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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미국화는 올바른 길인가?

이강기 2015. 9. 11. 16:52

아시아의 미국화는 올바른 길인가?

 

 

 

(아래 글은 Foreign Affairs지 98년 5/6월호에 게재된 Donald K. Emmerson
의 Americanizing Asia?를 완역한 것임. 필자 Emmerson은 현재 위스컨신대
학 정치학 교수로 있으며, 1998년 중에 나올 Indonesia Beyond Suharto:
Polity, Economy, Society의 편집자이기도 함)

 

 

 

<> 리더를 뒤따르기로?

 

 

 

기간이 얼마나 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아시아 위기는, 동아시아 경제가 영
원히 번창할 것이라는 통념을 깨뜨린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가 위기로부
터 얻게 될 정치적 교훈은 아직도 의문스럽다. 예컨대 정치적 자유는 경제를 성
공시키는데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또는 경제운영이 정치를 하는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얘기일까? 그리고 불신을 받고 있는 "아
시아적 가치" 라는 명제에 대한 "유교적" 해석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위기는, 태국정부가 바트화를 방어하기 위해 외화준비금을 더 이상 탕진시키는
일을 포기하고 바트화를 달러에 대해 변동환률제로 바꾸던 지난 해 7월 2일에
시작됐다. 그 때까지 "관리되던 환시장"이 갑자기 수습 불가능한 상태가 돼 버
렸다. 바트화의 추락은 주위 지역의 통화와 주가를 폭포처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방콕에서 쿠알라룸푸르, 마닐라, 그리고 자카르타에서 서울과 홍콩까지
휩쓰는 바람에, "아시아의 부흥", "동아시아적 모델" 그리고 마침내는 "태평양의
세기"를 소리높여 부르짓던 해설자들은 이러한 미사여구들을 그들의 스크린이나
디스켓으로부터 편집할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하게 됐다.

 

약간의 경고들이 좀 일찍 나오긴 했었다. 세계은행은 7월 이전에 태국에서의 동
향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리고 MIT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만 교수 같은 일부 회
의론자들은, 동 아시아의 위험천만한 경제적 보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제 분석가들은 낙관적이었고 재고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나서 보니까 아시아의 1997년 대부분은 annus horr
iblilis였음이 분명하다. 그 위기는 올 해 초 몇몇 나라들, 특히 태국과 한국에
서 감소됐으나, 동남아에서 가장 큰 경제권인 인도네시아를 악화시켰다. 오늘날
대부분의 관측자들은 이번 위기와 그 후유증이, 만약 더 이상 끌 요인이 생기지
않는다면, 1999년까지는 아무튼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97년에 다섯 곳의 동아시아 증권시장 -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및 태국 - 이 달러가치로 쳐서 총 주식 시가총액의 5분의 3 이상을 잃어버렸다.
인도네시아의 계속된 한발과 삼림화재로 인한 경제적, 환경적 그리고 건강상의
문제들이 동남아 연근해에 쇼크를 더하게 했다. 한편 일본경제는 2차 대전 후
이 나라의 성장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7년 연속 정체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재정적으로 뇌출혈을 일으키고 있는 국유기업들이 중세왕조시대의 안
정을 계속 위협받고 있다.

 

동아시아 위기의 가지들이 이 지역 밖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지들은
언론들이 "아시아 열병에 걸릴 다음 국가는 어느 나라가 될까?" 하고 묻고 있는
속도를 뛰어넘고 있다. 미국에선 동아시아에 대한 낙관주의의 파열이, 냉전 종식
후 세계의 힘의 역동성의 위치에 관해 가장 폭넓게 토의하던 양파 사이의 균형을
깨뜨린 것처럼 보인다. 토론의 양쪽 당사자들을 힘의 확산파(Divergence)와 집중
파(Convergence)로 구분할 수 있겠는데, 확산파 쪽은 외국인들이 정치, 경제 및
문화에서 비 미국적인 모델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우월성에 도전하고 있다는 견해
를 나타내고 있고, 한편 집중파 쪽은, 외국인들이 미국의 우월성을 모방함으로써
미국의 패권에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97년의 동 아시아 사건은 확산파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적어도 부전패로 집중파의 주장을 강화시켜준 것으로 나타났
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최소한 확산파들의 3가지 논리를 약화시켰다. 첫째 그것은 아
마도 동아시아와 일본의, 대기업 - 일본의  케이레츄, 한국의 재벌, 인도네시아
의 konglomerat - 들이 협동하여 이룩한 특수한 경제성장 모델과 교활한 정부
관리들에 대한 신뢰성을 유린했다. 아시아시장의 붕괴는, 동아시아 "개발국가"
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정실자본주의의 폐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둘째, 아시아
위기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문명의 충돌" 기회를 감소시켰다. 성장률이 줄어들
고 달러계산으로서의 손실이 커지자 국가의 재원이 고갈되었고, 중화세계(필자는
일본, 한국, 동남아등도 모두 중화세계로 본 것 같다 - 편집자) 지도자들의, 서
구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손상시켰다.

