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1> 최초의 영남인 패총 유적에선 선사시대 때부터 일본과 교류
흔적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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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서구 범방동 패총의 발굴 당시 모습.
작은 사진은 부산 동삼동패총에서 나온 가면 모양의 조개껍데기. |
| #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러분은 역사 공부가 재미있었습니까? 혹시 연대나 왕의 이름, 그리고 사건 등을 외우기만 해야 하는 지겨운 과목쯤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는지요? 더군다나 개인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신성한(?) 구절만을 외쳐야 하는 부담으로 남지는
않았는지요?
원래 역사란 그렇지도 않은데, 우리의 역사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것이 되었을까요? 역사소설은 재미있는데, 역사는
재미없다고 합니다. 대중에게 위안을 주고, 문화로서 공유할 수 있는 역사가 적은 우리 현실이고 보면, 이런 불평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선은
역사학자들의 책임이겠지요. 연구 축적의 부족에 학문적 방법과 기술만 중하게 여겨 왔던 잘못입니다. 연대와 사건 이름 정도가 구성된 역사는 X선
사진 같습니다. 이런 사진에서 매력을 느끼기는 어렵겠죠.
다행히 이제는 어느 정도 연구도 축적되었고, 근년에는 젊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쉽게 씌어져 읽히는 역사, 읽혀 즐길 수 있는 역사, 즐기며 느낄 수 있는 역사'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교육의 역사 모두에 동등한 의미를 두려는 움직임들입니다.
이번에 여러분과 함께 떠나는 가야사 여행도 그러한 기획의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함께 떠나는 이야기 가야사 여행은 우리 지역의 역사를 둘러보고 지역적 전통이나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대강의 줄거리와 함께, 우리 지역에 산재하는 가야의 문화유적을 따라가며, 거기에 얽혀진 가야인 들의 사연을 중심으로 이야기
여행을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 신석기인의 쓰레기장
아직 가야는 아니지만, 영남지역에서 처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흔적은 7000년 전 이상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근 부곡온천의 아랫동네에서 발굴조사 된 창녕 비봉리유적에서는 통나무배,
망태기, 많은 조개껍데기와 도토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통영 연대도, 부산 동삼동과 범방동, 김해 수가리 패총유적 등에서는 5000~4500년
전의 삶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던 무렵입니다. 패총(貝塚)은 최초의 영남인들이 버렸던 쓰레기들이
조개껍데기와 함께 쌓인 유적입니다. 잡아먹었던 많은 양의 조개껍데기와 함께 여러 생활도구들이 버려졌습니다. 현대의 쓰레기장에서 우리들의 생활이
잘 나타나듯이, 패총은 최초 영남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2002년 문을 연 영도 동삼동패총전시관에 가면
최초 영남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많은 조개류를 비롯해 뗀석기 간석기 숫돌 같은 석기들, 돋을새김무늬와 빗살무늬 같은 토기들, 동물
뼈로 만든 낚시바늘 같은 뼈연모 들이 있습니다. 40여종이나 되는 조개류는 거의가 바다에서 채집되는 것들로, 지금은 남해고속도로의 개설과
경마장의 건설로 소멸되어 버린 김해의 수가리패총과 강서구의 범방패총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범방패총에서는 130cm에 11~13세
정도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었습니다. 범방아이라 이름 부쳐진 최초의 영남지역 어린이의 모습일 겁니다.
이러한 남해안의 신석기인들은
수렵과 어로를 중심으로 생활하였고, 아직 본격적인 농사는 몰랐었습니다. 하지만 바닷가 모래밭에 꽂아 쓰기 편리한 뾰족 바닥의 그릇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조개 팔찌와 발찌 같은 장신구로 멋을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의 왜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통영 부산 김해의 패총유적에서 발견되는 흑요석(黑曜石)은 까맣고 반질반질한 화산암으로 화살촉 만들기에 좋은
재료입니다.
