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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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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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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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人生의 香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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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春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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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회고·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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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上海 이일 져일 安東縣奇遇 나는 世界一週無錢旅行을 할
생각으로 4년간 인생의 가장 아름다온 시기를 바친 五山학교을 떠나서 安東縣에를 갓다. 五山학교를 떠날 때에 여러 어린 학생들이 20리, 30리를
따라오며 눈물로써 석별해 준 정경은 내 일생에 가장 닞히지 못할 중대성 잇는 사건이다. 그때 내 낳이 23 胸中에는 勃勃한 雄心과 공상적
방랑성으로 찻엇다. 그때ㅅ 뜯잇다는 사람들은 많이 압록강을 건너 悲歌를 부르며 해외로 방랑의 길을 나섯던 것이다. 申采浩, 尹琦燮같은 이들이 다 그때에 五山을 거쳐서 떠낫다. 나도 그 조류에
휩슬닌 것이라고 하겟지마는 내게는 독특한 나 자신의 이유도 잇엇던 것이다. 安東縣서 한밤을 자고 나니 囊中에 所存이 70몃錢. 이것을
가지고 奉天을 향하고 갈 수 잇는데까지 가가지고는 걸식여행으로 직접, 河南 등지를 지나 南京으로 上海로 杭州로 福建으로 廣東으로 安南으로 印度로
波斯로- 끝없는 방랑을 계속하자는 것이엇다. 바로 客主門을 나서는데 千萬意外에 爲堂 鄭寅普君을 만낫다. 君은 수년전 京城서 一面識이 잇엇을 뿐이오 아직
친하다고 할만한 처지도 아니엇다. 그러나 나도 爲堂의 文名을 欽慕하던 터임으로 반갑게 그의 명주고롬같이 가냘피고 부드러운 손을
잡앗다. 「이거 웬일이요? 그런데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이오?」 하는 것이 그가 내게 하는 인사엿다. 나는 路傍에 선대로 내
의도를 대강 말하엿다. 내 말을 듯던 爲堂은 「그게 말이되나. 이 치운 때에... 대관절 上海로 가시오. 上海에는 可人(당시 洪命熹군의 號)도 잇고 湖岩(文一平君의 號)도 잇어. 나도 집에 나녀서는 곳 도로 上海로 나갈테야」하고 나를 强勸하엿다. 나는 처음에는
멧마디 고집을 부렷으나 마츰내 爲堂의 好意를 밧앗다.
爲堂은 自己路需中에서 중국지폐〈22〉 10원배기 두장을 내게 주엇다.
그러고 그 길로 그는 정차장을 나아가 서울로 향하엿다. 나는 爲堂이 준 中貨 20원을 가지고 上海까지 船票를 14원에 사고 퍼런 淸服 한 벌을 사닙고 岳州라는 英船에 船客이
되엇다. 그때 동행이 三人인데 하나는 벌서 故人이 된 鄭又影군이오 하나는
車寬鎬군이오 또 하나는 閔忠植군이엇다. 이 三人은 서울서부터 동행인 모양이지마는 나허구는
安東縣 주막에서 처음 만난 동행이다. 그래서 船室도 그들 三人이 同室에 들고 나는 혼자 한 방을 차지하엿다. 때는 11월 龍岩浦連山에
하야케 눈이 덮이고 갑판에 어름판이 생길 지경이니 난방장치없는 선실의 치위는 말할 것이 없서서 出帆하기 전날 밤 한밤을 담뇨로 몸을 꽁꽁 싸매고
한 간통도 못되는 船室 안으로 왓다갓다 하기로 새와버렷다.
營口에서 困境 배는 大連을 잠깐 들러서 營口에 왓다. 그런데
岳州號는 무슨 일인지 營口에 머믈어 버리고 우리 일행을 營口市街에 내어 던지엇다. 우리 市中의 어떤 支那여관에 들어서 다음ㅅ 배가 떠나기를
기다리느라고 분명히 기억은 못하나 3,4日을 거긔서 留連하엿다. 이에 걱정이 일어낫다. 그것은 내 路費가 떨어진 것이엇다. 모두 20원에서
船票가 14원 淸服이 아모리 싸도 3원 얼만가 4원은 되엇고 安東縣서 三大浪頭本船까지 오는 쌈판비가 또 不少하엿으니 囊中에는 1원도 餘在가
없엇던 판이다. 上海로 直航만하면 배에서 밥은 얻어 먹으니 걱정이 없으련마는 中路에서 여관에 들게되니 一泊 요금도 내일 힘이 없엇다. 그때에
나는 참으로 죽고 싶엇다. 進退維谷이라니 이런 곤경은 없엇다. 내 곤경의 눈치를 먼저 챈 이가 車寬鎬군이엇다. 君은 營口留宿費는 염려말라고 나를 慰勞하엿다.
