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덕분에 아시아는 백인지배에서 해방"
한반도, 국제 2008/12/12 12:13 가우자리
중일전쟁, 진주만 공격은 음모에 말려든 탓
'다모가미 도시오' 일본 항공자위대 막료장이 지난 11월 일본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논문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 정년 퇴직 형식으로 사퇴했다. 항공자위대 막료장은 공군 대장으로 한국으로 치면 공군 참모총장이다.
논문의 논리가 골 때린다.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의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 이를 미국의 일본침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양국 사이에 합의된 조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주둔한 것도 조약에 근거했다. 일본은 상대국의 양해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병한 적은 없다."
"장제스는 코민테른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이런 장제스는 끊임없이 일본군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1937년 8월15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국군의 포악함을 응징함으로써 난징(南京)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장제스에 의해 중일전쟁에 말려들어간 피해자다."
"1928년의 장쩌린(張作霖 - 만주의 군벌) 열차폭파사건,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다."(이들 사건은 각각 일본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의 계기가 됐던 사건임- 편집자 주)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타이완을 모두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개발하려고 했다. 당시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 가운데 식민지의 내지화를 꾀하려고 한 나라는 일본 뿐이다.(이하 일본 식민통치기간 만주, 한반도, 타이완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했는지 자세하게 서술...한국 뉴라이트들의 논리도 똑같다)"
"이 은 전하(영친왕)의 비(妃)가 된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는 쇼와(昭和) 천왕의 비(妃) 후보였던 고귀한 분이다. 만일 일본정부가 이 왕조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면 이런 고귀한 분을 이 은 전하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야마토·조선·한(한족, 즉 중국인)·만주·몽골의 각 민족이 서로 섞여 사이좋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내부에는 300명의 코민테른 스파이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루즈벨트가 만든 덫에 걸려 진주만공격을 결행하게 된다." (다모가미 도시오는 일본의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획책한 음모에 말려들어가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식이다.)
"대동아전쟁 후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가 백인국가의 지배에서 해방됐다. 이는 러일전쟁, 그리고 대동아전쟁에서 싸운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다. 만일 일본이 그 때 대동아전쟁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종평등의 세상이 찾아오는 것은 백년, 2백 년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2차 대전 뒤 피식민지 국가의 해방은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에 의해 이뤄졌는데...이런 생각을 하다니)
"태국과 미얀마·인도·싱가포르·인도네시아에서도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본에 대한 평가는 높다. 그리고 일본군을 직접 접했던 사람들은 일본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퍼드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이 침략국가였다는 것 등은 무고한 누명이다. " (왜 한국과 중국은 빼냐?. 한국과 중국이야말로 일본군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어본 사람들인데)
논문을 다 읽고나서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차라리 일본 우익이 부럽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본 우익은 지들이 남을 팬 것이니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소리라도 하지, 일본 식민통치 당하면서 두들겨맞았던 한국인데 한국 뉴라이트들은 남한테 당한 식민통치가 행복했다고 하니....원래 보수는 민족주의자고 진보는 계급주의자인데...한국 진보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까지 동시에 해결해야하니 힘이 너무나 많이 든다.
다음은 논문 전문
일본은 침략국가였던가
다모가미 도시오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의해 미국의 군대가 일본 국내에 주둔하고 있다. 이것을 미국의 일본침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양국 사이에 합의된 조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들 나라에 일본군이 주둔한 것도 조약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의외로 알려져있지 않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군대를 진주시킬 때 상대국의 양해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병한 적은 없다.
현재의 중국정부가 '일본의 침략'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지만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 의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중국대륙에 대한 권익을 얻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조약 등에 근거해 군대를 배치했던 것이다. 이에대해 압력을 가해 무리하게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조약 그 자체가 무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다소의 압력을 수반하지 않는 조약 등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일본군에 대해 장세스 국민당은 빈번히 테러행위를 반복했다. 일본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폭행과 참살사건도 빈번히 발생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미군의 요코다 기지와 요코스카 기지 등에 자위대가 공격을 가해 미군 및 그 가족 등을 폭행, 참살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자제하며 평화를 추구했지만 그 때마다 장제스에게 배반당했다.