 

셋째, 이번 위기는 냉전종식후 형성된 3개지역 블록의 삼각 다리중 아시아쪽 다
리에 손상을 줬다. 이들 세 블록은 각각 후배지와 허브를 갖고 있는데, 동아시
아는 동경으로부터 부채꼴로 펴져 있는 상태이고, 미국은 워싱턴에 집중돼 있고,
유럽은 브랏셀의 지휘를 받고 있다. "세 머리의 박치기 싸움"은 아시아의 머리가
위력을 잃어버리자 싱거운 판이 돼 버렸다.

 

아시아위기가 집중파의 지지자들을 고무시켰음은 필연적이다. 미국 관측자들은
특히 1989년 베르린 장벽의 붕괴가 미국정치모델의 지혜 - 자유 민주주의 - 의
정당성을 입증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는데, 같은 논리로 1997년 아시아시장 붕
괴는, 미국 경쟁모델의 지혜 - 자유시장 자본주의 - 의 정당성을 입증했다고 믿
을 것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일으키던 동 아시아의 실패는 소위 말하는 아시아
적 가치의 허약성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고, 이에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속성이 있는 문화적 자존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가
그 빛을 잃음으로서 미국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자국가들의 장점과 힘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덕목만 남았다는 것일까?

 

이번 아시아 위기로 인해 아시아가 미국식 방식 - 미국인들은 지금 "우리들은 세
계: We are the world" 라는 노래를 가슴뿌듯하게 부를 수 있게 됐다. -을 택하
리라고 에견하는 것은 아직은 주제넘는 짓이다.

 

첫째 동아시아의 다양성 -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다양성 - 은 이번
위기가 나라마다 각각 다른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입은 충격과 그에 필요한 대처 방법도 각각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
국식 자본주의가 해결방법이 결코 될 수 없다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 경우도 있다. 물론 말레이시아에선 그것이 화근이
었다. 미국 투자가인 죠지 소로스 같은 주식중개자와 헤지펀드 매니저들에게
이번 위기의 책임을 돌리며 비난을 퍼붓고 있는 마하티르 총리는 자본거래에
대한 지구적인 컨트롤 제도를 설립하자고 제의함으로써 워싱턴을 간담을 서늘
하게 했다.

 

둘째, 억지로 하는 것과 즐겨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비록 정책입안자
들이 마가렛 대쳐 전 영국총리의 자유시장에 관한 유명한 말 "다른 대안이 없
다.(There is no alternative 혹은 줄여서 Tina)"라는 경험주의적 정당성에 동
의할 수 있었다 하더래도, 그것이, 정말로 대안이 없다는데 대해 컨센서스를 끌
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Tina가 불가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
녀를 즐겁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이 분명히 있고, 또
적어도 일부 아시아 사람들은 Tina를 배제할 수 있는 그 무엇 - 통제되지 않는
시장과 그들에게 닥쳐온 취약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어떤 대안 - 이 있나하고 계
속 궁리할 것이다.

 

셋째, 미국 모델은 하나로 뭉치기가 힘들고, 어떻게 아시아 위기를 해결할 수 있
나 하는 문제가 미국시람들 자체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지의 한 페이지에서 한 전문가는 세율을 더 높이고 지출을 더 억제
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다른 전문가는 그 반대의견을 보이고 있었다. 결코 0제 3
자가 아무것도 결정적인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논쟁은, 위기
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IMF의 활동을 두고도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 재무부 부차관보인 로렌스 서머즈는 IMF의 처방이 아시아위기를
해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하바드대학 경제
학자인 제퍼리 삭스교수는 IMF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고, 한편
전 미국국무장관이던 죠지 슐츠는 IMF의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중 누가 과
연 진실한 미국모델을 대변하는 것일까?