그러치마는 上海에 간대야 돈 나올 구멍없는 내가 객지에 난 남의 돈을 얻어 쓴다는 것이 염체없는 일이지마는 迫不得已하니 無可奈*엿다. 나는
車寬鎬군의 호의를 받어서 이 곤경을 면하엿거니와 아직 그 후의를 갑흘
기회를 얻지 못하엿다. 내가 車君에게 빗진 금액으로 말하면 5원미만이겟지마는 그 厚誼를 도저히 1,000원 10,000원으로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鄭又影君도 車君의 도음으로 여행하던 모양이엇다. 上海에 가는 船中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더 부처 말할 것이 잇다. 그것은
내 모자가 넘어 낡앗다 하야 悶忠植군이 미국군대식 모자 하나를 내게 기부한 것이다. 속에는 때묻은 西洋木 바지저고리를 입고 겉에는 펴런 무명
淸服을 입고 이 미국군모를 쓴 내 꼴을 상상하면 지금도 失笑를 不禁한다. 게다가 그 淸服이 염색이 安定이 되지 아니 하여서 손과 목아지에는
얘청물이 묻엇다.
同衾 上海에서는 白爾部路 22號인가 洪命憙 文一平 〈23〉 趙鏞殷군 등이 동거하는 집에 갓다. 내게도 돈이 한 푼도 없지마는 그
양반들도 강목을 츠는 판인데 鄭寅普군이 본국서 돈을 얻어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침을
삼키고 앉엇는 꼴이라고 한다. 그러케 한판을 내라는 식객이 하나 늘었으니 걱정이다. 窮寢臺를 장만할 돈이 잇나 衾枕장만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나는 洪命憙군과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덥고 잣다. 침대란게 지질한가.
棕?노로 얽은 것 웋에다가 얇단 돗자리 하나를 깔앗으니 무거운 궁둥이 둘이 누으면 마치 햄목에 누운 것 모양으로 밑이 용수와 같이 움쑥
빠져버린다. 자다가 깨어보면 우리 둘은 흖이 궁둥이를 맞대고 낯을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자던 것이엇다. 가끔 량식이 떠러저서는 이제는
고인이 된 ?觀 申檉씨헌테 얻어다가 먹은 일도 잇다고 기억된다. 그때 ?觀은
우리가 잇던 집보다 좀 큰 집을 얻어 가지고 7,8學生을 留宿시켯고 또 영어강습소도 경영하엿다. 申采浩와 金奎植씨도 ?觀宅에 寓居하엿다. 이를테면 이때 1913년경 ?觀宅은
上海뿐아니라 江南일대 조선인 亡命客의 本據엿다. 同濟社라는 結社에 ?觀이
지도자엿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ㅅ사람 가는 곳에 窮이 따른다. 法租界一隅에 모혀 잇는 조선인 망명객들에게는 가끔 絶糧의 厄이 왓다.
우리는 하로 종일 즐기는 담배를 굶다가 밥 지어주는 중국인 하인의 호의로 自轉車票 한 각을 얻어 甦生의 기쁨을 찬양한 것이든지 趙鏞殷군이 모자와 구두가 없어서 맨머리 슬립바 바랑으로 프란스 공원에
볏쪼이러 다닌 것밧게 출입을 못한 것이라든지 다 그때ㅅ 생활을 대표할 재료들이다.
