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念.思想.思潮

자살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 소펜하우어

이강기 2015. 9. 18. 08:10

자살에 대하여




1

내가 알고 있는 한, 여러 종교 중에서 자살을 범죄로 인정하는 것은 다만 일신교, 즉 유태교뿐이다. 그런데 《구약성서》나 《신약성서》 속의 어디에도 자살에 대한 적극적 금지나 부인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교의 신학자들은 자살에 대한 엄중한 금지를 제멋대로, 각기 자기가 만든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기초를 두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기초가 된 그들의 철학적 사상이라는 것이 졸렬한 것이어서 그것을 논증하기에는 몹시 미흡하다. 그 약한 논점을 보충하려고 그들은 자살에 대해서 품는 혐오감을, 여러 가지 노골적인 사견(私見)을 드러내거나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자살은 가장 큰 비겁이라든가, 그것은 미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든가,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어리석은 푸념을 늘어놓고 있으며, 또한 자살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아주 무의미한 말을 던진다.

사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몸과 생명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리를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소품과 보유집》 제2권 제121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살은 범죄의 하나로 취급되고, 특히 비천하고 완고한 사이비 신자가 많은 영국에서 자살자는 모독적인 방법으로 매장되고 유산마저도 몰수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배심 재판소는 거의 언제나 자살을 정신 착란에 의한 것이라고 판결한다. 자살을 과연 죄악인가, 아닌가? 나는 이 문제에 관헤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도덕적 감정에 호소하여 판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가령 친지 한 사람이 어떤 범죄, 이를테면 살인이라든가 폭행이라든가, 사기, 절도 따위를 범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인상과 그 사람이 자유 의지에 의한 죽음, 즉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받는 충격을 비교해보면 좋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심한 분노와 극도로 불쾌한 느낌과 처벌이나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자만, 후자인 경우에는 애처로워하는 심정과 동정심을 금치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개 그 자살한 사람의 용기에 대한 일종의 찬양하는 마음마저도 이것에 첨가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잘못한 행위에 대해서처럼 도덕적 비난의 감정을 느낀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친지, 친구, 친척 중에서 스스로 이 세상을 등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모든 사람들이 범죄자를 대하는 것같이 증오의 감정을 품는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성직자가 대체 무슨 권한으로 성서 속에서 아무런 예증도 제시하지 못하고 또한 아무런 확고한 철학적 논증마저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설교 단상이나 또는 저서를 통해서 우리들이 경애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범죄라는 낙인을 찍거나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정상적인 매장 의식을 거부하는지, 한 번 이것에 대한 변명을 요구해 보아야 하겠다눈 것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에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나 근거인 것이며, 내용 없는 문구나 욕지거리 등을 그 대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명백히 해두어야 하겠다.

[이설(異說)] 오히려 나는 성직자들은 대체 어떤 이유로(이런 경우에) 해서 우리들의 친구나 친척에게 낙인을 찍고, 이 사람에게 명예로운 매장을 거절하는가. 나는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성직자들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성서에는 예증이 없다. 철학적 근거도 확실치 않다.그리고 또 이것은 교회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그러한 근거를 가져왔을까. 죽음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최후의 피난처이며, 이것을 성직자들의 명령만으로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는 없다.

형법에 자살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여 그것이 교회에서도 통용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생각해 보묜, 그 금지 자체도 역시 명백히 가소로운 일이다. 도대체 형벌을 부과한다고 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는 사람을 위협해서 그만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에 누가 자살에 실패한 사람을 벌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자살을 하는 데 실패한 그 방법의 미숙함에 벌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더 나아가서 이 문제에 대하여 고대인들의 견해는 앞서 말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플리니우스(로마의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생이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오래 끌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애착이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의 성질이 원래 어떻게 만들어져 있든 간에 남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죽지 않을 수 없으며, 품행이 나쁘고 신을 모독하는 일을 해온 사람도 마찬가지로 죽어간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온갖 선물 중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의 약으로서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더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선물은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물지(博物誌)》 제28권 제1장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은 설사 스스로
자살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이 수많은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최상의 선물이다.
                                                                                                 《박물지》 제2권 제7장

또한 마실리아(지금의 마르세유)와 케아 섬에서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데 대한 적절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 당국에서 공공연히 독인삼을 끓인 독약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여기에 인용해도 좋을 것이다.(《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제2편 제6장 제7절, 제8절)