사실 장제스는 코민테른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1936년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해 코민테른의 앞잡이인 마오쩌둥 공산당의 게릴라가 국민당 내에 들어가 있었다. 코민테른의 목적은 일본군과 국민당을 싸우게 해서 양자를 지치게 하고, 최종적으로 마오쩌둥 공산당에게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국민당의 거듭되는 도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1937년 8월15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국군의 포악함을 응징함으로써 난징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장제스에 의해 중일전쟁에 말려들어간 피해자인 것이다.
1928년의 장쩌린(張作霖 - 만주의 군벌) 열차폭파사건도 관동군이 저지른 일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져왔으나 최근에는 소련 정보기관의 자료가 발굴되어 적어도 일본군이 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마오(아무도 몰랐던 마오쩌둥)>(윤 치안, 講談社), <黃文雄의 대동아전쟁긍정론>(黃文雄, 왓쿠출판) 및 <일본이여 '歷史力'을 닦아라>(문예춘추) 등에 의하면 최근에는 코민테른이 저지른 일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해지고 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 관해서도 지금까지 일본의 중국침략의 증거처럼 말해져왔다. 그러나 도쿄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때 중국공산당의 류사오치(劉少奇)가 서방측 기자와의 회견에서 "루거우차오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중국공산당원이며 현지 지휘관은 바로 나였다"라고 증언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대동아해방전쟁> 岩間弘, 岩間書店).
만일 일본이 침략국가였다고 한다면 당시에 열강이라고 불리던 나라 가운데 침략국가가 아니었던 나라는 어디였는지 묻고 싶다. 다른 나라가 했기 대문에 일본이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만 침략국가라고 불릴 까닭도 없다.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타이완을 모두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개발하려고 했다. 당시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 가운데 식민지의 내지화를 꾀하려고 한 나라는 일본 뿐이다. 일본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매우 온건한 식민통치를 실시했다. 만주제국은 성립 당초인 1932년 1월에는 인구가 3천만 명이었는데 매년 100만 명 이상 증가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만주의 인구가 왜 폭발적으로 늘었을까. 그것은 만주가 풍요롭고 치안이 좋았기 때문이다. 침략이라 불리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다.
농업 이외에는 거의 산업이 없었던 만주 황야는 불과 15년 사이에 일본정부에 의해 활기찬 공업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한반도도 일본이 통치하던 35년간 1300만 명이었던 인구가 2500만 명으로 두배가량 증가했다. (<조선총독부통계연감>). 일본통치하의 조선도 풍요롭고 치안이 좋았다는 증거이다. 전후 일본에서는 만주나 한반도의 평화로운 삶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노력에 의해 현지 사람들은 그 이전의 압정에서 해방되고 또 생활수준도 훨씬 향상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만주나 한반도, 타이완에 학교를 많이 세워 현지인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도로, 발전소, 수도 등 생활 인프라도 많이 건설했다. 또한 1924년에는 조선에 경성제국대학, 1928년에는 타이완에 타이페이 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일본정부는 메이지유신 이후 9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했는데 경성제국대학은 6번째, 타이페이제국대학은 7번째로 세워졌다. 그 뒤 8번째가 1931년의 오사카 제국대학, 9번째가 1939년의 나고야 제국대학의 순이다. 일본정부는 오사카나 나고야보다도 먼저 조선과 타이완에 제국대학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일본정부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인정했다.
전후 마닐라의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견을 받은 조선 출신의 홍사익이라는 육군중장이 있다. 이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26기생으로 이오지마에서 용맹을 떨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과 동기생이다. 조선 이름을 사용한 채 제국육군의 중장으로까지 승진한 사람이다. 또한 1기 뒤 후배에는 김석원 대좌가 있다. 중일전쟁 때 중국에서 대대장을 맡았다. 일본병사 약 천 명을 이끌고 수백년 동안 계속 괴롭혀온 전 종주국 중국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 공훈이 뛰어나 천황폐하의 금사(金賜) 훈장을 받았다. 물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장제스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니이가타의 디카다의 연대에 부속해 교육을 받았다. 1기 후배로 장세스의 참모였던 샤잉치도 있다.
