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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환위기 전말 - Financial Times

이강기 2015. 9. 11. 16:55

한국 외환위기 전말

 

(Financial Times, 98. 1. 15)
미쉘 깡드쉬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한국을 방문할 수 있음을 알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인들에겐 모든 외국인들이 비슷 비슷하게 보이니까요."
한 한국관리가 그에게 이런 농담을 건네며 안심시켰다. 11월 16일(97), 일요일
저녁 이렇게 국제통화기금총재는 서울에 도착했다.

재정경제원의 중견 간부가 주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관용차 대신 렌트카로 IMF
팀을 에스코트했다. 인터 콘티넨탈 호텔 근방에서 강경식 당시 재정경제원장관
을 만났고 그로부터 한국이 국제 구제금융을 요청해야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
다는 설명을 들었다.

97년 초 여름, 처음으로 아시아 위기가 태국에서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일이 이
렇게 크게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7월에 태국 통화가 폭락한
후에 IMF의 한 고위간부는 다른 나라들이 위기에 처할 위험이 없느냐고 그의 보
좌진에게 물었다. 거기서 언급된 나라들은 평소에 경제안정에 좀 의심이 가는
나라들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중국등이었으며, 그 당시 한국은
그 리스트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해 한국이 같은 배를 타려 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은 세계 11번째의 경제대국이고 OECD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한국이 가진 문
제점들은 이런 것과는 경우가 다른 것으로 보았다."고 그 간부는 말했다.

그 당시에 일반화 돼 있는 한국에 대한 그러한 인식과 판단이 세계가 한국문
제를 다루는데 있어 왜 일찌감치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는 지를 설
명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발단은 1993년 초 김영삼씨가 대통
령에 취임하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기있는 정치가였던 그는 가벼운
경기 불황을 마악 끝내고 성장의 길로 들어서는 시점에 대권을 맡았다.

그래서 그는 다양하게 거대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의 재벌들에게 대담한 투
자를 하도록 부추기는 정책을 폈다. 한국은 94-95년에,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
투자 부움에서 오는 호황을 멋모르고 만끽했다. 한국의 재벌들은 항상 과도한
차입에 의존해 왔는데 그것이 지금은 평균 자본의 4배나 되게 눈덩이처럼 불
어났으며, 그렇게 투자한 시설은 생산과잉을 낳았다.

이러한 과잉시설은 96년에 이 나라 주종수출품목인 컴퓨터 메모리 칩의 가격을
폭락시켰다. 칩 메이커들의 수익이 90%나 떨어졌고, 자동차, 선박, 철강 및 석
유화학제품 메이커들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은 그들이 빌린 장기외채의 원리금을 상환하느라 단기외
채를 마구 끌어들인 결과 단기외채금액이 급속하게 불어났다. 한국의 폐쇄적
인 금융시장 때문에 이자가 싼 외화차입은 특히 재벌들에겐 아주 매력적인 것
이었다.

마침내 기업들의 채무폭탄이 터질 단계에 이르렀다. 첫 폭발은 97년 1월 한보
철강이 60억 달러의 빚을 진채 쓰러지면서 일어났다. 한보는, 한국에서 일반화
돼 있는 정경유착, 이른바 정실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은행들이 정부의
압력을 받고 이 철강 메이커에게 거액의 융자를 해 준 것이다.

한보사태는, 당시 다른 일로 정부의 권위가 실추돼있는 바람에 더욱 악화됐다.
97년 1월초(사실은 96년 연말 - 옮긴이) 대통령이 여당의원들로 하여금 새 노동
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게 한 것이다. 3주간의 노조 항의집회가 벌어졌고, 김
대통령의 권위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한보사태가 이것
의 초기증상이었다. 은행들은 이젠 더 이상 의심가는 기업에 대출을 하려고 하
지 않았다.

한보파산에 얽힌 정치 스캔들로 개각이 되고 자유시장원칙론자인 강경식씨가
김영삼 정부의 제 7대 재경원장관으로 취임했다. 경제개혁을 방해하는 것으로
소문난 부처를 맡은 것이다. 강장관은 그것을 뜯어고치려고 했다. 그가 취임한
지 며칠도 안돼서 삼미철강이 쓰러졌는데 그대로 내버려뒀다.