남해안에서는 나지 않기 때문에 화산이 많은 일본의 큐슈 북부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5000~6000년 전 최초의 영남인 들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의 왜인들과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동삼동패총에서는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와 함께
일본열도의 죠몽토기도 출토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말도 말고 탈도 많은 한일관계사의 시작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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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인제대 박물관장 △저서 '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 등 △가야사 및 고대한일관계사 분야에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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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야사의 시간과
무대 12개독립국 부산경남넘어 경북,전북까지세력
뻗쳐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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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의 기마인물형토기(국보
제275호) |
| #가야사의
의미
가야의 역사는 2,000년 전 남쪽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1,400년 전 북쪽 내륙지역에서 마감되었습니다. 흔히 6가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고려시대 일연스님의 생각일 뿐입니다.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문자 기록과 가야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12개국 정도가 각각의 역사를 가졌음을 알게 됩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무려 600년 동안이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독립국들이었습니다. 가야가 망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통합되기 100년 전이었습니다. 100년 먼저 망한 것과 600년
동안 역사를 함께 했던 것 중 어느 쪽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지는 분명할 겁니다.
이런 간단한 산술 계산의 의미조차 존중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야사는 홀대되어 왔습니다. 삼국시대라는 말이 그 대표입니다. 우리 고대사가 삼국만의 역사로 생각되어왔던 까닭에 가야사는 탈락되었습니다.
가야사의 탈락은 우리 고대사의 이 빠진 복원을 뜻하고, 600년 동안이나 가야인으로 살았던 고대 부산·경남인의 역사는 무시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의 의미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가야사의 시간과 무대
보통 가야사는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 5만군의 가야 공략 사건을 전환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전기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 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 아라국은
전·후기 모두에 큰 세력이었습니다. 전기에는 남해안의 동래 김해 창원 마산 함안 고성 사천 진주 등이 바다로 전해지던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번성하였고, 후기에는 고령 합천 창녕 함안 의령 산청 거창 함양 등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가야문화의 꽃이 피었습니다.
'삼국유사'는
가야사의 무대를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서 지리산까지로 기록했습니다만, 낙동강 동쪽의 부산 양산 창녕, 그리고 지리산
서쪽의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에서도 가야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됩니다.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이 가야사 전개되던
무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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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5가야조 |
| #가야라는
이름
가끔씩 지역에서 가야사를 연구하신다는 분들조차도 가야의 이름이 너무나 많은데, 어느 것이 옳고, 또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모두 옳습니다. 가야국 모두를 아울러 가리키거나, 각국의 이름이 따로 전하기 때문입니다.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12개국 명이 있었고,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으니 삼국과 왜의 제3자가 부르던 이름에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부쳐진 이름들이 있습니다.
가야는
가라(加羅)에서 온 말입니다. 가라는 옛말에서 산과 들 자락의 마을을 뜻했습니다. 마을이란 일반명사가 특정국의 고유명사로 정착하게 된 겁니다.
김해의 가락국은 '가라의 나라'입니다. 나라의 말씀이 나랏 말으로 표기되던 원리입니다. 가야의 한자는 加耶(신라)→伽耶(고려)→伽倻(조선)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인(人)변 하나씩이 더해졌습니다. 합천의 가야산이나 함안의 가야읍을 伽倻로 쓰는 것은 가장 늦게 사용되던 조선시대의
표기가 남은 때문입니다.
가야의 한자는 뜻은 없고 소리만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단한 加耶의 표기가 좋을
겁니다. '삼국지'는 12개의 가야국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와 같은 이름은
없습니다. ○○가야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부쳐진 것들로 정작 가야인은 몰랐던 이름입니다. 가야 각국을 부를 때는 가락국(김해) 가라국(고령)
아라국(함안) 등과 같이 쓰는 것이 옳겠습니다.
