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日帝의 風水 모략설 해부

이강기 2015. 9. 11. 12:03
日帝의 風水 모략설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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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일본 산께이신문 논설위원 겸 서울지국장)씨의 저서『한국인의 역사관』중 「제 6장 日帝 風水謀略說」을 抄譯한 것이다. 일본 우익계 신문의 기자가 썼으니 필경 일본우익들의 "늘 하는 소리" 일거라는 선입관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올바른 역사인식의 바탕 위에서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혹은 이해하려하고) 있는 것일까? 진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 지 이 글을 읽어보면 느끼는 바가 있을 것 같아 옮겨 보았다.  - 이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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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帝가 박은 쇠말뚝

김영삼정부의 업적을 기록한 정부공식간행물 중에 『변화와 개혁 - 김영삼정부 국정 5개년 자료집』(전4권, 1997년12월 발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제1권 「정치편」제3장은 「역사 바로 세우기」로 되어 있으며 그 제2절에 「구 조선총독부건물 철거와 경북궁 복원」이라는 항목이 있다.

김영삼정부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사업에는 이처럼 구 조선총독부청사를 해체 철거하고 그 자리에 경복궁 복원공사를 시행하는 것이 있었으며 그리고 세 번째로「쇠말뚝 제거 및 固有地名회복」이라는 것이 있었다. 고유지명 회복이라는 것은 일본통치시대에 새로 만들어 붙였던 지명을 원래지명으로 바꾸어주는 것인데 이것도 일종의 민족주의운동으로 1995년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각지에서 행해졌다.

우선「쇠말뚝 제거」얘기부터 해보자. 사실 정부사업으로 실시된 이「쇠말뚝 제거」운동은 한국의 反日 민족주의 및 風水說과 결합돼 있었는데 한국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아주 특이한 민족주의 현상이었다. 앞서 얘기한 자료집은 문제의「쇠말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日帝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전국의 여러 名山에 쇠말뚝을 박아 地脈을 끊어 논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뿌리깊은 피해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확산돼 있다. 정부는 역사적으로 뜻깊은 시점인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이런 피해의식을 청산함으로써 국민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새로 출발할 수 있게 하려는 의미에서 쇠말뚝 제거사업을 범 국민운동으로 추진했다. 1995년 2월부터 전국적으로 실태조사를 행하여 180개의 쇠말뚝을 찾아 내 제거작업을 벌였다. 뽑아 낸 쇠말뚝은 해당지역 주민들에게 전시한 후 역사적인 유물로서 영구히 보관할 계획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거작업을 벌일 방침이다.」

여기에 기록된「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名山에 쇠말뚝을 박아 지맥을 끊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문제의「風水說」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명산에서 흘러나오는 地脈에는 민족정기가 간직돼 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가 이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고 명산의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 지맥을 끊어 놓았고, 그 쇠말뚝은 지금도 전국 각지의 산에 박혀 있으며,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그것을 뽑아내 민족정기를 회복시키려 한다(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것을 정부사업으로 계획하고 1995년 2월 閣議에서 의결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내무부 주관 아래 각지의 행정기관에 지시를 내리고 언론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사업이 전개됐다. 쇠말뚝 탐색에는 군대도 동원되었는데 지뢰탐지기까지 사용하여 왼 산을 뒤지고 있는 풍경이 이따금씩 TV 뉴스에 등장했다.

한국정부는 결국 풍수설에 기초하여 정부사업을 전개한 것이다. 이 풍수설에 근거한 「일제 쇠말뚝 모략설」과 정부사업으로 전개된 쇠말뚝 제거작업에 대해 TV, 신문 등 언론기관들을 포함하여 어느 단체도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언론기관들은 오히려「일제풍수모략」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反日 민족주의」를 선동했다.

