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일제강점기시대의 공업화 추진 상황

이강기 2015. 9. 11. 12:12

일제강점기시대의 공업화 추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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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제 4장 "전체주의적 식민정책" 중 "공업화", "교통 통신" 및 "도시화" 부분을 옮겨온 것이다. "일제통치 35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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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

 

  일본통치가 시작된 후 20년간 조선은 주로 증가하는 일본인구의 식량공급원으로, 그리고 일본상품의 시장으로 간주되었다. 공업 발전이나 중산계급의 확대도 미미했다. 사회적 계층이동은 점진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1931년에 이르러 큰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만주침략과 특히 중국으로의 팽창정책 준비로 조선이 일본의 아시아지배 기지가 된 것이다. 조선의 공업과 도시 발전이 강화되고, 공업원료는 수탈되었으며,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로 발달하고 있던 통신제도는 일본의 대륙지배를 위한 생명선이 되었다. 1938년 이후 통신망의 확장은 중국에서의 전면전쟁의 유발을 앞두고 크게 촉진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사태 추이는 조선사회에 질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실로 그 이전 20년간의 신중한 변화보다 더 큰 변화이다. 그것은 급격한 사회동원의 고전적 실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전쟁 이후까지 계속된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대 변동의 서장이었다. 조선 자체의 이익보다는 오히려 일본을 위한 이 급진적인 개발은, 조선이 전쟁확대의 긴장과 수탈에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치적으로 안정되게 성장했다는 일본측의 평가에 의거하여 시행되었으며 또한 그 평가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일본의 전쟁노력이 방해받을 정도의 큰 사건은 조선 내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앤드류 그라얀체프(Andrew Grajdanzev)는, 조선 공업의 발달은 <표1>과 <표2>와 같이 예상보다 증가가 적었다고 말하고 있다.  증가가 예상보다는 적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물가변동으로 인한 왜곡을 수정하면 공업생산의 총액은 5년간 80%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 된다. 그 후에도 이 증가는 급격했다. 1945년의 엔화에 의한 공업생산총액은 1932년의 그것에 약 15배였다. 전체 공업생산 중 가내공업의 비율은 계속 줄어들어 1933년의 40.1%에서 38년엔 24.7%가 되었다. 공업생산고에서 차지하는 중공업의 비율은 1930년에 38%이던 것이 42년에는 73%가 되었다. 조선의 무역수지는(그 97%는 일본과의 무역이었지만) 언제나 수입초과였다. 일본은 조선을 중요 투자 저장고의 하나로 만들었으며, 1939년에는 수출총액 35억 7천 600만엔 가운데 12억 2천 941만 7천엔이 조선으로 흘러갔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투자액은 1910년에는 약 1억엔 이하이던 것이 1940년에는 대략 50억-60억엔 정도가 되었다.

표1 조선 공업의 발달(1922-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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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자수           공업총생산고         물가변동에 의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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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천명)             (100만엔)              (100만엔)
1922년                46                 223.3                 721.7
1929                  94                 351.5                 641.3
1933                 120                 367.3                 520.3
1937                 207                 959.3                 672.0 
1938**               231                 1140.1                690.0
1944                 550                20500.0                1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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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앤드류 그라얀체프 [현대 한국](New York 1944), 148.149쪽;  [한국. 각 시대의 국토.국민.문화] 서울 1960, 학원사간, 220쪽, [조선은행통계월보] 1922, 29, 33, 39년 각 1월호. * 당시 서울의 도매물가지수로 수정. ** 1938년 일본인 노동자는 321만 5천명이었고, 총 생산고는 196억 6,700만엔이다.

표2 조선 공업회사의 성장<광업포함> (19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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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수   액면자본   불입자본   전 회사 불입자본   공업비율   공업회사
                                                                     평균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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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84      189.9       76.7       310.6         24.7%      0.158
1932      563      260.9      143.6       373.3         38.2        0.255 
1935      717      287.9      198.1       591.3          33.5       0.276
1938     1203      656.3      430.1       1028.1         41.8       0.358
1939     1812      728.7      510.0*      1235.7         41.2       0.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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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앤드류 그라얀체프 [현대한국](New York, 1944, p153).
[조선은행통계월보] 서울, 1939년 1월. * 개략적인 수, 금액은 100만엔

 