임나(任那)는 '일본서기'가 고대 일본의 가야 지배를 꾸미기 위해 썼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 신라의 '진경대사탑비'(창원)에도 쓰여 있습니다. 임나는 가야 여러 나라들이 김해와
고령을 높여 '님(主)의 나라'로 부르던 것에서 비롯된 가야의 대명사입니다. 지금 대가야(大加耶)는 경북 고령으로 통하지만, 원래 가야사에는
2개의 대가야가 있었습니다. 1~4세기에는 김해가 큰 가야였고, 5~6세기에는 고령이 큰 가야였습니다. 나중의 큰 가야가 고령이었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원래 입문이란 게 꼭 필요는 하지만 별로 재미는 없습니다. 다음부터는 가야의 유적을 찾아 거기에 얽힌
가야인들의 이야기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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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야사의 고향
구지봉 풍요기원 구지가 수로왕 맞이 노래로 각색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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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입석과
표지석. |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아마도 이 노래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 국립김해박물관 뒤편의 낮은 언덕 구지봉에서
가락 9촌의 촌장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불렀다는 구지가입니다. 사적 429호 구지봉은 가야사 시작의 무대였습니다.
김해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구지봉에 오르면 5~6개의 짧고 둥근 돌에 받혀져 구지봉석이라 새겨진 평평하고 널찍한 돌 하나가 보입니다. 고인돌
무덤입니다. 이 고인돌이야말로 구지가가 불러지고 수로왕의 가락국 세우기를 지켜보았던 증인입니다. 왜냐구요?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수로왕의
등장을 42년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만, 남해안의 고인돌은 기원전 1세기가 되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구지봉 고인돌이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수로왕이 등장하기 이미 150년 전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돌은 수로왕 등장 이전의 무덤이었고,
수로왕 이전의 김해는 가락 9촌의 촌장인 구간(九干)들이 영도하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구지봉의 고인돌은 수로왕의 가락국이 아닌 구간사회의
무덤이었습니다. 고인돌에서는 청동기가 출토되지만 철기는 아직 아닙니다. 이러한 고인돌의 청동기사회에 철기를 가지고 등장했던 것이
수로왕이었습니다. 수로왕이 등장하는 42년경에는 이미 철기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각색된 구지가
구지가는 가락 9촌의
촌장들이 불렀습니다. 따라서 원래의 구지가는 구간사회의 굿판에서 불러지던 기원의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구지가는 '머리를 내어라' 했기에
나타난 (우두)머리가 수로왕이었다고 전합니다. 머리 수(首)에 나타날 로(露)가 이름이 되었던 거지요. 지금 우리가 아는 구지가는 구간사회의
노래가 아니고, 가락국의 성립과 수로왕의 등장을 신성하게 꾸몄던 노래입니다. 청동기시대의 구간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던 구지가가 철기시대 가락국의
건국자를 맞아들이는 노래로 각색되었던 겁니다.
수로왕이 철기문화를 가지고 청동기문화의 가락 9촌 사회를 통합해 가락국을 세우고 보니
신성화의 도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가락국 '용비어천가'의 제작입니다. 마침 알맞은 소재가 있었습니다. 선주민의 구간사회인들이 신성시하던
구지봉과 구지가가 있었습니다. '됐다! 이 장소에, 이 노래에, 나의 출현을 담아보자'. 그래서 바다 거북이를 괴롭히며 해신에게 해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던 노래가, 하늘에서 건국자를 내려주는 이상한 모양이 되었던 겁니다.
#무덤이 말하는 가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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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양동리 212호 고분서 출토된
목걸이. |
| 이러한 사실은 다시 김해지역의
고고학 자료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구간사회인들이 만든 고인돌은 김해 9개면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고, 각각에서 출토되는
부장품들도 비슷합니다. 균등한 고인돌의 분포나 우열의 차가 별로 없는 유물들은 김해지역을 9촌장이 나누어 이끌던 부족연합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락국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지는 목관묘(木棺墓)와 목곽묘(木槨墓)에서는 처음으로 철기가 나타납니다.
