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소견
(2000년 5월15일)
- 정치분석가님의 글에 부쳐
유교양반들의 오만, 왜 일본은 서양문물을 쉽게 받아들였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는가?
좋은 글들을 계속 주셔서 많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수고를 많이 하십니다. 5월 14일자 정치분석가님의 글 가운데서 거론된 중요한 두 가지 명제가 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바람에 붓을 들게 되었습니다.(사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주제란, 첫째는 "세계화된 안목"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아시아적(한국적) 가치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선 "세계화 된 안목"에 관한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아마도 서울 올림픽 이후부터 사람들이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말을 곧잘 했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 때부터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세계 속의 한국"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진정한 "세계화"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화 된 눈"을 가져야 될텐데 가만히 보면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 눈으로만 세계를 보면서 말만 그렇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세계 속의 한국"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속의 세계"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진정한 세계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지요. 비약인진 몰라도 이러한 눈을 가졌기 때문에 IMF 환란도 맞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의 규모나 내용은 영락없이 세계화가 돼 있는데 그것을 운용하는 주체들의 눈이 여전히 한국적이었으니 그 갭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세계화된" 눈을 가진 사람들이, 혹은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물안 개구리 눈"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풍조가 있다는 점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눈으로 한국적인 것을 좀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당장 사대주의 내지 패배주의 사고라고 몰아 부칩니다. 특히 사학계에서 그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옛날 군국주의 시대 일본 학자들의 사고를 닮았다하여 군국주의 사관 혹은 식민사관으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서 이런 풍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진정한 세계화를 이루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우선 안목을 넓혀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숲도 봐 가면서 나무를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또 일본 얘기를 하게 됩니다만, 직장생활 말년에 업무상 일본과 영미의 신문이나 잡지를 매일 보며 씨름을 해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에 들어가면 대부분 볼 수 있지만, 그 무렵만 하더라도 거금을 들여 정기구독을 해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이나 미국 언론들의 "세계화 수준"이야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놀란 것은 일본 언론들의 태도였습니다. 온 세계에다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까지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였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텔렉스나 팩시밀리(그 당시)를 통해 들어오는 세계의 뉴스를 취사선택하고 번역하여 주로 전달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데 반해(한국과 관련이 있는 것은 물론 해설이나 평가를 합니다만), 그들은 직접 일본과 관련이 없는 웬만한 것도 사설이나 칼럼, 단평, 기타 해설란을 통해 부지런히 그 배경을 설명하고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본 독자들의 세계화 수준이 높은 탓도 있겠지만, 언론이 국민들의 눈을 세계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정보량이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많은 정보를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그런데 한가지 고약한 것은 일본인 자신들의 정보는 좀처럼 개방하기를 꺼린다는 점입니다. 인터넷에서 일본 정보를 검색해보면 당장 느낄 것입니다.)
우리 나라와 일본 역사를 읽으며 간혹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즉 외국문물을 받아드리는데 있어 과거 우리의 태도는 기름때가 절은 무명베 같은데 비해 일본은 리터머스 시험지 같다는 얘깁니다. 기름이 절여진 무명베에 아무리 물감을 들여본들 잘 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그에 비해 리트머스 시험지는 취사선택된 물감이 멋지게 들여집니다. 그들은 벌써 130여전 전부터 그랬습니다. 탈아론(脫亞論) 으로 유명한 후꾸자와 유기찌(福澤諭吉)는 1875년에 "문명론 개략"을 저술했는데, 그 때 벌써 서구가 스스로 도달한 문명의 높은 곳에서 여타 세계를 깔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시아 특히 일본이 그런 상황으로부터 숙명적으로 탈출할 수 없다고 하는 서구의 아시아관을 단호하게 비판하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본 국민들에게 심어줬습니다. 지금 일본돈 만엔짜리에 그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것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경우엔 그로부터 약 100년 후 박대통령이 그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박대통령의 역사적 평가 문제로 정치분석가님과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일찍부터 세계화된 눈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음은 중국의 경우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민족을 야만인으로 본 것은 그리스인이나 중국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주로 상업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볼 기회도 많았고 그래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끝내 자기도취에 빠져 서세(西勢)가 바로 코앞에 와서 수염까지 잡아당기려 하는데도 여전히 그들을 야만인 취급하며 업신여겼습니다. 이미 많이 회자된 얘깁니다만 1793년에 죠지 메카트니(George Macarteny)라는 영국의 전권대사가 통상교섭을 위해 당시 청나라의 건륭황제를 배알했을 때, 황제는 통상을 거절하며 영국왕 죠지 3세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그 사절에게 내렸습니다. 물론 당시 중국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중국황제의 위상에 걸맞은 외교적 언사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인데,,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길지만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 기록된 동 서신 내용을 모두 인용하겠습니다.