「민족정기를 말살했다」고 하는 쇠말뚝 수색과 그 제거작업의 몇몇 사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는「走狗山」에서 발견된 쇠말뚝은 직경 4cm, 길이 1m 정도의 철봉으로 1995년 2월24일 현장에서 산신령을 진정시키는「告由祭」를 올린 후 1시간 반 작업 끝에 그것을 뽑아냈다. 이 현장의 지형은 풍수설에 의하면「渴龍飮水形」을 한「明堂」인데 연구가들은「日帝가 용의 코에 해당되는 부분에 쇠말뚝을 박아 그 지역에서 人才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한국일보 1995년 2월7일자 특집기사에서)

또 하나는 같은 경상북도의 포항시에 있는 龍山에서도「日帝가 산의 地氣를 끊기 위해 박아 논 지맥단절 쇠말뚝(직경 1.5cm, 길이 1.5m) 2개」를 제거했다고 하는데, 이 현장의 地勢는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쇠말뚝이 발견된 부분은「용의 척추에 해당되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연합통신 1995년 2월21일자)


<> 민족정기를 끊는다?

이「日帝 風水謀略說」에 근거한 쇠말뚝탐사와 그 제거작업은 이전부터 민족주의자 단체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행해져 왔다. 그 하나의 사례로「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들이 1993년에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충청북도 속리산에서 벌였던 쇠말뚝제거작업은 당시 언론에서 크게 소개되었다.

보도에 따르면「日帝가 한민족의 地氣를 끊으려 박아 논 직경 1.5cm, 길이 30cm의 쇠말뚝을 제거하기 위해 회원 십 수명이 해발 1000m 높이에 있는 바위 위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8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합계 7개를 모두 뽑아냈다. 쇠말뚝은 (물이 솟아 나오고 있는) 甘露泉 주변에 약 1.8m 간격으로 박혀져 있었으며, 샘 양쪽의 2개는 日帝가 박은 것이고, 샘 입구로 통하는 곳에 있는 5개는 안전장치용으로 한국인들이 박은 것으로 추정된다」(한국일보 1995년 9월14일자)고 했다.

이처럼「日帝모략」이나「민족정기」등과는 관계가 없고 단순히 손잡이나 발판용으로 박아 논 쇠말뚝인 것 같아 보이는데도 언론보도는 한결같이「日帝 풍수모략설」로 치닫고 있다.

또 하나를 소개해 보자. 이것은 1995년 광복50주년을 기념하여 남북 군사분계선 가까운 강원도 楊口의 梧鳳山에서 있었던 쇠말뚝 제거작업을 현지 러뽀 형식으로 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한 것이다. 기사는「한반도의 血脈을 끊어 논 쇠말뚝 제거/日帝의 흔적을 뽑아내다/청년 20명이 14시간 구슬땀/역사청산 현지 러뽀」라는 현란한 표제로 시작되었다.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 보면,

「오전 8시, 드디어 "역사청산"이 시작됐다. 그리고 14시간 후 마침내 그것을 해냈다. 80여 년간 우리 민족의 정수리에 박혀 있었던 쇠말뚝을 뽑아 낸 것이다. 길이 180cm, 직경 3cm의 추악한 모습이 드러났다. 6각형으로 된 쇠말뚝의 중심부에는 작은 홈이 패어 있다. 땅의 기운이 뽑혀져 나오도록 치밀하게 제작된 것이다. 日帝가 韓日合邦 무렵에 梧鳳山의 거북이 모양을 한 산등성이 머리부분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楊口의 혈맥이 단절돼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 곳의 地勢와 經絡으로 보아 명산의 혈맥을 끊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작업을 지휘한「白頭大幹보존협의회」의 김모씨는「針을 잘 못 놓으면 살이 썩는 것처럼 氣脈이 막히면 땅도 썩는다」고 하며「쇠말뚝이 박혀 있었던 곳은 남한강의 발원지이며 필시 서울과 춘천시의 시민들에게 썩은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 (日帝가) 의도적으로 한 짓 같다」고 말했다.(문화일보 1995년 3월6일자)

이렇게 뽑아낸「日帝의 風水侵略」용 쇠말뚝은 앞서 얘기한 정부자료에 의하면 180개가 넘었다. 쇠말뚝 길이는 소개했던 것처럼 1m 이상의 것에서 30cm 정도의 대못(鐵釘) 같은 것까지 다양했다.

서울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북한산은 흰 岩机가 아름다운 명산으로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다. 일요일에는 시민들에게 좋은 행락지가 되고 있는데, 이 북한산에서도 이전부터 민족주의 단체에 의한 쇠말뚝 제거운동이 있어 왔다. 뽑아 낸 쇠말뚝은 대략 30cm 전후의 것으로 한 때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었다.

