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고대 동북아의 외교와 전쟁

이강기 2015. 9. 16. 22:04

고대 동북아의 외교와 전쟁

 

- 7세기의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

 

 

 

                                        임 기 환(고구려연구재단)

 


 


 

  머리말

 


 

국가간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교섭과 충돌은 구체적으로 외교와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고대 동북아시아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다수의 국가와 종족세력들이 흥망을 거듭하고 세력의 부침이 교차되는 다원화된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와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동북아의 국제관계의 전모를 살펴보는 것은 발표자로서는 감당키 어렵다. 본 발표에서는 고대 국제관계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7세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5?6세기대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북조와 남조로 나뉘고, 여기에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柔然 및 서역의 吐谷渾, 동방의 고구려가 세력권을 구성하며, 이들 국가 사이 역관계의 連動性에 의해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는 다원적인 국제 질서였다.1) 이러한 국제질서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고구려?백제?신라?왜 및 靺鞨?契丹 등 여러 국가 및 종족세력은 적어도 북방 遊牧세력과 中原세력의 영향과 세력 침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황에서 독자의 力?係와 국제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6세기 중반 이후에는 5세기 이래 국제질서 운영의 주인공들인 北魏와 남조 梁, 북방의 柔然 등이 퇴진하고, 새로이 북방에서는 突厥이 대두하며 중원에서는 통일제국으로 수와 당이 차례로 등장하는 격렬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장차 동아시아 전체 국제질서의 재편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7세기에 들어 끊임없이 전개되는 전쟁 속에서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였고, 신라가 한반도의 통일국가로 성장하였으며 만주에서는 발해가 성립하였다. 이는 곧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국제질서의 재편 결과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동향을 통해 5?6세기를 외교의 시대가 할 수 있다면, 7세기는 전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양 시대 국제관계의 성격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7세기에 나타난 독특한 동북아 국제관계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2)

 


 

1.  동북아 세력권역의 해체와 책봉-조공질서의 변화

 

598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와 隋 사이의 전쟁은 5세기 이후 고구려와 중원세력의 첫충돌이었다. 이는 5~6세기에는 만주?한반도?일본 지역의 국제관계가, 중국의 南北朝나 북방 遊牧세력의 국제관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개되어 왔음을 뜻한다. 물론 양 권역이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세력변동의 연관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양 권역의 여러 국가간의 교섭을 매개하는 외교형식은 주로 冊封과 朝貢 관계였다.

 

고구려는 북중국을 통일한 北魏와 교섭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남조 외교를 구사하였다. 북위 역시 배후의 안정이라는 면에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 남조의 입장도 ?북위의 견제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와 외교적 이해가 일치하고 있었다. 백제도 남조와 교섭하고 있으나 그 성격은 고구려와 전혀 다르며, 오히려 백제는 대고구려전략을 위해 倭나 신라와의 교섭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倭 역시 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 외에 남조와 직접 교섭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 이외에 신라?가야?왜 등의 국가적 성장으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더욱 다원화되었으며, 이에따라 동북아에서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갖는 국제질서 상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 등 동북아의 제국가가 중국의 제왕조와 맺고 있는 冊封?朝貢 관계는 외교 관계의 한 형식으로서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면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봉이나 조공이 갖는 현실적인 기능도 서로 다르고, 이에 따라 책봉?조공관계에 대한 서로의 인식도 차별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적 인식을 전제로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이란 외교 형식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은 피책봉국의 자립성과 독자성에 대한 남북조 왕조의 容認이었다.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 관계의 다양한 내용과 차별성을 고려하면, 이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하나의 ‘책봉-조공체제’로 파악하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남북조시기는 중원 왕조가 분열됨으로써 주변 제국, 즉 피책봉국이자 조공국의 주체적 입장이 책봉?조공 관계에서 보다 강하게 드러나는 시기였던 것이다.3)

 

그런데 7세기에 들어 중원의 통일 세력으로서 隋와 唐의 경우 중국 중심의 天下?이나 황제의 권위를 실현시키려는 대의명분론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제 질서를 요구하면서 ?동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隋가 건국 직후 주변국에 수여한 책봉호의 구성을 보면,4) 4세기 이래 각국의 현실적 지배력을 상호 인정하던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이 변모하였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의 수립이었다.