 

넷째, 아시아위기에 대처하는 IMF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이론과 실제  - 자유시
장 이데올로기와 가능한 위기교정법 -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자아냈다. IMF의 주
주들은 기업들이 아니라 국가들이다. 그러나 위기 그 자체는 국가채무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은행들과 기업들이 저지른 민간채무 때문에 발생
한 것이다. IMF 간섭에 대한 정부대 정부의 성격은 상황의 심각성을 더해 줬다.
그리고 IMF 자체의 비밀스런 회합과 합의의 불투명성은, IMF가 위기국들에게 모든
재정.경리부문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다섯째, 태국에 대한 97년 8월의 IMF 팩키지에 워싱턴의 결정이 직접 기여하지 못
함으로써 동남아를 고통에 빠뜨렷다. 미국이 IMF를 장기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
문에 간접적으로 아시아위기 해소를 위해 헌신했다는 워싱턴의 주장을 수긍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식견있는 사람들은, 미국의회가 아시아위
기를 회복시키는 문제에 대해 적의를 보이거나 무관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들은 신속하게 의회를 설득하여 IMF에 추가금융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클린
턴 행정부의 무능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무능은, IMF가 제시하는 조건이 특히
미국모델에 경사돼 있으며, 미국 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미국의 보상을 받게 된다
고 믿고 있는 그들의 바램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만약 아시아인들이 미국모델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자유로운
시장과 더 자유로운 정책이 초기에 위기를 예방할 수 있거나, 적어도 그 영향을
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믿도록 미국으로부터 큰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 세개의 성공과 하나의 실패

 

 

 

미국화를 강요하는 외에, 동아시아의 경제질병에 대한 치료로서 정치적 자유라는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처방은 세 개의 성공과 하나의 실패를 가져왔다.
즉 대만의 (경제위기에 대한) 저항, 태국과 한국의 회복, 그리고 인도네시의 붕
괴가 바로 그것이다. 대만은 아시아 주요 경제국들 가운데서도 통화하락이 가장
적었던 나라다. 달러표시로 대만의 주가는 97년에 단지 5% 하락했으며, 98년 들
어서는 3월 17일을 지나면서 10%가 올랐다. 이 정도의 오르내림은 이 시장을 옛
날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일한 두 시기에 태국 증권시장은
76%나 곤두박질을 쳤다가 다시 73% 올랐다. 그러한 거친 오르내림은 하루에 최악
에서 최고로 33번이 계속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
지는 보도하고 있다. 서울의 변덕스러운 증권시장도 그 오르내림이 험준하기 짝
이 없었는데, 97년말의 69% 하락에서 98년 초에는 58%가 올랐다.

 

모두다 전에 독재주의국가이던 대만, 태국 및 한국은 비록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그러지 못
했다. 아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던 1966년 이래의 권위주의 정권일 뿐 아니라
3월에 76세의 독재자 수하르토는 이미 피델 카스트로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정부
수반으로 남은 기록을 세웠으며, 그의 나라가 아시아위기 탈출 경주에서 맨 꽁
지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스스로 앉
았다. 추적해 본 33개 주식시장 가운데 자카르타시장보다 더 나쁜 곳은 아무데
도 없었다. 국내외 투자자들을 막론하고 97년과 98년 초에 죄다 팔아치우고 도
망을 가려고 했으며, 증권의 가치가 달러벨류로 64%나 날라가버렸다.

 

이러한 일들은 정치적 자유와 규률이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아주 인상적인 것은 태국과 한국이 국가 리더십문제와 정권
교체를 거뜬히 해낸 점이다. 태국에선 정치적 자유가 없는 가운데 차발리트 용
차유드 총리가 이끄는 무능한 연립내각이 신임을 얻지 모했다. 그 대신 태국은
경제위기를 예방하지 못하고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든 책임을 챠발리트총리에게
물을 수 있었다. 11월에 챠발리트는 사임하고 츄안 릭파이 총리가 들어섰다. 츄
안의 인기는 그로 하여금 필요한 개혁을 할 수 있는 전문 테크노크라트들을 핵
심 장관직에 앉힐 수 있게 해 줬다. 경제에 대한 신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달 후 한국도 역시 리더를 바꿨다.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은 태국의 챠발리트
처럼 경제를 비틀거리게 한 리더로서 비난을 받았으며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졌
다.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씨가 당선되었고, 그에게 개혁을 위한 위임권이 주어
졌다. 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정부와, 경제를 수선할 정부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싹텄다.