붕어곰 나는 독감이 들엇다. 상당한
고열이엇다. 이런 작자와 한 침대에서 궁둥이를 마조대고 자지 아니치 못하게 된 洪命憙군이야말로 가엾은 일이다. 의사를 불리올 형세나 되나
申澈군이 의약의 지식이 잇어서 내 주치의가 되엇고 나종에는 어디서
붕어를 한놈씩 사다가 손소 고아서 주기를 3,4日이나 하엿다. 그 정성된 愛護의 감격은 실로 뼈에 사모쳣다. 내가 「어린 벗에게」라는 글에 쓴
것이 이 일이다. 「내 그저. 되지 못하게 웬 冷水浴은 하노라고.」 하고 쾌유후에 洪命憙군에게 실컨 嘲弄을 받앗다. 나는 그때부터 아츰 冷水浴을 廢하여
버렷다.(此項完)〈24〉 〈22-24〉
잡지명 |
삼천리 제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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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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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0-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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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人生의 香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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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李光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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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문예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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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는 秋汀(一) 나는 歐羅巴를 經由하야 北美로 가는 路次에 海參威를
거치어 吉林省 穆稜縣인, 中東線 무린驛에 병으로 누으신 秋汀 李甲先生을 아니 찾을 수 없엇다. 秋汀과 나는 前面이 없다. 그렇지마는 그 때 朝鮮靑年으로 秋汀 李甲을 모를
사람이 어듸 잇으랴. 秋汀도 雜誌반연으로인지 나를 아시엇다. 日本 陸軍士官學校 出身, 日露戰爭에 觀戰武官으로 滿洲까지 從軍하엿고 韓國에
들아와 陸軍?領, 軍部大臣副官을 歷任하고 後에 官職을 내어던지고 여러 同志를 ?合하야 西友學會(後에 西北學會)를 朝鮮하야 祖先敎育運動의 嚆矢를 일울 뿐더러 또한
曠前絶後한, 有力한 敎育運動을 이루엇고, 그 뿐 아니라 大規模結社의 嚆矢를 이루어 民衆團結運動의 氣運를 促進한 것이다. 그러다가 庚戌年
合邦의 機運이 熟하야 撑支할 수 없음을 看破하고 飄然히 亡命하야 俄京 페테르브륵에 逗留하던 중에 全身不隨가 되어 德京, 法京의 모든 名醫의
治療를 받앗으나 效가 없어, 조고만 집을 빌어가지고 療養하시는 中이엇다. 내가 무린에 秋汀을 찾은 것이 바로 陰曆 正初이던가 싶다. 나는
上海에서 陽曆換歲를 하고 海參威에서 俄曆換歲를 하고 그리고 무린에서 陰曆換歲를 햇다고 記憶한다. 이 때 무린에는 눈과 어름 뿐이엇고 춥기도 여간
아니엇다. 秋汀이 居處하시든 집은 房이 셋에 부엌 其他가 부튼 아모렇게나 지은 木制 洋屋으로 방에는 카펠도 깔지 아니하고 窓은 겹窓이나
카텐도 없고 家具라고는 秋汀이 앉은 安樂椅子外에 木椅子 2, 3張과 장지 하나 새둔 寢室에 寢臺 하나쯤이엇다고 생각한다. 寢室과 居處室
새에는 패치가가 잇어서 寢室로 아궁이가 나고, 居處室은 南西向으로 窓이 잇어서 光線은 充分히 들어오고 아라사ㅅ사람의 집이니 만치 방이 칩지는
아니햇다. 秋汀은 아츰에 일어나서는 安樂椅子에 앉어서 저녁에 갈 때에야 나리는 모양이엇다. 우리는 어느 때에 가나 그가 같은 姿勢와 같은
方向으로(南窓울 등지고 페치카를 향하야) 앉어 잇는 것을 보앗으나 그밖에 다른 모양으로 잇는 것을 도모지 보지 못하엿다. 그럼무로 그는 스스로
起動을 못하기 때문에 寢臺에서 椅子에 올 때나 그와 反對일 때나(이것이 그의 移動의 全體다) 그 夫人과 따님의 힘을 빌엇을 것이다. 그래도
謹嚴한 秋汀은 남이 잇는 곳에서 이러한 悲憺한 動作을 보이지 아니함인지 나는 一個月이나〈26〉 每日 先生을 訪問하되 언제나 安樂椅子에 앉은 그를
보앗을 뿐이다. 내가 여듧시에 秋汀을 찾아가면(나는 秋汀宅에서 約 5分程 되는 安淸溪宅에 留宿하고 잇엇다)秋汀은 如前히 南窓을 등지고
페치카를 向하고 앉어 잇다가 나를 보고는 빙그레 웃엇다. 그리고는 分明치 못한 語音으로 時候人事를 하고, 그리고는 우리 日程에
入하엿다. 우리 日程이란 것은 편지를 쓸 것과 談話를 하는 것과 電氣治療를 하는 것이엇다. 편지는 하로에 平均 4, 5張을 썻는데
편지 받을 이는 西伯利亞, 南北滿洲, 上海 其他 中國一帶, 布?, 北美, 間或은 歐洲 等地에 흐터지어 잇는 同志들이엇고, 편지 사연인즉 하나도
秋汀 自身에 關한 것은 없고 全部 同志間의 誤解와 疏隔을 풀기 爲한 忠告와 仲裁, 團結作成에 關한 意見, 靑年訓練機關設置에 關한 計劃, 情報의
交換, 健康을 注意하라는 忠告와 落心말고 奮鬪努力하라는 激勵 等이엇다.