 

隋나 唐이 통일제국으로서 책봉?조공의 형식을 통하여 관철하려는 세계 질서는 기존에 고구려나 백제가 갖고 있던 책봉?조공관과는 현저히 달랐다. 여기서 이념적으로 고구려와 수?당의 정면 충돌이 예상된다. 그런데 남북조 시기의 책봉?조공질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던 신라의 경우에는 기왕의 책봉?조공 관계에 대한 독자의 전략이나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점이 신라가 隋나 唐이 요구하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책봉?조공관이나 국제 질서를 손쉽게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 남북조 시기에도 중원세력이 서역이나 북방세력과 맺고 있던 경험 및 동북아의 여러 국가와 맺고 있던 교섭의 경험이 달랐던 만큼, 통일세력으로서 등장한 수와 당도 일차적인 관심은 北方과 西域이었다. 그런데 북방과 서역이 중원세력의 통제 아래에 들었을 경우 중원세력이 동북아에 대해 어떠한 동향을 보일 지는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후 삼국과 수?당의 관계는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면서 변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수?당에 의한 중원의 통일로 이제까지 남북조의 분열 구조 위에서 전개하여 온 고구려의 외교 전략은 깨지게 되었다. 더욱 수?당에 의해 중국과 북방세력이 통합되고, 또한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도 수?당 제국의 구심력을 쫓아 수?당와 연결됨으로써 삼국 간의 상쟁에 중원세력이 침투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당시 수?당에 대한 강경한 외교정책이 고구려로서도 유일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못한 배경에는 5세기 이래 과거 고구려 세력권에 대한 복고적 집착도 일조를 하였다고 짐작된다. 6세기 이후 고구려의 대외 전략은 중국 세력에 대비하고 신라를 압박하면서 옛 세력권을 재건한다는 입장이었다.5) 그런데 이제 국제 정세가 변화하였는데도 이 전략에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고구려가 신라나 백제를 동맹관계로 만들지 못한 데에는 4세기 이래 지속된 삼국간의 전쟁과 갈등관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삼국의 ?隋??唐 외교는 곧 삼국간 전쟁이 격화되면서 초래된 결과로, 동북아에서 이루어지는 삼국간 역관계의 범주가 수?당 중심의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원세력의 동향이 동북아 정세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동북아 독자의 국제관계의 범위가 해체되고,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력 변동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 결과 7세기에는 고구려 혹은 동북아세력과 중원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하고 격화되었다는 점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면이었다.

 


 


 

2. 주변세력의 성장과 국제관계의 연동성

 


 

동북아일대와 중원 및 북방세력간의 동향이 밀접해졌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와 수의 전쟁단계만 하여도 전쟁 당사자는 隋와 고구려에 한정되었고 더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런데 隋가 주변의 강국인 突闕과 吐谷渾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에 대한 지속적인 공벌을 한 결과가 다른 주변 제국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5세기 이래의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토욕혼?고구려 및 돌궐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이들 이외의 주변세력이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그만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변동의 요인이 多岐化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고구려의 주도권 약화와 신라의 성장은 삼국간의 항쟁을 더욱 격렬하게 촉진하고, 나아가 이러한 삼국의 항쟁에 중원세력이 개입될 개연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즉 중원세력의 입장에서는 적대세력과 동맹세력을 구분하고, 이를 통한 국제질서의 재편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이는 唐대에 현실화된다.

 

돌궐의 경우는 내부 분열과 隋의 공벌로 일찍이 그 세력이 약화되어 비록 수 멸망 직후 일시 세력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과거 柔然 등 북방세력이 가졌던 위협성을 중원세력에게 보여주지 못하였다. 중원의 최대 적대세력인 북방세력이 너무 쉽게 수나 당에게 굴복함으로써, 중원세력이 서역이나 동방으로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돌궐과 고구려의 세력 약화는 요해지역에서 거란?말갈 등을 비롯한 제민족이 서서히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게 되었고, 후일 고구려 국가의 해체는 거란과 말갈의 성장을 촉진하여 이들 제종족의 역사적 활동이 향후 크게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과 왜의 관계도 유의된다. 왜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정세변동에서 한 발자욱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전통적으로 백제와의 교섭이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수의 등장 이후 새로이 고구려와 왜의 외교관계도 밀접해졌으며, 왜 역시 한반도내의 정세 변동에 연관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백제 멸망 직후 이 전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던 倭마저도 663년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어 백촌강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 좋은 예이다. 