또한 고대에 얼마나 많은 영웅이나 현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자기의 목숨을 끊었던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은 설사 그 사람 자신에 있어서는 부정한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제15장) 그러나 스토바에오스는 페리파토스 학파의 윤리학에 관한 그의 저술(《윤리학 발췌》 제2권 제7장, p.386) 속에서 "혹심한 불행 중에 있는 선한 사람들이나 또는 너무나 행운에 겨운 악한 사람들은 인생을 작별해야 한다"는 명제를 인용하고 있다. 또한 그 책에는 "그러므로 사람들은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시의 행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자신의 지능을 계발하며 살아가고 미리 자기가 묻힐 무덤에 대해서 생각해두었다가 필요할 땐 언제나 스스로의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 구절도 인용되어 있다. 또한 스토아 학파가 쓴 것을 보면 우리들은 그들이 자갈을 일종의 고귀한 영웅적 행위라고 찬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예증으로 내세울 수 있는 문헌이 100개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이 세네카의 것이다. 또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도 사람들은 자살을 종교적인 행위로 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과부가 분사하는 자기 희생이라든가, 자가르나우트의 수레바퀴 밑에 몸을 던져 치어 죽는 희생이라든가, 갠지스 강이나 사원의 연못 속에 사는 악어에게 몸을 바친다든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인생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연극 속에서도 같은 것을 볼 수 았다. 예를 들면 중국의 유명한 작품 <중국의 고아> 속에서 고귀한 성품을 가진 대부분의 인물이 자살에 의해서 인생을 끝마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살이 범죄라는 시사는 그 연극의 어느 부분에도 나타나지 않고, 또한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자신의 작품 가운데서도 결국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마호메트》의 팔미라나, 《마리아 슈투아르트》의 모티머,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의 주인공이나 쉴러의 《발렌슈타인의 죽음》에 나오는 테르츠키 백작 부인도 모두 그러하다.


그러니 햄릿의 독백이 어떤 죄스러운 명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제 않다. 이 독백은 만약에 세상의 진실이 사람이 죽음으로써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 확실한 바에는 죽음을 무조건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고 푸념하고 있을 따름이다("그러나 그것이 큰일이야"). 아쨌든 일신교, 즉 유태계의 모든 성직자들과 이들과 영합하는 철학자들에 의해서 조작된, 자살에 반대하는 이유나 근거는 용이하게 반박할 수 있는 졸렬한 궤변에 불과하다(《윤리의 기초》 제5절 참조). 흄은 그의 《자살에 관한 시론》에서 성직자들의 궤변에 대해 매우 철저한 반박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 비로소 출판되기는 했으나, 영국의 야비하고 완미(頑迷)하며 파렴치한 성직자의 전체에 의해 즉시 판매 금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아주 적은 부수만이 비밀리에, 그것도 아주 비싼 값으로 판매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위대한 철학자가 쓴 이 책과 또 하나의 논문이 보존된 것은 바젤의 복각본 덕택이다. 당시 영국에 퍼진 자살 반대론을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반박한, 일류급의 사상가인 동시에 저술가의 한 사람에 의하여 씌어진 이 순수한 철학 논문 하나가, 그의 조국에서는 마치 어떤 밀수품이기나 한 것처럼 은밀히 외국으로 반출되어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영국 국민의 커다란 수치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동시에 또 이 사실은 교회가 지닌 양심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자살에 반대하는 단 한 가지 적절한 도덕적 근거를 나의 주저에 논술해 놓았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제67절). 그 논거란, 자살은 고난에 한 이 세상 속에서 참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상적(假想的)인 구원만을 받는 것이므로, 자살은 최고의 윤리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도피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살이 윤리적인 의미의 잘못이라고 해서 반대하는 경우와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의 자살은 죄악이라고 낙인을 찍으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깊은 핵심은 고난(십자가)이 인생 본래의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은 이 고난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대인 사이에서 자살이 용인되고 도리어 존중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교의 견지보다 한층 낮은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됴교가 자살에 반대한다고 하는 앞서 말한 근거는 어디까지나 금욕주의적인 이유이며, 즉 이는 과거 유럽의 도덕 철학자들이 서 있던 입장보다도 훨씬 높은 윤리적 입장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만약에 우리가 이 아주 높은 입장에서 내려온다면, 이미 거기에는 자살을 탄핵할 어떤 확고한 도덕적 이유도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살에 반대하는 유일신교적인 종교의 성직자들이 보이는 저 유별나게 활발한 열의는 원래 성서에 기초를 두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적절한 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거기에는 어떤 감추어진 이유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신이 '모든 것은 다 대단히 좋은 것이니라'고 한 것에 대한 불손한 인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 이유가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또한 이런 유태계 종교의 의무로 되어 있는 낙관주의가 자살로부터 고발당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자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케아 섬 그리스의 케아 섬에서는 노인이 자발적으로 죽음에 몸을 맡기는 풍습이 있었다.
페리파토스 학파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산책하면서 강의했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산책(Peripatos)'이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번역된다.

