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對日 抵抗史觀의 神話

이강기 2015. 9. 11. 12:14

對日 抵抗史觀의 神話

(이 글은 구로다 가쓰히로의 저서 "한국인의 역사관" 중 제2장 "對日 抵抗史觀의 神話"를 초역한 것임)

 

 

1995년 광복50주년 이후 한국에서는「역사바로세우기」와「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이 슬로간처럼 곧잘 사용되고 있다. 헌데 이것은 필시 한국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전자를 일본말로 정확히 직역하면「역사를 다시 바르게 세운다」는 뜻인데,「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재미있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기록이기 때문에 바로든 거꾸로든 새삼스럽게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한국인들의 역사관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한 이상에는 당연히 역사는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인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결국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른 형태로 기록한다는 것이 된다. 단적으로 말해 과거를 현재의 가치관으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구조선총독부청사는 현 시점에서 민족감정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구조선총독부청사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사실(역사)보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현재의 민족감정 또는 국민정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정 그렇다면 지금껏「역사, 역사....」하면서 역사를 좋아하여 과거를 굉장히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인들이 이외로 과거를 경시하고 있으며, 과거보다 현재를 더 중시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역사바로세우기」라든가「과거청산」이라는 말을 그토록 쉽게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보면, 그들이 역사(과거)를 그렇게 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중시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자신들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과거(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현재의 시각에서 보아 훌륭하고 깨끗하고 바른 자신들의 아름다운 역사일 뿐이며 그 이외는 어느 것도 모두「청산」의 대상이 된다.

 

<> 단절의 역사관

 

한국인의 역사관은「단절의 역사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단절을 좋아한다는 것인데, 이유는 현재를 중시하고 현재를 정당화하고싶어하기 때문이다.「단절사관」에서는 언제나 현재에 서서 과거를 재단한다.

 

그래서 필자는 최근, 한국인들은 과거에 지나치게 구애받고 있는 것 같지만 과거 지향적이라는 평이 실제로는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사실상 일본 쪽이 과거에 구애받고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단절사관을 가진 한국인들처럼 과거를 시원스레 청산하거나 부정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현재는 과거로부터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과거를 부정하는 일에는 어딘지 서투르다. 한국인들처럼 현재의 자신들에게 모든 것이 나쁘고 맘에 들지 않는 과거(역사)는 가능한 한 日帝나 구정권 등「타인」탓으로 돌려 청산하고 부정하려고 하는 단절사관은 일본인들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일본사회에는 지난 번 전쟁(또는 그 패전)에 대해「1억 총 참회」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발상이 한국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역사에 대한 참회는 타인들이 하는 것이며 자신들이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들로서 일본과의 근.현대사에 있어서의 최대의 울분은「일제시대」로 불리고 있는 일본에 의한 35년간의 지배일 것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주권을 잃었던 식민지 지배는 분명히 생각하기조차 싫은 울분의 역사일 것이다. 한국인 스스로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반일감정, 반일정서의 원인을 그런 과거의 피해의 역사에서 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근년 들어 다른 견해도 동시에 갖게 되었다. 확실히 과거에 일본에게 지배를 받았다고 하는 피해의식이 일본에 대한 울분 또는 악감정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식민지지배의 피해체험을 가진 민족과 국가가 많지만, 구지배국에 대한 민족감정이 한국정도로 심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특히 과거 식민지 경험을 가진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볼 때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유독 왜 한국에서만 반일감정, 반일정서가 강한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일본지배로부터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울분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가설이다.

 

 

 

<> 전승국이 되지 못한 恨

 

만약 한국이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이나 해방전쟁으로 일본을 타도하고 일본에게 승리하는 형태로 해방과 독립(한국식으로 말하는 광복)을 성취했다면, 그들의 대일감정이 지금과는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술자리 등의 담론에서「일본과 한판 붙어 이기고싶다!」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곧잘 한다. 그렇게 하면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이른바 반일감정)은 일거에 해소되고 일본인들의 對韓우월감도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예컨대 베트남, 인도네시아, 버마, 인도 등이 식민지배를 경험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식민지배국에 대한 전쟁 내지 투쟁의 결과로서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다. 중국이나 대만(중화민국)은 전승국이 되었다.