 

이처럼 신라?백제?왜 등 주변 제국은 물론 거란?말갈 등이 성장하여 이들이 갖는 국제적 위상이 달라지게 되면서 고구려와 당 전쟁 과정에서는 수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전쟁의 당사자나 참여자가 대거 늘어났다는 점이다. 본래 이 전쟁의 기본 축은 당과 고구려이지만, 당이 돌궐?거란을 동원함으로써 다수의 세력집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더욱 660년 백제 정벌전부터는 신라가 이 전쟁의 또다른 중심축을 맡음으로써 전쟁 수행의 주체가 확대되었음은 물론 이제 전쟁의 기본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다.

 

한편 이와같은 정세변화 속에서 당을 중심으로 주변 제국가의 역관계가 이전보다 깊은 연관을 갖고 전개되고 있었다. 즉 동아시아 전체의 국가간에 전개된 외교전략과 전쟁에서 연동성이 훨씬 깊어진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는 수,당을 견제하고 대항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국가동맹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북방 유목국가나 내륙아시아 국가와 동맹을 시도한 바 없지는 않다.6) 607년 북방의 돌궐과도 제휴를 시도하여 수양제의 침입의 빌미를 주기도 하였고, 645년 당의 배후를 공격한 설연타의 동향 역시 고구려와 薛延陀의 동맹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당은 두통거리인 돌궐이나 설연타 등을 제압할 때에 이들과 적대적인 다른 세력을 이용하였는데,7) 일종의 以夷制夷정책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전략 역시 당시 동아시아 제국간의 정세변화의 連動性이 높아진 결과이다.

 

당의 대고구려전이나 대신라전의 경우에도 대체로 북방과 서역의 정세와 직간접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 백제 멸망이후 670년을 전기로 하는 신라의 당에 대한 공세는 서역의 정세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었다. 당이 660~670년 초반까지 한반도에 군사력을 집중한 결과 서역과 북방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토번의 성장, 돌궐의 재등장을 초래하게 되었다.8) 그리고 서역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당의 주력이 서역으로 돌려지게 되자 신라와 고구려유민들은 대당전쟁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76년 나당전쟁의 종식에도 676년 이후 급박해지는 토번과의 전쟁, 토번의 동맹세력인 서돌궐의 재흥 등이 중요한 국제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북방과 서역의 동요는 계속되었으며, 이는 다시 동북방에 영향을 주었다. 696년 동북방에서 거란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말갈과 고구려유민이 독립하여 698년에 발해가 건국된 것도 그러한 동향과 연관된다. 

 


 

맺음말

 

7세기 들어 나타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크게 2가지 축을 중심으로 변동하고 있었다. 하나는 중국의 통일국가인 수, 당과 고구려 사이에 이루어지는 동북아시아 세력권 장악을 둘러싼 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 내 삼국간 전쟁이다. 이 두가지 축은 서로 다른 구조와 성격을 갖는 것이지만, 고구려가 양쪽의 공통된 당사자라는 점과 나아가 隋와 唐이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점차 하나의 축으로 통합되어 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것은 唐代에 현실화되어 고구려-당의 전쟁과 신라의 삼국통합전쟁이 결합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680년 한반도에서 세력재편이 끝났을 때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당을 중심으로 서역에서는 토번이 세력을 확대하고 북방에서는 동돌궐이 재흥하여 反唐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달리 동북아시아에서 신라는 당과 재통교 이후 시종 우호적이고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일본 역시 당의 율령체제를 수용하면서 親唐적인 입장이었다. 발해는 한때 군사적 충돌까지 갔으나, 기본적으로는 당과 화평관계를 유지하며 당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동북아의 여러 왕조는 親唐의 태도를 견지하였는데, 이는 수,당에 대하여 시종 적대세력으로 남았던 고구려의 멸망이 가져온 결과의 하나였다. 이제 동북아는 다시 외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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