그 무렵 아시아 위기는 점점 확대되고 있었고, 그것이 야금야금 한국 기업들과
한국 통화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시장원리에 충실한 개혁을 하겠다
는 강장관의 약속은 7월에 이 나라에서 3번째로 큰 자동차 메이커인 기아가 파
산을 막기 위해 은행에 비상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시험기를 맞게 되었다. 또
이 때 한국에서 가장 큰 주류 메이커인 진로가 97년 들어 쓰러지는 3번째 재벌
이 되었다. 국제신용 평가기관들은 문제의 재벌들에게 과잉융자를 해준 한국 은
행들의 평가지수를 낮추기 시작했다.

10월 들어서 기아에 대한 구제금융을 거절한 강장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
지자, 김대통령은 12월의 대통령선거를 걱정하게 되었고, 10월 22일 강장관이
한 발 물러섰다. 은행들이 기아에 대한 추가융자를 거절한 후 강장관은 기아를
국유화(법정관리)시켰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Standard & Poors가 즉각 한국의 채무등급을 내렸다.
일이 꼬일려니까. S&P의 이러한 결정이 우연히도 홍콩달러에 대한 투자자들의
공격으로 홍콩주식이 폭락하는 사태와 맞물려 버렸다.

이러한 두 사건이 한국에서의 외자유출의 도화선이 되었고 한국통화인 원화가
치가 급속하게 떨어져버렸다. 외국은행들이 한국에 대한 단기채무의 借換(roll
over)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11월 초까지 원화가 계속 폭락했고, 3개월 수입금
액을 밑도는 300억 달러의 외화준비고가 2주 이내 절반으로 떨어져 버렸다.

한국정부관리들은 엄격한 대부조건을 내세우는 IMF의 구제금융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에 각각 쌍무차관형식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 재무부는 즉각
그러한 요구가 결실을 보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만약 상업은행들로 하여금 그들의 채무자들과의 약속에 의해 채무연장
을 하는등 한국을 도와주도록 설득한다면 어떻게 될까? 11월 며칠간 미국 관
리들은 자기들끼리 그러한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를 했다. 결론은 미국이나 IMF
의 공식적인 자금이 아니라 민간부문의 자금으로 그 위기에 대처한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디어는 결국 배제되었다. 미국 관리들은 협상뉴스가 한국부
채에 대한 모라토리움으로 해석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모든 긴급 외
환시장에서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IMF에게 맡
겨두는 것이 더 좋다고 결론이 났다.

11월 13일, 화요일 밤, 강장관은 중앙은행총재 및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함
께 이젠 한국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깡드쉬총재
더러 그 주말에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의 회합에서 강장관은 11월 19일 수요일에 IMF의 구제금
융요청사실을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발표는 2가지 개혁계획과 연관시키는 것으
로 하기로 했다. 하나는, 정부의 금융관리를 개선하고 중앙은행에 통화정책에
대한 독립권을 부여하며, 재벌들에게 결합재무재표를 만들도록 하는 새로운 법
률을 재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원화에 대한 거래제한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정책변경에 대한 징후가 다음날인 11월 17일, 한국중앙은행이 외환시장 개입을
포기함에 따라 원화의 대 달러 환률의 정신적인 하한선인 1달러대 1,000원선을
넘기도록 내버려두는 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강장관의 계획이 즉각 뒤틀려
버렸다. 11월 18일, 국회가 금융개혁입법 통과를 거절해 버린 것이다. IMF에 대
한 구제금융신청사실을 발표하기로 돼있는 그 날 아침에 강장관은 해임됐다.

대통령은 IMF와의 협상에 강장관이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통상산업
부장관으로 있던 임창열씨를 재정경제원장관으로 임명했다. 임장관은 전에 재
경원간부로 있을 때 호락 호락하지 않는 협상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80
년대 후반에 IMF에서 근무한 적도 있는데, 이러한 경험이 협상을 한국에 유리
하게 이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1월 19일 오후 임장관은 금융안정정책을 발표했다. 환률의 일일 상.하한폭을
당초의 2.5%에서 (강장관이 제의했던 15% 대신) 10%로 넓히고, 10조원의 정부
자금을 도산상태에 빠진 은행에 융자한다는 것이었는데, 한편 정부는 부실한
금융기관들을 통폐합하기로 약속했다.