풍수설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라면 표고 수백 미터에서 1천 미터를 넘는 산 정상에 1m 정도의 철봉이나 더욱이 30cm 정도의 鐵釘을 박아서 地脈이나 氣脈 심지어 민족정기를 끊어 놓는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문제가「일본」또는「日帝」라고 하는 과거의 것이 되면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정부도 언론도 여론도「反日」이라고 하는「狂氣」에 사로잡혀 視野협착증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反日全體主義라고나 해야할까. 특히 1995년의「광복50주년」이라고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문제로서 쇠말뚝제거 정도에서 그친다면 그다지 實害는 없다.「과거」를 소재로 하여 자신들만의 일종의「민족적 기운내기」로서 끝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風水謀略論」내지「風水侵略論」이 지나치게 횡행하게 되면 묘한 결과가 나온다. 한국사회의 거울인 한국 언론의 진한 反日情緖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995년 3월1일자(이날은 3.1독립운동 기념일이다) 경향신문에 사진과 지도를 곁들인 큰 기사가 게재됐다. 서울의 주한일본대사관 건물이「서울의 精氣」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장소로 이전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고는 일본대사관도 경악했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은 전 서울대 교수이며「풍수학자」로 알려져 있는 崔昌祚씨였다. 기사는 그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일본대사관 건물은 풍수학적으로 말해 수도 서울의 主山인 북악의 정기를 빼앗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외의 明堂에 공급되고 있는 정기를 차단하고 있으며, 日帝에 의한 풍수침략의 상징성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씨는 내친 김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저 위치는 틀림없이 그들의 선조들이 일국의 왕비를 참살하고 나라를 빼앗고 더욱이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살해한 그 역사적 현장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것은 일본이 잘 못하고 있는 것이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다」고 했다.

서울의 일본대사관은 고궁인 경복궁 근방에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대사관 부지는 한국정부의 권유에 의해 정해진 것이며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그 장소를 택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가까운 곳에는 일본대사관 건물보다 훨씬 큰 미국대사관 건물이 버티고 있어 문제의 신문기사가 말하는 소위「북악 精氣」의 흐름을 일본 대사관과 꼭 같이 미국대사관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수도 서울의「精氣」는 민족의 정기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이 그 정기의 흐름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데 미국은 지금으로선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장차 반미감정이 높아지게 되면 미국도 또한 풍수설에 의한 민족주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덧붙여 말하면 미국대사관은 경복궁의 거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화문 앞 세종로 대로변에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경복궁에 가깝기는 하지만 길 안쪽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일본대사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당당하게 서 있다.


<> 風水 메카시즘

광복50주년인 1995년 한국 民官이 모두「日帝風水謀略說」에 정신이 팔려 反日정서를 즐기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것에 이의를 제기한 언론이 있었다. 한국언론의 명예를 위해 꼭 소개하고싶다.

한국에서는 언론을 포함한 여론상의 對日過去事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는 어떤 식, 마치「아무렇게나 말해도 좋다」「아무렇게나 써도 좋다」는 느낌조차 들 정도로 센세이셔널하다. 말하자면 反日정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민족주의 정서보다는 사실에 충실하고 있는 언론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가웠다.

「일제풍수모략설」에 유일하게 반론을 제기한 기사는 종합잡지인「月刊朝鮮」1995년 10월호의 조사보도인「김영삼정부는 "風水政權"인가?」(金容三기자 집필)였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은 표제와 前文을 달고 있다.

「전국취재, 日帝 쇠말뚝을 찾아서/그러나 확증은 하나도 없었다/이것은 풍수 메카시즘이다」
「역대 대통령 집무실, 국립중앙박물관(구조선총독부) 철거에 이어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국가기관들이 선두에 서서 "일제 쇠말뚝뽑기 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있는데 희한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결국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이른바 "문민정부"는 쇠말뚝 망령에 홀려 21세기로 나아가고 있는 한국을 미신과 과거에 얽어매고 있다」- .