이왕조(李王朝) 최후의 전하인 이 은(영친왕) 전하도 육군사관학교의 29기 졸업생이다. 이 은 전하는 일본에 대한 인질과 같은 형태로 열 살 때 일본에 오시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전하를 왕족으로서 정중히 대우하여, 전하는 각슈인(學習院)에서 공부한 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셨다. 육군에서는 육군중장까지 승진해 활약하셨다. 이러한 이 은 전하의 비(妃)가 되신 분이 일본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 비 전하다. 이 분은 쇼와(昭和) 천왕의 비(妃) 후보였던 고귀한 분이다.
만일 일본정부가 이 왕조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면 이런 고귀한 분을 이 은 전하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궁내성은 이 두 분을 위해 1930년 새 집을 건축했다. 현재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이다. 또한 청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제국 황제였던 푸이 전하의 동생인 푸제 전하에게 시집간 분은 일본 화족인 사가 가문의 사가히로 비(妃) 전하다.
이것은 당시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들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만주나 조선, 타이완에 대한 일본의 마음가짐은 열강의 식민통치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지만 인도인을 위해 교육을 베푼 적은 없었다. 인도인을 영국의 사관학교에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물론 영국 왕실로부터 인도에 시집을 보내는 것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야마토·조선·한(한족, 즉 중국인)·만주·몽골의 각 민족이 서로 섞여 사이좋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인종차별 철폐를 조약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을 때 영국이나 미국은 일소(日笑)에 붙였다. 현재의 세계를 보면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대로 세계가 바뀌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국(淸國)은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의 사후처리를 요구받아 1901년 일본을 포함한 11개 나라와 의화단 최종협정서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청국에 주병권(駐兵權)을 획득하여 당초 2600명의 병사를 두었다. (<盧溝橋 사건의 연구> 秦郁彦, 도쿄대학출판회). 또한 1915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와 4개월에 걸친 교섭결과, 중국의 논리도 받아들여 이른바 대 중국 21개조 요구에 대해 합의했다. 이것을 일본의 중국침략의 시작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요구는 열강의 식민지지배가 일반적인 당시의 국제상식에 비추어 보아 그렇게 이상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도 한 때는 완전히 승낙하고 비준했다. 그러나 4년 뒤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인정받은 중국이 미국의 후원을 받아 대 중국 21개조 요구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데도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일본의 논리를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본 일본인 昭和編> 渡部昇一, 祥傳社). 또한 일본은 장제스 국민당과의 사이에 합의를 받지 않고 군대를 진주한 적은 없다. 항상 중국 측의 승인 아래 군대를 진주시켰다. 1901년부터 배치된 베이징의 일본군은 36년 뒤인 루거우차오 사건 때조차 56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盧溝橋 사건의 연구> 秦郁彦, 도쿄대학출판회).