一個月間에 나는 秋汀의 편지를 百張만 쓰지 아니하엿다.
秋汀은 내가 까지까지는 그 따님(이름은 正熙, 只今 陸軍步兵大尉 李應俊氏 夫人, 두 분에 對해서는 다시 말할 機會도 잇겟다)-그 때
겨오 15, 6歲 밖에 아니되엇던 이가 代書햇던 모양이다. 그래서 秋汀이 平素에 하고 잇는 말을 다 하지 못하다가 다행히 내가 간 機會를
利用하야 편지를 쓰게 한 것*다. 이 편지들 中에 어떤 것은 直接 그가 口授하엿고 어떤 것은 要旨만 口授한 것을 내가 適當하게 지어썻다.
나는 그의 口授를 받아 적는 동안에 그가 感極하야 或은 落淚하고 말이 막히고, 聲淚俱下하야 한참이나 우후후 하고 우름ㅅ소리를 진정치 못하는 것을
보앗다. 鐵石心腸이라는 評을 받던 一代英雄이 同胞事를 말하다가 放聲慟哭하는 양은 참으로 悲壯 그 물건이엇다. 편지에만 아니라 談話에도
秋汀의 話題는 恒常 公에 關한 것이엇다. 無非憂世의 至情으로 나오는
말슴어니와 더러는 後輩인 나를 啓發하기 爲하야 夜來에 材料를 準備한 듯한 한 談話도 잇엇다. 그렇지만 그는 決코 先輩가 後輩를 敎訓하는 듯한
態度를 보임이 없고 어듸까지든지 나는 당신과 平等인 親友, 知己로 보아 肝膽을 吐露하는 態度엿다. 用語도 그러하거니와 表情도 그러하엇다.
그렇다고 그것이 억지로 짓는 것이 안니라 至情이오 自然이엇다. 나는 혼자 내 宿所인 淸溪宅에 누어서 지나간 하로 秋汀과 같이 하던 일을
생각하고는 「秋汀의 속에는 朝鮮이 찻다. 秋汀의 속에는 朝鮮밖에 없다. 그는 그의 속에서 自己를 내어 쫏고 그 자리에다 朝鮮을 들여 앉혓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愛國者란 이런 사람이로고나」하고 觀念으로만 가지고 잇든 것을 實物로 目擊한 것을 깃버햇다. 지금도 내 속에 利己心이
發作할 때에는 秋汀의 웃는 모양이 나타나시 나를 激勵해
준다.(此項未完)〈27〉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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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명 |
삼천리 제1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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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1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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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0-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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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人生의 香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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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李光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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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회고·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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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는 秋汀(2) 나는 秋汀의 겨테 1개월을 머무는 동안 여러 가지
아름다운 광경도 보고 이야기도 들엇다. 그 중에 멧가지를 적자. 이것은 秋汀 자신의 이야기다-. 「島山이 美洲에 건너가는 길로 돈을
美貨 500圓을 보냇습데다. 島山의 사정을 내가 다 아는데 웬 돈 500원이 잇어서 내 병치료비로 이 적지 안니한 돈을 보냇는고 하고 매우
