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평가 방법에 대한 소견
(2000년 6월6일)
H님이 퍼온 "김재규가 부활한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우선
김재규 평가 방법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급선무다 싶은 생각이 든다. 아직 10.26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모두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지만, 평가 방법상의 문제 때문에 평가자체가 더욱 지연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뉴스 메이커지의 기사도 박정희의 위업을 기리는 사람들
때문에 김재규의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왜 박정희의 위업이 김재규의 평가를 막아야 하는가?
박정희는 박정희고 김재규는 김재규다.
따라서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별개로 이뤄져야 한다. 뉴스메이커지 기자도 지적한 것처럼 "김재규는 악(惡)이고 박정희는 선(善)"이라든지 혹은 "김재규는 선이고 박정희는 악"이라는 2분법적 역사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김재규 묘소 앞에 세운 비석의 비문을 정으로 쪼아내는 몰상식한 짓을 한다든지 또는 김재규의 재평가작업이 "박정희 신드롬"(이 용어 자체가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다)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이 이분법적인 역사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박정희가 꼭 "죽어야만" 김재규가 "사는지", 그리고 박정희가 "살기" 위해선 왜 김재규가 꼭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얼른 생각하면 이러한 이분법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보면 둘 다 "사는" 예도 허다하지 않는가. 우선 김재규의 경우에 곧잘 비유된다는 브루터스와 브루터스에게 죽임을 당한 시저의 경우도 그렇고, 우리 나라 역사에서도 최영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성계, 그리고 세조나 세조에게 항거하다 비참하게 죽은 사육신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죽이지는" 않고 있다.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안중근은 그들에게 불후의 애국자인 이또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로만 보임직 하지만 안중근을 위인으로 기리는 모임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김재규를 안중근 같은 사람이라며 그를 살리려고 무척 애를 쓴 김수환 추기경도 언젠가 신문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면서 손수 경부고속도로 구간을 하나 하나 점검했다."며 그의 경제건설에 대한 집념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역사를 모름지기 이렇게 유연하게 봐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쿠니가 야게루"라는 일본 영화를 보고 김재규가 그의 동생에게 했다는,“나는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게찌 미쯔히데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대의 아니겠는가.”라는 말 중에 나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1년 그 당시 세력을 떨치며 자기에게 항거하던 히에이잔 승원에 불을 질러 건물 3천여 채를 파괴하고 수천명의 승려들을 학살한 냉혈한이며 문화재 말살자이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100년간의 센고꾸(戰國) 시대를 마감케 한 걸출한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으며, 오히려 심복으로서 기습반란을 일으켜 주군과 그의 아들을 죽인 아게찌 미쯔히데(明智光秀)를 하열에 두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미쯔히데도 케네디를 죽인 오스왈드 같은 대접은 받게 하고 있지 않는 것이 일본인들의 역사관이다.
박정희와 김재규 중 어느 한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쪽을 꼭 "죽이려고" 하다가는, 마치 그들을 고려 무신정권시대의 정중부(鄭仲夫)나 최충헌(崔忠獻) 같은 사람들로 만들 우려도 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문제는 이미 본란에서 논란을 거듭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김재규의 거사가 전혀 사심 없이 오직 유신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그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쏜" 것인지를 규명하는 것에서만 출발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내란목적 살인"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들을 확보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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