이 때 베이징 부근에는 수십 만 명의 국민당군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형태상 침략과는 거리가 멀다. 시데하라 기쥬로 외무대신으로 상징되는 대중 융화외교야말로 일본의 기본방침이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마침내 미일전쟁에 돌입해 3백만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내고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에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에 의해 치밀하게 만들어진 덫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사실 미국도 코민테른에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
베노나 파일이라는 미국의 공식문서가 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방대한 문서인데 월간 세이론(正論) 2006년 5월호에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대학의 후쿠이 조교수(당시)가 내용을 요점만 추려 소개해 주었다. 베노나 파일이란 코민테른과 미국에 있었던 에이전트 사이의 교신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은 1940년부터 1948년까지의 약 8년 동안 이것을 모니터했다. 당시 소련은 1회에 한해 사용하는 암호문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미일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부터 해독작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무려 37년이나 걸려 레이건정권이 등장하기 직전인 1980년에 이르러 해독작업을 마쳤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의 절정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기밀로 분류했다. 그 뒤 냉전이 끝나고 1995년에 기밀이 해제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1933년에 탄생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내부에는 300명의 코민테른 스파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은 재무부 제2인자인 재무차관 해리 화이트였다. 해리 화이트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인 '헐 노트'를 쓴 장본인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모겐서 재무장관을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움직여 일본을 미일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루즈벨트는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해리 화이트 등을 통해 코민테른의 공작을 받아 전투기 100대로 구성된 '플라잉 타이거스'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 싸우는 장제스를 뒤에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보다 1개월 반이나 이전부터 미국은 중국대륙에서 일본에 대해 은밀하게 항공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미일전쟁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위장해 일본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루즈벨트가 만든 덫에 걸려 진주만공격을 결행하게 된다. 그런데 미일전쟁은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일본이 미국이 요구하는 '헐 노트'를 받아들였다면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미일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도 당시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미국이 제2, 제3의 요구를 내놓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백인국가의 식민지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나 세탁기, 컴퓨터 등은 내버려두면 언제가는 누군가가 만든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배, 피지배의 관계는 전쟁에 의해서만 해결되어 왔다. 강자가 스스로 양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싸우지 않는 자는 지배당하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다.
그런데 대동아전쟁 후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가 백인국가의 지배에서 해방되게 되었다. 인종평등의 세계가 도래해 국가간의 문제도 논의에 의해 해결되게 되었다. 그것은 러일전쟁, 그리고 대동아전쟁에서 싸운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다. 만일 일본이 그 때 대동아전쟁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종평등의 세상이 찾아오는 것은 백년, 2백 년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 싸운 조상, 그리고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영령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그 덕분에 우리들은 평화롭고 풍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대동아전쟁을 '우둔한 전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전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오늘날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는 모두 바보였다고 말한다.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벌여 많은 일본국민의 목숨을 빼앗았다. 죽은 사람은 모두 개죽음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한번 결정된 국제관계를 뒤엎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미국은 일본의 수도권에도 버젓이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일본이 되돌려달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리 간단하게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북방 네 섬이 60년 이상 불법으로 점거당한 상태다 '독도'도 한국의 실효 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도쿄 재판은 지난 전쟁의 책임을 모두 일본에게 물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컨트롤은 전후 6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본인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일본군은 강해지면 반드시 폭도가 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위대는 가능한 한 움직이기 힘들게 해두자는 것이다. 자위대는 영역의 경비도 할 수 없고 집단적 자위권도 행사할 수 없고, 무기의 사용에도 매우 제약이 많다. 또한 공격적 무기의 보유도 금지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군대와 비교하면 자위대는 규칙에 꽁꽁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마인드컨트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일본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는 체제는 완성되지 않는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다면 일본의 미국화가 가속화한다. 일본의 경제도, 금융도, 상관행도, 고용도, 사법도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간다.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이어져 일본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간다.
일본에서는 지금 문화대혁명이 진행인 것은 아닌가. 일본국민은 20년 전과 지금 중 어느 쪽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은 좋은 나라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일동맹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양호한 미일관계가 필수적이다. 단, 미일관계는 필요한 때 서로 돕는 양호한 부자 관계와 같은 상태가 바람직하다.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에 기대고 있는 듯한 관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침략을 미연에 억제함과 아울러 외교교섭에서 힘이 된다. 외국에서는 매우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러한 것이 일본에서는 국민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대동아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이 아시아 나라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아시아 나라들이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태국과 미얀마·인도·싱가포르·인도네시아에서도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본에 대한 평가는 높다. 그리고 일본군에 직접 접했던 많은 사람들은 일본군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일본군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퍼드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본군의 군기가 다른 나라에 비교해 매우 엄정했다는 것은 많은 외국인이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 침략국가였다는 것 등은 무고한 누명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랜 역사와 우수한 전통을 지닌 멋진 나라이다. 우리들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특별한 사상을 주입받지 않는 한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자연히 사랑한다. 일본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가 실시해온 것이 대단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거짓과 날조는 전혀 필요없다. 개별적인 일에 주목하면 나쁜 짓이라는 할 만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선진국에서도 폭행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자. 우리들은 빛나는 일본의 역사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말살당한 국가는 쇠퇴의 길을 걸을 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다모가미 도시오' 일본 항공자위대 막료장이 지난 11월 일본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논문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 정년 퇴직 형식으로 사퇴했다. 항공자위대 막료장은 공군 대장으로 한국으로 치면 공군 참모총장이다.