철기시대의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목관묘와 목곽묘 역시 고르게 분포하지만, 시내에 위치하는 것들만 대형화되고, 특별히 화려한 부장품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시내 대성동고분군과 주촌면 양동고분군의 유물이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산이라면, 여타 지역의 것들은 서민 이영식의 재산과 같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우열의 차가 확인됩니다. 결국 9촌장의 구간사회가 수로왕의 가락국으로 통합되면서, 김해지역의 부와 권력이 시내 한 곳으로
집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972년 이전까지 9개면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행정구역이 하나의 김해시로 통합되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김해지역에는 구지가를 포함하는 건국신화가 있고,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의 교체라는 고고학 자료가 있어, 가락국
형성의 비밀을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사정은 다르겠지만, 부산·경남 일대에서 가야 각국이 형성되던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가야사는 김해의 구지봉에서 막을 올렸다고 보아도 좋을 겁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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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전 한 닢이 말하는
해상왕국 황해도 일본서도 출토된 화천은 중계무역
증거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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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회현동패총전시관. |
| 회현동패총
2006년 10월 10일 김해시내 회현동에 패총단면전시관이 오픈되었습니다. 9m 깊이의 조개더미를
수직으로 잘라 넓은 정면과 좌우 짧은 단면의 3개 면을 노출시켜 가야인의 쓰레기장을 박력 있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07년 일본인
이마니시가 발견한 지 꼭 100년 만의 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유적입니다. 여러분들이 국사 시간에 열심히
외우셨던 바로 그 유적입니다. 회현리패총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의 행정구역명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로왕릉 남쪽의 봉황대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낮고 길쭉한 언덕으로, 가야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들이 생활쓰레기와 함께 쌓여 생긴 유적입니다. 지금 쓰레기장이라면
환경문제의 하나로 골치 거리가 됩니다만, 회현동패총은 가야사를 되살릴 수 있는 보고입니다.
발굴조사
1920년
우메하라와 하마다, 1934년 카야모토와 같은 일본인들이 발굴하였고, 1992년부터 2005년까지 간헐적으로 부산대박물관과 경남고고학연구소 등이
발굴조사를 했습니다. 수많은 조개껍질과 가야토기의 파편들, 그리고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고, 화천·세형동검·탄화미처럼 가락국(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것들도 확인되었습니다. 탄화미는 2000년 전 건국기의 가락국에서 성숙한 쌀농사가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한민족 청동기문화의 대표 유물로 가야에 대한 고대일본의 지배나 간섭을 말하던 일본학계의 잘못된 주장을 일축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됩니다.
동전 한 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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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화천 |
| 화천(貨泉)은 서기 9년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 찍은 돈으로 엽전처럼 생겼습니다.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그 오른쪽에 화(貨), 왼쪽에 천(泉)이라
새겼습니다. 물론 왕망전으로도 불리는 화천은 한 잎의 동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전혀 새롭고 너무나도 중요한 가야왕국 발전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천은 평양과 황해도,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큐슈에서 오사카까지에도 점점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찍은 화폐가 한반도
남단의 김해에서 출토되는 것도 신기한데, 서북한 지역과 일본열도에서 함께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해상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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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화천 |
| 화천이 주조된 약 200년
후의 기록이지만 '삼국지' 왜인전은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의 왜국들에 이르는 바닷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남해에 들어서서 동으로 방향을 바꿔 김해에 도착하고, 1000리(70㎞)의 바다를 건너 쓰시마, 다시 천리를 건너 이키, 다시 천리를 건너 큐슈
북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바닷길은 기원전후에서 3세기 후반까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였습니다.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대의 동아시아에는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나가사키 부산 등이 중개무역항으로서 유명합니다만,
고대에는 가락국이 거의 유일무이한 중개무역항이었습니다. 서북한지역과 일본열도, 그리고 회현동패총에서 출토되었던 화천은 이러한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증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기간은 대개 2년 내지 2년 반이 걸렸습니다.
반면에 화천은 불과 10년 밖에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화폐가 2년 내지 2년 반이나 걸렸던 바닷길에 점점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이 바닷길을 통한 무역과 왕래가 얼마나 빈번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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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천 |
| 중국의 선진 문물과 일본열도의
원자재가 김해의 가락국에서 교환되었고, 가락국에 모여진 가야 여러 나라들의 물품이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가락국과 함께 남해안에
위치한 전기 가야의 나라들이 일찌감치 고대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경제적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후에서
3세기경에 이르는 가락국을 해상왕국이라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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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상왕국의
항구 지금의 김해평야는 금관가야 항구 중 하나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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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김해
회현동패총에서 발견된 한 닢의 동전을 통해 해상왕국의 가야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바로 그 해상왕국의 항구가 회현동패총 서편의 봉황대유적과
장유면 율하리의 관동리유적에서 각각 발견되었습니다.
