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古代 東北亞 諸民族의 交易

이강기 2015. 9. 16. 22:03

古代 東北亞 諸民族의 交易

 


 

金泰植(弘益大)

 


 

        1. 머리말

 


 

3세기 무렵까지 동북아시아의 교역은 낙랑군과 金海 加耶國의 仲介로 중국-한반도-일본열도가 연결되는 형세였으며, 거래 물품으로는 中國製 銅鏡, 樂浪産 비단, 辰弁韓의 鐵, 倭의 靑銅儀器 등이 있었다.1) 그러나 4세기 초에 중국 군현이 축출된 시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의 각 정치 세력들이 결집됨에 따라 교역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변하였다. 그러면 본고에서는 4세기부터 9세기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의 변천 과정을 개관해 보자.

 


 

        2. 高句麗의 對外交易

 


 

4세기에 고구려는 北朝의 정권들 및 東晉?宋 등과 직접 교섭에 임했다. 당시에 고구려가 중국으로 받은 문물들에는 교역에 의한 것도 있고 요서 및 요동지역 이주민에 의한 것도 있어서, 前燕으로부터는 壁畵古墳, 鑿頭形 鐵鏃, 帶金具 등의 문물을 받았으며,2) 前秦으로부터는 佛像, 律令과 같은 고급문화를 도입하였다. 集安에서 출토된 東晉製 靑磁와 長頸壺는 고구려의 귀족들이 사용하던 사치품으로서 남조와의 교역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이다.3) 그 후 5~6세기에도 고구려가 중국과 교섭한 사실은 여러 기록에 보이나, 그를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외에 무엇을 수입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가 그에 대응하여 중국에 전한 물품으로는 5세기에 말, 黃金, 白銀, 담비 가죽, ?矢, 石弩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말과 銀은 고구려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고, ?矢와 石弩는 읍루의 사절을 대동하고 가서 전한 것이다. 또한 담비 가죽은 고구려가 ?婁와 南室韋에게 쇠손칼 또는 鐵을 공급한 대가로 구한 것이었다.4) 6세기 초에 고구려는 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夫餘의 黃金과 涉羅의 白瑪瑙[珂]를 중개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婁, 南室韋, 夫餘, 涉羅 등의 주변 민족에게 철기 생활도구 등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담비를 비롯한 동물 가죽이나 천연 보석류를 받아 중국에 중개 교역하고, 또는 자신들이 생산하는 銀이나 말을 중국에 보내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동북아의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중추적 중개교역자이면서 생산자였던 것이다.

 


 

        3. 百濟의 對外交易

 


 

백제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에 걸쳐 西晉의 錢文陶器와 東晉의 靑磁와 같은 고급 도자기를 많이 수입한 것이 특징적이다. 고구려나 신라, 가야, 왜 등과 달리 4세기의 백제 귀족이 이처럼 중국 도자기를 선호하고 있었던 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축출 이후 백제에 편입된 중국계 이주민들이 지배계급의 일부를 구성하며 중국 본토 문화의 수요층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5)

 

  5세기에 백제와 중국 남조 宋 사이에는 420년 이후 471년까지 將軍號 제정과 관련된 많은 정치적 교섭이 있었으나, 교역과 관련된 기록이나 유물은 그리 흔치 않고, 백제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도자기류는 시기가 내려올수록 줄어드는 편이다.6) 그 이유는 6세기 이후 백제의 중국문화에 대한 수입 자세가 고급물품보다 그 이면에 있는 지식과 기술체계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7) 450년에 백제가 宋에 易林式占과 腰弩를 구하여 받았다는 것이나,8) 541년에 梁에 方物을 보내면서 涅槃等經義, 毛詩博士, 工匠, 畵師 等을 청하여 받았다는 기록에서9) 이를 확인할 수 있다.

 

  4~6세기에 백제가 중국 남조에 도자기, 서적, 기술자 등의 대가로 어떤 물품을 보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晉 太元中(376~396)의 須, 義熙中(405~418)의 餘映, 宋 元嘉中(424~453)의 餘毗가 사신을 보내 生口를 바쳤다”는 <<梁書>>의 기록을 통해서, 4~5세기 백제의 방물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람(노동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百濟와 倭 사이의 교역은 어떠했을까? <<三國史記>>로 보아 兩者의 교섭은 397년부터 418년까지 5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당시에 왜국은 백제 태자 ?支를 호위하기 위한 병사 100인과 夜明珠를 보냈고 백제는 왜국에 白綿 10匹을 보냈다.10) 그러나 4세기부터 5세기 전반까지 백제와 왜 사이의 문물 교류 흔적은 확인되지 않다가 5세기 후반에 이르러 백제 남부지역 土器의 영향이 일본 須惠器에 일부 나타날 뿐이다.