논문의 논리가 골 때린다.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의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 이를 미국의 일본침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양국 사이에 합의된 조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주둔한 것도 조약에 근거했다. 일본은 상대국의 양해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병한 적은 없다."
"장제스는 코민테른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이런 장제스는 끊임없이 일본군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1937년 8월15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국군의 포악함을 응징함으로써 난징(南京)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장제스에 의해 중일전쟁에 말려들어간 피해자다."
"1928년의 장쩌린(張作霖 - 만주의 군벌) 열차폭파사건,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이다."(이들 사건은 각각 일본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의 계기가 됐던 사건임- 편집자 주)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타이완을 모두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개발하려고 했다. 당시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 가운데 식민지의 내지화를 꾀하려고 한 나라는 일본 뿐이다.(이하 일본 식민통치기간 만주, 한반도, 타이완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했는지 자세하게 서술...한국 뉴라이트들의 논리도 똑같다)"
"이 은 전하(영친왕)의 비(妃)가 된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는 쇼와(昭和) 천왕의 비(妃) 후보였던 고귀한 분이다. 만일 일본정부가 이 왕조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면 이런 고귀한 분을 이 은 전하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야마토·조선·한(한족, 즉 중국인)·만주·몽골의 각 민족이 서로 섞여 사이좋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내부에는 300명의 코민테른 스파이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루즈벨트가 만든 덫에 걸려 진주만공격을 결행하게 된다." (다모가미 도시오는 일본의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획책한 음모에 말려들어가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식이다.)
"대동아전쟁 후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가 백인국가의 지배에서 해방됐다. 이는 러일전쟁, 그리고 대동아전쟁에서 싸운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다. 만일 일본이 그 때 대동아전쟁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종평등의 세상이 찾아오는 것은 백년, 2백 년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2차 대전 뒤 피식민지 국가의 해방은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에 의해 이뤄졌는데...이런 생각을 하다니)
"태국과 미얀마·인도·싱가포르·인도네시아에서도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본에 대한 평가는 높다. 그리고 일본군을 직접 접했던 사람들은 일본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퍼드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이 침략국가였다는 것 등은 무고한 누명이다. " (왜 한국과 중국은 빼냐?. 한국과 중국이야말로 일본군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어본 사람들인데)
논문을 다 읽고나서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차라리 일본 우익이 부럽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본 우익은 지들이 남을 팬 것이니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소리라도 하지, 일본 식민통치 당하면서 두들겨맞았던 한국인데 한국 뉴라이트들은 남한테 당한 식민통치가 행복했다고 하니....원래 보수는 민족주의자고 진보는 계급주의자인데...한국 진보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까지 동시에 해결해야하니 힘이 너무나 많이 든다.
다음은 논문 전문
일본은 침략국가였던가
다모가미 도시오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의해 미국의 군대가 일본 국내에 주둔하고 있다. 이것을 미국의 일본침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양국 사이에 합의된 조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들 나라에 일본군이 주둔한 것도 조약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의외로 알려져있지 않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군대를 진주시킬 때 상대국의 양해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병한 적은 없다.
현재의 중국정부가 '일본의 침략'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지만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 의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중국대륙에 대한 권익을 얻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조약 등에 근거해 군대를 배치했던 것이다. 이에대해 압력을 가해 무리하게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조약 그 자체가 무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다소의 압력을 수반하지 않는 조약 등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일본군에 대해 장세스 국민당은 빈번히 테러행위를 반복했다. 일본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폭행과 참살사건도 빈번히 발생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미군의 요코다 기지와 요코스카 기지 등에 자위대가 공격을 가해 미군 및 그 가족 등을 폭행, 참살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자제하며 평화를 추구했지만 그 때마다 장제스에게 배반당했다.
