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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대부` 리영희 교수 … 학계, 재평가 논란 뜨겁다

이강기 2015. 9. 18. 08:29
`진보 대부` 리영희 교수 … 학계, 재평가 논란 뜨겁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대부였던 리영희(77) 전 한양대 교수에 대한 재평가를 놓고 학계의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리영희라는 민주화운동 시대를 대표하는 지적 거인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명암을 성찰해보는 움직임이다.

논란의 계기는 본지 8일자 3면에 실린 기사다. 리 교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내용이다. 한신대 철학과 윤평중(50) 교수의 '이성과 우상-한국현대사와 리영희'라는 글을 인용 보도했다.

중도적 관점의 시평을 언론에 발표해온 윤 교수의 글은 20일 출간되는 계간지 '비평'재창간호에 실렸다.

윤 교수 글의 핵심적 요지는 리 교수의 사상을 '인본적 사회주의'로 규정하며 "조야(粗野)하고 도식적인 리영희의 인본적 사회주의는 시장맹(盲)과 북한맹(盲)을 배태하면서 우리 시대를 계몽함과 동시에 미몽에 빠트렸다"는 주장에 있다.

여기에 이른바 진보 진영이 "잘못된 비판"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진보적 시각의 글을 각종 언론에 실어온 홍윤기(49) 동국대 철학과 교수가 앞장섰다. 한겨레신문 16일자에 윤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홍 교수는 중앙일보 17일자에 리영희 교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또 다른 글을 기고했다. 윤평중 교수도 한겨레에 실린 반박문을 읽은 소감을 중앙일보에 보내왔다. 독자들의 객관적 판단을 위해 두 교수의 새로운 글을 중앙일보에 나란히 싣는다.

홍 교수는 "내가 아는 리영희 선생은 우리의 현대가 전적으로 결여한 채 출발하였던, 비판적 계몽의 선도자"라고 주장한다.

윤 교수는 "냉전의 우상과 싸우는 과정에서 리영희 선생은 다른 종류의 우상을 쌓아올렸다. 그것은 바로 소박한 인본적 사회주의의 우상"이라고 주장한다.

냉전시대를 계몽한 자유인 리영희, 그리고 탈냉전시대에 또 다른 계몽의 대상이 된 리영희. '두 리영희'의 형상 사이에 벌어지는 논란이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념적 혼란과 갈등을 배경에 깔고 있는 주장이 맞붙었기에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를 지켜본 한 학계의 인사는 "이 논란이 리영희 선생을 통해 우리 시대의 맹점을 짚어보는 수준높은 논쟁으로 발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합리적 진보와 열린 보수를 아우르는 건강한 담론을 만들어 내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배영대 기자


리영희 교수는

냉전적 사고와 군사독재에 맞선 '자유로운 지성'의 대명사로 통한다. 1970~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을 통해 세상 보는 눈을 배웠다. 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직후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란 글을 발표하며 '성찰적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 "사회주의맹 깨뜨린 비판적 계몽주의자"

'사회주의에서도 배울 점 있다'
통찰했을 뿐인데 사회주의자 ?



체제의 압박에 의해 조직적으로 무지에 빠진 인간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다. 사방이 모르는 일투성인데 어떻게 자기 뜻을 제대로 펼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안 되는 앎으로 자기 삶의 비전을 길게 세울 수 없고, 사방은 온통 적으로 가득 차 행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돈이 많은들 무엇 하겠는가. 불신 속에서 누가 친구인지 알아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지식1) "소련과 중공은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공산주의 세계 혁명의 형제국이다. 이들은 전세계를 항상 침략의 위협에 떨게 만드는 평화의 최대 적이다." 지금은 없어진 소련을 두고 우리는 어린 시절 이렇게밖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소련과 중공의 위협에 맞서 투철한 반공의식으로 우리의 안보를 굳게 다져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지식 2) "소련과 중국은 서로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주권국가이다. 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중국 혁명가들에게 더 큰 도움을 준 것은 소련 공산당보다는 중국 문화에 존경심을 갖던 미국인들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약간 자라있던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때였는데 닉슨은 "중공"을 방문했고, 철천지 원수로만 알던 "중공 오랑캐"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유엔에 입성하던 때였다.