 

  왜와의 교역 중심은 6세기 전반 내지 중엽 이후로 백제로 옮겨졌다. 당시에 백제는 왜국의 요청에 따라 五經博士, 僧侶, 佛像, 經論, 造佛工, 造寺工 등을 보냈으니, 일본의 奈良 飛鳥 문화는 그 반영이다.

 


 

        4. 新羅의 4~6세기 對外交易

 


 

신라는 4~5세기에는 중국과 직접 교역한 사실이 잘 보이지 않고 고구려와의 교역이 문제가 된다. 慶州지역 출토 板甲이나 綠釉陶器 등은 신라와 고구려의 교섭이 4세기 전반부터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1) 그 후 377년과 381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중개로 前秦에 연결하던 상황을 보이고 있다.

 

  신라의 積石木槨墳 출토품 중에서 외래계의 것은 東晉 龍首柄?斗와 黑褐釉小甁, 高句麗 乙卯年(415)銘 靑銅壺?와 延壽元年辛卯銘 銀盒, 漢式 靑銅容器 등이 있는데,12) 그 중에 靑銅鼎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사회로 이입된 것이다.13) 樹白樺樹皮冠帽, 페르시안 또는 로만 글라스, 七寶裝飾寶劍, 板狀嵌玉金팔찌 등과 같은 중앙아시아 계통 물건들도 있다.14) 또한 5세기 이후 신라는 金冠과 금귀걸이를 비롯한 金工品을 자체 생산하였는데, 그 중에 步搖 장식을 만들어 접합하는 기술은 박트리아 및 慕容燕의 步搖冠에서 온 金工術이고, 금귀걸이의 空心多面體 구슬은 동남아시아 및 東晉의 金工術인데, 이는 모두 고구려를 거쳐서 들어온 기술이라고 추정된다.15)

 

  그러므로 4~5세기 신라에서 출토된 외래 물품들은 중국의 漢, 東晉, 慕容燕,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카자흐스탄, 중국 북방의 匈奴를 비롯한 胡族 등의 것이든지, 또는 고구려 계통의 물품이다. 그러나 신라가 그들 국가들과 직접 교역한 기록이 없으므로, 신라 문화의 외래적 요소에 북방이주민의 영향을 일부 인정할 수 있다 해도, 그 主流는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5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단절한 신라는 521년에 백제사신을 따라 梁에 조공한16) 이후, 564년에 北齊, 566년 이후에 陳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17) 陳으로부터 불교 經論 1,700여 권을 받았다.18) 이로 보아 6세기에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불교와 같은 고급문화의 수입이었다.

 


 

        5. 加耶의 對外交易

 


 

낙랑군이 약화된 3세기 말 이후 가야에서는 서북한지역과의 교역이 감소하고 일본열도와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김해 大成洞 및 良洞里 고분군의 鐵?, 銅?, 虎形帶鉤, 曲刀 등은 내몽고나 중국 동북지역에 기원을 둔 遊牧騎馬民族 계통의 유물들로서, 서북한지역을 통해 단속적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9)

 

  4세기 가야지역의 倭系 유물은 몇 점의 土師器와 巴形銅器, 碧玉製石鏃 등이나 그것이 주요 수입품은 아니었다. 당시에 가야는 왜에게 物的 資源인 鐵鋌과 선진문물을 공급하였으며, 왜는 가야에게 그 대가로 人的 資源인 勞動力20) 또는 軍事力21)을 지불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상호 교류를 주도하며 김해의 가야국과 河內 세력은 각자 가야연맹 또는 일본 서부연맹의 맹주국으로서 위치를 굳혀갔다.

 

  4세기 말에 백제는 옛 대방지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큰 전쟁을 수행하던 중 가야를 매개로 하여 倭兵을 대거 동원하였다. 그러나 백제-가야-왜의 연합세력은 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공세에 와해되었고, 그런 와중에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되었다.

