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우리는 왜 대형 이데올로기에 오금을 못 펴는가?

이강기 2015. 9. 9. 10:33

 

 

우리는 왜 대형 이데올로기에 오금을 못 펴는가?

 

 

(2002822)

 

조선 500년과 북한의 50년 역사를 비교해 보면, 물론 후자 쪽이 훨씬 혹독(오늘날 북한 위정자들 하는 짓이 말기의 연산군을 연상케 한다)하긴 하지만, 몇 가지 닮은 점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단일 이데올로기의 강요와 그에 따른 백성들의 역동성 억제, 그리고 위기 시 지배층의 피지배층 방기일 것이다. 연변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끌고 와 강제 수용소로 보내거나 죽이거나 하는 것도, 조선 말기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연해주로 탈출한 조선인들을 잡아와 참형에 처하던 것과 닮은꼴이고, "가난은 나라도 못 구 한다"는 속담처럼 창고가 텅 비자 기근을 그냥 방치한 것도 비슷하다. 조선실록을 보고 어느 학자가 계산해 논 기근자 숫자(1752-81: 1691397, 1782-1811: 2334229, 1812-40: 2167466)가 외신들을 통해 들려 오는 요 몇 년 사이의 북한의 기근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1791辛亥迫害 尹持忠權尙然이 천주교교리를 따르느라 神主를 불사르고 祭祀를 폐했다하여 죽였는데, 오늘 날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부인하다간 같은 변을 당할 것이다.

 