 

싸워 이겼다면 그 후의 관계는 대등해진다. 특히 민족 감정면에서 그러하다. 지배를 받아도 그것을 싸워서 뒤엎었다면「恨」이 사라져 피지배의 울분은 그렇게 남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국은 일본의 패전 때 전승국인 연합국 측에 끼이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또는 스스로에 대한) 최대의「恨」인「왜 한국은 연합국에 가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고찰은 한국에서는 이외로 적다.

 

한국 국정역사교과서의 근.현대사에는「항일독립전쟁」이라고 하는 항목이 있다(고교국사 下). 그 중「대일선전포고와 한국광복군의 활약」난에는「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즉시 대외활동을 시작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켰다.....한국광복군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조국의 광복을 우리 손으로 싸워 쟁취하기 위해 직접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고 쓰여 있다.

 

역사교과서에는 한문으로 쓰여진「大韓民國臨時政府 對日宣戰聲明書」(사본)의 사진도 실려 있는데, 이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기로 上海에서 수립한 망명정부를 의미하며, 그 후에는 重慶에 있었던 蔣介石의 중화민국정부와 행동을 같이 했다.「宣戰聲明書」가 순 한문으로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임시정부)은 연합국의 일원이 되지 못했고 對日 전승국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합국(蔣介石의 중국을 포함) 내지 국제사회가 한국의 역사교과서 記述과는 달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실체를 평가하지 않고 당시의 망명자 조직을「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의 경과를 보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해방후의 한반도에는 美蘇가 분할진주하고 결과적으로 해방 3년 후인 1948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독립하게 된다. 더욱이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분단국가 형태로서다.

 

이런 전후 사정을 역사교과서는「우리 민족은 자주독립국가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민족적 비극을 맞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분명 美蘇의 의도가 있었다고는 해도, 국제사회에서는 해외에 있었던「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규정한 포츠담선언이 약속했던「조선독립」을 담당할 확실한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들로서는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일 것이다.

 

좀 전에 일본에서 도죠히데끼(東條英機)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프라이드」가 제작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전승국(연합국)이 패전국(일본)을 일방적으로 제재한 극동군사재판, 이른바「東京裁判」에 대한 비판이다. 간단히 말해 패전국인 일본으로서도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을 태평양전쟁 開戰時의 최고책임자였던 도죠 히데끼수상(당시)의 변명을 통해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한국에서는 당연히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東京發로 계속 비판적인 보도를 전했다. 즉 한국은 東京재판을 지지하며 그 결과는 옳았다고 하는 입장이었다. 東京재판은 과거의 일본을 철저하게 심판하고 규탄했기 때문에 한국으로선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對日독립전쟁사관」을 國定歷史觀으로 하고 있는 한국은 그런 비판만 하면 다 된다는 얘길까? 일본과「독립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왜 동경재판의 원고석에 앉지 못했는지, 왜 동경재판에서 자신들이 일본을 심판하고 규탄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관점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동경재판에 대한 당시 한국측의 비판이 있었다고 하는데도 그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연합국에 의한 동경재판의 결과에 편승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만 것 같다. 일본을 자신들이 재제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심층심리에 존재하고 있는 민족적 울분의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 한국은 언제「건국」되었는가?

 