 

태국은 임기도중에 총리를 바꿨을 뿐 아니라 헌법까지 개정했다. 새 헌법 아래
서는 아무도 국회의원과 장관직을 겸임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러한 변화는 적
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태국 정치가들은 전에 엄청난 돈을 주고 표를 사
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연립정부를 구성, 내각에 자리를 차지했으며, 다음
의 선거를 위해 선거구민들에게 책상 밑으로 푸짐하게 선심을 쓰곤 했다. 약
200억 바트, 거의 8억 달러가 96년 11월 총선에서 탕진됐다. 그와 같은 재정
과 정치의 야합은 태국경제를 약화시켰으며 다음 해(97년)의 파멸로 몰고 갔
다. 장관이 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직을 포기케 함으로써 새 헌법은 정치에서
돈을 분리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재난을 극복할 경제적 능력을 강화시켜준다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미국의 정치적 모델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서
울과 방콕의, 민주적이지만 분열된 정부들은 97년의 위기를 예방하든가 억제하
는데 실패했다.

 

두 나라 각각 파당싸움과 교착상태가 개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김
대통령과 츄안 총리가 각각 국내정치에서의 밀월시대가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
는 일이다. 여늬 때처럼, 정치가, 그들의 경제를 개혁하기 위한 단합된 국가적
노력의 기회를 무산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김대중대통령 정부의 한국이 "고비
를 넘기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국
회에서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 그가 지명한 총리의 인준조차 받지 못
하고 있는 그는 국민들의 컨센서스를 이끌어내는 것이 시급하다.

 

 

 

<> 꼭 민주주의를 첨가해야?

 

 

 

김대중대통령은 아시아위기를 권위주의 통치 탓이라며 정면으로 권위주의를 비
난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경제)실패의 주된 원
인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해 왔다. 이 주
장을 직접 증명할만한 데이터는 없지만, 그러나 민주주의가 9개 동아시아 국가
들의 경제회복과 관계가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1997-98년의 그들의 주식시
장이, 널리 알려진 추산에 의하면, 1996년에 그들의 국민들이 누렸던 정치적
자유 만큼의 수준으로 폭락했다는 것을 감안 하건데 그렇다는 말이다.

 

이들 9개 동 아시아 경제국 가운데, 모든 나라의 정치적 자유가 항상 경제적 탄
력성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가 더 많은 쪽일수록 경제적 탄력
성도 더 큰 것임에는 틀림없다. 예외가 되는 나라가 한국, 태국 및 필리핀일 것
이다. 이들 나라들은 그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가 덜 발전되고 있으
며 따라서 앞으로 기대를 갖게 한다. 또한 싱가폴과 말레이시아는 다같이 낮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싱가폴이 말레이시아 보다 경제가 두배나
번창하다. 그럼에도 분명히 패턴은 있다. 다른 모든 조건들이 동일하다면, 이번
위기를 가장 잘 이겨내는 나라는 정치적 자유를 더 가진 나라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위는 아직 마법의 탄환은 아니다. 아래 표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다른
가설과 양립할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가들은 아래 표에 있는 5개 경제
국들 -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폴및 한국 - 은 또한 역사적으로 그리고 인구통
계학적으로, 즉 전통과 이민으로 중국에 대부분 빚을 진 나라들이라는 것을 알
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번 위기로 인해 아시아적 가치가 경제적 성공을
가져왔다는 믿음에 손상을 줬다고는 하더래도 97-98년의 쇼크로부터 회복하는
경쟁에서는 동일한 교의의 유교적 해석이 되살아날 것이다.

 

 

 

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탄력성과의 상관관계
--------------------------------------------

 

국가명              정치적 자유(1966)         경제적 탄력성(1997-98)
--------------------------------------------------------------------
일본                   1.5                       -10.5
대만                   2.0                       -12.4
한국                   2.0                       -47.0
홍콩                   3.0                       -19.0

 

동남아
-----

 

필리핀                 2.5                       -52.7
태국                   3.0                       -49.1
싱가폴                 4.5                       -32.5
말레이시아             4.5                       -64.7
인도네시아             6.0                       -78.3
---------------------------------------------------
주: 정치적 자유는 1에서 6까지 범위를 두었다. 낮은 숫자일수록 자유가 더 많
은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탄력성은 97년 3월 - 98년 사이의 해당국가 증권시
장 가치의 퍼센티지 변화이다. 숫자가 높을수록 탄력성이 더 강한 것이다.