봉황대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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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 선착장으로 되살아난 김해 봉황대
유적. |
| 김해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과 봉황대 사이의 습지에 위치한 봉황대유적은 가야민속촌의 조성에 앞선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습니다. 2002년과 2003년의 2차례에 걸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의 발굴조사에서 항구 관련의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사면에 자갈을 깔아 배를 끌어 올릴 수 있게 했던 시설, 해반천
쪽의 바닷물이 봉황대 쪽으로 범람치 못하도록 목재와 석재를 점토에 섞어 다지고 군데군데 나무못까지 박아가며 쌓아올린 기다란 둑 모양의 호안시설,
그 안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높은 마루의 창고형 건물자리들이 드러났지요. 건물의 기초로는 돌이 아닌 나무가 사용되었습니다. 습지에 가라앉지
않도록 궁리했던 가야인의 건축학적 지혜가 빛나는 대목입니다. 결국 최초로 확인된 해상왕국의 항구 때문에 민속촌 조성 계획은 철회되었고, 물을
채우고 작은 배까지 띄운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습니다. 발굴조사 탓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도 들었지만, 근거도 없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급조된
민속촌보다 확실한 역사고고학적 사실에 기초한 복원과 정비는 그만큼 당당하고 생명도 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관동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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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관동리 유적
복원도. |
| 김해시 장유면 율하신도시 조성
사업지 동북단에 남해고속도로와 율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관동리유적은 봉황대유적 보다 더 확실한 가야항구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5년
경남고고학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항구의 호안시설, 호안시설 앞에 다리처럼 돌출되어 배를 댈 수 있게 했던 선착장 같은 잔교, 여러 채의 창고형
건물지, 우물이 있는 마을과 고분군에 배후도로까지 발견되었습니다. 폭 6m 규모의 배후도로는 돌을 깔고 진흙을 다져 노면을 만들고, 도로 양측에
배수를 위한 도랑이 설치되었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공사가 한창인 부산신항의 배후도로를 연상케 합니다. 지금은 김해평야로 변했지만
고김해만(古金海灣)의 포구에 실재했던 가야항구의 하나가 발견되었던 겁니다.
김해평야는 바다
제가 공부할 때는 넓은
김해평야의 농업 생산력으로 가야왕국이 발전했다고 쓰면 백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생들이 그렇게 쓰면 빵점입니다. 가야시대의
김해평야는 바다였기 때문입니다.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내해로, 봉황대와 관동리 일대는 가락국(금관가야)의 항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산처럼 수심이 깊고 밀물 썰물의 차가 적은 곳이 좋은 항구입니다만, 이것은 스크루를 돌려 추진력을 얻는 배가 고안된 산업혁명 이후의
일입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의 수 만년 동안 인류가 사용해 왔던 최적의 항구는 정반대라야 했습니다.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 썰물의 차가
커야 했습니다. 밀물 때 내륙 깊이 들어와 배를 얹혀 두고, 짐을 내리고 물과 식량을 보충하고, 다시 밀물이 되면 배를 띄워 먼 바다로 나가
항해하는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일본의 가요를 담고 있는 8세기의 '만엽집(萬葉集)'은 지금 메트로폴리스로 변한 오사카에서 '밀물이 들어
왔으니, 배 띄워 먼 바다로 나가자'는 노래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항구가 김해시내와 장유면에 있었던 겁니다. 봉황대유적 바로 옆의
해반천(海畔川)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내였고, 고려 말에 왜구가 김해읍성 바로 앞 갈대 숲 속에서 튀어나와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는 기술도