1998년 8월15일 한국에선「건국50주년」을 맞아「건국논쟁」이 벌어졌다. 1948년 8월15일에 수립된「대한민국」50주년을「건국50주년」으로 축하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당초부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8년 9월9일을 건국기념일로 하여 매년 축하해 왔다. 이른바「9.9절」이라는 것인데, 1998년은「공화국창건50주년」으로서 특별히 성대한 축하행사를 벌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대한민국건국일」을 축하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8월15일」이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광복절」로 중요시되고 있기 때문에「광복」쪽만 중시되고「건국」쪽은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될 기회가 적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대한민국」건국정권인 초대 이승만 정부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예컨대 북한의 영향을 받은 좌파나 진보파는 당연히 반공.우파의 이승만 정권에 부정적이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평가를 떠나서도,「4.19 학생혁명」에 의한 퇴진으로 상징되고 있는 불행한 만년 때문에 이승만정권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꽤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여기에다 한 술 더 떠 근년 들어서는 일본지배시대의 망명정권으로 1919년 상해에서 세운「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1948년의「대한민국」건국은 상대적으로 위치가 낮아지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지배시대를 민족적 抵抗史로 그리고 있는「美化 사관」「우기기 사관」이라고 해야할 저항사관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확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도「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매우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문민정부」를 간판으로 내건 김영삼 정권(1993-1998)도,「국민의 정부」를 강조한 그 뒤의 김대중 정권도 자기들의 정권을「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정통정권이라고 하고 있다. 이른바 이 주장 배후에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시작이「상해임시정부」라고 하는 뉴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1948년의 이승만정권에 의한 대한민국의 성립이 특별히 「건국」에는 들어맞지 않다는 것이 된다.

 

이 결과 김대중 정권은 1998년 8월15일의「건국50주년」을 심드렁하게 취급하는 것처럼 보였다. 축하식전은 광복절과 겸해서 행해졌고 대통령 기념연설도 있었지만「건국50주년 축하」의 의미는 그다지 들어있지도 않고 IMF 경제위기 탈출을 위한「제2의 건국」을 강조하는 것으로 어물어물 넘기는 형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우익.보수파는 민간 레벌에서 독자적인 축하.기념행사를 가졌다. 그 중심이 된 것이 한국의 해방직후史를 장식한 이른바「반탁운동」세력들이었다.「반탁운동」이라는 것은 해방후의 한국(조선)을 연합국이 신탁통치하려는 案에 대한 반대운동인데, 이 반탁운동이「대한민국건국」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으며, 美蘇(연합국)에 저항하여 전개됐다는 의미에서는 아주 민족주의적인 운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한국인들의「건국」과 관계된 울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방직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45년 8월15일 패전 결과 포츠담 선언에 의해 한반도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해방된 한국(조선)에 대해서는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국(美蘇英) 외상회의에서 당장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말하자면 연합국은 해방직후의 한국(조선)을 독립 능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前述한 것처럼 한국의 역사교과서는「우리 민족은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할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고 기록돼 있지만, 일본지배로부터 자력으로 해방할 수 없었던 것이 「신탁통치」案이라고 하는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한국은 당연히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른바「반탁운동」이 그것인데 소련의 컨트롤 아래 있었던 좌익들이 도중에 贊託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한국(南) 政情은 신탁통치 찬성의 좌익과 반대의 우익에 의한 좌우대립이 격화되고 혼미에 빠졌다. 북에서는 소련이 추대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의사에 따라 신탁통치안에 찬성했고 이에 대해 曺晩植 등 민족주의파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바람에 숙청되었다.

 

그 후 이 문제는 美蘇공동위원회로 이관되었는데, 독립정부수립을 담당할 단체의 선정을 둘러싸고 美蘇가 대립하여 결국 결렬됐다. 그래서 이 문제가 미국 주도로 1947년 유엔에 상정되어「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설치되고 그 감시아래 남북동시선거를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착실히 공산화를 진척시키고 있던 소련은「유엔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여 결과적으로 유엔감시 하에 남쪽에서만 선거가 치러지고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리고 그에 이어 북에서는 소련지배하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됐다.

 

다시「건국50주년」얘기로 되돌아 와, 1998년 8월15일엔 정부의 기념식전에 대항하여 민간에서 독자적으로 기념식을 가졌는데 반탁운동 주역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는 진보파가 세력을 떨치고 있으며 특히 김대중 정권 아래서 한국 언론은 반공.우파에게 차가웠다. 우파들이 독자적으로 가졌던「건국50주년기념식」은 언론에서 거의 무시됐다.