 

자료원: Freedom Review, 28:1(January-February 1997), p. 26; Bryan T.
Johnson, Kim R. Holmes, and Melanie Kirkpatrick, 1998 Index of Economic
Freedom(Washington D.C. and New York:The Heritage Foundation/The Wall
Street Journal, 1998):"Dow Jones  Global Indexes, "The Wall Street
Journal, March 18, 1998, p. C14.

 

 

 

또한 한국을 제외하고 동북아시아 경제국들은 동남아 국가들보다 경제상태가
더 좋다. 그것은, 거리와도 상관이 있는 것 같다. 위기가 태국에서부터 시작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정한 부의 효과 때문에 어떤 나라의 시장
에 대한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예도 있었다. 96년에 경제적 탄력성이 가장
강한 나라들로 밝혀진 일본, 대만, 홍콩은 상기 리스트상에 있는 어느 다른
나라들 보다도 외환 보유고가 더 높았던 것이다. 더욱이 모든 동북아시아 사
람들은 싱가폴을 제외한 어떤 동남아 국가들 보다 평균적으로 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어떤 경우든 민주주의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한국과 싱가폴을 비교해 보면, 아시아 모든 나라에서의 경제적 퇴보의
주 원인이 민주주의의 결핍이라는 김대통령의 철저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97-98년에 한국의 주식가치는 달러계산으로 싱가폴 보다 훨
씬 줄어들었다. 싱가폴의 정치적 자유가 한국보다 크게 뒤쳐져 있는데도 말
이다.

 

싱가폴의 이광요 전 총리는, 아시아 위기에 대한 한 논평에서, 위기를 당하
느냐 않느냐의 차이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얼마나 허용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
이 아니라 경제를 얼마나 잘 운용해 왔느냐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싱
가폴 사람들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챔피언이 아니라면서,  "그러나 우리들
은 우리들의 사업을 운용하는데는 아주 까다로우며, 특히 금융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아주 공명정대하다." 라고 주장했다. 이광요씨는 또한 "아시아적
가치"가 모두 건설적인 것은 아니라는점을 잘 알고 있었다. "유교주의의 약
점의 하나"는 족벌주의라고 그는 말했다. 이번 위기에 미쳐 대처할 수 없었
던 나라들은 이러한 족벌주의가 - 그의 표현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독소"
- 만연하고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이광요씨의 관점은 그러한 주장들이 처음 나올 때 보다는
훨씬 호환성이 증가하고 있다. 선거 민주주의는 훌륭한 통치를 법치의 부재
로 타락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서의 훌륭한 통치는 특수한 이
해관계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공무원들과, 순간적으로 흥분하고 변덕을 부리
는 대중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민주주의는, 태국 중앙은행의 존업성과,
97년 7월의 바트화 붕괴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태국 민주주의 심장부의 돈과 정치와의 유착이 그것을 손상시켰던 것이다.

 

미국에선 대통령은 연방준비이사회의 수장을 임명할 수 없다. 대통령들은 연방
준비이사회의 가버너(Governer)들을 임명하는데, 임기 14년의 가버너들이 자기
를 임명한 대통령보다 훨씬 오래 그 자리를 지킨다. 가버너들은 또한 연방준비
이사회의 의장을 선거하는데 이 의장이 그들 가버너들에 대해 책임을 진다. 포
인트는 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비 민주적이다.