  1930년 이후시기의 특징은, 일본 최대의 산업.무역회사인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 ), 스미도모(住友), 야스다(安田)가 조선에 진출했다는 점이다. 몇 개인가의 일본의 거대기업, 예를 들면 노구찌(野口) 같은 회사는 조선에서 주로 발전한 기업이다. 광업은 1913년부터 1944년 사이에 약 80배-100배로 증가했는데 최후 15년간에 최대의 신장을 보였다. 공업과 광업에 취직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수가 2배로, 다시 2배로 증가하여 종전 때에 조선 내에 약 73만 3천명이었고, 그 가운데 55만명은 제조업노동자, 18만 3천명은 광업노동자였다. 이 외에 약 261만 6천명의 노동자들이 조선내부의 철도확장이나 기타 노역을 위해 징용되었으며, 특히 72만 3천명이 일본에서 일반공장 노동자나 남방의 일본 군사력을 보조하기 위해 징용되었다. 다른 수만 명은 일본군대로 징병되던가 또는 다른 자격으로 만주나 북부중국으로 끌려갔다.
  공업화의 과정은 조선에 특별한 희망을 주었다. 농업개발계획이 전반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충분한 기초가 닦여져 있었다. 급속하게 증가하는 총명하고 야심만만한 그리고 기술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던 조선인들은 고용을 원했으며, 산업이 제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진보의 길을 찾았다. 직능적인 위계조직과 전문화라는 것이 사회에 잠재적인 새로운 질서의 동인을 제공했다. 통일된 반도는 적절하게 여러 가지 자원으로 혜택을 입고 있었으며, 만주의 경제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조선인들의 고용상황이 일본 지배권 내에서는 좋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비단 수도권뿐만 아니라 텅스텐, 석탄, 수력, 어유(漁油) 등의 자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공업을 발전시킴으로서 개발균형에 기여했다. 공업 특히 지방의 공업은 결과적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제어할 수 없는 중앙세력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요새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만약 새로운 정치제도가 확립될 때는 지방을 대표하는 중심역할을 하게될 중간매개기관이나 관련단체의 발달을 촉구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산업의 발달은 사람들을 공통의 이해와 충성심을 가진 공동체에 붙들어맬 수 있으며 중앙집권화한 대중사회로 가는 경향을 중화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조선의 산업화는 실제로 이런 모든 이점을 이용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얼마쯤은 그 반대의 경향을 조장했다. 성장속도는 열광적인 것이었다. 전통이나 과거와의 유대가 없고 이름도 없는 시골 마을들이 우후죽순처럼 현대화되었다. 노동력은 원격지에서 급거 보충됐다. 일본 철도회사와 경쟁하고 있는 조선철도회사는 토지 없는 남부 사람들을 북부지방으로 흡수하기 위해 특별할인제도를 실시했다. 설비와 자원이 혹사당했다. 잔업은 당연한 것이며 노동조합활동은 금지됐다. 새로운 연대를 만들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공업의 완전한 붕괴는 노동력을 다른 분야로 쫓아보내든가 실업으로 몰아넣었다. 공동체들은 전보다 더 불안정하고 뿌리 채 뽑히기 시작했다.
  사실 새로운 공업시설은 비록 조선에 서있긴 했지만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일본은 1938년 조선에 있는 모든 법인의 전 불입자본금의 90%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5년에는 모든 제조업과 공업설비의 85%를 소유했으며, 모든 주요 은행과 보험회사 등을 지배했다. 한국의 한 경제학자는, 1940년에 조선에 투자된 전 공업자본에서 점하는 조선인 자본 비율은 6%에 지나지 않으며 조선인 손으로 조업되는 공업에 투자된 자본조차 그 금액의 90% 정도가 일본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지 하나의 대형 섬유공장과 2, 3개의 중간규모 은행 및 약간의 사업만이 조선인 소유였다. 그 외에는 주로 정미소와 식품가공 같은 소규모 공장들에 한했다. 소유권과 경영과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큰 공장이 이동해와도 원격지에 있는 본사로부터 감독을 받는 일이 많았다. 조선인들은 가장 낮은 차원으로밖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직공장(職工長)급 이상은 오를 수 없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런 환경에서는 기능의 전문화, 새로운 위계질서나 특례제도, 팀워크라든가 혹은 안정된 직업이라고 하는 사고가 길러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흥분상태가 고조되어 감에 따라 조선인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제도에 대한 충성심이나 공동체감각을 발전시키려는 의식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 동시에 이 흥분된 민중들은 정치활동에 참가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새로운 필요성과 새로운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1945년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원자화된 조직마저 붕괴된 조건에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쉽게 공산주의 조직에 의한 정치의 회생물이 되었다.
  약간의 소망은 이뤄졌다.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인력수요가 증가했으며, 수 천 명의 조선인들이 유복해졌고, 특히 일부 소수는 부자가 되었다. 수십만 명의 조선인들은 대형 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부 노동자들은 현장훈련을 통해 숙련공이 되었으며, 공업중학교는 1925년의 44개교에서 1941년엔 95개교로까지 늘어났다. 비록 일본인들이 공업과 농업에 대한 대부분의 소유권을 장악하고 있어 조건이 극도로 나쁜데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의 새로운 중산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거의 모든 중산, 상류계급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재산으로 거대한 기득권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일본인들이었다. 이것은 중산계급이나 기득권익 그 자체의 성장에 대한 일반인들의 존경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 바람에 중산계급 지위에 있던 조선인들마저 선망의 대상도 존경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일본에 협력했던 그들의 책임은 엘리트로서의 설득력을 훼손시켰다. 더욱이 모든 일본인들의 귀국과 일본인 재산의 몰수로, 다른 식민지정권 아마도 베트남 식민지정권이 끝났을 때 일어났던 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의미의 혁명적 상황이 벌어졌다.