 

  5~6세기 후기 가야의 교역은 4세기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문헌상으로는 중국 南齊에 조공하여 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은 加羅王 荷知, 즉 대가야 嘉悉王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箏을 고쳐서 加耶琴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정도이다. 중국 계통의 출토품도 전기 가야시대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반면에 왜와의 교역은 김해를 대신하여 고령을 중심으로 계속되어나갔다. 5세기 후반 일본열도 각지의 유력한 首長墓들에서 대가야의 威勢品으로 보이는 高靈樣式 귀걸이, 劍菱形杏葉, 馬? 등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고령에서는 오키나와산 夜光貝製 국자와 倭系 銅鏡이 출토되었다. 이는 5세기 후반에 왜와의 교역의 중심이 김해의 加耶國에서 고령의 大加耶國으로 옮겨진 변화를 반영한다.22)

 

  그러나 6세기 전반에 백제가 중국 南朝로부터 획득한 선진문물과 학문, 기술 등을 바탕으로 직접 倭와의 교섭을 시도하자, 대가야는 그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 열세는 곧이어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의 약화로 이어져 562년에 신라에게 병합되었다.

 


 

        6. 統一期 新羅의 對外交易

 


 

  7세기 중엽에 신라는 羅唐聯合軍을 결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어 羅唐戰爭을 벌였기 때문에 唐과의 긴장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698년에 渤海가 성립되자 8세기 이후 신라와 당은 가까워져서 公貿易 위주의 교역을 개시하였다.

 

  당시에 신라의 朝貢品은 金?銀?銅?磁石 등의 鑛物類와 布?帛 등의 織物類, 牛黃?人蔘 등의 藥材類 그리고 말?개 등의 動物類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의 回賜品은 綾?羅 등의 비단을 비롯한 각종 細工品과 書籍 등이었다. 또한 신라 遣唐使들은 唐物뿐만 아니라 서남아시아와 아라비아 등지의 물품도 다량 買入하였다.23)

 

  8세기 후반 내지 9세기에 황해 兩岸의 당과 신라는 점차 사회 혼란의 와중으로 돌입하였다. 그 후 신라와 당 사이에는 私貿易이 성행하였으며, 張保皐는 淸海鎭을 설립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한편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668년 이후 신라는 對唐 抗戰의 연장선 위에서 對日 외교를 진행시켰고, 일본은 신라가 문물수입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신라의 법률, 학술, 사상, 제도의 수입에 역점을 두었다.24)

 

  8세기 전반에는 신라와 일본은 경쟁적으로 遣唐使를 보내 당과의 교류를 추진하였다. 양국은 상호간에 정치적 우위를 주장하여 외교상 번번이 충돌하였으나, 외면적 우호는 지속하였다.25) 730년대 당과 발해의 대립 속에 신라는 당과 가까워지고 일본은 발해와 가까워졌지만, 신라와 일본 사이의 문물 교류는 增加一路에 있었다. 신라는 경제적으로 이득이 많은 對日 교역의 확산을 추구하였고, 일본은 買新羅物解와 正倉院 所藏品에 보이는 다양하고 국제성 풍부한 신라 物産에 매료당하였기 때문이다.26)

 

  신라에서 일본에 賜與된 물품은 각종 器物과 일상생활 도구, 가구 등과 같이 신라의 工房에서 만든 工産品과 고급 견직물, 피혁제품과 각종 약물 등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 신라에 賜與된 물품은 綿, 絲, 絹, ? 등이었다. 일본 天平文化의 精華인 正倉院 보물 중에 신라 문물임이 확실한 것으로는, 배모양 먹, 新羅琴(=加耶琴), 佐波理加盤과 수저 세트, 色氈과 花氈 등이 있다.27) 그러므로 7~8세기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역은 신라의 가공생산품과 일본의 원료가 교환되는 관계였다.

 

  9세기에 平安京으로 옮긴 일본은 遣唐使를 폐지하고 간헐적으로 京師교역을 이루었으나, 교역의 주류는 淸海鎭을 중심으로 한 신라 상인들의 중개 활동을 통하여 西日本에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동아시아의 교역은 종전의 정치적 冊封體制 부수적인 성격을 탈피하여 좀더 경제성이 강한 교역으로 대체되었다.