 

한 나라의 은행시스텀과 통화를 관장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확보해야 하며 선거
로 뽑힌, 짧은 임기를 가진 정치가들에게 맡기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하며 또
부패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아시아 어느 나라들보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실패는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
다. 1966년 수하르토정권이 시작된 때부터 시장에 바탕을 둔 정책을 선호하는
인도네시아 경제관료들은 경제를 잘 운용했으며, 시기적으로 경제가 성공하여
조심성이 없어지고 무모성이 고개를 들 때 까지는 국수주의자들의 낭비를 막고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자기만족에 빠지고 과
대확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오직 경제적 대 쇼크
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었다. - 1970년대에 국영 석유회사들의 거의 파산에
가까운 실패, 1980년대의 인도네시아 석유수출을 위한 석유가격 인하 및 97-98
년의 경제위기가 바로 그러한 쇼크들인데, 그럴 때 마다 필요한 회복을 위해
테크노크라트들의 영향력이 복원되곤 했다. 그러나 97-98년의 쇼크는, 신용회
복과 성장을 저해하는 족벌주의, 정실주의및 부패를 포함한 장애에 부닥치고
있다. (이제는 권자에서 밀려났지만) 수하르토 대통령과 그의 여섯 자녀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일으킨 문제점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 논문이 수하르토
퇴진 이전에 작성되었음을 참조할 것 - 편집자).

 

수하르토가 3월에 만든 새 내각 조직만 봐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통령인 B. J. Habibie는 연구기술부장관으로 몇 년을 보내면
서 이익이 남지 않는 하이테크 프로젝트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사람이다.
인도네시아의 목재왕으로서 새 통산부장관이 된 사람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목재제품의 거래를 억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회부의 새 장관은 수하르토의
맏딸인데 그녀는 일부에서 그의 아버지 후계자가 된다는 말도 있었다. 한편
그녀의 남자형제들은 자기들의 사업을 개혁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키는데 혈안
이 되고 있었다.

 

수하르토의 친척 및 친구들과의 관계는 왜 그가 대대적인 경제개혁을 요구하
는 IMF의 압력에 직면하여 주저하고 있는 지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그는
한도를 넘는 예산책정을 발표한다든가, 돈이 많이 드는 사회간접자본 프로젝
트를 다시 시작한다든가 하면서 초기에 IMF의 권고를 무시하는 바람에 두 번
째로 더 엄격하게 제시된 IMF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2월까지 도시에
사는 교육 받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수하르토는 개혁으로 경제회
복을 하는데 장애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개혁 없이는 인도네시아는 현 난
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잘 못된 시작?

 

 

 

동아시아 경제는 1997년을 넘기면서 급류속에 휘말려 있다. 리더국들 - 일본,
대만, 홍콩 - 은 뒤떨어진 인도네시아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자유롭다. 그러나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어서 불분명하다.

 

인도네시아가 "메시지를 얻어서" 민주화할지도 분명하지 않다. 과거 인도네시
아에서 간혹 그랬던 것 처럼 일부 비 중국계 인도네시아 사람들, 특히 무슬림
들이 그들의 고통을, 인구수는 적지만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소
수 중국계에게 책임을 돌려왔다. 2월에 중국인 소유의 상점들이 털리고 불탔다.
그러나 무장군인들이 대중들의 공중질서에의 도전을 계속 저지하고 있으며, 중
산층들은 이번 소란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다. 만약 무질서가 진정될 수
있다면, 아마도 현상유지가 가능하게 될 것이며, 수하르토가 건재하게 될 것이
다.(이 논문은 수하르토 몰락 이전에 작성된 것임 - 편집자). 비록 경제는 악
화되고 무질서는 확산되겠지만, 적어도 짧은 기간 내는 민주화보다 억압이 계속
될 것이다.

 

의문표는 민주주의를 잘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을 포함해 다른 나라들에게도 역
시 걸려 있다. 3월에 방콕의 야당 정치인들은 이미 새 정부에 대해 불신임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닐라에선 시장이 국수주의자인 죠셉 에스트라다를 걱정하
고 있다. 그는 5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당선이 유망시되고 있다.(대통령으
로 당선되었음 - 편집자). 김대중 대통령은 기업과 노동단체들로부터의 반 개
혁 압력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권위주의자들이 아니
다. 자카르타의 "친구.가족" 내각과는 대조적으로, 북경정부는 당료로 커 온
사람들 가운데서 개혁에 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비록
자유민주주의가 그들의 소망대로 성장하고는 있지만, 동아시아인들은 값비싸고
분열된, 그리고 쉬이 교착상태에 빠지기 쉬운 워싱턴에 존재하는 그것(자유민주
주의)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98년 동 아시아는,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한가지 희망아래 변화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미국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은 이 지역에 대해 막연
한 소망이 아닌 현실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정체가 드러난 동아시아 기적을,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아시아의 부흥"에 관한 새로운 우화로서 다시 자리매김
하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