자가르나우트(Jaggarnaut) 인도의 크리시나 신상(神像). 매년 한 번씩 그 신상을 큰 수레에 싣고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이때 이 수레에 치어 죽으면 극락에 간다고 믿고 신자는 기꺼이 수레 밑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큰일이야 《햄릿》 제2막 제1장 "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으로 시작되는 유명한 독백 중의 한 구절 "Ay, there is the rub...."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여기서는 'But, there is the rub'으로 인용하고 있다.

바젤의 복각본 데이비드 흄의 자살과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시론》, 바젤, 1799, 제임스 데커 간행.



2

일반적으로 인간은 삶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를 능가할 단계에 이르자마자, 자신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의 저항력도 확실히 강력한 것이어서 죽음의 공포는 말하자면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 같다. 만일에 생명의 마지막이 어떤 순수하고 소극적인 것, 다시 말하면 그래서 생존이 갑자기 정지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며, 아마도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종말에는 어떤 적극적인 것이 있다. 즉 육체의 파멸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이것이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고 주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육체는 바로 살려는 의지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말헤서 출구의 문지기와의 싸움은 멀리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곤란한 것이 아니다. 특히 정신적인 고뇌와 육체적인 고통 사이에 있는 대립의 결과로 보면 오히려 수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우리들이 육체적 고통을 아주 심하게 또는 계속적으로 받고 있을 때는 온갖 다른 근심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게 되고, 오직 건강의 회복만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매우 심각한 정신적인 고뇌는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을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육체적인 고통이 더 우위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도리어 우리들에게 일종의 상쾌한 기분 전환이 되어주고 정신적인 고뇌를 멈추게도 해준다. 이것이 바로 자살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즉 자살에 따르는 육체적인 고통은, 그보다 더 격렬한 정신적 고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순수하게 병적이고 심각한 우울증에 사로잡혀 자살로 말려 들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현저하다.



3

답답하고 무시무시한 꿈 속에서 불안이 절정에 달한 순간, 바로 불안 그 자체가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하여 깨어나 보면 이제까지 우리를 괴롭혔던 밤의 괴물 ㅡ 모든 공포 ㅡ 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와 같은 일이 인생의 꿈속에서도 일어난다. 그것은 불안의 절정이 우리에게 이 꿈을 깨뜨릴 것을 강요할 때이다.



4

자살은 또한 일종의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회답을 강요하려는 일종의 과제라고도 불 수 있다. 즉 이 질문은 인간의 현존내와 인식이 죽음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실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툰 실험이다. 왜냐하면 이 실험은 질문을 하고 그 다음 대답을 들을 의식의 동일성마저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출처: 이선우 홈페이지)





죽음에 대하여




1

죽음은 영감(靈感)을 받아들이는 정령(精靈), 철학을 주재(主宰)하는 신....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던들, 인간은 철학적인 사색을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모두 생존에 속한다. 양자는 서로 의지하여 이것이 저것의 조건이 되어 인생의 모든 현상에 두 극단을 이루고 있다. 가장 우수한 인도의 신화에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파괴의 신인 시바는 죽은 자의 해골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생식을 나타내는 영감을 휴대하고 있다. 즉, 사랑은 죽음을 보충하며, 양자는 서로 중화하고 서로 상극을 이룬다.

그리하여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죽은 자를 위해 값진 석관(石棺)을 마련하고, 그 조각에 주연(酒宴)이나 무도(舞蹈), 혼례, 사냥, 짐승들의 싸움이나 바쿠스제의 소란 등 ㅡ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즐거움에 충만하고 활동적이고 긴장된 삶의 이모저모를 표현했으며, 때로는 많은 남녀가 음락(淫樂)에 빠진 장면이나 자타르 신이 양(羊)과 교미하는 모습도 그리고 있다.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매장하는 개인의 죽음과 자연의 영원불멸한 생명을 대조시켜 앞으로 효과적인 방법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위안하려거 했다.