 


 

        7. 渤海의 對外交易

 


 

  발해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가장 빈번한 접촉을 가졌던 것은 당나라였다. 발해와 당 사이에는 732년에 한 차례의 전쟁이 있어서 양국간에 긴장이 조성되었으나, 762년에 당이 安史의 亂과 관련하여 渤海國王으로 상향 책봉한 이후로는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726년의 黑水靺鞨 사건 이후 불쾌한 상황 아래에서도 727년에 2차례, 728년에 1차례, 729년에 3차례, 731년에 3차례나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738년에는 당에 <<唐禮>> 등을 구하여 받았다. 이는 당의 통치제도를 수용하려는 발해의 적극성 때문이다.28)

 

  발해의 당나라에 대한 朝貢品에는 담비 가죽, 바다표범 가죽, 말, 昆布와 같은 自然産物, 그리고 瑪瑙 보석으로 만든 술잔과 금은으로 만든 불상 등의 鑛物細工品 등이 있다.29) 당은 발해에의 回賜品으로 주로 絹과 帛 등의 직물과 金銀製 그릇과 허리띠 등 귀족들의 기호품을 주었다.30)

 

  발해와 일본 교역의 1기는 727년부터 759년까지로, 발해는 당과의 무력 항쟁 및 신라와의 군사적 긴장 때문에 일본과의 교역에 열중하였다.31) 발해와 일본 교역의 2기는 762년에 발해와 당의 화해가 이루어진 이후의 시기이다. 그 후 9세기에 걸쳐 발해의 사신단은 상인단의 성격으로 변질하였으며,32) 이는 발해의 관심이 정치에서 경제로 이동한 것을 반영하고 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전한 교역품은 담비, 바다표범, 곰, 호랑이 등의 모피, 人蔘, 꿀과 같이 발해에서 생산되는 것과, 玳瑁 술잔, 麝香과 같이 당과의 교역에서 얻은 것들이었다.33) 발해가 일본에서 들여온 물건들로는 絹, ?, 絲, 綿과 같은 직물류가 주된 것이었으나, 때에 따라 黃金, 海石榴油, 水晶念珠, 檳?樹扇, 金漆 등의 특산물도 있었다.34)

 


 

        8. 맺음말

 


 

  4세기에 동아시아의 교역은 다원적인 체제로 재편되었다. 북방민족들의 에너지 분출로 인하여 중국이 둘로 분열되는데 반하여, 한국은 4개 지역중심 중 고구려와 백제의 내부 통합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요서?요동 및 서북한지역으로부터 중국계 이주민을 흡수하고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직접 교역으로 받아들이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고구려는 이 단계에 이미 국가제도 구축에 필요한 유교, 불교 등의 고급문화까지 정착시키면서 앞서나갔고, 백제도 이를 일부 달성할 수 있었다. 반면에 신라, 가야, 왜는 아직 제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고구려 및 백제와 제한적인 교역을 이룰 뿐이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동아시아 북부의 중추적 중개교역자 겸 생산자로서 중국의 남북조 및 주변 민족들을 조율하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5세기 이후 宋, 梁과 교역하면서 국가제도 정비를 위한 고급문화 수입에 주력하였고, 6세기에는 이를 바탕으로 신라, 가야 및 왜에 대한 백제 중심의 교역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6세기 초에 들어 내부 통합을 이루고, 초기에는 백제를 통해, 후기에는 陳을 통해 선진문물 수입을 도모하였다. 가야는 5세기 후반에 회복되어 백제 및 왜와의 사이에서 중개교역을 주도하려 하였으나 6세기 전반에 백제와 왜가 직결되자 발전의 원동력을 상실하였다.

 

  6세기 후반에 중국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동아시아는 다시 큰 변화를 맞이하여, 7세기 후반에 한국은 신라와 발해의 2국으로 정비되고, 일본은 내부 통합과 제도 정비에 진전을 보았다. 그 후 각국의 교역은 정치 상황의 전개에 따라 시기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였으나, 결국 8세기 후반에 이르면 당, 신라, 발해, 일본이 비슷한 국가 구조를 이루고 대등한 경제교역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4세기 이후 약 500년에 걸쳐 동아시아 각국 사이에 이루어진 활발한 교역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