  교통.통신

 

  한편 조선의 교통.통신 분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1899년의 서울-인천간 철도 개설 후 일본은 철도건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 1945년까지 총 연장 6천 362km에 이르는 노선을 부설했다.(해방될 무렵엔 몇 개의 신규 추가노선을 계획, 그 가운데 80 - 90% 완성된 것도 있다). 조선의 철도망은 주로 북부에 집중돼 있었고, 극동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의 철도망을 보유했는데, 이는 조선의 국내수요뿐만 아니라 일본의 아시아제국과의 팽창하는 연락망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자동차 도로는 철도만큼 발달되지 않았으며 나중에 약 2만 마일의 도로가 생겼지만 그 약 절반이 원시적인 도로망으로 비포장 도로였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일본인들이었지만, 1930년대에는 500개 이상의 버스회사와 230개의 택시회사, 671개의 트럭회사가 있었다. 그것들은 거의 소규모로, 2차대전 중에 소멸되고 살아남은 것은 극소수였다. 조선은 종전 때까지 23만톤의 선박과 많은 항만시설을 보유했다. 또한 잘 발달된 우체국망을 갖고있었는데, 1938년에는 1천 31국, 45년에는 남부조선에서만 670국이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이 전보발신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5천 600 마일에 이르는 전신선과 7천 100마일의 전화회선이 있었으며, 약 5만명의 전화가입자가 있었는데 조선인 가입자는 이 가운데 약 1만 5천 회선에 지나지 않았다.
  방송은 종전까지 순조롭게 성장을 계속, 조선 내에 15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10개 방송국은 1941년 이후에 설립됐다. 남부조선에만 약 24만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있었고 그 3분의 2는 일본인들의 소유였는데, 1945년에 조선인에 의해 거의 몰수됐다. 20만대는 1938년 이후에 구입된 것이다. 이리하여 1945년에 조선은 인구대비로, 1959년 현재 남 베트남, 인도네시아, 앙골라, 케냐가 갖고 있던 것 보다 많은 수의 라디오를 갖고 있었으며, 특히 인도, 미얀마, 나이지리아가 1979년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수치보다 더 많았다. 1937년에 조선에는 72개의 극장이 있었는데(일본에는 3만 2천 338개), 45년에는 약 300개의 극장과 51개의 영화관(일본에는 9만 4천 853개)이 있었다. 45년에는 조선총독부 관할아래 2만 명의 통신관계 노동자가 일했고, 그 상급직 4천명은 일본인들이었다.
  이런 시설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것이지만, 조선인들은 이미 2차대전 전에, 1980년대에도 아직 많은 신흥국들이 보유하지 않은, 혹은 최근에 겨우 보유한 통신이나 현대적인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았다. 이런 환경이 1945년 직전에 급속히 개량되어 조선사회를 새로운 복잡한 현대생활의 와중으로 발진시켰음이 분명하다. 통신이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보급되는 날도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가운데 조선인들은 이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대규모적인 정치적 동원을 향해 또 다른 발걸음을 시작했다. 