[왕이여, 귀하는 여러 바다의 건너편에 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명의 혜택을 입고자 하는 겸손한 욕망을 금치 못하여 청원서를 정중히 휴대한 사절을 파견하였다. ......... 짐은 귀하의 청원서를 정독하였는데, 거기에 표시된 성실한 말들은 그대의 겸비(謙卑)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는 진실로 가상할 만 하도다. ....... 귀하가 그 국민의 한 사람을 내 중화의 조정에 파견하여 우리의 신임을 받아 중국과의 통상을 관리케 하고자 하는 간청에 대하여 이는 나의 조정의 관례에 어긋나는 것임으로 고려할 여지조차 없다. ...... 설사 귀하의 중국조정에 대한 앙모심(仰慕心)이 우리의 문명을 습득하려는 욕망에 넘쳐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의 의식과 법규들은 귀국의 것과는 전혀 다른 까닭에, 귀하의 사신이 비록 우리 문명의 기초를 습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귀하의 이방적(異放的) 국토에 우리의 풍속과 관습을 이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귀하의 사신이 아무리 재주가 좋아서 우리 문화에 정통하게 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광대한 세계를 지배하는 짐은 꼭 한가지 목적, 즉 완전한 통치를 유지하고 국가의 제반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이다. 진기하고 고귀한 물건들이 내게는 흥미가 없다. 왕이여, 귀하가 봉정한 공물들을 수령하도록 내가 명령한 것은 먼데서부터 그것을 보낸 귀하의 정성을 생각해서 그렇게 했을 따름이다. 나의 조정의 위덕은 천하만방에 편만하여 만국의 왕들은 해륙을 거쳐 고귀한 공물을 봉정한다. 귀하의 사신이 그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무엇이든지 소유하고 있다. 진귀하고 정묘한 물건이라도 나에게는 하등의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귀하의 나라의 제품이 필요 없다.]
이 해로부터 꼭 49년만에 중국은 영국의 함포 앞에 무릎을 꿇고 홍콩을 내줘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중국인들이 바다 멀리 저편에서 승승장구하던 영국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 때는 차라리 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편전쟁 후 그들의 실질적인 힘을 알고서도 그들의 문물을 받아드리는 방법은 역시 서툴렀습니다. 결국 아편전쟁 때부터 청나라가 망한 1912년까지 그리고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2차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100여년 동안 치욕과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우리 나라처럼 어느 한 나라에 집어 먹힌 일은 없었지만,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중국 자체는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유교를 숭상하며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라들이(유교의 영향은 좀 엷긴 하지만 중국세력의 영향은 크게 받았던 베트남까지도) 더 큰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문명과의 충돌이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 태도에 유교문화가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이미 생명력을 잃은 유교가 마치 무명베에 절은 기름때처럼 새로운 물감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이야 사정이 크게 변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눈을 크게 뜨지 못하고 세계 속의 한국이 아닌 한국 속의 세계만 보려고 하는 분들이 많은 걸 보면 유교의 기름때가 다 빠지지 않았나 봅니다.
이강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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