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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의 "藝術論"

이강기 2015. 9. 15. 22:25
    春園의 "藝術論"
 
 
잡지명 동광 제17호
호수 제17호
발행년월일 1931-01-01
기사제목 文藝漫話
필자 春園
기사형태 문예평론

예술은 짓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어디서 들은 법하다. 지으랴서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감흥이 격하야 熟하는 끋에 저절로 예술이 되어 나온다는 뜻이다. 아기를 배면 아니 낳지 못하는 모양으로 예술도 낳으랴서 낳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술은 똥이라고 하엿다. 무엇을 먹으면 반드시 똥이 나오는 모양으로 인생을 살면 반드시 예술이 나온다는 말이니 이것이 다 예술이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억지로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물 모양으로 자연히 되는 것이 귀하다는 뜻이다.

그러치마는 예술이란 반드시 이러케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시장에 나오는 예술적 작품은 대다수가 상품되기를 목적하고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요, 지은 시요, 부른 노래다.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안는다 하면-돈이 생길 것을 예상하지 안는다 하면 今日의 예술품의 90페센트는 아니 나오고 말앗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 낳듯이 낳은 예술이 아니라 삭일 하듯이 지은 예술이 대부분이란 말이다. 예술가들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모양으로, 洋靴工이 洋靴를 짓는 모양으로 衣食의 資를 얻으량으로 피곤한 勞役을 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니까 今日의 예술가는 어찌하면 고객의 환심을 살가 하는 것을 가장 主되는 관심사를 삼지 아니할 수가 없다. 요새 日本문단을 風靡하는 「에로」니 「그로」니 하는 것이 다 이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希求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觀念群이요 그로란 好奇癖을 만족시킬 만한 觀念群이다. 나체의 젊은 여자, 接吻, 生殖器古怪, 병적인 것 등등.

朝鮮도 이 日本문단의 영향이 흘러 들어왓다. 日本과 같은 부의 集積과 문화의 爛熟은 없으면서 오직 그 결과인 퇴폐적 사조만은 일본에 합류하랴는 것이 오늘날 朝鮮의 현상이다.〈69〉

동경에 잇든 어떤 이의 말은 맛볼만한 말이다. 가로대, 일본청년은 오직 두 가지 부류로 갈린 듯하다-향락주의자와, 맑스주의자와로. 이른바 모보(모던 보이의 약칭), 모가(모던 걸의 약칭)의 말속한 의속, 얼빠진 듯한 특유한 퇴폐적 표정은 前者를 대표하고 다 떨어진 로시아식 양복저고리에 험상스러운 눈을 굴리는 이는 後者를 대표한다. 銀座通, 神保町通을 내왕하는 청년들을 보면 이 두 가지 부류 중에 어느 것에 속한다. 또 冊肆를 보드라도 에로니 그로니 하는 향락주의적인 冊籍이 아니면 맑스니 레닌이니 하는 사회주의적인 書籍이라고. 그리고 향락주의적인 계급은 아무 야심도 의지도 없이 찰나 찰나의 관능의 쾌락의 甘味를 추구하는 무리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朝鮮은 반드시 이와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倣似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향락주의자가 될 부와 교양과 환경의 문화가 부족하나 일본문학을 통해서 얻은 향락주의의 관념만은 흡수하여서 에로, 그로의 성전의 카페출입을 하는 청년도 멫 십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퇴폐적 기분은 마치 西班牙 감기와 같이 무서운 전염력을 가지고 잇으므로 意志未定하고 또 건전한 지도원리와 지도자를 못 가진 청년 남녀가 날로 이 악마의 희생이 될 자가 늘어갈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朝鮮에는 이러한 향락적 기분을 가진 청년보다는 민족주의적인 아스피레이션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요 그 담에는 맑스주의적 동경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朝鮮의 문학도 이 두 가지 경향으로 평행하야 흐르고 잇다고 볼 것이다.