사실 장제스는 코민테른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1936년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해 코민테른의 앞잡이인 마오쩌둥 공산당의 게릴라가 국민당 내에 들어가 있었다. 코민테른의 목적은 일본군과 국민당을 싸우게 해서 양자를 지치게 하고, 최종적으로 마오쩌둥 공산당에게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국민당의 거듭되는 도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1937년 8월15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국군의 포악함을 응징함으로써 난징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장제스에 의해 중일전쟁에 말려들어간 피해자인 것이다.
1928년의 장쩌린(張作霖 - 만주의 군벌) 열차폭파사건도 관동군이 저지른 일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져왔으나 최근에는 소련 정보기관의 자료가 발굴되어 적어도 일본군이 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마오(아무도 몰랐던 마오쩌둥)>(윤 치안, 講談社), <黃文雄의 대동아전쟁긍정론>(黃文雄, 왓쿠출판) 및 <일본이여 '歷史力'을 닦아라>(문예춘추) 등에 의하면 최근에는 코민테른이 저지른 일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해지고 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 관해서도 지금까지 일본의 중국침략의 증거처럼 말해져왔다. 그러나 도쿄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때 중국공산당의 류사오치(劉少奇)가 서방측 기자와의 회견에서 "루거우차오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중국공산당원이며 현지 지휘관은 바로 나였다"라고 증언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대동아해방전쟁> 岩間弘, 岩間書店).
만일 일본이 침략국가였다고 한다면 당시에 열강이라고 불리던 나라 가운데 침략국가가 아니었던 나라는 어디였는지 묻고 싶다. 다른 나라가 했기 대문에 일본이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만 침략국가라고 불릴 까닭도 없다.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타이완을 모두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개발하려고 했다. 당시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 가운데 식민지의 내지화를 꾀하려고 한 나라는 일본 뿐이다. 일본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매우 온건한 식민통치를 실시했다. 만주제국은 성립 당초인 1932년 1월에는 인구가 3천만 명이었는데 매년 100만 명 이상 증가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만주의 인구가 왜 폭발적으로 늘었을까. 그것은 만주가 풍요롭고 치안이 좋았기 때문이다. 침략이라 불리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다.
농업 이외에는 거의 산업이 없었던 만주 황야는 불과 15년 사이에 일본정부에 의해 활기찬 공업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한반도도 일본이 통치하던 35년간 1300만 명이었던 인구가 2500만 명으로 두배가량 증가했다. (<조선총독부통계연감>). 일본통치하의 조선도 풍요롭고 치안이 좋았다는 증거이다. 전후 일본에서는 만주나 한반도의 평화로운 삶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노력에 의해 현지 사람들은 그 이전의 압정에서 해방되고 또 생활수준도 훨씬 향상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만주나 한반도, 타이완에 학교를 많이 세워 현지인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도로, 발전소, 수도 등 생활 인프라도 많이 건설했다. 또한 1924년에는 조선에 경성제국대학, 1928년에는 타이완에 타이페이 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일본정부는 메이지유신 이후 9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했는데 경성제국대학은 6번째, 타이페이제국대학은 7번째로 세워졌다. 그 뒤 8번째가 1931년의 오사카 제국대학, 9번째가 1939년의 나고야 제국대학의 순이다. 일본정부는 오사카나 나고야보다도 먼저 조선과 타이완에 제국대학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일본정부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인정했다.
전후 마닐라의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견을 받은 조선 출신의 홍사익이라는 육군중장이 있다. 이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26기생으로 이오지마에서 용맹을 떨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과 동기생이다. 조선 이름을 사용한 채 제국육군의 중장으로까지 승진한 사람이다. 또한 1기 뒤 후배에는 김석원 대좌가 있다. 중일전쟁 때 중국에서 대대장을 맡았다. 일본병사 약 천 명을 이끌고 수백년 동안 계속 괴롭혀온 전 종주국 중국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 공훈이 뛰어나 천황폐하의 금사(金賜) 훈장을 받았다. 물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장제스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니이가타의 디카다의 연대에 부속해 교육을 받았다. 1기 후배로 장세스의 참모였던 샤잉치도 있다.