  도시화

 

  산업화와 통신 붐은 급격한 도시화를 동반했다. 1910년에 인구 1만 4천명 이상의 도시는 11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런 도시인구의 총계가 겨우 56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4%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것도 이전의 사회와 비교하면 도시인구가 급속히 증가한 것이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도시거주자는 아마도 30만 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의 인구는, 건설 된지 얼마 안되는 1426년에 10만 3천명이었는데, 1897년 2월에 시행됐던 정밀한 "국세조사"에서는 21만 9천 827명이었다. 1920년에는 그 수가 25만 200명에 이르렀으며, 1940년에는 93만 5천 500명이 되었다. 이사벨라 비숍에 따르면, "평양은 1896년에 6만 명의 인구를 가진 번영된 도시였는데, 청일전쟁으로 황폐되어 1만 5천명을 가진 도시로 쇠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자신문 "코리언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 1892년 4월)는 평양과 대구에는 각각 7만 5천명이 살고있다고 보도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대구에 살고있던 선교사 애덤즈 일가는, 그들이 구입했던 자전거를 도로사정이 나빠 마음대로 탈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성의 인구는 6만 명이었다. 다른 4개의 도시는 대충 3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제물포)의 인구는 3만 명을 훨씬 밑돌았다. 부산, 대전, 광주, 목포, 마산, 군산, 흥남 및 실제로 북쪽에 뒤늦게 탄생한 도시들 거의 대부분은 당시에 아직 한촌(寒村)이거나 아니면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1939-40년 국세조사가 실시됐을 때, 앞서 말한 11개 도시의 인구합계가 191만 6천명에 달해, 크게 증가한 전 인구의 약 8.4%를 차지했으며, 1935년이래 4년간 도시인구가 약 91% 증가했다. 해방될 때까지는 약 2천 600만의 총 인구 가운데 도시인구가 200만을 넘게 되었다. 조선 6대도시의 인구는 1930-40년 사이에 2배 이상으로 확대됐다. 청진같이 더 늦게 생긴 몇몇 북동부 도시들은 같은 기간에 5배로 증가했다. 또한 1940년에는 1만 5천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50개 이상이 되었으며, 그 총계는 301만 2천 400명으로 전 인구의 13-14%를 차지했다.
  이 기간에 평양의 인구는 28만 5천 965명으로 알려졌고, 1875년에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부산은 1920년에는 7만 3천 900명이었다가 1940년에는 24만 9천 734명이 되었다.(1963년에는 135만 4천 400명). 원산의 인구는 1만 8천명이었던 것이 1940년에는 8만 명이 되었고, 청진은 2천-3천명에서 1930년부터 40년 사이에는 약 20만 명이 되었다. 대전, 함흥, 목포 같은 알려지지 않은 마을도 4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되었다. 산업화의 진척 뿐 아니라 경작지 대비 인구과잉 및 지주의 횡포, 30년대 중반기의 실제적인 농촌 기아 등이 이처럼 도시로의 인구유입을 촉진시켰다. 전쟁이나 산업의 발전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도시로 내몰았는데 1945년 직전에는 더 많은 도시인구증가를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에 이주한 조선인(거의 도시지역에 살고 있었다.)들의 수도 증가했다. 일본으로의 이주민 수는 1914년의 3천 630명에서 1930년엔 41만 9천명으로 불어났다. 일본으로의 이주는 1920년대보다 1930년대가 적었지만, 1933년의 45만 6천 217명에서 36년에 69만 503명으로 증가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240만 명에 달했다. 해방 후 약 70만 명을 제외하고 모두 조선으로 귀국했지만, 그들 중 겨우 일부밖에 시골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의 도시인구가 1950년에 전 인구의 18.5%에 달하고, 그 다음 20년 동안 크게 늘어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며, 1980년대까지는 70% 이상 늘어나는데, 이처럼 한국이 갑자기 도시화된 국가들의 상위권 순위에 오를 것이라고 1945년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은 일제가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음에도 광범위한 정치적 변화를 강요하는 거대한 사회적 혁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산업성장에 맞춰 별안간 도래한 도시화로 사람들은 모든 인연이나 익숙해진 환경으로부터 멀어져, 자신들의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쉴새없이 사회적 필요성을 위해 싸워야하는 이질적인 세계로 내몰렸다. 1940년에 조선인들의 9%, 20-24세까지의 취업자의 13%가 그들의 출생지 이외의 지역에 살았다. 이 비율이 1945년에 더욱 높아졌다. 함경북도에만 1935년부터 40년 사이에 인구가 29%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전과 더욱이 전후에 계속되는 도시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친숙했던 시골행사에 참가하는 대신 정치활동이나 시위에 참가하도록 함으로써 뿌리 없는 대중사회로 그들을 몰아넣었다. 현존하는 여러 관행이나 제도를 개혁하려는 압력이 급속히 거세어졌다. 결국 조선사회는 혁명을 가능케 하는 혼란의 선행조건 가장자리에 도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