이것은 단 한가지 결정적인 예외, 즉 IMF에 구제요청을 하지 않은 것 외에는
전직 강장관의 플랜과 같았다. 임장관이 발표한 금융안정정책에서 IMF 구제금
융건이 빠져있자, 이튿날인 11월 20일, 원화가 10%나 폭락해 버렸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날밤 불야 불야 기자회견을 요청한 임장관은 정식으로
IMF에게 200억 달러의 긴급차관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그 다음주에 IMF 팀이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다시 워싱턴으로 되돌아 가 보면, 11월 27일, 추수감사절 휴일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최소한 행정부 고위관리 3명은 추수감사절 만찬에
참석못하는 바람에 가족들로부터 노골적인 핀잔을 들어야 했다. 재무부와 백
악관및 한국의 관리들이 바로 그날 긴 협상에 들어갔던 것이다.

11월 28일, 금요일 아침 김영삼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협상속도를
가속화하도록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그 때 클린턴은 감사절 휴가로 켐프 데
이비드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기서 그의 보좌진들과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해 논
의하고 있었다. 그들의 결론은 이대로 가면 한국이 12월 첫주에 채무불이행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15분간 이어진 통화에서 미국대통령은 한국이 직면한
긴박한 상황을 대략 설명하고 12월 1일, 월요일까지 IMF와의 협상을 끝내도록
시한을 제시했다. 그는 만약 이 협상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한국이 국제 금융
계로부터 "심한 응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만약 협상이
예정대로 마무리 되면, 미국은 "제 2 방위선"에서 한국에 대한 금융지원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전화 후에 김대통령은 임창열장관에게 월요일까지 IMF와 합의를 도출하도록
지시했다. 지금은 그 금액규모가 배로 불어난 구제금융에 대한 협상은 한국의
외환준비고가 60억 달러 수준까지 떨어진 그 주 말에 허겁지겁 결론이 났고,
11월 30일,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임장관은 합의에 이르렀음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태를 낙관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당시 쿠알라룸푸르에 체류하고 있
던 깡드쉬총재는, 한국이 지불불능상태에 빠진 금융기관들의 폐업을 주저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 협상안의 승인을 거부했다. 그는 중재를 위해 직접 서울로
날아갔다. 김 대통령 예방시 그는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세 후보가
IMF와의 합의사항을 준수하겠다는 서면약속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관리들은 깡드쉬의 그러한 요구를 오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 대통령
은 처음엔 거절하다가 후보자들의 체면을 살려주는 선에서 양보했다. 즉 후보
자들이 후보연설을 통해 합의사항준수를 천명하되, IMF를 상대로 직접 하지 않
고 대통령의 IMF 정책을 뒷받침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형식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깡드쉬는 재정경제원장관과 지불불능상태에 빠진 금융기관들의 처리
문제를 계속 협의했다.

그는 한국 재경원 관리들과 이번 구제금융에 참여하는 선진국 대사들을 초치하
여 오찬을 갖기로 했다. 이 오찬에는 깡드쉬부인이 호스테스역을 맡았다. 전직
간호사출신인 그녀는 한국의 관리들에게 "의료직에 종사하면서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약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환
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국사태를 빗
대어 말했다.

깡드쉬부인의 이러한 언급이 예언으로 증명되었다. 550억 달러의 IMF 구제금융
건이 그 날 저녁에 조인됐고 즉시 실마리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12월 8일, 한국의 한 대표적 신문인 조선일보는, 한국의 단기외채가 당초 생각
했던 것의 거의 2배인 1천억 달러가 넘는다는 IMF의 비밀서류 내용을 폭로했
다. 같은 날 임창렬장관은 상태가 가장 취약한 두 은행, 즉 서울은행과 제일은
행을 파산시키는 대신 정부가 사 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재벌군의 하나인
대우는, 부채투성이의 쌍용자동차를 사들였는데, 채권은행들이 상당부분의 금
융부담을 억지로 떠맡는 조건이었다.