2

죽음은 음락을 즐기는 성교를 통하여 결합된 매듭이 처참하게 풀리고 인간의 생존에 따르는 근본적인 미궁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커다란 환멸이다.



3

대다수 사람들이 지닌 개성은 의의와 가치가 적고, 측은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그들이 죽음에서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무슨 참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인류의 특질이며, 이 특질은 개인의 죽음에 의해 침해되는 일이 없다. 영원한 생존은 인류에 대해 분명히 기대되는 것으로, 결코 개인에게 기대되지는 않는다. 개체로서의 인간에게 영원한 생존이 주어지더라도, 그 성격은 불변하고 그 지능은 좁으므로, 이런 개체로서 살아가기가 오히려 적막하고 단조로워 삶에 염증을 느껴, 차라리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허무를 택하게 될 것이다.

개체의 불멸을 원하는 것은 하나의 혼미(混迷)를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개성은 또 하나의 특수한 혼미와 과오 ㅡ 그러니까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삶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서 해탈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충분한 실증은, 대부분의 인간, 아니 모든 인간은 자기가 꿈꾸는 어떤 세계에 옮겨 살게 되더라도 절대로 행복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불행과 고난이 없는 세계라면 그들은 권태의 포로가 되어버릴 것이며, 그리고 이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정도에 따라 불행이나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보다 더 좋은 세계로 그들을 옮기는 데 그쳐서는 충분하지 못하며, 반드시 그들을 송두리째 개조하여 지금의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오늘날 살고 있는 모습과도 전혀 다를 것이며, 죽음은 예비적인 단계가 될 터이므로, 이런 견지에서 보면 죽음은 도덕적인 필요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의 다른 세계로 옮겨진다는 것과, 자신을 완전히 개조한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죽음이란 개인적인 의식에 종말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의식이 죽은 후에도 다시 점화되어 무한히 존속되리라는 소망은 부당하다.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영원히 지속되는 의식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빈약하고 하찮고 비속한 사고와 많은 걱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의식은 죽음으로 일단락이 나서 영원히 끝장을 보아야 한다. 모든 생활 기능의 움직임이 그쳐 버리는 것은 그것을 덜어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죽은 자들의 얼굴에 깊은 안식이 깃들어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4

인간의 이런 한 토막 꿈 같은 생애에 비하면, 그 앞뒤에 놓인 무수한 시간의 기나긴 밤은 얼마나 무한한 것일까? 가을에 곤충의 세계를 살펴보면, 어떤 놈은 오랜 동면에 대비하여 잠자리를 마련하고, 어떤 놈은 그냥 한겨울을 지내고 봄이 돌아오면 다시 먼저대로 재생되기 위해 껍질을 만들지만, 대부분의 곤충은 죽음의 팔에 안겨 영원히 잠들기 위해, 적당한 곳에 알을 낳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알로 말미암아 다시 새로운 벌레로 재생한다.

이것은 모두가 자연이 주는 불멸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즉, 자연은 이렇게 해서 삶과 죽음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과, 그 어느 한쪽만이 유독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곤충이 애써 둥지나 구멍이나 굴을 만들어 봄이 되면 태어날 유충을 위해 먹이를 장만하면 안심하고 죽어가는 것은, 마치 인간이 밤이 되면 다음 날을 위해 옷과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편히 잠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만일 곤충이 스스로, 또는 본성에 의해 늦가을에 사멸하는 것이(마치 잠자리에 드는 인간과 눈뜬 인간이 동일한 것처럼) 봄이 되어 태어나는 유충과 동일하다면, 이런 사후의 준비는 하지 않을 것이다.



5
여러분이 기르는 개를 보라. 얼마나 태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개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몇 천만 마리의 개가 죽어갔지만, 이 사실은 조금도 개의 관념을 손상시킬 수 없고, 조금도 수심에 잠기지 않는다. 당신들의 개는 그처럼 무심히, 마치 오늘이 개로서 마지막 날이나 되는 것처럼 활기 있게 살아가고 있다. 그 눈에는 개로서의 영원한 본체가 빛나고 있다.