 

「반탁운동」을 담당했던 보수 본류라고 해야할 우파계는 해방이 되었을 때 연합국을 위시하여 국제사회로부터「정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해외망명정권인「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美蘇의 신탁통치안에 항거하여 독립정부(그 주체가 바로 반탁세력)를 세운 것이 바로 1948년의「대한민국」건국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한국 현대사의 경과는 오로지 한국이 일본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자기의 힘으로 성취하지 못했던 데서 유래한다. 물론 역사교과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美蘇등) 강대국의 이익에 좌우됐다고 하는 점도 있지만, 그것에 대항하는 민족적 주체의 결집이 없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분통터지는 일일 것이다.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는 1945년 8월15일의 해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광복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군의 승리 탓도 있지만, 그 사이에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저항하여 끈질기게 전개한 독립운동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중학국사.下)

 

「우리 민족의 광복은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부단히 전개한 독립투쟁의 결실이었다. 8.15광복은 전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투쟁해 온 결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은 민족운동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고교국사.下)

 

이러한 記述로부터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지배로부터의 탈출, 이른바 해방은 연합군의 對日戰 승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들의 독립 저항투쟁의 결과인「自力」쪽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1948년까지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없었던 것은「강대국들의 이해」가 개입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의 공식 견해이다.

 

그러나 일본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연합군의 對日戰보다 스스로의 독립투쟁결과라고 하는 역사인식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것은 美蘇(연합군)에 의한 분할進駐, 군정, 그리고 前述한「건국」의 지연 등을 봐도 분명하다. 연합국 및 국제사회는 그「自力」을 인정하지 않았다.

 


<> 對日「協力」의 기억

 

한국인들의 이러한「영광의 저항사관」에 대해 실은 한국인 스스로 정면으로 의문을 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대통령이 8.15 광복절 축하식전 연설에서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1981년 8월15일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행한 연설이 그러한데, 당시의 메모에 따르면「우리의 國恥에 대해 일본제국주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우리 자신들, 국내적 단결을 기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들, 그리고 국력을 약화시켜온 우리 자신들의 탓이었다는 것을 준엄하게 자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8.15 광복이 연합국의 승리라고 하는 민족외적 요인으로 실현됐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면서「과거를 진실 이상으로 미화함으로써 공허한 自尊妄大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한국대통령의 8.15 연설에서는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인데, 현실 쪽은 그 후 역사교과서에 대한 記述에서도 밝힌 것처럼 전연 역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덧붙여 말하건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8.15 연설도「독선적 민족주의」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한국인 자신들의 희귀한 민족주의 감정을 자기비판하는 내용이 함축돼 있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목적은 외국자본도입에 의한「IMF경제」를 바로 세운다고 하는 경제 마인드가 배경이 되고 있으며,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연설같이 역사인식에 대한 노골적인 자기비판은 아니었다. 필자는 지금도 그 때의 전두환 연설을 기억하고 있는데, 한국인으로서 이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국 역사교과서 근.현대사에서 눈을 끄는 것은 일본지배에 관해 1940년대가 일종의 공백기간이 되고 있는 점이다. 물론 전혀 記述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함으로써 일본지배하의 한국(조선)도 전시총동원체제로 들어갔다. 그 전쟁의 動員 모습에 대한 내용이 한국의 중학, 고교 역사교과서에서 1 페이지가 채 못되게 아주 간단하게 기술돼 있다. 

 

그 가운데 문제의「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1997년 판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고교국사의 경우 1940년대의 전시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에 광분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內鮮一體, 日鮮同祖論, 皇國臣民化와 같은 황당한 슬로건 아래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皇國臣民誓詞暗唱, 宮城遙拜, 神社參拜는 물론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당했다. 일제는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투옥, 살상까지 저질렀으며, 이러한 정책에 순응하지 않은 종교계 학교는 폐쇄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각종 물자를 약탈당하고, 청년들은 지원병의 명목으로, 또한 징병제와 징용령에 의해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시아에 강제동원되어 목숨을 잃었으며, 여성들까지 정신대란 이름으로 연행되어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됐다.」

 

이것이 일본 지배하의 1940년대史 기술의 거의 전부인데, 이 부분의 총괄로서 마지막에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한국의 자주적인 근대화와 발전에 크게 지장을 주었다. 모든 정책이 일제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계획되고 집행되었으며, 시설 설비투자도 전쟁수행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다. 일본측에서 이따금씩 언급하고 있는「일본지배는 좋은 일도 했다」고 하는「...도」를 의식한 반론이다.