이왕조(李王朝) 최후의 전하인 이 은(영친왕) 전하도 육군사관학교의 29기 졸업생이다. 이 은 전하는 일본에 대한 인질과 같은 형태로 열 살 때 일본에 오시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전하를 왕족으로서 정중히 대우하여, 전하는 각슈인(學習院)에서 공부한 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셨다. 육군에서는 육군중장까지 승진해 활약하셨다. 이러한 이 은 전하의 비(妃)가 되신 분이 일본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 비 전하다. 이 분은 쇼와(昭和) 천왕의 비(妃) 후보였던 고귀한 분이다.
만일 일본정부가 이 왕조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면 이런 고귀한 분을 이 은 전하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궁내성은 이 두 분을 위해 1930년 새 집을 건축했다. 현재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이다. 또한 청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제국 황제였던 푸이 전하의 동생인 푸제 전하에게 시집간 분은 일본 화족인 사가 가문의 사가히로 비(妃) 전하다.
이것은 당시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들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만주나 조선, 타이완에 대한 일본의 마음가짐은 열강의 식민통치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지만 인도인을 위해 교육을 베푼 적은 없었다. 인도인을 영국의 사관학교에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물론 영국 왕실로부터 인도에 시집을 보내는 것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야마토·조선·한(한족, 즉 중국인)·만주·몽골의 각 민족이 서로 섞여 사이좋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인종차별 철폐를 조약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을 때 영국이나 미국은 일소(日笑)에 붙였다. 현재의 세계를 보면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대로 세계가 바뀌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국(淸國)은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의 사후처리를 요구받아 1901년 일본을 포함한 11개 나라와 의화단 최종협정서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청국에 주병권(駐兵權)을 획득하여 당초 2600명의 병사를 두었다. (<盧溝橋 사건의 연구> 秦郁彦, 도쿄대학출판회). 또한 1915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와 4개월에 걸친 교섭결과, 중국의 논리도 받아들여 이른바 대 중국 21개조 요구에 대해 합의했다. 이것을 일본의 중국침략의 시작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요구는 열강의 식민지지배가 일반적인 당시의 국제상식에 비추어 보아 그렇게 이상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도 한 때는 완전히 승낙하고 비준했다. 그러나 4년 뒤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인정받은 중국이 미국의 후원을 받아 대 중국 21개조 요구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데도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일본의 논리를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본 일본인 昭和編> 渡部昇一, 祥傳社). 또한 일본은 장제스 국민당과의 사이에 합의를 받지 않고 군대를 진주한 적은 없다. 항상 중국 측의 승인 아래 군대를 진주시켰다. 1901년부터 배치된 베이징의 일본군은 36년 뒤인 루거우차오 사건 때조차 56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盧溝橋 사건의 연구> 秦郁彦, 도쿄대학출판회).
이 때 베이징 부근에는 수십 만 명의 국민당군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형태상 침략과는 거리가 멀다. 시데하라 기쥬로 외무대신으로 상징되는 대중 융화외교야말로 일본의 기본방침이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마침내 미일전쟁에 돌입해 3백만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내고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에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에 의해 치밀하게 만들어진 덫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사실 미국도 코민테른에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
베노나 파일이라는 미국의 공식문서가 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방대한 문서인데 월간 세이론(正論) 2006년 5월호에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대학의 후쿠이 조교수(당시)가 내용을 요점만 추려 소개해 주었다. 베노나 파일이란 코민테른과 미국에 있었던 에이전트 사이의 교신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은 1940년부터 1948년까지의 약 8년 동안 이것을 모니터했다. 당시 소련은 1회에 한해 사용하는 암호문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미일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부터 해독작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무려 37년이나 걸려 레이건정권이 등장하기 직전인 1980년에 이르러 해독작업을 마쳤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의 절정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기밀로 분류했다. 그 뒤 냉전이 끝나고 1995년에 기밀이 해제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1933년에 탄생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내부에는 300명의 코민테른 스파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은 재무부 제2인자인 재무차관 해리 화이트였다. 해리 화이트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인 '헐 노트'를 쓴 장본인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모겐서 재무장관을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움직여 일본을 미일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루즈벨트는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해리 화이트 등을 통해 코민테른의 공작을 받아 전투기 100대로 구성된 '플라잉 타이거스'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 싸우는 장제스를 뒤에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보다 1개월 반이나 이전부터 미국은 중국대륙에서 일본에 대해 은밀하게 항공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미일전쟁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위장해 일본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루즈벨트가 만든 덫에 걸려 진주만공격을 결행하게 된다. 그런데 미일전쟁은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일본이 미국이 요구하는 '헐 노트'를 받아들였다면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미일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도 당시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미국이 제2, 제3의 요구를 내놓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백인국가의 식민지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나 세탁기, 컴퓨터 등은 내버려두면 언제가는 누군가가 만든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배, 피지배의 관계는 전쟁에 의해서만 해결되어 왔다. 강자가 스스로 양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싸우지 않는 자는 지배당하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다.
