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中生
1933년 4월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 1946년 7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 본부 통신병 근무 1947년 3월 주하현 조선중학 재학 1950년 4월 북한 조선인민군에 편입 1957년 9월 인민군 제대후 온성탄광에서 노동 1958년 3월 중국으로 귀환 1958년 9월 가목사사범대학에서 역사학 전공 1961년 9월 아성현 중국중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근무 1966년 6월 문화대혁명때 교내 연금 및 강제노동 1970년 3월 농촌으로 추방돼 집단농장에서 노동 1974년 3월 교사 복직 1987년 8월 독립기념관 개관식에 참석 1989년 1월 영주 귀국 1989년 2월 삼성물산 해외사업부 중국담당 고문 1997년 2월 삼성물산 퇴사 |
‘조선의용군’은 일제시대 때인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결성된 항일무장독립부대였다. 당시 조선의열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하던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지도부에 한·중(韓中)연합체 성격의 무장부대의 필요성을 건의해 탄생한 것이 조선 의용군이었다.
중국 국민당 산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 청년 122명을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의용군은, 그러나 출범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갈등을 겪게 된다. 1942년 좌익계열 대원들이 의용대 본부가 있던 중칭(重慶)을 떠나 중국공산당의 영향권 아래 있던 화북(華北)지역으로 이동해 버린 것.
이후 중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 대장 등 민족주의 계열 대원들은 광복군으로 편입되고, 화북으로 떠난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군사편제를 갖추게 된다. ‘조선의용군’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조선의용대’로 불렸다.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항일투쟁에 나선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무장해제당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일본이 퇴각함으로써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內戰)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하고, 전략 요충지인 만주를 선점하기 위해 의용군을 이용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옌안(延安)과 타이항(太行)산 일대에 주둔했던 조선의용군에 만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만주로 진출한 조선의용군은 현지 조선족을 입대시키며 규모를 사단급으로 키운 뒤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국민당의 지방부대와 싸우게 된다.
항일투쟁을 위해 결성됐다 중국공산당 휘하 부대로 성격이 변해버린 조선의용군이 다시 한번 역사의 회오리 속으로 끌려들어간 계기가 바로 북한으로의 입국과 6·25 참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만주 진출후 사단 규모로 확대되고 전투경험도 풍부해진 조선의용군을 6·25 이전에 북한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 인민군으로 재편된 조선의용군은 6·25 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 최전방에서 남침(南侵)의 선봉대 역할을 맡기에 이른다.
역사의 迷兒, 조선의용군
이처럼 자못 복잡한 길을 걸어온 조선의용군이 ‘역사의 미아’가 된 데는 몇가지 배경이 있다.
중국은 조선의용군이 국공내전때 국민당과 맞서 싸우며 많은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의용군이 북한으로 건너가 6·25 전쟁에 참가한 과정에 대해서는 공식적 언급이나 평가를 일절 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으로 간 조선족 군인들을, 본인이 자원해 갔다는 의미로 ‘지원군’(志願軍)이라고 부른다. 중국공산당 차원의 공식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김일성은 1949년과 50년 두차례에 걸쳐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밀사를 보내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을 쌓은 조선족 부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중국 정부는 또한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6·25 참전 조선족 퇴역군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면서 ‘참전경력’을 인정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전쟁책임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나 한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한 듯, 조선족의 북한 이동과 관련된 공식적인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다.
개전(開戰) 초기의 주력부대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용군이 가장 홀대받은 곳은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은 휴전후 김무정·방호산·박일우 등 의용군 출신 고위 지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전개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역사만 인정하는 북한으로서는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조선의용군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의용군은 오랜 세월 ‘인민군으로 변신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공산당’으로 비쳤다. 의용군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가능한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기록이 전혀 공개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조선족의 북한 입국 및 6·25 참전에 대한 국내의 연구성과는 결코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다.
3년 동안 모두 10만명의 조선족이 한국전쟁에 참전
조선의용군의 6·25 참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을 안타깝게 생각한 김중생씨는,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지난해 8월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이라는 책을 펴냈다. 김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의용군 출신 퇴역군인 100여명을 수소문해 만났고, 중국과 국내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과 저술을 통독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 출판된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은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에게도 주목받는 새로운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김씨는 이 책을 쓰면서 일본 패망 이후 만주로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이 850명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져온 ‘400명’의 배가 넘는 규모다.
김중생씨 작업의 결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6·25 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가운데 200여명의 명단을 최초로 정리해낸 것이었다. 그는 이들의 신상을 ▷1945년과 46년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두차례로 나눠 개별입북한 경우 ▷1949년부터 2년간 부대를 인솔하고 입북한 경우 ▷휴전후 중국으로 돌아온 경우 ▷입북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경우 등으로 구분해 정리했다.
김중생씨는 또한 참전 조선의용군의 주요 지휘관들의 출생년도 등 개인 신상은 물론 의용군 시절 및 북한 입국 전후의 행적 등도 상세히 밝혀냈다. 이처럼 꼼꼼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김씨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21개 연대 가운데 47%가 만주에서 건너온 조선의용군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밝혔다.김중생씨는 6·25전쟁에 참여한 전체 조선족 규모를 10만명 안팎으로 추산한다. 이 가운데 개전 이전에 북한으로 건너간 경우가 6만5,000명에 달한다는 것이 김씨의 얘기다.
북한은 전쟁중이던 1950년 겨울부터 이듬해에 걸쳐 인민군 총참모본부 군사동원국 소속 장교들이 중국 현지로 건너가 조선족들을 상대로 모병(募兵)하기도 했다. 김중생씨는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때 하얼빈·옌지(延吉)·무단장(牧丹江) 등에서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조선족이 1만명 안팎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엔군 참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른다. 중공군은 한꺼번에 수십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냈다가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새로운 부대로 교체하는 방법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108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다. 이때 참전한 중공군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漢族)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배치될 때 반드시 조선족 통역요원이 동행했다고 한다. 1개 사단에 150명 정도의 통역이 배치된 것으로 추산하면 중공군을 따라 참전한 통역요원만도 2만5,000명이나 된다. 때문에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중 북한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족의 규모는 10만명에 달하리라는 것이 김중생씨의 분석이다.
관련자료와 퇴역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계해낸 이같은 자료를 종합하고 김중생씨가 내린 결론은 “조선의용군이 밀입북하지 않았더라면 6·25 전쟁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