위의 두 지식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주의맹에 해당되는 지식인가? 지식1에 의해 사회주의 '이념'에 맹(盲)한 상태에 있던 나는 지식2를 접하면서 사회주의 '현실'에 각성했다. 누가 나에게 지식2를 알게 해줄 만큼 풍부한 자료와 논변을 보여주었던가. 리영희 선생은 나의 사회주의맹을 깨쳤다. 사회주의도 현실적 유기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나의 맹한 의식을 결정적으로 깬 의식 경험은 또 있다. 과거 나는 항상 이렇게 알았다.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남한보다 강한 무력을 갖고 남한을 무력으로 합병하려고 하는 무섭고 교활한 상대다. 북한과 친하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리영희의 글을 접하면서 나는 참으로 자신 있게 나의 북한맹을 깨고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현대전에서 승리의 관건은 경제력이다. 남한은 북한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갖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도 남한의 군사력은 이미 북한을 압도한 지 오래다. 북한 핵은 북한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다는 북한 지도부의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다. 겁은 오히려 북한이 먹고 있다."

최근 리영희 선생을 인본적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가 사회주의 국가가 좋다고 찬양.고무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공정하게 통찰했을 뿐이다. 그가 인본적 사회주의자라면 그는 인본적 자본주의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주의에서의 생활을 비판하고 인간적인 삶을 그리워 하긴 했지만 자본주의를 타도하자는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그는 사회주의,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인본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공평한 규정이다. 왜 그가 인본적 "사회주의자"이기만 한가?

나에게 리영희는 맑스주의자나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언론인의 감각으로 무지의 장벽을 깨준 비판적 계몽주의자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앎을 통한 자유의 추구에서 항상 귀감이 된 표어가 하나 생각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윤평중 한신대 교수 "냉전의 우상과 싸우며 다른 우상 쌓아 올려"

'북한=도덕적 사회주의국가'
이미지 갖게 하는 데 기여


왜 새삼스럽게 리영희 선생이 문제인가? 한국적 반공규율사회의 우상을 깨트리는데 일생을 헌신한 '사상의 은사' 리영희는 쉴 권리도 없단 말인가. 과연 '이성과 우상: 한국현대사와 리영희'('비평'재창간호)는 그가 말년의 작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무례한 "인신공격" 인가.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인물결정론"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영희는 그냥 '한 사람'이 아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의 현실성을 그보다 더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도 드물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한국현대사에서 최대의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는 저술과 삶을 일치시켰으며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였다. 그의 이론은 소박하였으나 폐부를 꿰뚫는 호소력을 과시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시대를 앞서갔던 리영희의 분석능력이 반공냉전주의의 성채에 큰 균열을 냈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실천이 그 틈을 차츰 벌리면서 철벽같았던 성채를 무너뜨리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우리 역사는 웅변한다.

결국 리영희는 시대의 사상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냉전반공주의의 음험한 본질과 작동기제를 폭로하는 데 있어 리영희처럼 투명한 이성을 알지 못한다"고 썼다. 여기까지가 리영희의 공헌이다. 그 공은 한국민주주의의 성취 속에 녹아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그러나 냉전의 우상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우상을 쌓아올렸다. 그것은 바로 소박한 인본적 사회주의의 우상이며, 그 역사적 실례는 모택동 치하의 중국사회주의라는 것으로 현현되었다.

냉전의 우상을 격파한 이성의 전사가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다른 우상에 집착한 것은 한 개인의 판단 잘못일수도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결정적 논제에서 리영희는 자신의 오류를 흔쾌히 인정하지 않았다. 평범한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의 은사에게 스스로의 치명적 오류를 시인하는 여유를 바라는 것이 과연 지나친 일일까?

리영희의 무욕과 일관성, 고고함과 치열함, 자기희생으로 관통된 투쟁의 이력은 그의 발언에 신성한 아우라를 입혔다. 리영희의 실존적 의지와 관계없이 그에게 귀속된 이런 권위는 1980년대 '혁명의 시대' 이후 우리 사회에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자본주의의 모순이 강화될수록 사회주의가 아름다운 대안으로 상정되는 흐름에 리영희라는 상징이 심대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리영희는 "부족한 대로 '북구라파식 사회민주주의'가 현실적 선택"이라고 할 정도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사상의 세례를 받은 후학들은 빠르게 리영희를 추월해 과격하게 질주하였고 사회주의를 빙자한 '북한 물신주의'로까지 넘어가게 된다. 리영희가 모택동의 중국과 관련해 세운 인본적 사회주의의 우상이 한국사회에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가난하지만 주체적이고 자주적이며, 정통성을 지닌 도덕적 사회주의국가'로서의 북한의 이미지를 출발시키는 데 그가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북한관이 총체적 허구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목가적 북한관이 분단과 6.25 이후 계속되고 있는 생사를 건 '한반도 역사전쟁'의 실체를 모호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북핵실험 이후 자중지란에 빠진 우리 사회의 혼란상이 그 명백한 증거다. '왜 지금 리영희인가'라는 질문이 치명적인 현재진행형 의미를 갖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