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는 남해안의 해운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전부를 김해가 차지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김해는 남해안은 물론 전국 최대 항구의 하나였습니다. 김해의 바다 해(海)는 그런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김해평야에서
가야의 무역선이 인양될 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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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야왕궁이
보인다 수로왕릉의 남서쪽 봉황대가 유력한 왕궁터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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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유적의 토성 내부 주거지 발굴 조사
모습. 이곳에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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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의 수수께끼
지금도 가야사에는 신비나 수수께끼와 같은 수식어들이 곧잘 따라 다닙니다만, 이제부터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수수께끼의 하나가 가야 왕궁의
소재입니다.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국(아라가야), 고령의 가라국(대가야) 그 어디에서도 심증이 가는 곳은 있어도 지금까지 이렇다
할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고령에는 지산동고분군에서 읍내 쪽으로 다 내려온 연조동 언덕에 대가야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고, 함안에는 삼봉산 아래에 남문 선왕동 필동과 같은 왕궁 관련의 지명이 남은 아라 왕궁 추정지가 있으며, 김해에도 두세 군데나 되는 왕궁
후보지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왕궁후보지 김해시내에서 거론되고 있는 왕궁후보지는 수로왕릉 동북쪽의 동상동사무소 앞과 수로왕릉
남서쪽의 봉황대가 있는데, 양쪽 모두에 가락국 왕궁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다만 북쪽의 동상동사무소 앞보다는 남쪽의 봉황대 쪽이 더
유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동상동에는 허왕후의 궁궐 또는 분성대(盆城臺)가 있었다는 또 다른 전승도 있지만, 봉황대는
'삼국유사-가락국기'의 기록과 잘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락국기'는 서기 199년 수로왕이 돌아가시고 난 뒤 세웠던 왕릉의
위치를 '대궐의 동북쪽 평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왕궁의 위치는 모르지만, 수로왕릉의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수로왕릉이 왕궁의
동북쪽에 만들어졌다 하니, 반대로 왕궁은 현 수로왕릉의 남서쪽에 있었을 겁니다. 수로왕릉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봉황대입니다.
가락국 왕궁비 봉황대에서 동북쪽으로 수로왕릉을 향해 내려온 곳에 김해김씨 종친회관이 있는데, 이 건물 바로 뒤에는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와 비석이 서 있습니다. 비석에는 가락국 시조 왕궁터라는 뜻의 한자가 아주 깊고 두텁게 새겨졌고, 뒷면에는 조선 숙종 6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327년 전인 1680년에 세워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00년에 가깝다는 은행나무의 수령과 잘 어울리는 비석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비석이 세워진 것 역시 가락국이 멸망했던 532년부터 무려 1148년이나 흐른 뒤였습니다. 가야 왕궁 찾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추정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봉황토성 그러나 이 수수께끼가 풀려가기 시작하고, 드디어 가락국 왕궁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같은 자리에서였습니다. 가락국 왕궁터의 비석에서 불과 몇 발자국 나가지 않은 곳에서 가락 왕궁의 성벽이 발견되었습니다. 지난 2003년의
일이었습니다. 김해김씨 종친회관 앞의 소방도로 확장공사에 앞서 경남고고학연구소가 실시했던 발굴조사에서 5세기께의 토성(土城)이 발견되었던
겁니다. 토성의 양쪽 측면은 아래에서 위로 너비를 줄여가면서 모나게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고, 가운데는 나무 기둥을 박아 넣어 가며
흙을 켜로 다져 쌓아 올렸습니다. 석축 측벽의 하부 너비는 14m, 상부 너비는 7m, 남아있는 토성의 높이가 2.4m 정도 되는 규모였습니다.