朝鮮청년은 심히 切追한 현실ㅅ속에 잇기 때문에, 또 주위의 사정이 너무도 민족적 의식(계급적 의식보다도)을 刺激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민족적 의식에서 초월해서 純然한 인도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든지, 또는 純然한 맑스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든지 하기는 極難한 형편이다. 그래서 자연히 朝鮮청년의 思言行이 전부 민족주의적 색채에 물들어 잇게 되엇다. 이것은 차디찬 사실이다.

이러키 때문에 예술도 시대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 하면 朝鮮의 예술은 多分으로 민족적 색채를 아니 띨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 낳는 것 모양으로 저절로 나온다 하드라도 백인이 백인을 낳고 흑인이 흑인을 낳는 모양으로 朝鮮적 민족적이지 아니할 수 없고, 그것이 구두 짓듯이 짓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한 朝鮮人의 요구에 응하자니까 또한 朝鮮的, 민족적이지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예술에 恒等項이 잇는 것을 믿는다. 아니 그 항이 예술의 주체인 것을 믿는다. 민족적이니, 맑스적이니 하는 것은 다만 그 작자의 抱懷한 이데오로기의 개성차의 색채의 차이에 불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을 감상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까진 색채는 무시하더라도 그〈70〉 예술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모 所失이 없을 수가 잇는 것이다. 만일 작자가 의도한 어떤 관념적인 의도(例하야 효도를 장려하리라, 또는 맑스주의적인 어떤 이데에를 고취하리라는 등) 除할 때에 우리를 끄는 아무 실질도 없는 예술품이 잇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일개의 선전 포스터(미술일진댄)나 선전문(문학일진댄)에 불과한 것이지 예술은 아니다.

그러타고 우리는 예술의 공리적 가치-사회학적 가치를 무시하는 자는 아니다. 사회적 가치가 높은 예술이면 심히 감사할 만한 예술이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逼眞, 변화, 통일 등등의 미적 요소를 구비하엿다 하드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보아서 世道人心을 ?害하는 것일진댄 그것은 撲滅하여서 可한 예술이요 그러한 예술을 만든 자는 3대가 아니라 3億?에 손이 없이 태어나도 마땅할 것이다.
世道人心이란 말은 심히 모호한 嫌이 不無하지마는 우리는 世道人心이라고 할 때에 분명히 무엇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만일 과학적인 學語로 고친다 하면 인성의 고급정서(愛, 嘆美, 莊嚴, 연민 등등)에 訴하는 것이면 世道人心에 裨益한다 하고 저급정서(증오, 질투, 淫佚, 貪? 등등)에 訴하는 것이면 세도인심을 ?害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심히 중대한 문제이다. 웨 그런고 하면 이 저급감정을 淘汰하고 고급감정을 激發하고 습관화하야 매양 고급감정이 발하기 쉽게 하는 것이 곳 인류를 향상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니 예술의 인생에 대한 최고 공리적 가치가 여기 잇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으로도, 정치로도, 혁명으로도 할 수 없고 오직 예술만이 (진정한 의미의 종교와 아울러)할 수 잇는 독특한 聖職이다.

이러한 공리적 효과를 가진 예술(예술의 본질적 효과는 재미요 깃븜이요 높아진(숭고)의 정서이다)을 낳거나 지어낼(이러한 경우에는 낳는 것과 지어내는 것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예술가는 높고 큰 도덕적, 진리 탐구적, 심미적, 天?을 가지고 그리고도 刻苦勉勵하야 그야 쇠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크고 오래고 힘든 수양이 잇는 이라야 할 것이다.

「출판업자가 하려면 1일 1 톨스토이를 만든다」는 어떤 日本 문예비평가의 말과 같이 오늘날의 예술이 비록 카페의 여급의 음담과 같이 되엇다 하드라도 진실로 인심을 잡아 흔드는 예술은 오직 종교적 경건에서만 낳아지는 것이라고 믿는다.〈71〉
〈6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