이 기사의 특출성은 일제 쇠말뚝 소동의 진위 追及에 매달리지 않고「민족정기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캐고 있는 점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대통령관저의 스피치 라이터에서부터 국립국어연구원까지 찾아다니며「민족정기」에 대한 올바른 定義를 물었지만 어디에서도 명확한 설명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한다.「민족의 氣」라는 말은 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민족의 魂」이라고 설명하는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보면 그들의 주장은 일종의 정서 내지 기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정부사업으로 벌인「일제 쇠말뚝 제거운동」에 대해 이 잡지의 조사보도는, 정부의 지시를 받았던 지방 행정당국이 일종의 점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지방의「風水師」나「地官」등이 말하는「風說」을 기초로 反日을 좋아하는 언론의 지원을 받아 전개한 허구의 소동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문제가 된 쇠말뚝의 진상에 대해서도「風水說」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지리적인 방위표시나 측량에 관계가 있는 三角点 설치 등으로 박아 논 것이라고 하며 일본통치시대에 일본인 측량반에 따라다녔던 어떤 노인의 증언까지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일부는 바위절벽 위의 난간 등 위험방지 시설을 위한 것도 있다. 아무튼 이 조사 보도는「일제의 풍수모략」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전하고 있다.

민족주의자 단체나 「風水師」들이 주장하는「일제풍수모략설」에 대해 실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의문은 있었다. 예를 들어 前述한 서울 북한산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일본통치시대인 1927년에 石段과 난간 등과 함께 방위측정용으로 쇠말뚝을 박았다는 증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관계는 확인할 생각도 않고 오로지「풍수모략설」만 떠들며 反日情緖에 이용한 것이다.

또한 일본통치시대에 강원도에서 일본인 측량반을 따라다녔던 한 노인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측량용 삼각점 쇠말뚝이라고 현지 기자에게 상세하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에는「日帝蠻行!」식으로 보도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벌써 사실관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反日情緖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동원해도 좋다는 식이 된다. 기사에는 反日 강경파로 알려져 있는 서울대 사회학과의 愼鏞厦 교수의 주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日帝 자신은 풍수지리설을 믿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이 그것을 믿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그러한 정책과 행동을 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유명 교수조차「문헌」에도 없는「風說」로 논문을 쓰고 논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일본과 관계되는 반일정서를 만족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그처럼 개의치 않고 있는 것이며 사회에서도 그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통치시대에 일본인 측량반과 함께 일을 했다고 하는 앞서의 그 노인은「풍수모략설」이라는「風說」의 배경에 대해「나라를 빼앗긴 슬픔이 컸었다. 그 결과 조선인들은 전국의 여러 山頂에 박혀 있는 이상한 쇠말뚝을 보고는 "왜놈들이 조선에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血脈을 모조리 잘라 놓았다"고 하는 소문을 계속 유포하게됐다」며, 이 때문에 삼각점이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는 일도 많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 피해의식이 만든 풍수모략설

「풍수모략설」은 한국민들의 피해의식의 산물이다.「일제의 모략」이라고 함으로써「恨」을 傳承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풍수설의 地脈 血脈 사상을「민족정기」에 결부시켜 日帝가「민족정기」를 끊으려고 했다 함으로써 민족감정을 고양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살아남게 된 것은 반일정서를 민족적 원기회복제로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전국각지의 산에서 뽑아 낸 쇠말뚝이나 철봉은 한 때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과 독립기념관에「일제만행」의 증거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문의해 본 결과 전시는 하지 않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한다. 月刊朝鮮의 상세한 조사 보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구총독부청사의 해체 철거를 둘러싸고도 그 현장이 경복궁 부지였기 때문에「풍수설」이 난무했다. 앞서 소개했던 일본대사관을 둘러싼「풍수설」과 마찬가지인데, 구총독부청사는「수도서울의 정기」즉「민족정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위치에 지어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체 철거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해체 철거되어 현장에서는 흔적도 없어졌지만 그 부지 지하에 묻혀 있던 기초자재는 결국 그대로 두게 되었다. 그것은 길이 4-8m의 파일이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9,380개를 웃돌았다. 그런데 이 파일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자 단체는「민족정기 말살용」이라며 그 회복을 위해 그것들을 모두 뽑아 낸 후 고궁을 복원시켜야 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거공사를 하지 않았다. 그 파일은 地盤보강을 위한 것으로 밝혀져「민족정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과를 보도한 1997년 5월8일자 중앙일보에 의하면 그 파일을 제거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한국정부 문화재관리국이 내세운 이유가 걸작이었다.「日帝가 민족정기 말살차원에서 각지에 박아 논 쇠말뚝과는 위치나 재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일제풍수모략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月刊朝鮮의 부인에도 불구하고「쇠말뚝 풍수설」은 언론을 위시하여 여론에 의해 지금도 확고하게 신봉되고 있다. 일개 월간종합잡지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정부와 언론,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 로타리와 軍艦旗