성벽 내부에는 수많은 움집형 주거지와 창고형 건물지 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성벽과 비슷한 시기의 가야토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짓고 부수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했던 아주 빈번했던 도회 생활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성을
찾았다 원래 고고학자는 자신의 조사 결과를 특정의 역사기록과 직결시켜 단정적으로 해석하기를 매우 꺼려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봉황토성을 가락왕궁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가락국기'는 수로왕이 도읍을 정하면서 길이 1500보의
나성(羅城)을 돌리고 궁궐 관청 무기고 창고 등의 신궁(新宮)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봉황토성은 이로부터 약 400년 후가 되는
유적이지만, 비로소 가야의 왕궁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김해시는 올해부터 장기적인 계획 아래 적극적인 왕궁 찾기에 나선다고
합니다. 가야왕궁의 실체가 현실화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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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로왕을
찾아서 한에 패한 위만조선 유민이 가락국 세워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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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수로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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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김해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 수로왕릉은 가락국(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을 모신 무덤입니다. 김해의 관광과 답사에서 왕릉을 빠뜨리는 분은 별로 안 계실거고,
가야사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유적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왕릉공원으로 정비되어 아이들의 소풍이나 사생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도심의 녹지공간으로
시민들의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매년 5월과 10월에는 김해김씨 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시조할아버지에 대한 큰 제사를 지냅니다. 수로왕은
가야사의 첫 장을 열기도 하였지만, 김해김씨의 시조도 되기 때문입니다.
가야왕국의 부활?=얼마 전에는 그런 농담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출발할 때, 대통령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모두 김해김씨였기 때문에 "1500년 만에 가야왕국이 부활한 것"이라며 함께 웃은 적도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혈연과 지연의 고리를 끊으려 애쓰는 지금, 무슨 망언이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이
혈연과 지연의 끈적거림이 더 이상 기능 못하게 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수로왕의 나이='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은 42년에 태어나 가락국을 세웠고, 199년에 158세의 나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158년이나 사나 하는 의문도
생기겠지만, '가락국기'의 수로왕은 건국신화라는 특별 형식의 이야기에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삼국지' 왜인전은 3세기 왜인들의 평균
수명을 80~100세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발굴되고 있는 인골의 평균 수명은 40~50세에 불과합니다. 양쪽을 정합적으로 해석하면 비슷한
시기의 왜인사회는 1년에 2살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봄에 씨 뿌리고 한 살, 가을걷이 하고 다시 한 살을 먹는 것 같은 시간의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수로왕의 실제 연령은 158세를 둘로 나눈 79세 정도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원조 할아버지=그러나 이러한 추정이
성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삼국유사'가락국기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수로왕의 생몰연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8세는 몰년에서 생년을
뺀 계산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42년 탄생 즉시 왕이 될 수도 없고, 158세를 살 수도 없기 때문에, 158년은 가락국의 건국에서 완성에
이르는 일종의 국가 형성기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가 건국자인 수로왕에 의해 대표되는 전승으로 남은 것으로 봄이
좋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갔던 심수관이란 도공이 400년 이상 지난 지금 일본 큐슈 남부에 살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의 심수관은
'원조 심수관'의 14대손이 됩니다만, '원조'와 똑 같은 심수관의 이름을 명함에 새겨 내밀고 있습니다. 혹시 이렇게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수로왕의 출신지=김해의 '원조 할아버지'로 수로왕을 의심할 사람은 없지만, 수로왕 집단도 처음부터 김해인은 아니었고,
외부에서 이동해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로왕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요? 우선은 고조선(古朝鮮)이 있었던 서북한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
신라는 조선유민(朝鮮遺民)이 산과 계곡 사이에 살면서 시작되었다 합니다. 조선유민이란 바로 고조선의 남은 백성입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은 세계적 철의 제국이었던 한(漢)을 상대로 1년 동안이나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했던 위만조선의 철기문화는
요하의 연화보유적과 청천강의 세죽리유적 등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한에게 패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경주에 도착해 신라를 세웠고, 바닷길로
생각됩니다만 김해에 도착해 가락국을 세웠습니다. 수로왕은 고조선에서의 국가적 경험과 철기문화를 가지고, 아홉 촌장들에 의해 영도되던 부족연합의
구간사회를 통합했던 겁니다. 구간사회인은 청동기의 고인돌을 만들었지만, 수로왕 집단은 철기가 부장되는 목관묘(木棺墓)와 목곽묘(木槨墓)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목곽묘는 수로왕 집단의 고향이었던 서북한지역의 무덤 형태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자료에 따른다면, 수로왕의
출신은 고조선의 멸망에서 구하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국제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