외국은행들은 IMF 개혁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약속을 의심했다. 해외은행
들은 채권의 借換을 거절했고, 투자자들이 서울 증권시장을 썰물처럼 빠져나가
는가 하면 원화가치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IMF에 대한 미국의 일부 비판자들은
한국에 적용한 IMF 조건들이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비판자들은,
경솔하게 돈을 마구 빌려준 서방은행들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구제금융에 앞장
서고 있다고 불평했다.

진보적(center-left)인 야당지도자이며 노련한 정치가인 김대중후보는 IMF 협상
안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감으로 반사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의 당은 12월 3일이
"한국경제 치욕의 날"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는 IMF와의 합의를 "경제주권의 상
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무더기 해고를 피하는 방향으로 IMF 딜을
재협상하겠다고 약속한 김대중후보는 선거전에서 계속 선두자리를 유지해 나갔
다.

외국 투자가들이 김대중후보의 IMF 재협상론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자,
여당소속인 이회창 후보는 "무책임한" 언급 때문에 국가금융위기를 더욱 악화
시키고 있다고 김대중후보를 비난했다. 이에 김후보진영은 전략적 후퇴를 했
다. 12월 12일, 그는 깡드쉬에게 편지를 보내 IMF 협약안을 준수하겠다고 약속
했다.

선거결과는 김대중후보의 박빙의 승리였다. 한편, 그는 조용하게 김기환 경제
담당 순회대사를 미국에 보내 새로운 금융협조 팩키지를 탐색키로 했다.

12월 중순 현재까지 외국은행들은 한국 단기외채 가운데 만기가 도래한 20-30%
만 차환하고 있었다. 하루에 약 10억 달러씩 외화가 국외로 빠져나가자 - IMF
의 1차분 구제금융이 들어왔음에도 - 한국은 12월 말까지 외화준비고가 바닥이
날 판이었다. 김기환대사는 IMF와 미국및 다른 채권국들을 설득하여 구제금융
차기분을 앞당겨 처리토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12월 18일, 그는 IMF 약속이행
을 가속화시키겠다는 "IMF plus"로 알려진 새로운 제안을 갖고 워싱턴에 왔다.

미국 재무부 부장관인 로렌스 서머즈와의 회합에서 김대사는 한국이 이대로 가
가다가는 모라토리움이 불가피하다며, 금융협조를 해 주면 김대중 당선자가 IMF
딜 이행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처음에 미국측은 시큰둥해 했다. 크리스머스 일주일 전 까지만 해도 로버터 루빈
미 재무장관은 아직 한국이 특단의 자금융자를 필요로 할 만한 상태는 아니라
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이 구제금융을 앞당길 생각이 없다고 말했
다.

그러한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월 18일 저녁 그는 앨런 그린스펀 미 준비이
사회의장및 다른 관리들과 백악관 옆 제퍼슨 호텔에서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
에서 참석자들은 한국이 파산선고를 하면 한국에 250억 달러의 돈을 빌려 준 일
본이 금융위기에 빠지고, 한국 은행들이 대규모 투자를 한 다른 도상국시장에
금융환란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렇게 미국이 태도를 바꾸고 한국으로부터 (IMF 딜 준수에 대한) 재보증이 뒤
따랐다. 12월 22일, 미 재무부 데이비드 립튼 재무차관이 김대중 당선자를 만났
는데, 이 자리에서 김 당선자는 실업대책보다 한국의 경쟁력향상이 초미의 과제
가 되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같은 날 한국 국채및 회사채가 미국의 두 평가기관인 무디스
와 스탠더드 & 푸어스에 의해 정크본드 수준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한편 "IMF plus" 최종 세부내역에 대해 재경원 관리들과 협의가 진행되고 있었
는데, 이 가운데는 해외 투자가들에게 금융시장을 빨리 개방한다는 조항도 있었
다. 크리스머스 이브 한밤중에 임장관은 IMF와 8개 채권국들이 한국이 외채 지
불불능상태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100억 달러를 앞당겨 지원하기로 합의
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의 강요섞인 권유로 외국은행들이 한국에 대
한 단기채권의 차환을 결정했다. 최악의 순간을 넘긴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또
앞길에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