정부터 드러내는 쪽이 이겨본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역사교과서 같은 데서 일본으로부터 약간의 양보를 받아낸다 해도 그걸 승리로 간주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 가지 더 걱정스런 것은 세계의 구경꾼들이 이번 ‘싸움’의 양 당사자들을 각각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점이다. 개인간의 승강이나 싸움에서 양편의 접전태도를 보며 그 인격을 재 보듯, 그들이 혹시 한국과 일본의 국격을 재 보고나 있지 않은지 정말 두렵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는 나중의 문제다.
(2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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