본래 韓族의 주류는 초원서 말달리던 몹시 사납고 역동적인 종족이었다. 한반도로 들어와 농경생활에 정착하면서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간혹 욱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걸 보면 옛 성정의 편린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제국의 아침"이란 연속극에서도 나오지만, 고려 전반기 때까지만 해도 딸을 서로 바꿔 다함께 장인-사위가 되는가 하면, 딸 둘을 하나는 에비한테 다른 하나는 자식한테 시집보내기도 하고, 또는 이복동생한테 예사로 줘버리기도 했다(단순히 권력놀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런 습속들은 북쪽 오랑캐였던 시절의 <야만성>을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그 시절까지도 아직 유교문화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초원시대의 그런 원시적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역동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 삼국시대의 화랑 사다함이나 관창의 용맹, 김유신이나 계백의 雄姿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유교나 북한 공산주의의 폐해 중 가장 큰 것은 이렇게 연연히 내려오는 민족 특성인 역동성을 억압하여 싱싱한 생명력을 죽여버렸다는 점일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인간을 이데올로기라는 틀 속에 잡아넣어 마치 사나운 곰을 서커스용으로 길들이듯 지배층의 구미에 맞게 길들이려 한 것이 조선이었고 북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백성들을 모두 우물안 개구리로 만들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생명력을 죽여, 주어진 일 외 어떤 창조적인 일에도 관심조차 가질 수 없게 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공산정권들이 무너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조선은 시대에 따라 나름대로 신진세력의 저항도 있었고 하의상달식이든 상의하달식이든 개혁도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내에서 꾀해진 그런 개혁들은 마치 소련시절의 후루시쵸프나 안드로포프가 착수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개혁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다. 어느 이데올로기나 그렇듯, 처음 채택될 땐 그 자체도 역동성을 가진다. 조선 초기에도 그랬고, 공산정권들 초기에도 그랬다. 조선은 동일 이데올로기로 지속되기엔 500년이 너무나 길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외국의 대형 이데올로기에 오금을 못 폈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조선이 단일 이데올로기로 장장 500년을 이어올 수 있었으며, 세계 공산정권들이 거의 다 무너졌거나, 설령 남아있다 해도 공산이데올로기 자체는 이미 퇴색 된지 오랜데, 유독 북한만이 아직도 공산주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단 말인가? 남한은 또 어떤가? 일단 단일 이데올로기의 억압에서 벗어나 역동성이 되살아나자, 마치 옛날 초원서 말달리던 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경제를 일으키고 나라를 발전시킨 것 까진 좋은데, 이데올로기에 대한 향수만은 역시 버릴 수 없었는지, 서구식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유별난 집착을 보이더니, 또 이젠 종교 이데올로기에의 열정이 보통수준을 넘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언젠가 신문을 보니, 세계 50대 교회(신도수로 따져) 26개가 한국에 있다 했고, 미국과 일본의 유서 깊은 교회나 성당에는 본토인 신자 수보다 시간제로 빌려쓰는 한국인들의 신자 수가 몇 배 내지 몇십 배나 더 많다고 했다. 또 엊그제 기독교 방송을 들어보니 개신교에서 파견한 해외 선교사 수가 벌써 9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러다간 머지 않아 중국이나 러시아의 옛 교회나 성당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 같고, 기독교의 본산지인 유럽도 현지 교민 수만 늘어날 수 있다면 필시 그럴 것 같다. 아니, 이런 식으로 몇 백년만 지나가면 로마 교황청이 한국으로 이사를 온다는 소문이 들릴 지도 모르겠고, 장로교, 감리교도 세계 총 본부(그런 게 있다면)가 한국에서 세워질 지도 모르겠다. 불교는 이미 진작부터 세계 불교 총 본산인 法王廳을 한국에 세운다는 말이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과거 유교 및 불교에 대한 태도나 오늘날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편이었고, 일본도 취사선택하여 자기들의 문화 속에 녹아들게 했으며, 심지어 베트남조차도 선택적 활용을 하는 편인데, 유독 우리만이 주체성도 내버려 둔 채 정신없이 거기에 빠져들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세계적인 대형 이데올로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중국의 한족들이 과거 北狄이라고 천시한 북방민족들의 대 중국관계에서 찾고자 한다. 北狄들의 꿈은 늘 남쪽으로 내려가 한족들이 일궈 논 <문명>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엔 그곳이 낙원이었고, 세계의 중심이었고, 모든 이치의 원론이었고, 오리지널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그들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리고는 거기에 동화되어버렸다. 지배자로 내려갔다가 결국은 자기들의 문화와 민족마저 잃고 만 것이다. 오늘 날 몽골족 일부가 독립국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 옛날에 초원을 호령하던 그 수많은 종족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거나 남아있다 해도 중국의 한 소수민족들로 전락해 버렸다. 설사 중국이 과거 소련처럼 조각이 나 그들의 일부가 독립국을 세운다 해도 그들의 장래는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형제 내지 사촌쯤 되는 東夷族의 후손인 우리는 어땠을까? 우리가 만약 한반도라는 주머니 같은 곳에 갇혀 있지 않고 몽골족이나 여진족처럼 한 때 힘이 분출하여 중원을 점령하고 한족들을 다스리기라도 했다면 오늘날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답은 뻔하다. 우리도 별 수 없이 그들 북방민족들과 같은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중국문화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집착을 보인 끝에 과거의 한국문화가 중국문화의 미니어츄어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 바로 그들 북방민족들의 태도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유전인자들이 대물림해 와 오늘날에도 "세계의 중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심지어 대통령들이 한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그것의 다른 표현이 세계적인 대형 이데올로기에 대한 끝없는 집착인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다보니 문득 몇 년 전, 중국 산동성의 공자 후손들인지 공자사당 관리자들인지 하는 사람들이 공자에게 올리는 祭祀의 원형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는 신문기사 생각이 난다. 그들이 잘 배워 갔는지, 실망하고 갔는지 후문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은근히 으쓱해 하던 그 기사를 보며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게 과연 으쓱해 할 일인가?> 내가 만약 작가였다면, 張龍鶴<圓形傳說>이 아닌 <原型傳說>이란 제목의 공자 제사를 소재로 한 비판적인 소설이라도 쓰고싶은 심정이었다. 2500년 전의 남의 나라 聖人에 대한 祭祀原型이나 잘 보존해 가지고는 "세계의 중심"은커녕 "영원한 변방"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