그렇다면 수천 년 동안에 걸쳐 죽음이 멸망시킨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개가 아니다. 개는 당신의 눈앞에 아무 손상도 입지 않고 앉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죽음의 손에 멸망된 것은, 거의 형상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한정된 빈약한 인식 능력은 시간 속에서 그 그림자와 이 형상을 의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6

자기가 죽은 다음의 일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위안을 받을 수 없는 사람도 물질이 연속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것으로 해서 어떤불멸관(不滅觀)을 얻어, 어느 정도의 위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중얼거릴지 모른다.

"무엇이라구? 한갓 티끌이나 물질 따위가 연속한다고?
인간의 영생이란 고작해야 이런 거란 말인가?"

"잠깐만, 당신들은 그 티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티끌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티끌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티끌을 무시하기 전에 티끌이 무엇인지 알아야지, 티끌이나 재에 불과한 물질은 이윽고 물에 녹아서 결정이 되기도 하고, 또는 금속과 섞여 빛을 내기도 하여, 전광을 비추기도 하고, 자력(磁力)으로서의 위력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식물이나 동물도 되고 나중에는 그 불가사의한 품안에서 당신의 협소한 정신이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생명까지도 탄생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물질의 존속은 과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7

죽음과 삶이라는 유희보다 더 큰 승부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생사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극도로 긴장하여 불안한 마음으로 이 개개의 승부를 주시한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절대 에누리가 없고, 언제나 솔직하고 개방적인 자연은 여기에 대해 전혀 색다른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개체의 삶과 죽음이 자기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증거로는 동물이나 인간의 생명을 사소한 우연(偶然)의 농락에 맡겨, 죽어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당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벌레를 보라. 당신의 발길이 무심코 한 발자국만 어긋나면 그 벌레의 생사를 결정해버린다. 또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는 달팽이를 보라. 도망칠 수도 없고 몸을 막을 수도, 거처를 속일 수도 숨을 수도 없는 모든 강적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물고기는 우리가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 개울에서 유유히 꼬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몸집이 둔하여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두꺼비며, 높은 하늘에서 솔개가 노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새끼 새와 산림 속에서 늑대에게 발각된 산양 ㅡ 이 모든 희생은 연약하고 무기가 없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위험을 눈앞에 두고서도 무심히 걸어다니고 있다.

이와 같이 자연은 매우 정교한 피조물인 유기체로 하여금 대항할 힘이 없는 알몸으로 버려둔 채 보다 더 강한 자의 밥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맹목적인 우발 사건, 다시 말해서 길을 지나가는 바보나 아이들의 희롱에 맡겨두고 있다. 거기서 자연은 이 생물들이 사멸하여도 자기로서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으며, 그 죽음은 자기에게 무의미할 뿐더러 그 삶이라는 원인도 죽음이라는 결과도 자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자명하고도 분명한 말로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연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무수한 위험과 고난 앞에 나서게 하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죽더라도 자기 품으로 다기 돌아올 뿐이며, 그들의 죽음은 처음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유희, 다시 말해서 하나의 조그마한 손장난에 불과하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동물에 대하여 말한 것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즉, 자연의 위엄이 우리들 인간에게 미치고 있어, 삶과 죽음은 자연에게 전혀 파격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때문에 상심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니까.



8

개체의 죽음에 대해서는 고찰했으니 이번에는 인류라는 종족에게로 눈을 돌려 보자. 우리 앞에 가로놓인 아득한 미래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타날 허다한 세대 속에 우리들과는 풍속이나 습관이 다른 무수한 개인이 나타날 것을 생각할 때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세계를 잉태하고 미래의 여러 세대를 숨겨두고 있는 허무의 태반(胎盤) ㅡ 그 풍요한 원천은 어디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그것은 다만 모든 실재(實在)가 있던 곳, 그리고 있을 수 있는 곳, 현재의 속, 즉 현재가 거느리고 있는 사물 속이다. 그러니까 당신 속,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당신 자신 속이기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너는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마치 가을에 나뭇잎이 말라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슬퍼만 하며, 봄이 되면 그 나무가 초록빛 새 단장을 하는 것을 생각하여 위로로 삼지 않고 '그 나뭇잎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하며 서글퍼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 미련한 나뭇잎이여! 너는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다른 잎사귀들은 어디서 오는가? 네가 두려워하는 허무의 심연은 어디 있는가? 너는 차라리 자기 자신이 이 나무 속에 숨어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활동하는 힘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힘은 모든 나뭇잎의 세대를 통하여 생사에 구애받지 않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세대에 대해서나 나뭇잎의 세대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