밧기가 거북한 것을 동지의 정성을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바닷지오. 햇더니 그 후에 알아보니까 도산이 本國 들어와 잇는 동안 島山夫人이
남의 빨레를 해주고 벌어서 저축한 돈이라고요. 그러고는 島山은 어느 運河를 파는데 역부노릇을 하고 日工을 바다서 생계를 보탯다고요.」 여긔
도산이란 이는 毋論 安昌浩氏다. 또 하나는 伯林에 체류하엿을 적 이야기- 「내가 島山이 오라는 말대로 미국을 가랴다가 紐育서
상륙금지를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伯林 어느 여관에 잇을 때요. 이러케 안젓노라면 바로 정면에 德皇 카이서의 肖像이 걸렷습데다. 날마다 나는 그
肖像을 바라보앗지오. 그러고 혼자 말하기를 폐하! 나와 가튼 망명객을 비웃지 마시오. 폐하의 先王은 어떠하시엇습니까? 폐하의 父王이신
프레데릭대왕과 그보다도 폐하의 母后께서 나폴레옹에게 어떠한 욕을 당하시엇습니까? 폐하! 오늘 이 외로운 망명객인 外臣이 他日에 우방의 XX으로
폐하의 官廷에 손이 되여 폐하와 天下事를 談할 날이 없으리라고 어찌 말하겟습니까? 폐하! 오늘 外臣이 逋?으로 폐하의 국토를 밟는 것을 책망하지
맙시요. 혹시 폐하께서 外臣의 나라에 망명하시어서 外臣의 보호를 바드실 날이 잇을는지 어찌 암니까? 外臣의 陛下의 국가의 만만세를 비옵거니와
인생의 일이란 이러케 미들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34〉 이러케 말햇지오, 하하하하.」 선생의 이 말슴 중에서 한가지는 마저서 德皇 빌헴
3세는 萬乘의 位를 일코 和蘭에 망명객이 되엇거니와 秋汀 자신은 德皇을 보호할 지위에 서보지 못하고 벌서 不歸의 객이 되고 말앗다. 내가
穆稜을 떠나기 거의 臨時해서 秋汀은 날더러 春皐 朴泳孝씨에게도 10,000원만 보내달라는 편지를 쓰기를 부탁하엿다. 나는 선생의 부탁대로 그날밤
나의 숙소인 安淸溪宅에서 고심해서 春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썻다. 나는 그 속에 무슨 말을 썻든지 그것은 다 이저버렷다. 다만 大監,
侍生하는 말의 반복되던 것과 상당히 장문이던 것과 이튼날 아츰에 이 편지를 내가 읽어들일 때에 秋汀이 聲淚俱下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후에
들으니 朴春皐는 이 편지에 대해서 회답조차 아니햇다고 한다. 秋汀은 春皐를 만히 사모하는 모양이엿다. 그가 少詩에 春皐에게 사랑밧던 것을
내게 이야기하고 감사하는 정을 表하는 것을 여러번 보앗다. 그러나 나는 秋汀의 입에서는 그가 얼마나 曾往에 현금으로 春皐를 도은 것을 말하는
것을 듯지 못하엿다. 나는 다른 어떤이에게서 春皐가 일즉 궁할 때에 (候爵이 되기 전에) 秋汀에개 단 10,000원만 보탬을 바든 것이 아니란
말을 들엇다. 秋汀은 春皐에게서 돈 10,000원이 올 것을 상당히 자신하는 모양이엿다. 그러길래 이 10,000이 온다면 어떠케 쓸 것을
내게 말하기도 한 것이 아닐가. 그 돈의 用處는 결코 자기의 치료비나 가정의 생활비는 아니엿다. 나는 몹시 눈오고 바람부는 날 밤
한시(?)차로 치따를 향하야 穆稜을 떠낫다. 그럼으로 나는 秋汀께는 떠나는 날 오후에 작별을 하엿을 뿐이오 바로 떠날 때에는 뵙지를 못햇다.
秋汀은 내가 떠나지 말기를 바란 듯 하나 말로는 표시하지 아니하엿다. 나도 아니 돌아서는 발ㅅ길을 억지로 들렷다. 좀더 오래 모시고 잇어서
이야기ㅅ동무라도 해들일 것을 하고 至干今 後悔를 마지 아니 한다. 알는 秋汀을 말할 때에 나는 때노쳐 못할 이야기가 잇다. 그것은
李應俊씨와 秋汀의 유일한 혈육인 따님 正熙씨와의 혼인에 관한 것이다. 李씨는 少時에 秋汀의 *愛를 바다 韓國士官學校에 다니다가 군대 해산 후에
東京陸軍幼年學校로 전학하야 該校와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因해 日本士官으로 잇엇다. 그러다가 1921년 日本軍이 西伯利亞 出兵 時에 출정하엿던
길에 李씨는 그 은인 秋汀의 묘를 展하고 그 恩人遺孤인 正熙씨와 혼인한 것이다. 34년전에 한번 秋汀이 「너는 내 딸을 마타다고」한 한마듸ㅅ말을
지키고 지키엇던 것이다. 李씨에게는 달리 청혼하는 데도 만핫으나 다 물리치고 은인의 遺託을 有信하게도 지킨 것이다. 근세에 드문 美談이다.(이하
次號續)〈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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