거듭 말하거니와「일제풍수모략설」은 사실과는 무관하게 일본에 대한 민족적인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어떤 종류의 풍설이다. 말하자면「日帝風說」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러한「이야기」로 일본지배의 과거를 기억하고 전승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울분에 의해 민족감정을 새롭게 하고 원기를 돋우어 왔다. 일본인들이 보기엔 전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풍수설이 사회에 널리 침투돼 있는 한국에서는 그것이 한국인들의 민족적 피해감정의 표현형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日帝風說」은 앞서 이야기 한 것 외에도 수없이 많다. 한국 남부의 군항도시인 鎭海市는 일본통치시대에 해군기지로서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 앞 바다에 있는 거제도 부근은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이며, 특히 日露戰爭 때의 현해탄 해전에서 일본의 旗艦인「三笠艦」등 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숨어 기다리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진해는 한국 최대의 벚꽃 명소로 알려져 있다. 시내에는 지금도 구 식민지시대의 街路가 남아있는데, 시가의 중심부는 로타리가 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가로들이 사방으로 방사선으로 뻗어있다.

그런데 이 방사선 로타리를 가리켜 진해 사람들은 일본해군의 軍艦旗를 본떠 만들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일본지배의 흔적을 영구히 남기기 위한 계획적인 설계였다는 것이다. 특별히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日帝風說」이다.

「日帝風說」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구조선총독부청사 건설과 관계가 있는 광화문 일대 거리 이야기다. 구조선총독부청사는 중앙 돔을 정상으로 하여 좌우로 퍼져있는 장방형 건물이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돔 부분인 제일 중앙에서 갈라져 좌우 대칭의 ㅁ字 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日"字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日帝가 자기들의 지배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日"字로 설계했다는 말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배후의 북악산은 보기에 따라서는 "大"字로 보인다. 여기에 맨 앞쪽에 있는 서울시청(舊 京城府廳) 건물도 위에서 보면 "本"字를 거꾸로 한 것 같은 형태가 되어 있다. 이것을 합치면 "大日本"이 된다. 日帝는 그들의 지배과시를 위해 서울 광화문 거리를 "大日本"으로 설계했다는 것이다.

이「日帝風說」은 구조선총독부청사가 해체 철거될 때에도 계속 떠돌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신문도 TV도 지식인들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지금도 여론은 그렇게 믿고 있다.

물론「大日本 風說」에 대한 문헌 등의 증거는 없다. 우선 그들이 말하는「大日本」이라는 글자 가운데「日」字는 옆으로 누워있고「本」字 역시 거꾸로 되어 있다. 옆으로 누워있고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大日本」으로는 전혀 지배과시를 할 모양세가 아니다. 그러나 反日정서에 함몰돼 있는 한국 여론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사실을 조사하여 밝혀야 할 저널리즘이 선두에 서서「日帝風說」을 반추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 서울에 흐르고 있다는「氣脈」이라 부르는「風水說」만해도 그렇다. 前述한 것처럼 구조선총독부청사와 현재의 주한일본대사관이 경복궁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서울의「主山」인 북악에서 흘러내리고 있는「氣脈」을 전면에서 차단하고 있다며 風水민족주의자들은 비난하고 언론은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복궁 전면, 광화문 앞의 지하에는 지하철 3호선이 달리고 있다. 岩盤을 파내어 거대한 지하 터널을 뚫었으며 거기에 지하철이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는데, 이 지하철에 의해「氣脈」이 차단되는 일은 없는 것일까? 광화문 앞 지하를 달리는 지하철 3호선 건설에 風水 민족주의자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끝)
 200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