 

중학국사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강제」「강요」라는 표현이 더 많이 눈에 띈다. 1페이지 조금 못되는 記述가운데 이 2가지 표현이 무려 일곱 번이나 등장한다. 그리고「그 때 여성들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연행돼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었다」고 쓰여 있다.

 

일본지배가 끝난 지 이미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한일간에 때때로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하는 과거사에 대한「안건」의 대부분은 이른바「종군위안부」문제로 상징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일본의 전시총동원체제시대였던 이 1940년대의 사건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정역사기술에서는 이처럼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도 1990년대 후반까지는 기술의 대상이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역사교과서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것이 일본역사교과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한국 역사교과서에서 1940년대가「공백」에 가까울 정도로 간단하게 기술되고 있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저항사관」대로 한다면 이 시기에는 눈에 띌만한 저항의 역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방 후「김일성항일혁명신화」를 만들어 낸 북한에서 마저 1940년대에는 공백의 역사가 되고 있다.

 

한국의 공식사관이 강조하는 상해망명정부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광복군」이 重慶의 蔣介石정권과 그들을 지원하고 있던 미군의 지휘하에 있었던 것처럼, 구만주에 있던 김일성의「인민혁명군」도 공산계 중국인들 아래서 극동 소련군에 편입돼 소련 극동지역에 있었다. 말하자면 해외에서도 독자적인「독립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보다 큰 이유는 이상의 사실과 동전의 양면이 되겠는데, 이 때는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협력」이 가장 진척된 시대였으며「한국의 역사」로서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과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대는 분명히 한국인들이 일본인화 했던 시기이며 실제로 한국인 대다수는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 하마터면 일본인이 될 번했던 한국인

 

이것은 당시를 살았던 많은 한국인들의 증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당시 소년기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전시체제하의 교육으로 그들 의식의 90% 이상이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한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봄 유학을 하고 있던 동경으로부터  일시 귀향했을 때 서울(당시는 京城)의 한국인 거리였던 종로의 한 영화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뉴스영화에서 상영되고 있던 일본군의 승전전황에 관한 뉴스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동경 영화관에서조차 그럴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한국인도 마침내 일본인이 되고 말았구나」라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일본에 대해「협력」이라는 용어는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저항사관으로 고정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일본지배시대에 대한「한국인의 역사」에서는 저항만 있지 협력은 없는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고싶지 않은 것이며 더욱이 그 협력은 모두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한국 측이「강제」를 크게 강조하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말한다면, 종군위안부의 본질도 또한 전시체제하의 압도적인 일본인화의 흐름 가운데서의「협력」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한국인의 역사」에서는「강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국 역사교과서도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의 한국(조선)지배는 결국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의 일본인화는 실제로 꽤 진척됐다.「광복군」이나「조선인민혁명군」에 가담한 한국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들어가 일본장병으로서 연합군과 싸웠다.

 

근년에 과거를 둘러싼 한일관계론에서 일본과 나치스 독일을 비교하여 일본을 규탄하는 논의가 한일 쌍방에서 성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교과서는「일제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하고 있는데, 나치스는 유대인들을 독일인화 하려고 한 적이 없지 않은가? 「일제는 한일동조론까지 동원했다」고 하는데 나치스는 유대인과 독일인인의 조상이 같다는「독일.유대동조론」을 주장한 적이 없지 않은가?

 

한일간의 역사적 불행은 일본지배에 의해 한국인들이 일본인이 되었다 할 정도로「협력」이 진행된 것에 있다. 그런데 돌연 일본지배가 끝나고 신생 한국으로서 진짜 한국인들을 필요로 했을 때 한국은 곤란에 부닥쳤다.

 

그 결과 일본인화 한 한국인을 본래의 한국인으로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 일본의 모든 것을 악으로 몰아세우고 일본에 대한 협력의 역사를 배제하는 저항사관에 기초하여 철저하게 반일교육을 단행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반일감정, 반일정서는 일본지배에 대한「협력」과 일본인화라고 하는 뼈아픈 사실 때문에 해방 후에 오히려 강조되고 있으며 보다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