그런데 대동아전쟁 후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가 백인국가의 지배에서 해방되게 되었다. 인종평등의 세계가 도래해 국가간의 문제도 논의에 의해 해결되게 되었다. 그것은 러일전쟁, 그리고 대동아전쟁에서 싸운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다. 만일 일본이 그 때 대동아전쟁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종평등의 세상이 찾아오는 것은 백년, 2백 년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 싸운 조상, 그리고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영령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그 덕분에 우리들은 평화롭고 풍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대동아전쟁을 '우둔한 전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전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오늘날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는 모두 바보였다고 말한다.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벌여 많은 일본국민의 목숨을 빼앗았다. 죽은 사람은 모두 개죽음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한번 결정된 국제관계를 뒤엎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미국은 일본의 수도권에도 버젓이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일본이 되돌려달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리 간단하게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북방 네 섬이 60년 이상 불법으로 점거당한 상태다 '독도'도 한국의 실효 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도쿄 재판은 지난 전쟁의 책임을 모두 일본에게 물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컨트롤은 전후 6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본인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일본군은 강해지면 반드시 폭도가 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위대는 가능한 한 움직이기 힘들게 해두자는 것이다. 자위대는 영역의 경비도 할 수 없고 집단적 자위권도 행사할 수 없고, 무기의 사용에도 매우 제약이 많다. 또한 공격적 무기의 보유도 금지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군대와 비교하면 자위대는 규칙에 꽁꽁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마인드컨트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일본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는 체제는 완성되지 않는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다면 일본의 미국화가 가속화한다. 일본의 경제도, 금융도, 상관행도, 고용도, 사법도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간다.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이어져 일본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간다.
일본에서는 지금 문화대혁명이 진행인 것은 아닌가. 일본국민은 20년 전과 지금 중 어느 쪽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은 좋은 나라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일동맹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양호한 미일관계가 필수적이다. 단, 미일관계는 필요한 때 서로 돕는 양호한 부자 관계와 같은 상태가 바람직하다.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에 기대고 있는 듯한 관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침략을 미연에 억제함과 아울러 외교교섭에서 힘이 된다. 외국에서는 매우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러한 것이 일본에서는 국민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대동아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이 아시아 나라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아시아 나라들이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태국과 미얀마·인도·싱가포르·인도네시아에서도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본에 대한 평가는 높다. 그리고 일본군에 직접 접했던 많은 사람들은 일본군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일본군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퍼드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본군의 군기가 다른 나라에 비교해 매우 엄정했다는 것은 많은 외국인이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 침략국가였다는 것 등은 무고한 누명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랜 역사와 우수한 전통을 지닌 멋진 나라이다. 우리들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특별한 사상을 주입받지 않는 한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자연히 사랑한다. 일본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가 실시해온 것이 대단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거짓과 날조는 전혀 필요없다. 개별적인 일에 주목하면 나쁜 짓이라는 할 만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선진국에서도 폭행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자. 우리들은 빛나는 일본의 역사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말살당한 국가는 쇠퇴의 길을 걸을 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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